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화 (1/206)

1화

모든 것이 시작된 곳에서 끝내자.

베스의 속마음이 채 마침표를 찍기도 전, 성급한 둔탁음이 낡은 오두막 안을 울렸다.

사위가 어둠에 잠긴 시각. 이 시간에 찾아올 이가 누가 있을까.

“베스.”

기어코 다시 들려오고야 마는 제 이름에 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는 새카만 속눈썹이 꼭 겨울바람이라도 맞은 듯 애처롭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건 바람 소리야. 바람 소리일 뿐이야. 의미 없는 다짐을 읊조리는 입술도 속눈썹만큼이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베스.”

제발 내 이름 부르지 마.

전하지도 못할 말이 베스의 가슴 속에 응어리졌다. 엉킬 대로 엉킨 마음속에선 그 어떤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베스는 그저 문밖의 남자가 떠나 주기를, 아니면 겨울바람이 더 매섭게 내리쳐서 저 남자의 목소리를 감춰주기를, 그조차 안된다면 차라리 귀라도 먹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저 남자 앞에서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도. 정말 어리석게도.

“베스, 나 다쳤어.”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은 판자문의 군데군데 해진 상처 틈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당신은 결국 원하는 걸 얻는 사람이지.

베스는 새삼스레 남자에 대한 정의를 새로이 했다. 이런 남자와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뻗대다니. 마른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헛웃음이 나왔다.

영원히 그 자리에 굳어 있을 것만 같던 베스의 다리가 뻣뻣하게 문으로 향했다.

다정하게 ‘베스’라고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를 향해서. 아주 느릿하게.

차마 열지는 못하겠는지, 문고리만 잡은 채 작은 머리통을 문에 기댔다. 조금 전, 남자의 목소리를 흘렸던 판자의 상처에선 윙윙대는 겨울 소리만 났다. 어쩌면 겨울 소리를 목소리라 착각한 건 아닐까. 항상 겨울과 닮아있던 남자였으니까.

베스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잡은 문고리를 다시금 고쳐잡았다.

끼익하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곳엔 베스가 단 한 번도 잊은 적도, 잊을 수도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데베르 클리프.

짙은 잿빛 머리와 그와 닮은 눈동자. 사나운 듯 우울한 눈매. 굳게 다물린 입술. 선이 뚜렷한 얼굴까지.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야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베스는 자신이 떠난 뒤로 이 남자가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그리고 시간이 남자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따위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집요하게 바라보는 데베르의 시선에 눈을 떨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말로 아파.”

내리깐 시선의 끄트머리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보고 싶지 않은데. 갖은 흉터와 흘러내리는 피로 얼룩진 손이 베스의 손을 잡았다.

말갛다 못해 파리하다 느껴지는 여린 손이 남자의 피로 함께 얼룩져가는데도 베스는 미동이 없었다.

여자는 보고 있되 보고 있지 않았고, 듣고 있되 듣고 있지 않았다.

“베스, 제발.”

그게 더 데베르를 미치게 했다.

데베르의 무릎이 무너지듯 낡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베스의 허리를 안은 그의 팔은 우악스러울 만치 고집스러웠지만, 그 사이로 내뱉는 숨은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애타게 떨리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핏방울은 남자를 대신해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낡은 마룻바닥의 여린 틈을 놓치지 않고 스며드는 영악한 모습을 베스는 지켜봤다.

이제 평생토록 핏자국을 가지고 살아가겠지. 저 불쌍한 바닥은.

베스는 천천히 제 허리께에 얼굴을 묻은 남자의 머리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찬 기운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손가락에 감겼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할수록, 떨리던 남자의 어깨도 점차 잠잠해져 갔다.

말해야 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베스의 손길이 멈췄다.

그 순간, 힘이 풀어졌던 데베르의 팔이 다시금 여자의 허리를 세게 휘감았다.

덜 닫힌 문 사이로 다시 한번 매서운 바람이 들이닥치자, 바람을 머금은 베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혼해줘요.”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제발.”

당신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 * *

“어유, 얼른 오시오!”

마부의 재촉에 사망금 증서를 내려다보던 베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괄괄한 생김새에 걸맞게 마부는 미적거리며 뜸 들이는 손님을 기다려 줄 재량은 없는 자였다.

냉큼 마차에 올라타는 베스를 탐탁지 않은 눈길로 잠시간 보던 마부는 도착지가 적힌 종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베스가 기록소에 들어가기 전, 대여 마차 삯과 함께 준 것이었다.

마부는 킁, 하고 한번 코를 풀더니 익숙하게 채찍을 놀렸다. 다그닥거리는 발걸음에 맞춰, 파랗던 하늘도 그 빛깔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지붕도 없는 마차 위로 이젠 제법 겨울 냄새가 나는 찬바람이 여과 없이 베스의 얼굴을 때렸다. 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어지러운 머릿속을 날려버리기엔 제격이었으니까.

입가엔 자연스러운 미소도 걸쳐졌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물론 거창한 외출이랄 것도 없이 전쟁 사망금 증서를 새롭게 발급받는 것뿐이었지만, 베스는 전에 없던 홀가분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저녁, 베스는 전방 몰리 부인의 군병원으로 소속을 옮기게 된다. 후방 병원에 온 지 딱 일 년이 되는 때였다.

이해 못 할 결정이라고 고개를 내젓던 후방 병원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중 누구도 베스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베스에겐 진작 전방으로 가지 않은 게 유일한 후회란 것조차 말이다.

주머니 속에 잡히는 얇은 종이의 모서리를 살살 긁었다. 이 종이에는 전방 병원으로 가는 대가로, 이전 후방 병원에 있을 때보다 딱 두 배 많은 금액이 적혀져 있었다.

사망금 때문에 죽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

우울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수록, 베스는 노을이 붉어지는 하늘과 그 색을 기꺼이 받아먹는 들판에 집중하려 애썼다.

부인 병원으로 가면 아이네스도 있고, 딕시도 있을 테고.

“보아하니 간호사 같은데, 그 험한 데를 어찌 가셨소? 딸린 식구가 많은가.”

꼬리를 무는 베스의 상념을 끊어먹은 건 여태 채찍만 놀리던 마부의 퉁명스런 말이었다.

으레 간호사들을 보면 하는 질문이었다.

넥서스는 전쟁이 잦은 나라이고, 전쟁으로 부강해진 나라인 만큼 전쟁에서의 공을 크게 쳐 줬다. 평민으로선 만지기 힘든 사망 배상금과, 수도에서의 일 년 치 월급보다 많은 병사의 반년 치 월급이 이를 증명했다.

아마 마부는 긴 길을 가는 동안 손님의 기구한 사연이나 들으며 시간을 때울 요량인 듯 보였다.

하지만 베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눈만 도르륵 굴려댔다.

증서가 들어있지 않은 반대편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 길이만 하게 잘린 연필과 빳빳한 종이뭉치가 만져졌다.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참을성 없는 마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넥서스 이리저리 마부 노릇을 하도 많이 해서 한마디만 들어도 아가씨 고향을 알아챌 거요. 이 지방 사람 같지는 않고, 저기 메르딘 쪽에서 오셨소? 거기서 많이들 오더만.”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마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잠들었나 싶어 휙 뒤를 돌아봤을 땐, 애매한 미소를 띤 손님이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그 얼굴엔 마부를 골리겠다거나, 무시하겠다는 의중은 전혀 없어 보였다.

거 참. 대답 한마디가 뭐 그리 어렵다고. 구시렁거리며 다시 앞을 보던 마부의 머릿속에 언뜻 생각 하나가 스쳤다.

혹시 말을 못 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처음부터 말 한마디 없이 도착지가 적힌 종이를 건네는 것 하며, 지금도 보면 순하게 생겨서는 입 한 번 열지 않고.

뭔가 더 물으려고 달싹이던 마부의 두꺼운 입술이 이내 다물렸다. 그 뭐 좋은 거라고 묻겠는가. 마부는 해갈되지 않은 궁금증에 입맛만 쩝 다시며 다시 말을 모는 데 집중했다.

부지런히 가던 마차는 후방 병원으로 이어지는 숲길 앞에서 멈춰 섰다.

“간호사시니, 여기서부터 못 들어간단 건 아실 테고.”

베스는 대답을 못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짧은 미소로 인사하고는, 이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길로 걸음을 옮겼다. 마부의 안쓰러운 눈길이 뒤따라오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바람에 잔가지가 휘날리는 소리. 점점 멀어져가는 마차에서 나는 바퀴 소리. 베스가 사랑해 마지않는 소리들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전쟁이 끝나면.

흔치 않은 평화로움 속에서 베스는 습관적으로 전쟁 후를 상상했다.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즐거운 미래를.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만을 곱씹으면서 살 그날을.

한참을 생각하다 시큰해져 오는 가슴에 눈물이 나올세라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베스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저 멀리, 후방 병원 앞에 병사 한 명이 보였다. 정확히는 주위를 둘러보며 약품 창고 문을 여는 병사가. 병원장과 허가받은 간호사 외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약품 창고 열쇠를 쥐고서.

그의 손짓에 따라 총기를 쥔 병사 여럿이 병원 안으로 일사불란하게 들어갔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베스가 급하게 발을 떼려는 찰나, 굉음 같은 폭발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

순식간에 병원 창문으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함성인지 비명인지 구분되지 않는 소란과, 뛰쳐나오는 부상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하는 아군이 베스의 현실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아군?

자세히 보기 위해 찌푸려진 베스의 눈이 이내 커졌다. 비명도 나오지 않는 입을 틀어막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코바흐군이야.

모를 수 없었다. 넥서스와는 확연히 다른 가무잡잡한 피부에 짙은 눈썹. 넥서스 군복을 입었다 해도 얼굴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적군이 어떻게 후방 병원을.

베스의 혼란스러움이 가라앉기도 전, 헤드라이트 하나가 길게 빛을 내뿜으며 길목으로 들어섰다. 베스는 얼른 갓길의 수풀 더미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가까워지는 엔진 소리와 함께 심장도 가쁘게 뛰었지만, 치켜뜬 눈은 내리깔지 않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군용차의 차창으로 병원장 체버가 보였다. 그는 옆자리의 코바흐군과 농담이라도 하는지 편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넥서스 놈들 다 죽여!”

베스는 본능적으로 더 깊은 어둠을 향해 기어 들어갔다. 살아야 한단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울려댔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헤쳐 들어가다 앞이 막힌 순간엔 두 귀를 꽉 막고 눈을 감았다. 이 지옥이 얼른 끝나기만을 빌면서.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소름 끼치는 적막만이 숲을 에워싸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다시 기어 올라오자, 낙엽 위로 깔린 시체들이 사방에 내려앉은 죽음을 말해줬다. 망자의 소리 같은 스산한 바람이 쉭하고 베스의 등 뒤를 훑고 지나갔다.

베스는 널려 있는 시체 한 구의 군복을 정신없이 벗겨냈다. 아직 남아 있는 온기에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울 시간 따위는 사치였다. 찢어진 간호복을 벗고 뻣뻣한 군복을 몸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달렸다. 쫓아오는 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달리는 다리를 멈출 수는 없었다.

연기가 자욱한 병원 건물로 들어가, 적군이 훔치다 흘린 진통제며 알코올 솜, 주사기 따위를 닥치는 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살려야 해. 살려야 해.

대체 누굴 살린다는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거듭 중얼거리는 베스의 눈가가 시뻘겠다.

차오르는 연기를 피해 밖으로 뛰쳐나온 베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마차가 멈춰 섰던 길 끝엔 적군이 설치해놓은 지뢰선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베스는 지나온 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방으로 향하는 길.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으로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베스는 다시 한번 긴 머리를 틀어 올려 군모 속에 단단히 감췄다.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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