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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3화 (3/206)

3화

“대답해.”

잇새를 꽉 깨문 탓에 짓씹는듯한 음성이 데베르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아직 가시지 않은 바람의 여운이 여자의 긴 머리칼을 가볍게 흩날렸다. 데베르는 간지럽게 제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머리카락의 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허공을 맴돌던 머리카락은 여자의 군복, 아니, 누군가의 것이었을 군복의 가슴팍으로 얌전히 자리를 찾아갔다. 검붉게 물든 이름에 데베르의 시선이 멈췄다.

“그레이엄 카터. 당연히 네 이름이 아니겠지.”

느긋한 음성과 달리, 거칠게 여자의 군복 주머니를 뒤지는 손길이 그에게 더 이상의 아량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알렸다.

허공에서 버둥대는 발밑으로 그토록 소중히 챙겨왔던 약품들이 꼴사납게 나뒹굴었지만, 베스는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공포였다.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살려달라는 말을 대신해 빌듯이 남자를 붙잡고 있던 손이 툭 떨어졌다.

한참을 버둥거리던 다리 또한 생명을 다한 짐승처럼 늘어졌고, 쉭쉭 대던 숨소리조차 멈췄다.

툭.

여자의 소중한 것들을 떨어뜨리던 데베르는 마지막으로 여자를 추락시켰다.

곧이어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가 다시금 그의 귓가에 생생히 들려왔다. 애초에 고요한 숲에서 들려올 만한 건 많지 않았다.

얼마간 그 할딱이는 가슴팍을 보던 데베르는 건조하게 물었다.

“애인인가.”

애인이라니. 베스는 기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네가 코바흐인?”

이번에도 답은 같았다.

종이와 펜. 종이와 펜. 베스는 주문처럼 그 말만을 되뇌며 풀밭을 더듬었다.

“데베르 대장.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면-”

다가오던 아더가 멀거니 멈춰 섰다.

하도 데베르가 돌아오지 않아, 혹시나 싶어 먼저 출발한 거였다. 길 가운데 널브러진 코바흐군 시체에, 알만하다 싶어 멀찍이서 상황을 관전하던 중이었다. 저러다 상황을 아는 유일한 자마저 골로 보내겠다 싶어 온 건데. 하필 그게 여자라니.

하도 체구가 작아 그저 비실한 놈인 줄만 알았지. 아더는 복잡해진 상황에 제 눈썹께를 긁적였다.

데베르에게 여자가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목적은 뻔했다. 몸으로 유혹해 군 기밀을 캐오게 하는 것. 데베르가 가장 경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년 전 일이던가. 데베르가 그 여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안다면, 최소한 머리가 있는 적군이라면 그런 짓은 더 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의 경우는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아마 데베르는 여자가 모호한 방식으로 제게 접근한 것 자체를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아더의 눈이 정신없이 바닥을 훑어대고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여자는 뭐라도 찾는 중인지, 미친 듯이 풀숲을 손으로 헤치고 있었다.

엉망이 된 행색과 주위에 떨어진 약병 따위로 봐서는 종종 약품 창고를 털어 암시장에 내다 파는 민간인이 더 알맞아 보이는데.

아. 아더의 입술이 벌어졌다.

말 못 하는 간호사.

데베르에게 미처 전해주지 못한 가십이 떠오른 건 순간이었다.

“데베르, 간호사 아니야? 주사도 놓을 줄 아는 거 같던데.”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추론이었다.

“뭘 믿고.”

데베르는 피식 웃었다.

“고작 주사기 한 대 가진 것만으로?”

온기 없는 비소는 더 차가운 표정만을 남겼다.

“그건 웨인 뒷골목 약쟁이들이 더 잘하지.”

데베르는 뻐근한 목 언저리를 이리저리 돌렸다. 제 발치에 주저앉은 여자가 시선에 걸렸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이 여자를 잡아 흔드는 건 분명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벗어.”

얼른 이 지루한 심문을 끝내버리기로.

쉴새 없이 움직이던 여자의 손이 멈췄다. 이게 연기라면. 데베르의 머릿속에 작은 가정이 피어올랐다.

“네 그 꼴사납게 헐렁이는 군복 속에 폭탄이 없다는 걸 증명해.”

끔찍한 적막이 세 사람 사이를 채웠다.

황망하게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가 데베르의 발치부터 무릎, 허리. 가슴. 그리고 얼굴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올려다본 남자는 꼭 밤하늘과 맞닿은 것 같았다. 그만큼 높았고, 두려웠고, 속을 알 수 없었으니까.

무릎을 세운 베스가 손바닥을 내밀며 한 걸음 다가가자, 데베르는 딱 그 한 걸음만큼 뒤로 물러났다.

입술을 꽉 깨문 여자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제 반대 손에 대고 무언가를 써댔지만, 데베르는 보지 않았다.

또다시 한 걸음 다가가려는 베스의 발을 붙잡은 건, 철컥하는 재장전 소리였다. 다시금 저를 향한 총구에 베스는 굳은 듯 멈춰 섰다.

“넌 목격자이자 용의자야. 널 태우고 가다가 모두 죽을 수는 없잖아. 네 신원은 차후 문제지.”

베스는 피가 굳어 뻣뻣한 군복을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말아쥐었다.

아득한 절망감을 내리누르려는 듯 세게 깨문 입술에서 나온 찝찔한 쇠 맛이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려줬다.

무슨 수를 써도 저 남자는 믿어주지 않아.

어지러운 머릿속, 유일하게 명백한 사실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알려줬다. 군복 끄트머리를 쥔 손이 천천히 맨 윗단추로 올라갔다.

살기 위해서라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베스는 당장의 수치를 잊기 위해, 이어질 삶을 곱씹었다. 항상 꿈꾸던 그 날들을.

땀이 배어 나온 손이 매끈한 단추 위를 자꾸만 헛돌았지만, 남자는 재촉하지 않았다.

두 번째 단추가 열리자 멱살을 잡혀 발갛게 얼룩진 흰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아더 사령관, 돌아서.”

단추가 세 번째를 향해갈 무렵, 데베르의 명령이었다.

베스는 감정의 고저라곤 느껴지지 않는 잿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엔 여체를 향한 불순함은 없었다. 그저, 사냥할 짐승을 보는 것처럼. 언제라도 수가 틀리면 죽여버릴 요량으로 보는 것일 뿐.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목덜미만큼이나 하얀 슬립이 드러나려는 순간, 다시 한번 베스의 손이 단추를 비껴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저 살려고 도망친 거였는데.

눈을 질끈 감은 베스가 단추를 끄르려는데, 아더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그 손길을 막았다.

“데베르 클리프! 내가, 내 차에 태워. 신원은 보장할 테니까.”

“무슨 이유로.”

“아무래도 몰리 부인 병원으로 온다는 그 간호사 같다고. 말 못 한다고 했던.”

위스키 몇 잔과 함께 넘겼던 의미 없는 대화 속에 저 여자가 있었던가. 데베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지도.

베스를 샅샅이 훑어내리던 데베르의 시선이 바닥에 고정됐다. 정확히는 꼴사납게 크다 생각한 군복 밑으로 드러난 여자의 맨발에.

핏기라곤 없어 보이는 발에 난 붉은 생채기가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눈앞의 여자와 어울렸다.

“아더 사령관은 내 차로 가고, 이 자는 병사들과 함께 태워.”

데베르는 여자를 믿지 않는 선에서, 가장 아량을 베푼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 명령이었다.

* * *

데베르의 막사 안. 누렇게 깜빡이는 전구 밑에 자리한 베스의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령관이란 자의 몇 마디로 발가벗겨지는 치욕은 면했지만, 막사에 군대장과 단둘인 지금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태연한 건 데베르 한 명뿐이었다.

“긴장 풀어.”

베스는 덮쳐오는 그림자의 위압감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의 그림자는 베스가 앉은 작은 협탁을 삼키기엔 충분했다.

“본 걸 전부 적어.”

펜촉이 날카롭게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둘 사이를 메웠다. 지포 라이터가 긁히는 소리에 잠시 베스는 손을 멈췄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곧 맡아지는 매캐한 시가 향에 베스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향에는 무게가 없는데. 어째서인지 남자의 시가 향은 무겁게 공기를 짓누르는 재주가 있었다.

“외출 경위도 써.”

꾹꾹 글자를 눌러쓰던 베스는 흘긋 남자를 올려봤다.

언제부턴가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경위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늘씬한 시가에서 피어나는 흐린 연기가 슬금슬금 협탁 위를 넘어와 펜을 쥔 베스의 손가락까지 다가왔다.

베스는 남자가 모르게 손을 조금 뒤로 물렸다.

“사망금 증서?”

베스의 손이 제 군복 단추로 올라갔다.

목 밑까지 꽉 막히게 채워졌던 군복이 숲길에서처럼 하나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숲길에서 미처 풀지 못한 세 번째 단추에 흰 손가락이 닿았을 때, 데베르의 입술에서 다시 한번 짙은 연기가 길게 내뿜어졌다.

이번엔 베스가 피할 새도 없이 연기가 피부에 맞닿았다.

베스는 내키지 않는 손길로 안주머니에서 꺼낸 증서를 내밀었다. 어쩌면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 저 증서 탓일지도 모른다. 증서를 챙기는데 정신이 팔려 목숨같이 챙기던 펜을 시쳇더미 사이에 떨어트리고 왔으니까.

“몰리 부인이 오고 있어. 네 신원을 확인해 주러.”

데베르는 자신에게도 익숙한 사망금 증서를 건성으로 훑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흔한 이름에 흔한 성. 넥서스 군병원에선 발에 채이는 종이에 불과했다.

데베르는 서류철 사이로 증서를 끼워 넣었다. 고작 이 증서 따위가 뭐라고. 마치 대충 놓이는 종이가 제 모습이라도 되는 듯 속상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가 우스웠다.

새벽 두 시.

작전까지 단 네 시간. 슬슬 결론을 내야 한다.

이 여자는 재수 없는 우연일까. 변수일까.

“왜 코바흐군을 도왔지. 심지어 공습에 가담한 자를. 아군에게도 약품이 부족하단 걸 알 텐데.”

이제껏 제 결백을 담아 거침없이 써 내려가던 베스의 손이 멈칫했다. 고민의 시간만큼 얇은 종이 위로 잉크가 번져갔다.

데베르는 흔들리는 여자의 눈을 놓치지 않았다.

그토록 단단한 척하더니. 뭔가 망설이고 있었다.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하던 손이 마침내 짧은 문장을 완성했다.

‘어리고 아파해서.’

“어리고 아파해서.”

데베르는 제 목소리로 대답을 대신 읊었다.

어리고 아파해서라. 몇 번 그 대답을 입에서 놀렸다.

그 사이, 바깥에서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게 가까워지더니 보초병이 막사 밖에서 데베르를 불렀다.

“들여보내.”

명령과 동시에 온몸이 결박된 채 피범벅이 된 인영 하나가 막사 안으로 던져졌다. 놀란 베스가 움칠하며 몸을 뒤로 빼려는데, 어느샌가 등 뒤로 다가온 데베르가 베스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그 손길에 더 화들짝 놀란 베스가 어깨를 떠는 것보다, 데베르의 손이 더 빨랐다.

데베르는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베스의 턱을 쥐었다. 눈앞의 첩자를 온전히 볼 수 있도록.

숲길에서의 우악스런 힘은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어린놈들은 경험이 부족해서 코바흐에선 주로 기관총을 잡게 하지. 되는대로 쏴대는 거에 비해 효과가 꽤 좋거든.”

베스가 고개를 비틀어도 남자의 손은 끈질겼다.

“네가 진짜 군 간호사라면 질리도록 봤겠지. 사지가 절단되고, 숨이 끊어지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매달리는 넥서스 병사들을. 네가 살리고 싶어 한 그 ‘어리고 아파하던’ 놈들이 만든 작품들이잖아.”

데베르는 비스듬히 베스를 내려봤다.

“구원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데베르는 기꺼이 저를 노려보도록 여자의 턱을 놔줬다. 꽤 분에 찬 눈빛이 그를 올려다봤지만, 끝내 그 입술은 한치도 열리지 않았다.

아, 말을 못 한다 했지.

데베르는 잠시 잊었던 그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네 그 건방진 구원을 나도 받았으면 좋겠군.”

막사 안의 훈기 덕분에 혈색이 도는 여자의 입술은 흐린 불빛 아래서도 붉었다.

“내가 진짜 첩자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여줄까.”

병사 몇이 데베르의 명령에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태워.”

의연한 목소리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함께 보지. 베스 제인스 양.”

끔찍한 권유가 이어졌다. 지독히도 달콤한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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