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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81/121)

80화

샤르헨은 곧장 끌려 나갔고, 르잔과 메이도 마찬가지였다. 카르만은 페페의 시신을 보면서 엘리아나에게 말했다.

“그대 뜻대로 되어서 속이 시원하오?”

“끝까지 웃기고 있군요.”

“뭐?”

“내게 책임을 미루지 말고 자신을 돌아봐요. 우유부단하게 행동해서 샤르헨을 미치게 만든 사람이 누구죠? 페페의 비리를 방관한 사람은요? 하물며 내가 이렇게 칼에 찔려 죽을 뻔하게 만든 사람이 대체 누구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모든 원인이 나라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니…….”

“…….”

“카르만 당신은 내가 만난 모든 사람 중 최악이군요.”

카르만은 엘리아나의 말이 마치 제리크의 칼날처럼 자신의 마음을 베어 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고선 엘리아나의 방을 나갔다.

베르겐은 엘리아나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부인이 이 헌터 가문을 벗어나서 부디 행복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도 모두의 안녕을 바라죠. 페페의 명복까지도.”

엘리아나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끔찍한 시체에서 시선을 돌렸다. 베니는 구석에서 구역질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이 선명한 피 냄새가 모든 것의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돌고 돌아서 겨우 얻게 된 이혼 서류가 자신의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말이다.

전쟁. 그 피비린내 나는 이름의 무게에 엘리아나는 한숨을 삼켰다.

***

“엘리아나!”

“헬렌, 질리언!”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질리언은 엘리아나의 몰골을 보고선 처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손에 든 봉투를 흔들었다.

“그래도 성과가 있었어요.”

“성과라니?”

“이혼에 성공했어요.”

“…엘리아나.”

헬렌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엘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이혼도 중요하지만, 엘리아나의 몸을 소중히 여겨야죠. 어렵게 생긴 친구가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착한 헬렌. 나를 위해서 이렇게 눈물을 흘려 주다니. 내가 이렇게 마음이 고운 친구를 두고 어떻게 먼저 가겠어요.”

엘리아나는 헬렌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 맞다. 헬렌에게 보여 줄 드레스가 있었는데……. 베니. 둘을 안내해 주겠어? 질리언도 보면 좋을 거예요.”

“지금 이 상황에서 드레스 타령이 말이 되는…….”

“이 상황에 꼭 필요한 드레스에요. 정말 아름답거든요.”

엘리아나가 웃자, 질리언은 그 뜻을 알아채고는 헬렌과 함께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엘리아나가 양피지를 수놓아 둔 치마가 있었다. 베니는 몇 겹을 들어 올리고 왕의 밀서를 보여 주었다.

헬렌과 질리언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드레스 룸에서 빠져나왔다. 엘리아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드레스죠?”

“네, 과연 그렇군요. 그래도 드레스보다는 몸조리에 신경 쓰도록 해요.”

“그럴게요. 아, 헌터 공작께서 질리언을 만나고 싶어 해요.”

“…….”

“모쪼록 협력하는 방향으로 잘 부탁해요.”

“그대의 청이라면, 내 거절할 수 없는 걸 알잖소.”

질리언은 옅게 웃어 보이고선 헬렌을 보았다.

“잠시 다녀오마.”

질리언이 떠나고, 헬렌은 엘리아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엘리아나의 방에서는 여전히 옅은 피 냄새가 빠지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e

헬렌은 눈물을 닦았다. 엘리아나는 헬렌을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저도 뭔가 오라버니와 엘리아나를 돕고 싶어요.”

“헬렌, 너무 위험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엮였다지만, 헬렌까지 끌어들인 걸 알면 질리언이 날 가만두지 않을걸요?”

“하지만 오라버니와 엘리아나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요.”

“헬렌.”

“레이에게 제가 말해 볼게요. 백작님과 만날 수 있도록요.”

엘리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레이 오델리와 헬렌 허트가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맞았지만, 이런 정치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부담스러울 것이었다.

특히나 헬렌은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기에, 이런 얘기를 먼저 한다는 것부터가 도전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선한 마음씨에 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헌터 공작은 이미 오델리 백작을 만났어요. 그 이후에 이렇다 할 행보가 없지만, 아마도 그의 편에 섰을 거예요. 아들의 말만 듣고 나를 만나 주진 않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그리고 저도……. 레이가 그런 일에 휘말리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관계가 많이 발전했군요? 레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앗……. 그, 그게…….”

헬렌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를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목적이 있는 접근이었지만, 이제는 한편이 된 지 오래였다.

엘리아나는 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헬렌도, 질리언도, 제데이아도, 율리시스까지 모두 말이다.

“다음번 청혼 때는 그를 받아 줄 거죠?”

“청혼이라니……. 그런 얘기까지는 아직 나, 나누지 않았어요.”

“하지만 만약에 그가 용기 낸다면 꼭 받아 줘요. 아마 지금 어떻게 하면 헬렌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얘기할지 고민하고 있을 테니까요.”

헬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볼은 여전히 빨갛게 물든 채였다. 그녀가 마침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엘리아나는 자신의 결혼과 이혼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 가문에 들어오고 나서, 카르만과 샤르헨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는 무조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생각만 했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유명한 가문들과 인연을 맺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만약 정말 출세를 위해서만 애썼더라면 행복해지지 못했을 거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없었겠지.’

엘리아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찌 보면 전쟁을 막아 내는 역사의 큰 줄기에 로즈 가문의 넝쿨이 뻗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본래는 이름만 남은 채로 사라져 가는 귀족이었으니까.

엘리아나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질리언이 돌아왔다. 질리언은 예상보다 더 어두운 표정이었다.

“얘기는 잘 마쳤나요?”

질리언은 고개만 끄덕였다.

“질리언이 와 줘서 다행이에요.”

“언제 로즈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소?”

“거동이 가능해지는 대로 바로요. 오늘도 여기서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었어요. 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다들 쳐들어와서는……. 난리가 났죠.”

“제리크 공작이 자랑스럽게 말하더군. 오늘 악의 한 축을 걷어 냈다고.”

엘리아나는 헛헛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악의 한 축……. 정의로운 사람의 표현은 남다르네요.”

“정의롭다라.”

“딱 어울리죠?”

엘리아나가 소리를 내 웃자, 질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파도 짓궂은 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그게 엘리아나 로즈답지 않나요?”

질리언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풀이 죽어 있었다면 실망했을 것이오.”

“그럴 리가요. 질리언과 헬렌을 실망하게 할 수는 없죠. 금방 일어날 테니 또 놀러 가요. 테네브 부인께서 헬렌과 함께 놀러 오라고 하셨거든요. 정원을 보여 주신대요.”

엘리아나의 밝은 목소리에 헬렌도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좋아요. 엘리아나가 나으면 같이 가요. 안 그래도 부인께서 그때 보내 주신 꽃을 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몇 송이 잘라서 선물하려고요.”

“그래요. 그때 또 만나요.”

“헬렌. 이만 일어나자.”

“네, 오라버니.”

“그럼 이만 가 보겠소. 몸조리 잘하시오. 엘리아나.”

“질리언도 몸조심해요.”

“걱정하지 마시오. 내게 칼을 들고 덤볐다간 외려 그 칼이 부러질 테니까.”

질리언의 허풍에 엘리아나는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탄 마차가 완전히 저택을 떠난 후에, 제리크 헌터가 다시 엘리아나의 방을 찾았다. 그는 한껏 만족한 미소를 띤 채였다.

“질리언 허트에게 미리 잘 말을 해 놨더구나. 생각보다 얘기가 더 잘됐어. 카르만과 관계가 좋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건만, 네 덕을 보는 일도 있구나.”

제리크 헌터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말하더니 엘리아나를 보며 돈주머니 하나를 침대 옆 협탁 위에 던졌다.

“이게 뭔가요?”

“일이 잘 해결된 데에 대한 보상이지. 네가 좋아하는 돈.”

사람을 빈정 상하게 하는 짓도 가지가지였다. 엘리아나는 카르만 헌터의 그 버르장머리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확실히 알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꼿꼿하게 굴었다가는 페페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돈주머니를 집어다가 바로 열어 보았다.

“1,000디온은 되겠는데요?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닌가요?”

엘리아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일부러 감추지 않았다. 제리크에게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엘리아나의 의도대로 보인 것인지 제리크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을 이었다.

“네게나 큰돈이지. 헌터 가문에서는 푼돈일 뿐이다. 어떠냐, 앞으로도 까다로운 귀족들을 잘 연결해 준다면 네게 이만큼의 보수를 주마. 나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쓸 수 있는 돈이지.”

엘리아나는 조금 고민하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분수에 맞는 삶을 살겠어요. 이젠 헌터 가문의 이름도 없고, 남작 부인도 아닌 저를 누가 반기겠어요. 저는 그냥 모자나 만들고 시무스 남작 부인과 함께 다과회를 즐기면서 살 거예요.”

“시무스 가문이라니……. 끼리끼리 노는구나. 뿌리도 없이 형편없는 집안끼리. 쯧.”

“테네브 부인께는 한 번 정도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건은 어떻게 안 될까요?”

엘리아나는 궁상맞게 말을 이었다. 제리크는 표정을 찌푸리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제데이아와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테네브 부인은 필요 없다. 부인들은 다들 가주의 말을 듣기 마련이지. 네겐 안타깝게 됐다만, 내 주머니를 털려거든 다른 데를 알아봐야 할 게다. 네 말대로 헌터 가문이라는 뒷배도 없고, 남작 부인의 이름도 없는 너를 받아 줄 데는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안의 소문을 팔아먹고 지낸다면 오늘 페페의 꼴과 다를 바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명심해.”

“제가 제일 가까이에서 봤는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모자와 화장품을 팔며 살 거예요. 로즈 가문은 이미 이 정도로도 일 년은 거뜬히 먹고 살 수 있어요.”

“정말 거지 같아서 못 봐주겠군. 몸이 낫는 즉시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네. 바라던 바에요. 이렇게 큰돈을 챙겨 주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공작님의 아량에 감사해요.”

엘리아나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제리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엘리아나의 방을 나섰다. 엘리아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돈주머니를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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