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엘리아나를 만나고 온 이후, 질리언은 해적 폴 테일러를 탈옥시켜 주었다. 미리 약속된 날짜였다.
폴은 감옥에서 탈출하고 나서 정확히 5일 후에 디컨 조르디언을 뒤통수를 칠 계획이었다.
폴 테일러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그저 이익이 되는 쪽에 붙을 뿐이었다. 그런 그와 거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존 조르디언 정도였다. 디컨이나 트로이는 노련함에서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정보망을 통하자면, 그날은 바다 건너 조르디언 상단이 인티그레스 왕국에서 대량의 폭약 재료를 밀입국 시도 하려는 날이었다. 공급할 곳은 안 봐도 뻔했다.
―인티그레스 왕국은 탄광이 있어서 석탄이나 폭약 재료들이 싸거든. 한 자루에 200디온씩, 총 200자루가 들어온다고 들었소.
치아 사이사이에 검은 때가 낀 늙은 해적은 칼자국과 세월의 흔적으로 두꺼워진 손가락을 두 개 들고선 흔들어 보였다.
―딱 두 배 받으리다. 400디온씩 총 80,000디온. 사겠소? 경이 사든 사지 않든 우리는 무조건 그 배를 털 것이오. 안에 든 것은 모두 모래로 바꿔 놓을 작정이지. 나를 이곳에 처박아 놓고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괘씸죄로 말이야. 존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어. 진즉에 나를 빼냈겠지. 아니, 애초에 잡히지 않게 했으려나? 뭐 죽었으니 물어볼 순 없겠지. 낄낄.
사악한 목소리였다. 질리언은 평생에 걸쳐서 해적과 협력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라가 뒤집힐 위기였으니 말이다.
질리언은 곧장 제데이아에게 연락을 넣었고, 제데이아는 국왕의 허가를 받고 80,000디온을 육지에 머물고 있는 폴의 선원에게 몰래 전달했다. 갱스턴 블러는 제데이아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므로 몰래 돈을 움직이는 건 간단했다.
―다음에 내 손에 잡히면 사형뿐이다.
―낄낄. 명심하겠소이다, 질리언 허트 자작.
거래가 성사된 후에 폴 테일러는 다신 잡히진 않을 자신이 있다는 듯이 웃었다. 질리언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눈앞에 있었다.
조국과 평화.
질리언은 엘리아나를 만나고 온 후에 그 마음이 더욱더 굳어졌다. 제리크 헌터 공작은 정말로 율리시스와 엘리아나가 예상했던 그대로 말했다. 나라가 위험하니,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적으로는 원한 관계가 있었지만, 군인으로서는 그를 존경하고 있었던 질리언은 큰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만큼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질리언은 군함의 조타실에 앉아서 폴 테일러가 탈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엘리아나.”
파리한 안색으로 애써 웃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헌터 가문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콘티노 왕국의 이름으로, 동생인 헬렌의 이름으로. 그리고 엘리아나 로즈의 이름으로 말이다.
***
엘리아나가 남작 저택을 떠나는 날은 공교롭게도 샤르헨이 남쪽 탑에 갇히는 날이었다. 어쩌면 제리크 공작이 엘리아나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정한 것일지도 몰랐다.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페페처럼 죽거나, 샤르헨처럼 될 것이라고 말이다.
베니가 먼저 짐을 옮겨 둔 덕에 몸만 이동하면 되었던 엘리아나는 질질 끌려가는 샤르헨의 모습에 멈춰 섰다.
“놔! 나는 남작의 아이를 가진 사람이야! 그 추운 성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이건 다 모함이야! 공작님을 한 번 더 뵙게 해 줘! 난 카르만의 아이를 가졌다고!”
“공작님께서 번복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샤르헨 님, 이러지 마시고 얌전히 따라 주세요.”
“싫어! 싫다고!”
“샤르헨 님!”
샤르헨은 순식간에 위병들을 뿌리쳤다. 그녀는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서 자신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녔다.
샤르헨은 정신없이 복도를 헤매다가 엘리아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샤르헨은 엘리아나에게로 뛰어와 무릎을 꿇었다.
“엘, 엘리아나, 엘리아나. 날 좀 도와줘요. 그 증언은 거짓이었다고 공작님을 설득해 줘요. 한 번만 도와줘요. 어차피 이 남작가를 떠날 거라면 그렇게 해 줘도 되잖아요.”
흰자가 충혈되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애절하게 엘리아나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시킨다면 그녀의 발등에 키스라도 할 것처럼 절박해 보였다.
“내게 남작 부인의 자리를 넘겨주고 가면 엘리아나에게도 이득이에요. 내, 내 보석들을 다 줄게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줄게요. 제발, 제발 나를 도와줘요.”
엘리아나는 차가운 눈동자로 샤르헨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찔린 배는 아팠고, 그동안 당해 왔던 모욕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가 왜?”
엘리아나의 짧은 물음에 샤르헨의 눈이 커졌다.
“왜? 왜라니? 네가 나타나서 모든 게 망가졌어! 너 때문에! 너만 없었어도 우리는 행복할 거였어! 너만 없었으면… 너만 없었으면!”
샤르헨은 벌떡 일어나서 엘리아나의 목을 조를 듯이 달려들었다. 그동안 위병들과 하녀들 앞에서 부린 가식을 던져 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왜 이러십니까, 샤르헨 님!”
“미친년! 너만 없었어도, 너만 없었어도!”
“엘리아나 님. 뒤쪽으로 오십시오. 위험합니다.”
엘리아나의 명 때문에 뒤에 있던 조셰프가 앞으로 나왔다. 엘리아나는 그에게 잠시 멈추라고 한 다음, 위병들에게 붙잡힌 샤르헨에게 다가갔다. 양팔이 붙잡힌 그녀의 턱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엘리아나 님!”
“나 때문에? 너와 카르만은 왜 항상 애꿎은 내 탓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지? 정말 나 때문이었을까? 이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왔더라도 카르만은 결코 너를 공작으로부터 지켜 내지 못했을 거야. 왜냐고?”
“…….”
“나약하니까.”
“카르만을 욕보이지 마!”
“지난날 네가 욕보였던 다른 부인들을 생각해. 어떤 사정도 모르고 이 저택에 들어와서 모욕당해야 했던 그녀들을!”
“…….”
“카르만 헌터는 처음부터 너를 제리크 헌터로부터 지키지 못할 남자였던 거야. 너도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을 네 번이나 한 거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닌데!”
엘리아나가 호통치자, 샤르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엘리아나는 그녀를 보면서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소꿉놀이는 끝났어, 샤르헨.”
“…….”
엘리아나는 샤르헨의 얼굴을 밀치듯 놓아 주고선 조셰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저주할 거야! 엘리아나 로즈! 저주할 거라고!”
“해.”
“뭐, 뭐라고?”
샤르헨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엘리아나는 고개만 살짝 돌려서 그녀에게 답했다.
“저주하라고. 그 골방 같은 탑에 갇혀서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일 텐데. 맘껏 해. 신이 누구의 편을 들어 주는 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엘리아나!”
절규에 가깝게 제 이름을 외치는 샤르헨을 두고서 엘리아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남작가의 저택에서 벗어났다.
짧지만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로부터 이별이었다.
엘리아나는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자신이 부른 마차에 올랐다. 어느 공작, 백작의 마차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그 어떤 때보다 더 행복했다.
카르만은 자신의 집무실에 서서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차에 올라서 남작가에서 멀어지는 엘리아나를 보며 카르만은 복잡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보내지도 못하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엘리아나의 말처럼 자신은 우유부단함의 끝에 서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엘리아나, 샤르헨 중 누구도 선택하지 못하고 그저 제리크 헌터의 아들로만 존재할 뿐이니 말이다. 카르만은 밀려오는 피로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세수를 아무리 해도 머릿속의 복잡함은 깨끗이 씻기지 않았다.
***
“엘리!”
엘리아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났다. 아버지의 건강은 정말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집 안에 늘 자리 잡고 있던 퀴퀴한 곰팡내와 어두운 기운이 사라졌다. 내부는 밝았고, 가족들의 얼굴도 밝았다.
옷차림과 매무새도 깔끔해져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아직 배에 남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눈높이를 맞춰 안아 주지는 못했지만, 엘리아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동생들과 가족들을 안았다.
“고생했다, 엘리. 정말 고생했어.”
아버지의 말에 엘리아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눈물을 흘렸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모두.”
“우리도! 우리도 보고 싶었어!”
“언니, 나 하프 연주하는 거 들어 볼래?”
“누나, 내가 쓴 글도 봐 줘! 진짜 잘 썼다고!”
“꼬마 도련님들, 아씨들. 엘리는 조금 쉬어야 해요.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답니다.”
“힝…….”
모두 엘리아나를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베니의 말 한마디에 정리되었다.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웃고선 베니를 따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이라서 어색했지만, 무엇보다 어색한 것은 두툼해진 침구와 화사한 커튼이었다.
베니가 엘리아나가 돌아오기 전에 바꿔 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베니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에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남작가의 침대보다 훨씬 좁고, 딱딱했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락했다. 이제야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것처럼 편안했다.
“공방들은 내일 둘러보자. 오늘은 이만 쉬어. 너무 고생 많았어.”
“응, 아직 덜 나았나 봐.”
“당연하지. 네가 당한 일이 좀 큰일이야? 푹 쉬어. 저녁에는 네가 좋아하는 감자수프에 오리 요리를 할 거야.”
“맛있겠다. 기대돼서 잠이 달아나려고 해.”
“얼른 자. 준비하려면 한참 걸릴 거야.”
베니가 엘리아나의 머리칼을 넘겨 주자,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에는 율리시스가 준 펜던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꼭 쥐었다. 아직 샤르헨의 고함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이 고된 피로를 녹이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엘리아나 로즈로서의 새로운 생이 시작될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