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이혼이라뇨. 그럴 수 없습니다.”
카르만은 아버지의 통보에 반항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말이 아닌 주먹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카르만은 바닥에 쓰러졌다. 제리크 헌터는 그에 멈추지 않고 쓰러진 카르만의 뺨을 몇 대나 내리쳤다.
“이, 한심한, 이런, 이, 한심한 놈.”
그는 치아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는 아들의 멱살을 던지듯 놓으면서 말했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사랑 타령이야? 이 시기만 무사히 지나면 네 앞에 모든 게 무릎 꿇게 될 것이다. 갖지 못할 여자가 없고, 황금은 넘쳐나겠지.”
“…….”
“그런 피라미 같은 물고기는 잠시 풀어 줘도 얼마든지 다시 네 곁에 둘 수 있단 말이다. 어째서 너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거냐! 그것도 줄줄이 썩은 나무들만!”
제리크 헌터는 성을 내면서 베르겐에게 손을 뻗었다. 베르겐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의 손을 닦아 주었다. 흰 천에는 카르만의 피가 가득 묻어 나왔다.
“샤르헨 그 계집애는 자멸한 것이나 다름없다. 죽이지 않고 성에 가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비를 베푼 것이야.”
“아직 샤르헨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확신할 수는…….”
“내가 그래서 네가 한심하다고 하는 것이다. 권력의 추가 기울면 어떻게 되는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같은 편이었던 사람들도 모두 뒤돌아서게 된다. 내 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리면서 제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지.”
“…….”
“너는 내일 그걸 보게 될 것이다. 그걸 보고도 깨닫는 게 없다면 너는 헌터 가문의 가주가 될 자격이 없어!”
제리크 헌터는 단호하게 말하고서는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이혼 서류를 들었다. 증인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갈겨 쓰고선 가문의 이름 밑에 인장이 새겨진 스탬프를 찍어 눌렀다. 잉크가 빠르게 말라 가면서 헌터 가문이 이혼을 승낙했다는 문서가 단숨에 완성되었다.
카르만이 바닥에서 겨우 상체를 일으켰을 때, 제리크는 그 문서를 베르겐에게 주었다.
“똑똑히 보고, 깨닫고, 나를 따라라.”
“…….”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줄 테니까.”
제리크 헌터의 눈이 야망으로 빛났다. 카르만은 그제야 아버지가 벌이고 있는 모든 일이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에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그 힘에 대한 욕심이 말이다.
카르만은 그의 눈을 피했다. 그 열망에 맞서기에 자신은 너무 작은 존재였다.
‘엘리아나.’
카르만은 지키지 못한 네 번째 부인의 이름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콜록, 콜록.”
샤르헨이 기침을 연거푸 해 댔다. 그녀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사람을 만나기를 거부해 왔다. 하지만 제리크 헌터의 부름에는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했다.
그녀가 불려 나온 곳은 다름 아닌 엘리아나의 방이었다. 엘리아나는 몸이 다 낫지 않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이었다.
샤르헨은 하얀 망토를 가운처럼 두른 채로 가냘픈 몸을 작게 말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녀를 보면 얼른 쉬어야 할 것 같다며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 주고자 할 만큼 연약하고 작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 모두 제리크 헌터의 이름 앞에서 꼼짝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연인인 카르만도 마찬가지였다. 카르만은 얼굴 한쪽이 부은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뭔가에 억눌린 듯 분한 표정이었다.
카르만과 베르겐, 베니와 메이 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다름 아닌 집사 페페와 하녀 르잔이었다.
두 사람은 겁에 질려 있는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했던 일이 모두 밝혀진 것처럼 말이다. 특히 페페는 곧장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처럼 다리를 벌벌 떨고 있었다.
“페페.”
“네, 네. 공작님.”
“네 멍청한 머리로 잘도 헌터 가문의 재산을 빼돌렸더구나. 그 뚱뚱한 배를 당장 갈라도 시원찮을 정도인데, 욕심으로 가득 차서 용케 숨을 붙이고 있었군.”
“고, 공작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죽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페페는 곧장 바닥에 몸을 낮게 붙였다. 이마를 쿵쿵 바닥에 부딪치면서 목숨을 구걸했지만, 그런 그의 목에 다가온 것은 날카로운 검이었다.
“헤엑…….”
“그런 파렴치한 짓을 벌이고도 목숨을 구걸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빨리 이 불명예스러운 삶을 끝내 달라고 애원하지는 못할망정!”
“살,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공작님!”
“그럼 말해 봐라. 샤르헨이 네게 뭘 사주했지?”
“네?”
페페는 눈치를 보았다. 샤르헨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로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페페가 땀만 흘리자 검이 조금 더 페페의 두꺼운 피부 위로 가까이 닿았다.
“으, 으윽! 말, 말하겠습니다! 다 말하겠습니다! 엘리아나 로즈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시켜서도 좋고, 제가 직접 죽여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비리의 오명을 벗겨 주고 집사로 다시 일하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찔렀나?”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찌르지 못했습니다. 찌를 수 없었습니다. 검만 들면 손이 너무 부들부들 떨려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페페는 침과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선 말을 이었다.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분비물로 번들거렸다. 제리크의 칼이 움직였다. 옆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르잔에게로였다.
“그럼 너인가?”
“네? 저, 저는 아닙니다!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공작님.”
“네가 샤르헨의 첩자 노릇을 했다던데?”
“그, 그건 맞지만……. 그리 오래하지 못했습니다. 남작 부인께서 눈치가 빠르시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저,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시녀장 메이와 샤르헨 님이 엘리아나 님을 죽이겠다고 말씀하는 걸 들었습니다.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러니 범인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르잔은 살기 위해서 말을 쏟아부었다. 제리크의 칼끝은 르잔을 떠나서 메이에게로 향했다. 메이는 앞의 두 사람보다는 조금 더 덤덤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등 뒤로 땀이 흐르는 상태였다.
제리크 헌터는 메이에게 칼을 겨누려다 말고 뒤로 휘둘러서 페페의 목을 내리쳤다.
“케, 케… 켁…….”
날카로운 검은 페페의 목을 베었다. 온통 피가 튀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엘리아나는 눈을 감았다. 제리크 헌터는 지금 엘리아나를 해친 범인을 찾는 게 아니었다. 이 저택의 모든 인물에게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고 겁을 주는 것이었다.
머리를 조아리라고. 제 뜻을 따라 움직이라고 말이다.
엘리아나는 금세 퍼지는 역한 피 냄새처럼 그의 그런 정신이 역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금 입을 잘못 놀렸다간 정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엘리아나는 침대 옆에 서 있는 베니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괜한 불똥을 맞아 제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순 없었다.
“더러운 돼지 새끼를 먼저 죽이고 시작한다는 걸 내가 깜빡했군.”
얼굴에 점점이 피를 묻힌 채로 제리크 헌터가 칼을 메이에게 겨눴다. 칼끝에서는 페페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메이는 담담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입술을 잘게 떨고 있었다.
“네가 엘리아나 로즈를 찔렀나?”
“아닙니다.”
“그럼 네 귀에 난 상처는 뭐라고 변명할 것이지?”
샤르헨의 시선이 간절하게 메이에게 닿았다. 제발 그녀가 차라리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메이의 입술은 망설이지 않고 열렸다.
“샤르헨 님이 저택의 모든 하녀의 귀에 상처를 낼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저도 포함이었습니다.”
“왜 귀에 상처를 내라고 했지?”
“…….”
“왜!!”
그의 다그침에 메이는 놀라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벌벌 떨었다. 엘리아나는 베니의 손을 잡고선 입을 열었다.
“답을 알고 계시면서 고문하는 건 그만두세요, 공작님. 저를 찌른 사람은 샤르헨 헌터입니다. 제가 똑똑히 목소리를 듣고 눈을 보았습니다. 어떻게든 증거를 남기려고 범인의 귀를 물어뜯었고, 귀걸이를 입에 문 채로 쓰러졌고요. 귀걸이는 잉그 오델리 백작이 주최했던 파티에서 샤르헨이 착용했던 귀걸이였습니다.”
“그, 그건 잃어버렸어요! 하녀 중에 누가 훔쳐 간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왼쪽 귀를 보여 줘요, 샤르헨. 이로 물어뜯어 귀가 찢어진 자국은 칼로 억지로 찢은 자국과 다르죠. 게다가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을 테니, 상처는 덧나 있을 거고요.”
엘리아나의 말에 샤르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샤르헨의 왼쪽 귀는 퉁퉁 부어 있었다. 고름이 차서 노란 진물이 흐르기도 했다.
제리크 헌터는 단숨에 다가가서 그녀의 망토를 벗겼다.
“아버지!”
“…….”
카르만 헌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듯한 눈동자로 말을 이었다.
“제발…….”
“…….”
“제 아이를 가진 여자입니다.”
“못난 놈. 네 부인을 죽이려고 했던, 질투에 눈이 먼 여자다! 살인을 저지르려고 했다고!”
“샤르헨을 살려만 주신다면!”
“…….”
“시키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카르만…….”
샤르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제리크 헌터는 칼을 거두고선 혀를 찼다.
“나약한 놈. 베르겐,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결과가 나오면 샤르헨을 남쪽 탑에 가둬라. 저 계집애들을 넣어서 수발을 들게 해. 아기를 낳을 때까지만 처벌을 미루는 것이다. 자결하지 못하도록 상시 감시하고, 이 셋이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하게 해.”
“네, 공작님.”
“엘리아나, 질리언은?”
“점심 이후에 여동생과 함께 방문한다고 하였어요.”
“그 전에 씻어야겠군. 더러운 돼지 피가 튀었으니까.”
그는 피가 튄 모노클을 벗고선 그대로 엘리아나의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