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00)

078.

그렇게 통보한 린셀이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 왕비는 린셀에게 당했다는 분한 마음에 이를 꽉 깨물었다.

에리한과 도이첸은 서로 마주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어리버리한 린셀이 왕비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다니. 사람이 변하는 건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비. 이렇게 된 이상, 린셀의 결혼을 서둘러야겠습니다.”

“뭐라고요?”

“그럼 저렇게 놔둘 겁니까?”

“저는 인정 못합니다!”

왕비는 테이블을 내리쳤다. 하지만 에리한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 이제 그만 하시지요. 린셀의 결혼 준비는 저와 아바마마가 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에리한과 날카로운 대치 상태인 왕비를 본 도이첸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비. 그래요. 왕비는 린셀의 결혼 문제에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제가 저만 좋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국사란 앞으로의 국력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린셀은 공주입니다. 그냥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바론은 그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도 이렇게 성장해 왔으니, 크게 염려치 마세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왕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황에 에리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음, 그래. 조만간 다시 부르마.”

“네, 알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에리한이 식당을 나섰다. 그래도 생각보다 당차게 말한 동생 때문에 자신이 나설 일은 많지 않았다.

어린 줄만 알았더니…… 왕비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린셀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동생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

“그랬구나. 아침부터 분위기 장난 아니었겠어요.”

“뭐,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죠.”

에리한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침에는 린셀의 일로 오후에는 바임이 복귀해 서로 업무 상의를 하느라 하루 종일 시달렸더니 이제는 두통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는 린셀의 결혼 준비로 더 바빠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빨리 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음, 그렇구나. 그나저나 린셀 공주님 대단하신 거 같아요. 저는 왕비님이 너무 무섭던데.”

“어마마마가요?”

에리한의 반문에 소리오닌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쁜 뜻은 아니에요! 그냥 워낙 멋지시고 당당하시니까, 주눅이 들더라고요.”

“아아, 압니다. 어마마마는 대단하시죠.”

피식 웃으며 왕비를 떠올린 에리한은 곧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의 피곤한 얼굴을 본 소리오닌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리한의 뒤로 가서 섰다.

“?”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에리한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뒤에 서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소리오닌이 근육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이것 봐요. 어깨가 꽉 뭉쳐 있잖아요.”

“소리오닌 님?”

“안 그래도 어깨는 다쳤던 곳인데, 너무 일만 열심히 하지 말아요.”

소리오닌의 손이 어깨 곳곳을 만져주었다. 그녀의 손이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사실도, 그녀의 걱정스런 말투도 기분이 좋았다. 에리한은 씨익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무리하고 있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그래도 걱정이 된단 말이죠.”

“하하, 이런 걱정 들어본 거 정말 오랜만이네요. 어렸을 때 빼고는.”

에리한이 어깨에 올라간 소리오닌의 손을 떼서 다시 앞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래도 제 걱정 해주는 소리오닌 님을 보는 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게 뭐에요, 당연한 걸 가지고.”

“그런가요?”

그의 말에 쑥스러워진 소리오닌은 괜히 집 안을 둘러봤다. 그러다 눈에 띄 베개를 보고 반색했다.

“맞다, 에리한 님! 저 베개요, 저거 엄청 좋아요!”

에리한은 소리오닌이 가리킨 베개를 바라봤다. 괜찮다고 우기는데도 기어코 페릴이 자신의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아, 저거…….”

“네, 네. 페릴 님이 만들어 주셨다고 했죠? 무슨 깃털이더라.”

“오하로칸의 깃털로 만든 베개입니다.”

“오하로칸! 맞네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아무튼 완전 푹신해서 잠이 잘 와요. 페릴 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소리오닌은 베개가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생글생글 웃었다. 오하로칸이 어떻게 생긴 줄 알았다면 저렇게 좋아하지는 못할 텐데.

에리한이 속으로만 웃었다. 그렇게 베개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에리한의 머릿속에 퍼뜩, 스쳐가는 단어가 있었다.

‘하콧의 비늘.’

전에 페릴이 오하로칸의 깃털을 사면서 들었다던 소문. 아무래도 찜찜해서 조사를 해보려고 했었는데, 정신이 없어 그냥 넘어가 버렸다. 내일은 페릴을 불러 소리오닌의 감사 인사를 전하는 김에 하콧의 비늘에 대해 말해봐야겠다,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왕비도 그렇고, 자하만 백작이 조용히 있는 것도 수상했다. 소리오닌이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바임이 돌아왔으니 믿고 같이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늘었다. 에리한에게는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그럼 제가 내일 페릴을 만나 소리오닌 님이 너무 감사해하셨다고 전해주겠습니다.”

“그래 주실래요? 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소리오닌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한도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

달빛이 환하게 내려앉은 늦은 시간, 에리한이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왕자님.”

“어, 바임? 아직까지 있었어? 아니지, 아까 나랑 같이 나갔잖아.”

바임이 에리한의 집무실에서 나오면서 그를 불렀다. 생각지도 못한 바임의 재방문에 에리한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네. 그런데 전하의 시종장이 왕자님을 찾다 포기하고, 린셀님의 궁으로 오셨더군요.”

“아바마마의 시종장이 나를?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본성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바임은 이 말을 전하기 위해 꽤나 오랜 시간 왕자궁에 머물러 있었다. 요즘 소리오닌을 만나러 자주 나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런 왕자를 용케도 왕비가 두고 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알았어. 참, 바임. 내일 페릴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내일 오후에 페릴 좀 불러 줘.”

“네, 알겠습니다.”

“린셀이 기다리겠다. 그만 가 봐.”

에리한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바임에게 말했다. 그러나 에리한의 말을 듣고도 바임은 자리에 서서 우물거렸다.

“저, 왕자님.”

“음? 또 뭔가 할 말이 있어?”

에리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바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요즘 잠은 잘 주무십니까?”

“아아, 물론이지. 잘 자고 있어. 걱정 마.”

차마 소리오닌을 만나는데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말은 전하지 못했다. 결국 바임은 별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바임을 보내고 난 다음 에리한은 침실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지, 린셀의 결혼 얘기라면 이렇게 밤늦게 부르지는 않았을 텐데…… 뭐 내일 가 보면 알겠지.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에 피곤함을 느낀 에리한은 금세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위나, 이리 와 보렴.”

“네. 아버님 무슨 일이세요?”

자하만 백작이 자신의 서재 앞을 지나던 위나를 불러 들였다. 그의 부름에 서재 안으로 들어 온 위나는 백작에게 물었다.

“여기, 이 서류 어떠냐?”

백작이 수십 장이 겹쳐져 있는 종이더미를 위나에게 건넸다. 그 서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위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별 관심 없이 성의 없게 훑어보던 걸 그만두고 글자 하나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상세히 읽어 내려갔다.

“아, 아버님? 이게 무슨……?”

“어때. 그럴듯하지?”

“네, 네! 아버님이 직접 작성하신 거예요?”

위나의 물음에 백작이 파안대소했다. 

“그럼! 그 서류를 작성하느라 며칠 밤을 고생했다.”

“아버님, 정말 대단하셔요! 그럴듯한 게 아니고, 정말 거래를 위한 서류 같습니다. 서명까지 완벽해요!”

백작은 그녀의 말에 슬쩍 뜨끔한 기분이 들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니, 돈도 없는 초크센의 귀족놈이 진짜 이런 걸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다 생각해보고 작성한 것이야.”

“그렇다면 더더욱 대단한 것이지요! 아버님이 무기나 용병단에 대해 이렇게 정확한 정보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래봬도 수도에서 일하고 있지 않느냐, 이 정도는 알아놔야 바론에 위협이 되는지 판단할 수 있지.”

백작이 흠,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위나는 자신의 아버지에 팔에 매달려 살랑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것만 있으면 혼인은 저희 쪽으로 무조건 넘어오게 되겠군요.”

“그렇지! 아무리 에리한이라고 해도 이제는 지 멋대로 날뛰지 못할 것이야.”

“아버님,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내 딸을 위한 일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그리고 곧 나는 바론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테고 말이지.

자하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왕자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하는 딸을 바라봤다.

계획만 제대로 성공한다면 위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혼인하는 꿈을 이루게 될 것이었다. 비록 자신의 목표를 이룸과 동시에 위나는 상처를 입겠지만, 잠깐만이라도 딸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