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위나, 이 서류를 잘 보관해두고 있어라. 나는 지하에 가서 그 놈을 만나봐야겠어.”
“네! 제가 잘 가지고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죠?”
“글쎄다,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느냐. 그 놈은 네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살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흐음, 그렇긴 하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버님, 조심하셔야 해요. 그럼 저는 가볼게요.”
남자에 대한 흥미를 비추다 금세 식어 버린 위나가 인사를 하고 서재를 나섰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그 놈은 숨만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곧 이 서류들의 주동자가 되어서 소리오닌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하는 중요한 배역이 될 테니까.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자신의 딸이 나간 뒤 백작은 자신의 책상 서랍 제일 아래 칸, 비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위나에게 건네준 서류의 원본이 들어 있었다.
그 서류의 서명에는 노미텐의 이름이 아닌 자하만 백작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준비한 반란이었다. 원래는 위나가 결혼을 한 뒤 몰래 왕의 뒤통수를 칠 계획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결혼조차 확실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 서류들로 소리오닌과 그 오라비부터 제거해야 했다. 원본만 들키지 않으면 왕과 왕비가 눈치 챌 일은 없을 것이다.
설마 자신이 용병들과 무기들을 사들일 거라고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
백작은 원본 서류에 입을 맞추고는 비밀 서랍에 고이 넣어 두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이 나라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을 날이 멀지 않았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즐거웠다. 크게 웃음을 내뱉은 백작이 슬슬 지하 감옥을 향해 걸었다.
“백작님, 오셨습니까.”
“그래, 그 놈은?”
지하 감옥의 문을 지키고 있던 사병 한 명이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백작이 노미텐의 상태를 물었다.
“네, 아직까지 별 이상은 없습니다. 약간의 탈수 증상이 있는 것 같지만, 어제부터는 밥도 먹고 있습니다.”
“음, 알았다. 여기는 내가 있을 테니 너는 잠깐 자리를 비켜라.”
“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말고. 별 일 없을게야. 얼른 가봐라.”
“그, 그럼 10분만 있다 오겠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한 사병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병사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백작이 그제야 문을 열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했다. 습한 공기에 슬쩍 인상을 찌푸린 백작이 제일 깊이 있는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는 노미텐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초점을 잃어버린 흐리멍덩한 눈으로 백작이 오는 걸 보고만 있었다. 처음처럼 울고불고 할 만한 힘도 없는지 그저 입만 벌릴 뿐이었다.
“노미텐? 그래, 어제부터 밥도 먹는다고? 잘 생각했다. 아무리 감옥에 있어도 몸은 챙겨야지.”
“…….”
“흠, 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가 보군.”
백작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지. 숨 쉬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됐다, 라는 생각으로 다시 등을 돌려 나가려 할 때였다.
콰쾅!
창살이 격하게 흔들리며 나는 소리에 백작의 어깨가 움찔했다. 구석에 쪼그려 있던 노미텐이 어느새 창살에 붙어서 백작의 소매를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급작스러운 노미텐의 격한 행동에 깜짝 놀란 백작이 뒷걸음질 쳤다.
“저, 저는 언제 나가는 건가요?”
간절한 표정을 지은 노미텐이 팔을 허우적거렸다.
“흠, 여기서 나가고 싶은가?”
“네, 네! 내보내 주시면 정말 쥐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다시는 바론으로 오지 않을 거예요!”
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백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래, 조금만 기다리거라. 곧 나갈 수 있어.”
“저, 정말입니까?”
“그럼, 그럼. 아마 네 여동생도 만날 수 있을 거다.”
백작이 다시 감옥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동생의 얘기가 나오자 노미텐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제, 제가 바론에 온 건 소리오닌과는 상관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잠깐…… 혹시 소리오닌도 잡혀 온 건가요? 저 때문입니까?”
“글쎄다?”
“안 돼요! 제 동생은 안 됩니다!”
“하핫, 거참. 동생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군!”
백작은 정말 웃긴다는 듯 크게 웃어버렸다.
지하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동생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곧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온 백작이 노미텐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동생의 안전은 네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네?”
“네가 여기에서 조용히, 내 말을 잘 듣고 있으면 동생은 그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거고. 이렇게 날뛰면 동생의 인생도 시궁창이 되는 거란 말이다.”
백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미텐은 후다닥 창살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다시 구석으로 돌아가 조용히 앉았다.
“저, 저만 조용히 있으면 되는 거지요?”
“그래, 너만 조용히 있으면 돼. 누가 뭐라고 하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알았지?”
“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지, 그리고 밥 잘 먹고 건강히 있도록 해.”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 백작은 뒤엣말은 속으로만 말했다. 백작의 속뜻을 모르는 노미텐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많이 무서운 사람에게 붙잡힌 건 아닌 것 같다고,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있으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미텐은 백작의 말을 명심했다. 조용히 입 다물고. 그러면 다 괜찮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소리오닌이 불이익을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 조만간 다시 오겠다. 그때까지 탈출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는 네 동생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다 아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여기서 조용히 있겠습니다. 동생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저도 무사히 나갈 수만 있다면. 탈출 따위 꿈도 꾸지 않겠습니다.”
노미텐이 백작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백작은 그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멍청한 놈.”
크큭, 백작은 입을 통해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생의 반에 반도 못 하는 칠푼이 같았다. 딱 봐도 어리석고 겁만 많은 남자가 분명했다.
이제 그 계집을 눈앞에서 치워 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겠나, 저런 놈을 오라비로 둔 자신을 원망해야지.
백작은 이 걸 언제 터뜨려야 제일 효과가 좋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 계집이 제일 행복하다고 느낄 때 터뜨리겠어. 아주 나락으로 떨어져 버려라.
***
“아바마마. 부르셨습니까.”
“그래, 요즘 소리오닌에게 가 있느라 저녁시간에는 아예 궁에서 보이지가 않더군.”
도이첸은 귀가 살짝 빨개진 자신의 아들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런 에리한의 옆에는 바임도 함께 있었다.
“바임. 저번에는 제대로 얘기할 시간도 없었지? 흠, 아버지가 되는 기분이 어떤가?”
“저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과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제 태어나는 우리 아기에게는 좋은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호오, 그래. 그건 결혼을 꼭 하고 싶다는 거군?”
“……네.”
왕의 짓궂은 질문에 바임 또한 살짝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 두 남자의 신선한 반응에 왕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아바마마, 헌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저녁에 부르실 정도면 평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에리한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었다. 그의 물음에 그제야 왕이 뭔가 생각난 듯했다. 왕은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에리한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음, 사브만에서 온 거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에리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왕에게 받은 봉투를 빠르게 열어보았다.
그간 있었던 일을 들었던 바임도 표정을 굳히고 에리한의 손에 있는 봉투를 노려보았다.
“어제 저녁에 도착해서 바로 알렸는데, 네가 부재중이더구나. 내용은 나도 보지는 않았다.”
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리한이 조심스럽게 봉인되어있는 봉투를 열었다.
투둑, 하는 봉투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간단한 알림이 적혀있는 서류였다.
[사브만에서는 이번 혼인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왕세자의 사인이 휘갈겨져 있었다.
“……하!”
에리한의 입에서 큰 숨이 터져 나왔다. 왕에게서 사브만의 공식 서류를 받아들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나 보다.
사브만에서 보낸 서류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양식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평소의 서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소리오닌에게 미안함이 가득한 듯 길게 이어지는 히튼 왕세자의 끝인사말이었다.
에리한에게 이 서류는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했다.
“어떠냐, 에리한. 사브만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써 있나?”
“그렇게 써 있습니다.”
에리한의 힘 있는 대답에 왕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퍼졌다. 그의 옆에서 에리한의 반응을 살피던 바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됐구나. 이렇게 큰일을 겪고도 혼인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그래.”
도이첸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왔는데……. 어느새 두 사람은 그들의 가정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님. 이 서류를 어마마마께 보여 드리고 당장 결혼 허락을 받겠습니다. 사브만에서도 혼인을 포기했다는 걸 아시면 더 이상 저희를 떨어트려 놓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에리한이 당장이라도 왕비궁을 향하려 했다.
“잠깐, 에리한. 멈춰 보아라.”
“네?”
왕은 에리한을 멈추게 한 후에 본격적으로 해야 할 말들을 시작했다.
“물론 너의 결혼은 너의 어머니인 마리딘 왕비 때문에 늦춰진 것도 있지만, 자하만 백작이 차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이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