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00)

077.

“됐어요. 애초에 제가 바임 님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린셀이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바임은 린셀의 머릴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한테 최우선은 린셀 님과, 린셀 님 뱃속에 있는 우리 아기입니다.”

“바임 님……! 정말이죠? 제가 오라버니보다 더 소중한 거죠?”

바임이 에리한을 힐끗 쳐다봤다. 에리한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린셀 님이 소중하죠.”

“저는 이 세상에서 제일 첫 번째가 바임 님이에요! 정말로요!”

린셀이 바임의 품으로 돌진했다. 바임은 린셀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린셀이 다칠까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아주 눈꼴 시리네. 에리한은 두 사람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린셀은 한참동안 바임의 팔을 잡고 꼼지락거리다 떨어졌다.

“그래, 이제 떨어졌나? 그럼 너희 궁으로 좀 가지?”

“안 그래도 갈 거예요. 맞다, 저 할 말이 하나 더 있었어요.”

“음? 뭔데?”

바임의 복귀 말고 할 얘기가 더 있다는 말에 에리한이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저, 임신이 확실하대요.”

“아?”

“오늘 의사에게 확실히 진단 받았어요.”

린셀의 표정이 금세 어른스럽게 변했다.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얼굴로 에리한을 마주봤다. 에리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린셀의 배로 향했다.

저기에…… 린셀과 바임의 아기가? 전에도 들었던 얘기지만 그때는 반신반의했었다. 린셀은 자기 좋을 대로 말할 때가 많으니까…… 그냥 그런 기분에 말부터 덜컥 내뱉은 건 아닐까 의심했었다.

“정말?”

“네, 정말입니다. 저도 옆에 있었습니다.”

바임이 그녀의 말을 뒷받침했다. 그제야 에리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랬단 말이지. 린셀, 네가 어머니가 된다고?”

“어머니라니! 너무 쑥스럽지만…… 네, 제가 어머니가 된답니다.”

“그래. 축하해, 린셀 그리고 바임도. 갖고 싶은 건 없어? 축하선물을 보낼게.”

에리한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린셀과 바임을 쳐다봤다. 그의 물음에 린셀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선물은 필요 없어요.”

“왜? 필요한 게 많을 텐데.”

“그런 건 천천히 준비해도 되잖아요. 지금 당장 해 주셔야 하는 게 있어요.”

“……?”

린셀은 두 사람 사이에 있던 테이블을 훌쩍 넘어 자신의 오라버니 손을 꼭 잡았다.

아슬아슬하게 테이블에 걸쳐진 린셀 때문에, 에리한은 혹여 그녀가 다칠까봐 손 대신 어깨를 잡아주었다.

“제가 내일 아침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이 사실을 알리고 결혼을 정식으로 허락받을 참이에요.”

“내일? 아침부터?”

“네! 저번에는 혼나느라 제대로 얘기도 못했잖아요. 내일은 정말 확답을 받아야 해요!”

굳은 결심을 한 듯, 린셀의 눈이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해 줘야 하는 건?”

“당연히 제 편이 되어 주시는 거죠!”

“흐음?”

미적지근한 에리한의 반응에 린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오라버니, 지금 반응 뭐예요?”

“아니,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큰 반대는 안하실 거 같은데.”

“저야 물론 오라버니만큼 큰 반항은 아니긴 하지만…….”

그녀의 말에 에리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아니! 반항이라기보다는……. 아무튼! 그래도 혹시 몰라요! 요즘 어마마마의 심기가 엄청 불편하잖아요!”

“그래, 요즘 어마마마께서 외부활동도 안하시고 궁에만 계시긴 하지.”

그 원인의 99%가 자신이기는 했다. 허나 에리한 또한 한 발자국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소리오닌이 없던 시간 동안 그의 세상은 모두가 흑백이었고,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일 아침은 무조건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해요, 알았죠?”

“그래, 알았어. 그건 걱정 마.”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저는 이만 갈게요. 바임, 가요.”

린셀은 뒷걸음질 쳐 테이블에서 내려갔다. 바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그녀는 짧게 인사를 했다.

“그럼, 에리한 님. 내일 뵙겠습니다.”

“응, 내일 봐.”

바임 역시 린셀과 함께 인사를 하고 에리한의 궁을 나섰다.  

커다란 바람이 몰아친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동생은 언제나 넘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 에너지를 바임과 태어날 아기에게 쏟겠지. 에리한의 얼굴에 짧은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언제까지나 어리기만한 줄 알았는데, 방금 전 린셀의 얼굴은 분명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얼굴이었다. 에리한은 신기한 기분에 한참동안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기라…….”

자신과 소리오닌의 사이에는 아직 먼 이야기이려나? 에리한은 자신과 그녀 사이의 아기를 상상만 해도 행복한 마음이 가득했다.

자신과 같이 이렇게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음, 우선은 내일 린셀의 일부터 해결해야하는 건가.”

내일 아침은 아무래도 조용히 먹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네 사람의 입에서는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에리한도 크마엔에서 돌아온 후로 처음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웬만하면 왕비와 부딪히는 게 싫어서 자신의 궁에서 해결을 했었는데…….

어제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 린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침부터 본성으로 온 참이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왕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웬일로 린셀, 에리한 모두 아침식사를 하러 왔구나.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움찔, 린셀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그 움직임을 본 왕비가 자신의 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린셀, 너구나. 그래, 할 말이 뭐니?”

왕비는 식기를 내려놓고 입술 주변을 닦아냈다. 그녀 역시 이렇게 피곤한 아침식사는 오래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에 하던 얘기를 마저 하고 싶어서요.”

“음?”

“제 결혼 문제요.”

돌려 말하지 않는 그녀의 화법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왕비는 에리한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몇 달 만에 돌아와서는 바임과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딸까지 더해지자, 요즘 스트레스가 말이 아니었다.

좀 가만히 있으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아낸 왕비는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네 결혼. 결혼 상대는 내가 다시 찾아보고 있으니 기다려라.”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어마마마. 저는 바임 님과 언제 결혼식을 올릴지 상의하고 싶은 거예요.”

“뭐?”

매번 자신의 옆에 붙어서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없었다. 왕비는 몇 달 사이에 너무도 변한 딸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어마마마께서 제 결혼까지 정하실 권리는 없어요. 저는 바임 님과 결혼할 거예요.”

“너, 너! 지금 네가 한 짓을 잊은 거야? 네가 사브만 왕자와 혼인을 파기하는 바람에 얼마나 일이 꼬였는지 모르겠니!”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머니도 제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옳다구나 하고 소리오닌 님을 저 대신 사브만에 넘겼잖아요?”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오는지 린셀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왕비에게 맞서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의 모습에 왕비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움찔할 정도였다.

쾅!

결국 분에 못 이긴 왕비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반동에 테이블 위에 있던 식기들이 부르르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그 혼인은 네가 망친 거야. 어디서 고집을 부려? 죄송한 줄 알면,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남자를 찾아 혼인을 해!”

“그럴 수는 없어요.”

“좋게 말하니 알아듣지 못하는 게냐?”

린셀은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딘 왕비를 바라봤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보기만 해도 무섭고, 말 한마디를 할 때도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은 바임과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있고 소중한 아가도 있다. 이 정도에 물러설 수 없었다.

“저는 이미 바임 님과 저의 아기를 가졌어요. 설마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부인으로 맞겠다는 사람은 없겠죠?”

자신의 배를 감싼 린셀이 왕과 왕비를 차례로 쳐다봤다. 옆에서 왕비를 말릴 준비를 하던 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린셀……?”

“네, 아바마마. 사실이에요. 의사의 진단도 확실히 다 받았어요.”

도이첸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다. 물론 자신은 바임과 린셀의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런 사실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둘의 대화를 듣던 왕비가 갑자기 손을 올렸다. 맞은편에 있는 린셀의 머리를 향하던 손이 에리한에 의해 저지되었다.

눈을 질끈 감은 린셀의 머리 위에서 왕비와 에리한의 설전이 벌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왕자야말로 무슨 짓입니까? 그 손 놓으세요!”

“못 놓습니다. 아기까지 가진 애한테 너무하십니다.”

“너무하다니요? 지금 너무한 건 린셀 공주입니다!”

에리한은 끝까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아들을 한 번 노려본 왕비는 올렸던 팔에 힘을 뺐다. 

“그래, 다들 진정하고 앉아서 얘기하지.”

왕이 에리한과 왕비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두 사람은 짧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살벌한 기운이 흐르는 중이었다. 그들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종들과 시녀들은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제 결혼으로 바론에 이익이 된다거나 그것을 위해 결혼해야한다는 말을 말아 주세요.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어요.”

“너만 생각하는 거니? 이기심이 끝이 없구나!”

“네, 저는 이기적이죠. 근데 어쩌죠? 이게 다 어마마마를 보고 배운 거라…… 적당하게는 안 되는데.”

아기가 있다는 걸 밝혔음에도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려 한 왕비였다. 린셀은 왕비의 행동에 더 큰 화가 올라왔다. 이를 악문 왕비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그러고도 이 성에 머물 수 있을 거 같아?”

“하, 이젠 절 쫓아내시겠다는 협박인가요?”

“못할 것도 없다. 그놈 따라 성에서 나가 버려!”

왕비의 외침에 린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요, 어마마마. 저는 이 성을 나갈 생각도, 결혼을 포기할 생각도 없답니다. 저를 쫓아내시려거든 이렇게 소리만 치지 마시고 아바마마와 대신들의 동의를 받아오셔야 해요.” 

마지막으로 살짝 무릎을 굽혀 우아하게 인사한 린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 배가 부르기 전에 결혼식을 하고 싶어요. 날짜는 아바마마가 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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