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그렇군요…… 덴타라는 아이. 엄청 힘들었겠어요.”
“그랬을 겁니다. 그 뒤로 동생에게 있던 마법 능력이 오빠에게 옮겨 갔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오늘 보니 꽤 세더군요.”
커다란 물줄기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소년의 모습을 기억해낸 남자가 말했다. 그의 말에 동의하듯 소리오닌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서 세리에게 잘해준 거구나. 동생 생각이 나서…… 괜히 코끝이 찡해져온 소리오닌이 코를 찡긋거렸다.
***
까무룩 잠들었다가 일어난 세리가 창문을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 어스름하게 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잤나. 아직 멍한 머리를 털어낸 세리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문을 열고 일층에 도착하니 도란도란 얘기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오닌 님?”
“어, 세리? 일어났어?”
뺨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소리오닌이 세리를 발견하고 한걸음에 뛰어왔다.
“너무 많이 잤나 봐요. 벌써 저녁이죠?”
“나도 자다가 이제 일어났어. 우리 어제 밤샜잖아.”
소리오닌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는 세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소리오닌, 저녁 먹어라. 세리? 너도 어서 오렴!”
안쪽에서 로센 공작이 소리쳤다. 알겠다고 말한 소리오닌이 세리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소리오닌 님, 저는 나중에 먹을게요.”
“왜? 하루 종일 굶어서 배고프잖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따로 먹어도 돼요.”
나중에 사용인들이 먹는 식당에서 챙겨먹을 생각에 세리는 자신을 잡은 소리오닌의 손을 떼어냈다.
“안 돼. 오늘은 나랑 같이 먹어.”
“네?”
“얼른. 나 뺨에 있는 상처가 화끈거려서 씹는 게 너무 불편해. 네가 식사 좀 도와줘야해.”
“아아, 네. 그럴게요! 소리오닌 님, 많이 아프셔요?”
급하게 지어낸 말에 세리가 화들짝 놀라 소리오닌을 이끌었다. 식당에 도착한 세리는 정말로 소리오닌의 앞에 잘게 조각난 고기들을 가져다 놓을 뿐 자신의 입에는 단 하나도 넣지 않고 있었다.
“세리.”
“네, 소리오닌 님? 더 작게 잘라 드릴까요?”
“아니, 나는 이제 됐으니까 너도 먹으라고.”
“아아. 알겠습니다.”
멋쩍은 웃음을 지은 세리가 그제야 조금씩 음식들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공작이 맛있는 음식들을 세리의 앞으로 슬쩍 옮겼다. 네이드도 따뜻한 차를 준비시켜 세리에게 전해줬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던 세리도 어설픈 그들의 웃음을 보고 자신을 배려해 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배시시 웃은 세리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공작과 얘기를 나누었다. 소리오닌과 세리는 이층으로 올라와 침대에 누웠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바론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소리오닌 님.”
“응?”
“이제 바론으로 가니까 좋으셔요?”
“뭐?”
세리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이렇다 할 말은 안 해도 소리오닌이 아까 전부터 에리한에게 선물 받은 머리핀만 꼭 쥐고 있는 걸 발견했었다.
“얼른 가고 싶으시죠?”
“어, 그러니까…….”
“에리한 왕자님이랑 뽀뽀도 하고 그러고 싶으신 거죠?”
“세, 세리, 너는……!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소리오닌이 세리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세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세리를 바라보던 소리오닌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제 괜찮아?”
“네?”
“그…… 네 친구 있잖아. 괜히 내 앞이라서 괜찮은 척하는 건가 싶어서……”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아까 엄청 울었더니 좀 후련해졌어요.”
“으응. 다행이다.”
“저는 소리오닌 님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세리는 소리오닌의 팔을 한 번 꼭 껴안은 후에 일어났다.
소리오닌에게 저녁 인사까지 마친 세리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창밖에 뜬 달을 바라봤다. 은빛으로 빛나는 달빛 사이로 소년의 말간 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이 지나도, 내일이 지나도, 앞으로 많은 시간이 지나도…… 저는 덴타 님의 행복을 빌게요. 눈을 꼭 감은 세리가 소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
다음 날. 소리오닌과 세리, 네이드는 바론으로 떠나기 위해 일찌감치 일어났다. 저택의 앞마당에 모인 세 사람이 자신들을 배웅하러 온 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로센 공작님,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신세만 지네요.”
“괜찮다. 소리오닌, 이번에는 정말 안전하게 바론까지 가야 한다?”
“네, 물론이죠!”
사브만에서 고생했던 것만 생각하면……! 소리오닌을 포함해서, 모두의 등이 다시 한번 오싹해졌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오냐, 다음에 올 때는 작정하고 놀러 와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수도에는 안 가십니까?”
네이드의 어깨를 두드리며 흐뭇하게 웃던 공작이 수도 얘기가 나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싫다. 안 갈 거야.”
“전하는 한 번 보러 오셔야죠.”
“그건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하마. 그리고 당분간은 몬스터 떼가 나올지 모르니, 디그롬에 있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네.”
공작이 딱 좋은 핑계인 몬스터를 들먹이자 네이드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딱딱한 태도에 공작은 푸념 섞인 말을 내뱉었다.
“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무뚝뚝해졌는지 정말!”
그럼에도 네이드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그의 입을 여는데 실패한 공작이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나이나 덩치에 비해 귀여운 공작의 행동에 소리오닌이 웃어 버렸다.
“저희 진짜 가볼게요! 감사했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공작은 세 사람을 실은 마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었다.
***
마차 안에 있는 소리오닌과 세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네이드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그는 지금까지 함께 있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에리한은 다정하게 대화를 주도했고, 페릴은 자신이 더 신나서 떠드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즐겁게 웃으면서 다녔는데…….
이 사람, 너무 조용하다. 자세히 보니 눈빛도 좀 무섭다. 시원시원하게 말하던 공작이 빠지자마자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가 가득했다.
네이드는 그녀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딱히 해줄 게 없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네?”
“없는 사람 취급하라는 말입니다.”
제 딴에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지만, 그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한동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아까보다 더 얼어붙어 있는 그녀들을 본 네이드가 쯧, 하고 속으로 혀를 찬 뒤 눈을 감았다. 네이드가 눈을 감은 지 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제야 두 사람의 입이 떨어졌다.
“소리오닌 님, 여기 뺨에 상처. 흉이 남으면 어떡하죠?”
“어? 아아, 이 거. 로센 공작님이 약을 챙겨 주기는 하셨는데…….”
세리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소리오닌 뺨에 붙어있는 반창고를 바라봤다. 숲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공작의 저택에 와서 보니 꽤 큰 상처라서 깜짝 놀랐었다.
“속상해요,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괜찮아, 세리.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잖아.”
“이미 지나갔으니까 더 속상하죠! 되돌릴 수 없잖아요!”
세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맞는 말이었다. 이미 지난 일이 되어서 되돌릴 수 없었다.
자신도 그도 마지막에는 서로 상처만 주고 끝냈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었다. 좀 더 좋게 헤어질 수 있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세리가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펴주며 말했다.
“약 잘 바르고 밥 잘 먹으면 다 나을 거야.”
소리오닌의 나이가 23살이라고 했으니까, 아직 회복력이 좋을 때다. 그럴 거라는 믿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밖을 바라봤다. 숲을 달리는 게 아니라 바론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그래도 에리한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다. 그치?”
“네? 음, 뭐, 저야. 소리오닌 님이 좋으면 좋죠!”
“뭐?”
“소리오닌 님이 에리한 님 만나면 저도 좋답니다!”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짓궂은 표정을 한 세리 때문에 소리오닌의 얼굴이 빨개졌다. 시끌시끌한 그녀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네이드는 언제 눈을 떠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
똑똑.
“들어 와.”
달도 뜨지 않은 깜깜한 밤. 크마엔에 시찰을 나온 에리한의 집무실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크마엔의 예산 장부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분홍 머리를 본 에리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에리한 님.”
“페릴? 너 오늘 보초서는 날도 아니잖아, 안 자고 뭐해?”
“안 자고 뭐하긴요, 에리한 님이 걱정돼서 와봤습니다.”
집무실 책상 앞에 선 페릴이 고개를 쑥 내밀어 에리한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거뭇하게 내려온 다크서클, 평소보다 수척해진 뺨, 부르튼 입술까지…… 평소 그를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다들 놀랄 만큼 에리한의 모습은 많이 상해 있었다.
“걱정할 거 없어. 할 일이 많은 것뿐이다.”
눈앞에 가득 찬 분홍색 머리카락을 밀어낸 에리한이 말했다. 그는 할 일이 많다고 했지만, 저 장부를 검토하는 것도 벌써 세 번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에리한 님,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좀 주무셔야죠. 제가 여기에 불이 켜진 걸 한두 번 본 줄 아십니까? 저만 봤으면 말을 안 합니다! 저 말고 모든 병사들이 봤다고 하니까 문제인 거죠!”
“자고 있어. 안 자고 어떻게 살아?”
“제 말은 하루에 7시간 이상 푹 주무시는 걸 말하는 겁니다!”
페릴의 말대로 모두 잠들어 있을 이 늦은 시간에, 지치지도 않는지 잔소리가 끝이 없었다. 귀가 따가운 듯한 느낌에 에리한의 미간을 좁혔다.
페릴은 페릴대로 무식하게 일만 하고 본인의 몸 하나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에리한이 답답했다.
“알았어. 이제 잘 거다. 불 끄고 잘 거니까 그만 나가.”
“……정말이죠?”
“그래, 정말이야.”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은 페릴이 느린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다시 책상을 내려다 본 에리한은 어느새 뒤섞인 장부를 보고 혀를 찼다.
몇 번이나 검토를 해놓은 거지만 그래도 뭔가를 계속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소리오닌을 구하러 당장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합리화 시키려는 걸까.
며칠 뒤면 다시 바론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마 그때까지도 그녀의 소식이 없다면, 이런 식으로 버티는 것조차 자신이 없었다.
“에리한 님!”
그때 돌아간 줄 알았던 페릴이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