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00)

067.

이번에 그는 정말 화났다는 표정으로 에리한의 앞에 섰다.

“분명히 주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이제 나가려고 했어.”

“벌써 삼십 분이 지났단 말입니다!”

벌써? 페릴의 말에 더 놀란 건 오히려 에리한이었다. 그저 소리오닌의 생각을 잠시 했을 뿐인데…….

“에리한 님이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해 보세요. 저희는 왕비님한테 죽은 목숨입니다!”

“페릴…….”

“그러니까, 주무시고 몸 좀 챙기세요. 이러다 소리오닌 님 만나기도 전에 큰일 나시겠습니다.”

페릴의 입을 통해 나온 소리오닌의 이름에 에리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페릴은 에리한의 호위로 함께 크마엔으로 오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들었다.

자신 역시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에 대해 많은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우선 건강부터 챙겨야 나중에 사브만에 쳐들어가든가 할 것이 아닌가!

귀여운 외모와 다르게 뼛속까지 단순무식한 페릴은 적 아니면 아군, 뺏지 않으면 뺏긴다, 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계속 사브만에서 소리오닌을 놔주지 않는다면 쳐들어가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각오가 되어 있었다.

“흐음…….”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중 에리한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손에 든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나가지.”

“넵, 제가 침실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페릴이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에리한의 얼굴에 피식, 하는 작은 웃음이 걸렸다.

그 뒤로 페릴은 밤마다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에리한은 수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며칠 동안은 억지로 수면을 취해야 했다.

그동안 몸을 혹사시킨 것이 맞는지, 꾸준히 잠을 청하자 그래도 뒤척이는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도로 돌아가는 날, 에리한의 손에는 땀이 차기 시작했다. 자신을 배웅하는 크마엔 영주에게도 뭐라 인사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소리오닌이 돌아오지 않았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머릿속이 멍했다. 그런 에리한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은, 뒤쪽에서 호위를 하다 그의 옆으로 온 페릴 때문이었다.

페릴은 자신이 타고 있는 말에 커다란 주머니 두 개를 달고 있었다.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페릴?”

“네, 에리한 왕자님!”

“그 주머니는 뭐야?”

에리한이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꽤나 궁금했는지 모두들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아아, 이거요? 깃털이에요.”

“깃털?”

“네, 오하로칸의 깃털이랍니다!”

페릴이 주머니 하나를 떼서 흔들었다. 크기에 비해 상당히 가볍게 움직이는 주머니를 보고 다들 고개를 기울였다.

“오하로칸의 깃털은 왜……?”

“이 깃털로 베개를 만들면 잠이 그렇게 잘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

“왕자님 것도 좀 나눠 드릴까요?”

“아니, 됐어. 괜찮아. 그럼 그건 어디서?”

에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오하로칸의 깃털을 베고 자다니. 좋은 꿈을 꿀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물물교환 하는 거 좋아한다고!”

“그러고 보니 그랬지.”

디그롬 숲에서 몬스터의 피를 뽑던 페릴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 몰랐는데, 크마엔 시내에도 물물교환 하는 식당이 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급히 다녀왔지요.”

어제 저녁에 갔던 식당을 생각하는지 페릴의 입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다른 사람들 얼굴에는 어이없는 웃음이 걸렸다.

“아, 근데 좀 이상한 게 있었습니다.”

“음?”

페릴이 주머니를 다시 걸어놓고 에리한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어느 정도 진지해 보였다.

“요즘 누군가가 하콧의 비늘을 사 모은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하콧의 비늘?”

에리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콧은 자주 발견되는 몬스터도 아닐뿐더러, 그 비늘을 얻는 과정이 까다로웠다. 덕분에 하콧의 비늘은 물량이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다.

“그걸 사들여서 하는 게 뭐겠습니까. 바로 무기 만들기죠!”

“거래량이 많지 않을 텐데?”

“보통 무기상이나 상점에서는 물량이 없지만, 저처럼 개인 거래하는 것까지 합치면 꽤 될 겁니다. 일부러 하콧 같은 상급 몬스터만 잡으러 다니는 용병들도 꽤 되고요.”

말을 마친 페릴이 다시 호위 행렬에 맞춰 섰다. 

“가격이 한두 푼이 아닌데, 일반 시민이 사 모을 리는 없고. 성으로 돌아가면 한 번 조사해 봐야겠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수도로 향하는 에리한의 머릿속에 또 다른 고민거리가 하나 더 생겨났다. 

***

“소리오닌 님, 바론의 수도에요! 저기 성도 보여요!”

“정말?”

아직 해가 뜨기 전 새벽, 세 사람을 태운 마차가 수도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세리가 소리오닌을 불렀다. 소리오닌도 신이 나서 세리의 옆으로 바짝 붙어 고개를 내밀었다. 떠날 때보다 조금 더 선선해진 바람 말고는 변한 것이 없었다. 

신난 두 사람을 보던 네이드는 마부를 불러 마차를 세우도록 했다. 바론을 코앞에 두고 멈춰선 마차에 소리오닌과 세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마차가 로센 공작님 것이라는 게 알려지면 귀찮은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세리, 내리자.”

“네, 얼른 짐 챙길게요.”

세리는 마차 구석에 놓아둔 짐을 챙겨 내렸다. 수도 앞에서는 네이드 덕분에 병사들에게 심문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나오는 변두리 마을에 소리오닌이 지내던 집이 있었다. 

“우선 돌아왔다는 걸 최대한 안 들키게 하는 게 좋을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당분간은 집밖으로 나오지 말아 주십시오.”

어차피 자신은 사브만으로 가기 전까지 이 집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새삼 불편할 것도 없는 일이라 알겠다고 대답하고 집으로 향했다. 

“소리오닌 님, 저는 공주님 성으로 가볼게요.”

“그래? 하긴, 여기에 같이 있으면 안 되겠구나.”

“그렇죠! 이래봬도 공주님 성에서 일하다 나왔으니까요.”

“근데 네가 없어졌다 갑자기 나타나면 다들 의심하지 않을까?”

소리오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의 성에서 일하는 시녀만 몇 명인데요. 저 한 명 정도는 신경도 안 쓸 거예요. 걱정 마세요!”

“으응, 알았어. 그래도 조심히 다녀. 알았지?”

“쉬는 날에 또 놀러올게요!”

세리가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네이드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세리와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을 보낸 소리오닌은 아직 어두운 방을 한 바퀴 돌아봤다. 왕비의 부탁을 듣고 여기를 떠날 때만해도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리고 그때만 하더라도 에리한을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지. 

에리한을 생각하던 소리오닌은 가만히 미소를 짓고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물건이 아닌 에리한 본인을 만지고 싶었다. 제발 그동안 그에게 큰일이 없었기를…….

눈을 꾹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쉰 소리오닌은 자꾸 무럭무럭 커지는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가 끝나면 쉬었다가, 저녁에는 디그롬에서 받아 온 채소의 씨를 심자. 어쩌면 당장 에리한과 만나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안 되니까 되도록이면 밤에 움직여야지. 씩씩하게 팔을 걷어붙인 소리오닌이 주먹을 꾹 쥐었다.

***

“전하, 오늘 조찬 회의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오늘이 회의가 있는 날이었던가?”

도이첸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회의 얘기를 꺼내는 시종장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시종장은 그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이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알았네. 귀찮으니 그냥 집무실에 딸린 식당에서 먹겠다.”

“네, 알겠습니다. 다른 분들께도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시종장이 절도 있는 인사를 하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요즘 통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더니, 아침마다 온몸이 뻐근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몸을 이리저리 돌리던 도이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이런! 언제 온 거냐?”

도이첸이 침실 구석을 보며 말했다. 언제 들어와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나타난 네이드는 도이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녀왔습니다.”

“일어나, 일어나! 우리 사이에 무슨 이런 예의를 차리는 건가!”

도이첸이 네이드의 어깨를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왕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정말 즐거운 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별 일 없으셨습니까?”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자네는? 소리오닌 양이랑 같이 돌아온 건가?”

“네. 사브만에서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잘 해결되었습니다. 소리오닌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지금 원래 지내던 곳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쉰 도이첸이 네이드의 얼굴을 살폈다. 

“좀 야위었나? 밥은 잘 먹고 다닌 건가?”

“물론입니다.”

“그래, 다행이구만. 에리한은 아직 크마엔에서 돌아오지 않았어. 에리한이 오기 전까지 왕비나 다른 사람들한테 소리오닌 양이 다시 왔다는 걸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왕이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그녀를 구하러 갔다는 걸 들키지 않았는데, 에리한보다 왕비가 먼저 알게 되면 또 소리오닌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은 전하고 왔습니다. 그녀도 상황을 어느정도 자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음, 그렇군. 알겠네, 고마워. 며칠 푹 쉬도록 해.”

“아닙니다.”

며칠 쉬라는 왕의 제안에 네이드는 굳은 표정으로 거절했다. 그 모습을 본 왕은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일 안하고 쉬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언제까지 하루도 안 쉬고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닐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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