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00)

065.

순간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순순히 사과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그러든 동생의 눈빛을 읽은 히튼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볼 수 없어도 잊히지 않는 게 있다. 네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말할 권리는 없어.”

“…….”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 정신 차리는 대로 집무실로 오도록 해라. 여기서 더 난동을 피운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

말을 마친 히튼이 뒤돌아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던 덴타는 가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성문을 지나 자신의 집무실로 가는 내내 별 말이 없던 히튼의 걸음이 멈췄다. 그를 따라 가던 소년도 걸음을 멈췄다. 

“말…… 다시 할 수 있게 된 거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거면 됐다.”

다시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덴타는 빠른 걸음으로 히튼의 소매자락을 잡았다.

“아버님. 저는 이제 죄책감만으로 살지 않을 거예요. 죄책감에 더해 베네루아 몫의 몫까지 열심히 살게요.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덴타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여동생의 죽음을 마주볼 수 있었다. 

히튼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을 꼭 안아 주었다.

***

타만과 카민은 천천히 가트에게 다가갔다. 몬스터들의 사체에 둘러싸인 동생은 오늘따라 더 작아보였다.

타만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괜찮냐?”

아무 말이 없는 동생 대신 카민이 타만을 나무랐다.

“형님! 지금 가트가 괜찮겠습니까? 괜한 걸 물으시고 그러세요!”

“아, 아니. 이게 내 나름대로의 위로야!”

“그런 위로라면 안 하는 게 낫겠습니다.”

한심한 듯 자신을 쳐다보는 카민에 타만이 발끈했다. 

“너는 뭐라고 위로해 줄 건데?”

“네?”

“그래서 너는 어떤 위로를 해 줄 건데? 뭐 대단한 위로라도 해 줄 건가 봐?”

타만은 크게 웃으며 카민을 잔뜩 비꼬았다. 

“유치합니다!”

“안 유치한데?”

지금 막 엄청난 실연을 당한 동생을 두고 투닥거리는 형님들이었다. 가트는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성문으로 향했다.

“가트!”

카민이 얼른 그를 쫓아가 어깨를 감쌌다. 

“뭡니까…….”

“아, 아니 그냥. 혹시 힘들어서 쓰러질까 봐. 부축하려고…….”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형님의 말에 가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됐습니다. 안 쓰러져요.”

“그래? 응. 그래…….”

카민은 말로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동생의 어깨를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결국 카민을 매달고 성으로 들어 온 가트는 들릴 듯 말 듯한 물음을 던졌다.

“그럼 제 마음은…… 어떻게 합니까? 쉽게 변하지 않는 마음도 있다는데, 저도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가트…….”

그 힘없는 목소리에 카민은 그저 동생의 어깨를 토닥여줄 뿐이었다. 

***

밤새 달린 소리오닌의 일행은 해가 뜨고 나서야 디그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 다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세리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부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세리, 얼른 누워.”

“저는 괜찮아요. 소리오닌 님부터 쉬셔야죠.”

그렇게 말하는 세리의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소리오닌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세리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손에 힘을 줘 침대에 억지로 눕혔다.

“나는 어차피 상처 치료도 해야 하고 바로 누울 수는 없어. 그러니까 먼저 쉬고 있어. 알았지? 내가 깨울 때까지 일어나면 안 돼!”

“……네에…….”

세리가 잘 누워 있는지 확인한 소리오닌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일층으로 내려왔다. 오는 내내 크게 소리도 내지 않고 우는 바람에 혹시 탈수증상이라도 올까 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대체 덴타가 누구인지……. 어떡하다 친해져서 저렇게 슬퍼하는 건지. 괜히 맘이 무거웠다. 

“소리오닌.”

“아, 로센 공작님. 상처는 좀 어떠세요?”

일층에는 공작과 네이드가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는지. 조금 피곤해 보일 뿐 표정이 나쁘진 않았다. 

“나야 괜찮지. 너도 얼굴에 상처가 났는데. 이리 와서 약 좀 발라라.”

“네.”

그제야 자신의 얼굴에도 상처가 났다는 걸 깨달은 소리오닌이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시녀들이 가져온 연고들과 약들을 이리저리 살피며 어떤 것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왜 그러냐? 소리오닌 너…… 혹시 상처도 없앨 수 있는 건가?”

“아, 아니에요! 그런 거 못해요!”

“그래? 난 또……”

뭔가 아쉬워하는 듯한 공작의 표정에 소리오닌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조용히 서 있던 소리오닌의 시야로 불쑥, 작은 유리병이 들어왔다. 

“어……?”

“상처에 바르는 약.”

“네, 고맙습니다.”

소리오닌이 인사했지만 남자는 별 말없이 자신의 팔에 난 상처에 붕대를 감았다. 그를 보던 소리오닌도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셔 굳은 피를 닦아내고, 찢긴 상처에 유리병에 담겨 있던 약을 발랐다. 

“이거 괜찮은 건가? 흉 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소리오닌의 뺨에 난 꽤 큰 상처를 본 공작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무튼 그 사브만 사람들과는 다시는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주 무식하게 마법능력만 엄청난 야만인들이었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왕자가 불러들인 몬스터들이 평생 본 몬스터의 숫자보다 더 많았다.

그 정도면 사브만과 바론을 이어주는 숲의 몬스터들을 다 불러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시 몬스터 떼들을 생각하지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부르르 한 번 크게 몸을 떨어 생각을 덜어낸 공작이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근데…… 그 덴타라는 아이 있잖아요. 공작님은 누군지 알고 계세요?”

“덴타? 음, 들어본 이름 같은데.”

조심스러운 소리오닌의 물음에 공작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가 이리저리 뒤섞인 기억을 끄집어낼 때였다. 

“히튼 왕세자의 아들입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네이드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러자 공작과 소리오닌 모두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왕세자의 아들?!”

뭐, 뭐야. 그렇게 대단한 아이였어? 그냥 왕족이 아니잖아! 세리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정말로 다시 못 볼 걸 알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입안이 씁쓸해졌다. 

공작 또한 왕세자의 아들이란 소리를 듣고 어렴풋이 뭔가가 떠올랐다. 

“그래! 맞아, 그 쌍둥이!”

“네? 쌍둥이요?”

공작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신이 아직 디그롬에 오기 전이었을 때였다. 사브만에 급하게 조문 내용이 담긴 전령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 장례식이 아마 히튼의 쌍둥이 딸이라고 들었다.

“응, 그래.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그렇게 어린 아이가 죽은 것도 특이했고, 거기다 쌍둥이 중에 한 명이 죽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었어.”

“그럼…… 그 쌍둥이 중 한 명이……?”

“음, 그 쌍둥이 중 한 명의 이름이 덴타였어. 죽은 아이가 베네루아? 이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앉아 있는 세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근데 왜……. 어디가 아팠나요?”

“아냐, 그런 건 아니었고…….”

시녀에게 차를 부탁한 공작이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고였다고 들었어.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한동안 사브만 하면 그 쌍둥이 얘기들뿐이었지.”

“그랬군요.”

“바론도 마찬가지지만, 쌍둥이 자체가 흔하게 태어나는 일이 아니지 않나? 그 때문에 사브만 왕족 중에서도 예쁨을 많이 받았다 하더군. 거기다 동생인 베네루아는 대단한 마법 능력을 가졌다고.”

시간이 꽤 흐른 뒤지만 꽤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정리한 공작이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베네루아가 마법을 써 본다고 어른들 없이 오빠인 덴타와 둘이서만 숲으로 나갔었어. 한낮이었고 주위에는 위험한 몬스터들도 없다니까 소풍 가는 마음으로 신나서 갔을 거야.”

숲이라면 아이들끼리만 가기에는 위험했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이었지만 소리오닌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다행히 몬스터도 만나지 않았고, 길도 잃지 않았고. 재밌는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는데…….”

“혹시 그 벼랑에서 일어난 일입니까?”

“맞아, 벼랑에서 떨어졌지.”

네이드 또한 뭔가 들은 게 있는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소리오닌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벼랑? 벼랑에서 떨어져? 숲의 대부분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있는 곳은 평지였다.

디그롬에 돌아올 때도 언덕을 지난다거나 고지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벼랑이라뇨? 그 근처에 벼랑이 있었어요?”

“그래 그 근처에는 벼랑이 있을만한 지형은 아니었어.”

“그럼……?”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지, 숲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특별한 예고도 없었다. 전조 증상이라거나 큰 소리가 났던 것도 아니었다. 숲을 나설 때만 해도 길이었던 곳이 돌아올 때는 크게 갈라져 버렸다.

“숲이 움직인다고요?”

“움직인다고 하기에는 딱 맞지 않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

“하필이면 둘이 서 있던 길이 갈라지면서 동생 쪽의 땅이 깊이 가라앉았어.”

소리오닌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럼 덴타라는 아이는 자신의 동생이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다 봤단 말이야? 

“갑작스러운 일이고, 어른들도 같이 간 게 아니라 어린 남자애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물론 어른들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틈이었지만.”

“그, 그래서…….”

“결국 동생의 시체는 못 찾았다고 하더군. 동생이 떨어지는 걸 본 아이는 성으로 돌아와 얘기를 전하고 며칠 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해. 그 사이에 장례는 끝나고, 그 뒤로 남자아이는 전혀 말을 하지 못했다고 들었어.”

공작의 말이 끝났다. 소리오닌은 전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냥 아래로 떨어져 버리다니. 

“지금도 가끔 숲에서 새로운 벼랑이 생긴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벼랑에서 인명사고가 났던 건 그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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