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아, 이런, 내가 손님을 모셔놓고……! 미안해요. 나도 가트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거라, 당장 급한 일에 대해 말해 버렸지 뭡니까?”
“괜찮아요. 천천히 말씀 나누세요.”
“사실 내 아들이 가트처럼 마법에 소질이 있답니다. 그래서 이번 원정은 가트와 함께 일을 하러 보냈죠. 워낙 낙후되어 있는 동네를 손봐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소리오닌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히튼이 신나게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말이 국가 재정비일 뿐 자세히 살펴보면 아들의 마법 수행을 위한 원정이었던 것 같았다.
“아드님도 마법 능력이 뛰어난가 봐요, 가트 님처럼. 가트 님이 마법으로는 알아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습니다! 가트의 마법능력은 사브만에 엄청난 축복이지요! 아마,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능력입니다! 제 아들도 가트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니까요!”
“흐음. 그렇군요. 가트 왕자님 대단하셨네요.”
히튼은 옆에 앉아 있는 가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녀석 덕분에 어딜 가도 무시 받던 자신들이 이제는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덴타 역시 가트만큼 성장해 주면 좋겠지만, 히튼은 알 수 있었다. 가트의 마법 능력은 전무후무할 것이라는 걸.
기분이 좋아 보이는 히튼을 힐끗 쳐다본 소리오닌은 짙은 미소를 짓고 가트의 앞에 고기반찬을 놓았다.
“많이 먹어, 야옹아.”
이라고 말하는 걸 잊지 않고.
***
“응? 소리오닌 양?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갑작스럽게 소리오닌이 내뱉은 말에 히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가트 역시 아주 조금이긴 했지만, ‘야옹이’라는 단어에 움찔거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바뀐 식당 분위기에 과장되게 깜짝 놀란 눈을 하고 말했다.
“어머? 히튼 님, 모르셨어요? 가트 님 사실은 야오…… 읍!”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가트가 소리오닌의 입을 턱! 하니 막아 버렸다. 그 때문에 말하려던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소리오닌은 가트의 손에 막혀 있는 입술을 한껏 끌어올려 웃음 지었다.
역시 야옹이는 금기어였어. 너만 내 약점을 쥐고 있는 줄 알았지?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야옹이! 난데없이 나온 이름에 놀란 듯한 가트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소리오닌은 한껏 눈을 휘며 웃어 주었다.
일부러 그랬군. 그녀의 반짝이는 초록 눈동자를 본 가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하고 소리오닌을 일으킨 다음 데리고 순식간에 식당에서 사라졌다.
“……야옹이?”
묘한 어감을 가진 단어의 뜻이 뭔가 히튼은 궁금해 했지만, 해답을 알고 있는 그 둘은 점심 식사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
식당에 올 때처럼, 또다시 가트의 손에 딸려 나온 소리오닌은 아까와는 달리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당황하는 걸 처음 봐서 일까, 두고두고 놀려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왜? 야옹이란 말을 하자마자 사람을 이렇게 끌고 와?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비밀이었나 봐?”
“……하!”
깜찍하게도 협박을 하려는 건가? 가트는 그녀의 귀여운 도발에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입을 꾹 다문 그를 보던 소리오닌은 인심 쓰듯 말했다.
“좋아, 나도 야옹이에 대한 건 사람들한테 비밀로 해 줄게. 그럼 우리 쌤쌤이다? 나 이제 바론으로 가도 되지?”
‘쌤쌤’? 희한한 단어를 쓰며 억지협상을 한 그녀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좋아! 이렇게 간단한걸! 소리오닌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 당장이라도 바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당당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가트는 어느새 다시 여유로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말해.”
뒤통수에 들리는 그의 대답. 소리오닌이 가던 발을 멈춘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트를 쳐다봤다.
“……뭐?”
“말하라고. 큰형님이든, 작은형님이든. 원한다면 정원에서 소리쳐도 좋아.”
“지, 진짜야?”
“물론.”
이게 아닌데? 야옹이라는 말만 내뱉었을 뿐인데, 식사 도중에 끌고 나올 정도로 알려지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야옹이로 변하는 거 비밀 아니었어?”
“알려지면 귀찮긴 하지. 근데 엄청나게 큰 비밀은 아니야. 맘껏 말해도 돼.”
“……거짓말!”
눈에 띄게 낙담하는 소리오닌을 본 가트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진짜야. 내가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오히려 다들 더 좋아할걸?”
“으으…….”
저렇게 나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당당히 나갈걸! 저러니까 말해 버릴 의욕도 꺾이네……. 아까와 달리 침울해진 소리오닌이 가트를 한번 째려본 뒤에 다시 등을 돌렸다. 가트는 몇 걸음 만에 소리오닌을 앞질러 그녀 앞을 가로막고 섰다.
“비켜.”
소리오닌이 짤막하게 말했다. 어설프게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벼르고 있던 야옹이 작전이 먹히지 않아 지금 그녀는 속상했다.
그런데 쉬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마저 방해하는지. 지금 소리오닌에게 가트의 존재는 숨 쉬는 것만 봐도 밉상일 정도였다.
“놀러가자.”
“뭐? 놀러? 너랑? 내가 미쳤어?”
“며칠 동안 얼굴도 못 봤잖아.”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씩씩대는 소리오닌을 멀뚱히 쳐다보던 가트는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야!”
이제는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 소리오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고함에 가트가 잠깐 놀란 눈을 했다.
“나랑 놀기 싫으면 야옹이랑 놀아준다고 생각해. 야옹이로 변할까?”
“무슨, 됐어! 이제 와서 야옹이로 변해봤자야.”
“이제 2주 되기 전까지 시간도 별로 없잖아.”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가트는 소리오닌의 눈치를 살살 보며, 지금까지의 그 답지 않게 저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래도 피식, 저래도 피식. 비웃음만으로 그녀를 열 받게 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눈앞의 그는 바론에서 조용히 옆에 있어 주던 야옹이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가트에게서 보이는 야옹이의 흔적들에 소리오닌의 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디 갈 건데?”
소리오닌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네가 좋아하는 곳.”
다행히 이번에는 그녀가 도망갈 것 같지 않았다. 천천히 손에서 소리오닌의 팔뚝을 놓은 뒤, 가트는 따라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둘 사이 별 말은 없었지만, 소리오닌은 알 수 있었다. 가트가 자신의 걸음 속도를 맞춰서 걷고 있다는 걸. 그녀가 일부러 천천히 걷고 있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별 말이 없었다.
가트가 그냥 야옹이로 남아 있었으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을 텐데. 귀여웠던 야옹이가 갑자기 덩치가 산만한 청년으로 변하다니……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아까 내 눈치 볼 때는 좀 귀여웠지만. 소리오닌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
“응?”
“다 왔어.”
가트는 넓은 들판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을 유심히 쳐다보자, 그곳에는 커다란 밭이 펼쳐져 있었다.
“뭐, 뭐야…… 웬 밭?”
“너 밭 좋아하잖아. 바론에 있을 때 매일 밭에서 놀지 않았어?”
“그, 그건!”
가트는 정말 순수한 호의로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것 같았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내가 놀려고 밭에 나갔겠냐! 먹을 게 없으니까 밭에서 풀이라도 뽑아서 먹으려고 한 거지!
소리오닌은 가트의 어이없는 행보에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밭에 있을 때 유독 야옹이를 많이 만나긴 했지만…… 어쨌든! 하고 많은 것 중에 어떻게 밭을 좋아할 거라 생각할 수가 있어?
하지만 마음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과는 다르게 소리오닌의 발걸음은 빠른 속도로 밭을 향하고 있었다.
“어, 와아! 이거 못 보던 건데? 오이랑 비슷하게 생겼네?”
“음? 오이?”
“그런 게 있어. 음흠!”
일렬로 정리되어 있는 작물들을 보는 소리오닌의 눈이 반짝였다. 가트는 그녀의 옆에 찰싹 붙어서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행동이 꼭 바론에 있을 때 곁에 있어 주던 야옹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 거다. 그가 사브만의 왕자가 아니라, 처음 바론에 왔을 때 유일하게 자신과 함께해준 야옹이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나 잘했어?”
“뭐?”
“내가 소리오닌이 좋아하는 곳에 데려왔잖아.”
가트는 자신이 밭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 어이없는 착각을 고쳐줄까 싶기도 했지만,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처음 보는 채소들을 유심히 보고 있을 때였다.
가트의 은색 머리카락이 소리오닌의 얼굴로 바짝 다가왔다. 갑자기 눈앞이 은빛으로 빛나는 것 같아, 그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왜, 왜 그래?”
“쓰다듬어 줘.”
무슨? 소리오닌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그녀의 당황한 듯한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가트는 계속 머리를 들이밀었다.
얘 왜 이래! 지금 그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를 야옹이로 생각하기로 했잖아. 빨리.”
“내, 내가 언제!”
“어쨌든 빨리 칭찬해.”
막무가내로 우기는 가트 때문에, 소리오닌은 어쩔 수 없이 성의 없는 손짓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툭툭 쓸어내렸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가트의 붉은 눈이 크게 휘었다.
사그락거리는 머리카락의 느낌은 좋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소리오닌이 물었다.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살갑게 굴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엄청 으르렁거렸거든?”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말에 가트는 역시, 하는 표정으로 웃음 지었다. 다른 여자들과는 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 정말 다른 차원에서 온 건가? 뭐, 상관없지만.
“이제 시간이 별로 안 남았잖아. 갑자기 그 생각이 드니까…… 잘 지내보자, 하게 된 거야.”
“음…… 그래, 있는 동안은 싸우지 말고 잘 지내지 뭐.”
저쪽에서 먼저 좋게 나오는데 혼자 화낼 수 없는 소리오닌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있는 동안에 잘 지내다,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겠지.
단순한 그녀의 대답에 가트는 다시 한번 미소를 띄웠다.
“그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
우리가 결혼할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