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00)

053.

위나는 하얀 손가락으로 시녀의 이마를 꾸욱, 밀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시녀의 태도에 화가 난 위나가, 이번에는 시녀의 뺨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죄송할 짓 하지 말고 얼른 에리한 님을 만나게 해주면 되잖아?”

위나의 앞에 있는 시녀는 덜덜 떨면서 눈을 꼭 감았다. 지금은 톡톡, 작은 소리를 내며 뺨에 닿은 손이 언제 세차게 내리칠지 몰라 더 무서웠다. 

결국 짧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위나가 시녀의 뺨을 올려붙였다. 뺨을 맞은 시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 소리에 놀란 시녀장이 복도로 달려 나왔다.

“위, 위나 자하만 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왕자님이 아시면 큰일 나실 거예요!”

“뭐? 너도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거야?”

달려 나온 시녀장이 위나를 말렸다. 위나는 나이가 지긋한 시녀장에게도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게 무슨 행패인지……. 궁에 있던 시종들과 시녀들은 그저 그녀가 얼른 가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때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무슨 짓입니까.”

2층에서 로비를 내려다보는 에리한의 눈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의 등장에 하얗게 질려있던 시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에리한을 보고 뜨끔했던 위나는 곧 표정을 바꾸며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에리한 님, 돌아오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왔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순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위나의 행동에 짧게 한숨을 쉰 에리한이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위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1층에서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종들에게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을 잊지 않고.

“자하만 양.”

“편하게 위나라고 불러 주세요.”

아까 그 장면을 들키고도 사르르 웃어 보이는 뻔뻔한 태도에 에리한은 입술을 더 굳게 다물었다. 지금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인 위나 자하만.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끝까지 무시하고 싶었지만, 곱게 떠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최대한 정중하게 경고를 하기 위해 응접실로 데려온 것이었다. 

“자하만 양. 저는 분명히 시종들에게 오늘 쉬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자신의 부탁에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에리한 때문에 살짝 빈정이 상했지만, 위나는 다시 입술을 끌어올려 환하게 웃었다.

“에리한 님, 무도회가 끝난 후로 얼굴을 뵌 지 오래 되어서……. 너무 반가워서 그랬답니다!”

“저는 자하만 양의 방문이 반갑지 않습니다.”

“……네?”

칼같이 떨어지는 에리한의 대답에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조금 전 왕비가 자신에게 보인 태도와 정반대인 그의 태도. 나와 결혼을 하기 위해 서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똑똑,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말없이 앉아만 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녀장이 들어왔다.

“왕자님. 차는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까 일 때문인지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시녀장이 괘씸했지만, 에리한의 앞이었다. 울컥하는 성질을 가라앉힌 위나가 답했다.

“나는 마사만 차로 부탁해.”

당연하게 하대하는 그녀를 본 에리한은 짧은 비웃음을 내뱉은 뒤, 시녀장을 바라봤다.

“아니. 자하만 양은 이제 곧 나갈 거니 차는 필요 없네.”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알겠다는 뜻을 전한 시녀장은 곧바로 응접실을 나갔다. 위나는 당황하여 얼른 에리한을 보았다.

“에, 에리한 님?”

“자하만 양이 어떤 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찾아와 이런 소란을 일으킨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제가 드리고픈 말씀은, 앞으로 이런 식으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그렇게 잔인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으세요?”

위나의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겉으로만 보면 한없이 안 되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도, 에리한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남은 말을 마저 이어갔다.

“그리고 제 시녀들에게 보였던 그런 폭력적인 행동. 상당히 불쾌합니다.”

“포, 폭력이라니요. 그 시녀가 너무 예의가 없기에 교육을 시킨 것뿐입니다.”

“제 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행동한다는 건 저에게도 그럴 수 있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이 이상 무례한 행동을 하신다면 저 역시도 자하만 양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겠습니다.”

“뭐라고요?”

너무나 어이없는 말에 흐를 것 같았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그 대신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떻게 시녀와 에리한이 같을 수 있는가!

하지만 에리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앞뒤 분간 못하는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커지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라앉혔다.

“오늘은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피곤하셔서 실언하신 거라 생각하겠어요. 그럼.”

부들거리는 몸을 숨기지 못한 위나는 빠르게 일어나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에리한은 다시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온 위나는 로비에 서 있는 시녀장을 발견했다. 손가락을 까딱해, 그녀를 불러 세운 위나는 섬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음번에 왔을 때도 저것들이 오늘이랑 똑같은 태도로 나를 대한다면, 너부터 가만두지 않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위나는 시녀장을 노려본 후에야, 밖으로 향했다. 에리한 궁의 정문에는 자하만 백작이 마차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

“오, 위나! 생각보다 빨리 나왔구나. 혹시 왕자님을 뵙지 못한 거냐?”

“아, 아닙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앞이라지만 위나는 에리한에게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다는 사실은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에리한 님이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잠깐 인사만 하고 나왔습니다. 에리한 님은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하셨지만, 제가 어찌 더 피곤하게 할 수 있겠어요?”

“그렇군! 역시 내 딸이다. 이렇게 배려해 주는 마음씨가 얼마나 고운지!”

위나의 입을 통해 나오는 새빨간 거짓말을 철썩 같이 믿은 백작은 껄껄,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앞으로 온 국민을 돌보는 중요한 자리에 올라갈 텐데, 이정도의 배려는 당연한 거죠.”

그녀 역시 핑크빛 입술을 올려 웃었다.

***

가트의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약점을 잡으면 뭐하나, 협상할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데. 답답한 마음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소리오닌은 오늘은 기필코 사브만을 떠나고 말 거라 다짐했다.

나는 분명히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 싶었던 거야. 근데 그 야옹이 자식이 숨은 거라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을 나섰다. 

“소리오닌.”

“?”

방금 속으로 엄청 욕하고 있었는데 한 발자국을 떼자마자, 며칠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던 가트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뭐, 뭐에요. 대체 그동안 어디 갔던 거예요?”

“나? 왜? 혹시 보고 싶었어?”

그가 시원하게 웃으며 소리오닌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시야를 가득 메운 새빨간 눈동자에 깜짝 놀란 그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때문에 방문에 딱 붙어 있게 된 소리오닌의 손을 꼭 잡은 가트가 발걸음을 크게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손 좀 놔요!”

“싫어.”

“어디 가는 데요!”

“큰형님 만나러.”

아, 물론 소리오닌도 히튼을 만나러 갈 생각이긴 했다. 오늘 사브만을 떠날 거라는 말을 전하러. 근데 옆에 이 남자가 갑자기 나타난 바람에 말할 기회가 사라졌다.

“알겠으니까, 이 팔 좀 놓고 가라니까요?”

“싫다고 말했잖아.”

“으으. 진짜! 그리고 언제까지 반말할 건데요?”

“계속, 그럼 너도 해. 반말.”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가트의 대답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진짜 한다? 나중에 뭐라고 하기 없기?”

“응. 반말하니까 좋네.”

결국 소리오닌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말을 놓기 시작했다. 가트는 예전에 야옹이한테 했던 것처럼 편하게 대해 주는 쪽이 더 좋기에 그녀의 반말이 반가웠다. 

막상 말을 놓는다고 해도 둘이서 뭔가 다정하게 말할 사이는 아니었기에, 결국 별 말없이 식당에 도착했다. 

“소리오닌 양, 어서 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래요. 손님을 모셔놓고 바쁜 일 때문에 제대로 대접을 못해서 말이죠. 사과의 의미로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면 어떨까 해서 불렀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리오닌은 가트의 팔을 쳐내고 얼른 히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순식간에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간 그녀의 온기를 느낀 가트도 소리오닌의 앞자리에 앉았다. 

“저, 다른 분들은?”

“아. 타만은 원정훈련을 갔고, 카민은 연구실에 있습니다. 뭔가를 발견했다는데, 불러도 대답을 안 하기에 그냥 혼자 왔습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사브만의 형제들은 각자의 개성이 정말 뛰어난 편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은발과, 붉은 눈뿐이었다. 이렇게 안 닮는 것도 힘든 것 같은데. 소리오닌은 속으로만 웃음 짓고 히튼을 따라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가트. 덴타와 함께 다녀온 곳은 어땠나?”

“예상대로였습니다. 아직 손 봐야 할 곳이 많았습니다.”

“흐음. 거 참, 문제야. 사브만에 그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히튼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걱정이 많아 보이는 큰형님을 보던 가트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덴타가 이제는 곧잘 따라오더군요. 덕분에 예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오, 그래? 덴타가 열심히 노력했나 보군! 허허.”

아들의 실력이 좋아졌다는 말에, 히튼은 금세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웃기 시작했다. 둘의 대화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는 소리오닌만은 그저 조용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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