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00)

055.

세리는 소리오닌의 방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소리오닌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방은 휑하게 비어 있었다.

“어디 나가셨나? 같이 점심 먹자고 하시고선!”

방 안을 몇 번 둘러보던 세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발걸음을 돌렸다. 소리오닌 없이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건 엄청 부담스러웠다.

물론 사브만에서는 세리 역시 손님으로 대접해 주고 있었지만, 자신은 엄연히 따지자면 손님의 시녀였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 일하는 사람보다 낮은 직급일 수도 있는데, 뻔뻔하게 밥을 달라고 찾아갈 수 없었다. 휴, 얼른 소리오닌 님 을 찾아야지. 오늘따라 아침까지 굶어 텅텅 비어 있는 배를 쓰다듬으며 세리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빠른 걸음으로 손님방이 있는 건물을 나와,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건물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세리의 정면에서 은발 소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 덴타 님이다!”

해열제를 받은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못 봤는데, 오늘 딱 마주치다니 괜히 반가운 마음에 세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덴타 역시 세리를 발견했는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먼저 빠른 걸음으로 세리의 앞으로 간 덴타가 허공에 글을 썼다.

[안녕.]

“안녕하세요, 덴타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리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세리의 인사를 받은 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덴타 님. 얼른 식당으로 가셔서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오늘은 하실 일이 많으십니다.”

덴타의 뒤에 서있던 시종 중 한 명이 그에게 말했다. 그의 일정을 보면 이런 식으로 복도에 서서 잠깐 얘기할만한 여유도 없었다.

덴타는 시종의 얘기에 가지런한 눈썹을 찌푸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세리에게 시종이 싸늘한 눈초리를 보냈다. 시종의 서슬 퍼런 눈빛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세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덴타 님. 인사를 드리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세리는 여전히 굳어 있는 시종의 얼굴을 쳐다보고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려 뒷걸음질 쳤다. 만나자마자 가 버리려는 그녀의 행동에 덴타는 자기도 모르게 세리의 손목을 잡았다. 

“!”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손목이 잡힌 세리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던 덴타의 시종들까지 모두 놀란 눈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놀란 건 덴타 자신이었다. 소년은 놀란 토끼눈을 하고도 세리가 가 버릴까 봐 급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밥은?]

다짜고짜 밥이라니…… 밥? 세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점심은 먹었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덴타의 뒤에서 시종이 다시 한번 설명해줬다. 시종의 말이 맞는지 소년은 눈을 빛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아, 음…….”

점심은커녕 아침도 먹지 않았지만, 보아하니 안 먹었다고 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세리는 조심스레 덴타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며 말했다.

“네. 방금 식사를 마쳤답니다. 덴타 님도 맛있게 드세요.”

싱긋 웃어 보인 세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자극 받은 위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꼬르르륵.

순간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배부르다고 하자마자, 무슨 일이야! 배에서 나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세리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건 점심을 안 먹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꼬르르륵.

미치겠네. 세리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웬만하면 모른척 해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웃음을 참는 듯 덴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년의 뒤에 서있던 시종들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입술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자, 같이 점심 먹어.]

“아, 아닙니다!”

덴타는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세리를 앞장서갔다. 이정도면 따라올 만도 한데……. 자신이 하는 말에 자꾸 아니라고 말하는 입이 얄미워서 덴타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걸 본 시종은 작게 한숨을 쉬고 세리에게 말했다.

“같이 점심을 먹도록 하세요.”

“네……?”

“덴타 님이 원하시니 점심을 함께 하셔야겠습니다.”

시종의 말은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세리는 사브만에 와서 자신의 눈치가 다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윗사람의 기분이 상하기 전에 알아서 착착 눈치껏 행동했을 텐데.

어차피 가게 될 거 괜히 몇 번이나 거절해 버렸다. 이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을까, 입술을 깨물며 세리는 덴타의 뒤를 재빨리 따라가기 시작했다. 

소년이 안내한 곳은 소리오닌과 평소에 같이 먹던 커다란 식당이 아니었다. 방의 중앙에는 6인용 테이블이 있었고, 바로 옆에서 직접 요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담한 부엌 같은 느낌의 식당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덴타가 세리를 올려다보며 옆 의자를 가리켰다. 옆에 앉아도 되나 싶어 다른 시종의 눈치를 살피자, 시종은 빨리 앉으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 의자를 빼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의자까지 빼 주시다니! 그들의 과한 친절에 얼굴에 빨개진 세리는 얼른 자리에 앉아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세리까지 착석하는 걸 본 요리사는 준비해놨던 점심 식사를 바로 내보냈다.

조용한 식사 시간. 평소 소리오닌과 재잘거리면서 식사를 했던 세리는 이 고요한 분위기가 숨 막혔다. 덕분에 배가 고팠던 것도 깜빡하고 눈앞의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맛없어?]

세리가 먹는 걸 유심히 쳐다보던 덴타가 테이블에 글씨를 썼다. 고개를 숙인 채 기계적으로 포크를 놀리던 세리는 그 글씨를 보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에요! 맛있어요!”

[그럼, 자리가 불편해?]

다시 허공에 글씨가 쓰였다. 세리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좋은 의자인데 불편할 리가. 너무 과분한 대접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세리가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았다. 기어들어가는 세리의 목소리를 들은 덴타는 자상한 눈빛으로 세리를 쳐다보았다.

[너를 보면 내 여동생이 생각나서 잘해 주고 싶어.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거든.]

천천히 나타나는 글자들을 다 읽어 내린 세리는 그제야 덴타의 과한 친절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쌍둥이 동생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에 대한 친근함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이 소년과 쌍둥이라니. 그럼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애가 있다는 건데. 정말 예쁘겠다. 남자인 덴타도 이렇게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그렇군요! 덴타 님과 쌍둥이라니, 정말 예쁘실 거 같아요.”

세리가 말하는 진심이 담긴 칭찬에 덴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덴타의 말에 부담이 조금 없어진 세리는 아까보다 좀 더 편하게 식사를 했다.

자신의 부족한 글 공부 실력으로 덴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의 글씨를 꼼꼼히 봐야 했기 때문에, 세리는 소년의 얼굴에 집중했다. 그래서 덴타의 뒤에 서 있는 시종들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굳어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맛있었어?]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나온 차와 과일을 먹으며, 덴타가 물어왔다. 

“네, 정말 맛있었어요. 이렇게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세리가 앉은 채로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에 마주 보고 웃어준 덴타가 뭔가를 쓰려고 하다가 계속 망설여지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본 세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덴타를 쳐다봤다.

세리의 궁금함이 담긴 눈빛에 덴타는 볼을 슬쩍 긁더니, 조심히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의 긴장감이 글씨에도 고스란히 담겨, 파르르 떨리며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점심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세리는 그 글씨를 읽고 깜짝 놀랐다. 세리도 놀랐지만 주위에 있던 시종들과 요리사도 놀란 듯, 모두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세리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덴타는 고개를 기울여 다시 묻는 듯한 표정을 했다. 

“아, 저……. 음…….”

어, 어쩌지? 오늘 하루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 저렇게 물어본대도 세리는 당장 답할 수 없었다. 우선 소리오닌의 허락이 있어야했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은 소리오닌의 컨디션이 좋아지면 바론으로 떠날 거라, 당장 내일이라도 사브만에 없을 수도 있었다.

곤란해 보이는 세리의 모습에 덴타가 얼른 글씨를 덧붙였다. 

[혹시 너의 주인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야?]

“그,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점점 작아지는 세리의 목소리에 덴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소년의 표정을 살핀 세리가 침을 꿀꺽 삼킨 뒤 얘기했다.

“그럼, 우선 내일 점심 식사는 덴타 님과 할 수 있게 잘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나머지 점심 식사도 꼭 물어볼게요!”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세리가 덴타의 기분을 살폈다. 세리의 말이 아주 맘에 들지는 않아 보였지만, 내일도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에 어느 정도 기분이 풀렸는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 여동생이랑 비슷한 또래라고 이렇게 살뜰히 챙겨주시다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세리가 덴타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덴타 님, 장로님이 기다리시겠습니다. 어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복도에서 덴타를 재촉하던 시종이 이번에도 뒤에서 소년에게 말했다. 시종의 재촉에 덴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세리도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세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덴타가 시종들을 데리고 식당을 벗어났다.

소년의 반짝이는 은발이 자신의 눈에서 사라지자, 세리는 긴장으로 잔뜩 올라가 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덴타가 썼던 글씨들을 혹시나 잘못 읽을까 봐 집중해서 봤더니 눈도 뻑뻑해져 왔다. 세리가 작은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있을 때였다. 

“거기, 여자애. 너 몇 살이냐?”

“네?”

뒤에 서 있던 요리사가 대뜸 세리를 불렀다. 

“너 말이다. 몇 살이냐?”

“17살입니다.”

“흐음. 그렇구만. 확실히 덴타 님과 나이가 같군.”

요리사의 혼잣말을 들은 세리는 방금 헤어진 소년을 떠올렸다. 정말 같은 나이였구나. 정말로 나이만 궁금했던 것이었는지, 그 뒤로 딱히 말이 없는 요리사에게 인사를 하고 세리는 식당을 벗어났다. 

통통, 소리가 날 것 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세리의 뒷모습을 본 요리사는 어두운 얼굴로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직도 덴타 님은 베네루아 님의 일을 잊지 못하시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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