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00)

051.

도이첸은 잠시 말을 끊고, 양 손을 맞잡았다. 직접 전하기는 어렵지만 현실을 알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네가 보는 할아버지, 즉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신 분이셨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일어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했고.

“…….”

“하지만 그건 우리가 그 분을 보는 시선일 뿐이다. 다른 쪽에서 보는 아버지는 무책임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무능한 왕일뿐이었다.”

“아바마마, 어째서 그런!”

도이첸의 입으로 통해서 담담하게 나오는 말에 에리한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누구보다 사이가 좋았던 부자였는데, 이렇게 적나라한 평가를 맘에 두고 있었던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다. 세간에서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거지. 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정을 듬뿍 받고 자랐고, 그 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소리오닌 양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할 때도 크게 거부감이 없었을 거고.”

“할아버님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래. 하지만 네가 소리오닌 양을 계속 고집하면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마리딘도 어찌 보면 너의 할아버지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 중 한 명이잖나?”

“어마마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게 된 이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바론의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지방 소규모 귀족의 막내딸이었던 어머니가 왕자였던 아버지와 결혼할 수 있었던 건, 할아버지 대에서 혼인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 버린 것에 대한 보상이었단 걸. 

누구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숨길 수도 없는 비밀이었다. 

“그러니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웬만한 각오로 함께하기에는 무척이나 힘든 길일 수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절대 작은 각오로 소리오닌 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너는 우선 왕비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해라.”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바마마 제가 사브만에 갈 수 있도록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에리한이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리오닌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아파왔다. 더군다나 자신이 직접 그녀를 그곳에 놓고 왔다는 게 더욱 더 에리한을 힘들게 했다.

무너지듯 쓰러지는 에리한을 억지로 일으켜 앉힌 왕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뒤 힘주어 얘기했다.

“지금 여기서 네가 해야 할 책임까지 다 놓는다면 너에게 정말 실망할 것이다.”

“그럼 어떡합니까? 두 눈 뜨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지켜만 보라는 겁니까?!”

에리한 또한 악에 받쳐 소리쳤다. 마음 같아선 사브만으로 당장 쳐들어가 그 왕자의 멱살이라도 쥐어 잡고 싶었다. 

“내가, 내가 도와주마.”

“…… 네?”

에리한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눈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올려다 봤다. 

“그러니 너는 왕비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적당히 연기를 하고 있어라.”

“아바마마가 무슨 수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한 아들을 본 도이첸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비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듯이 행동하더니, 도와준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순한 양이 되었다. 

평소에는 능구렁이 같은 놈이, 소리오닌이 관련된 일에는 이토록 알기 쉬운 바보가 되다니. 사랑이라는 건 대단한 것이구만. 

“다 생각이 있으니, 그냥 나를 믿어 주길 바란다.”

“아버님을 못 믿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을까 봐. 그게 걱정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출발해도 늦어 버렸다면 그건 너의 인연이 아닌 것이라 생각해라.”

하, 에리한이 짧게 한숨을 쉬며 도이첸을 쳐다봤다. 이런 말을 하는 아버지를 정말 믿어야 하나 하는 강한 의문이 들어 있는 눈빛이었다. 아들의 불신 가득한 눈빛을 받은 도이첸은 잠시 놀란 눈을 하다가 금세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농담인 걸 눈치 챈 에리한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걱정 말아라, 내 납치를 해서라도 데려다 줄 테니. 아들이 죽고 못 사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그러니 이제는 식사도 제대로 하고. 단식 투쟁은 이제 끝낼 때가 되었지 않니?”

밥 투정을 하는 꼬마 아이를 보는 듯한 도이첸의 말에 에리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귀여운 모습에 다시 한번 크게 웃은 왕은 느긋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문 앞에는 안절부절 못하며 누구라도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모여 있었다. 왕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에리한이 이제 좀 씻은 뒤에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는구나. 피로 회복에 좋은 입욕제 좀 팍팍 쓰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왕의 명령에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왕자를 보좌하느라 정신이 없는 궁을 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도이첸은 당분간 아무도 들이지 않게 했다. 조용한 집무실 안, 푹신한 의자에 한껏 기대앉은 그의 뒤로 소리 없이 네이드가 다가왔다. 

“결국 에리한 님을 돕기로 결심하신 겁니까?”

“음, 내 생각보다 더 꼬여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당연히 에리한이 소리오닌과 고난과 역경을 뛰어넘고 더 단단해져서 올 줄 알았더니……. 이건 뭐, 시작도 전에 끝난 상황이 아닌가?”

그는 집무실 책상을 툭툭 손으로 건드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 그 둘을 방해하려고 왕비가 손을 쓴 건 알겠는데 말이지. 사브만에서 전령의 내용을 한 번 더 꼬았다는 게 영 꺼림칙해.”

“사브만에서요?”

“음, 아무래도 그 쪽에서 장난질하는 놈이 있는 것 같은데. 왜지? 그쪽에서는 에리한이나 소리오닌이나 다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사브만에서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한 정보가 한정적이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제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네. 물론 소리오닌 양도 안전하게 구해 오겠습니다.”

네이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긴 벌써 십 년 가까이나 옆에 있었는데, 이 정도는 별 거 아니겠지. 

“고맙네.”

의자에서 일어난 도이첸이 오랜만에 네이드를 마주 보며 섰다. 평소 도이첸의 뒷모습만 보던 게 습관이 되어 있는 네이드는 그와 직접 눈을 마주치자 놀란 얼굴이 되었다. 물론 눈에 띄지 않는 아주 미미한 변화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도 나지 않았지만. 

“뭘 그리 놀라나? 내 얼굴 잊어버릴까 봐 보여 주는 걸세.”

“…… 잊어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농담으로 건넨 말에도 진지하게 답해온다. 이게 또 나름 귀여워 보였다. 도이첸은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꽈악 쥐었다. 

“그럼, 소리오닌 양을 부탁하네.”

“걱정 마십시오.”

“……자네 역시 몸 조심하고.”

그 말을 끝으로 네이드가 몸을 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곳을 한참 쳐다보던 도이첸은 다시 자리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위나 자하만은 커다란 거울을 보며 입술 색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미 앞서 드레스만 다섯 번 넘게 갈아입은 그녀의 행동에,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위나는 점점 더 변덕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 덕에 일주일을 버티는 시종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똑똑, 

세 번째로 입술 색을 고쳤을 때였다. 그녀의 방문이 열리며, 그녀의 아버지인 자하만 백작이 들어왔다. 

“위나.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느냐?”

“아뇨, 아버님. 오늘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신가요?”

마지막으로 발랐던 핑크색 립스틱으로 결정한 위나는 매끄럽게 빛나는 입술을 끌어올리며 답했다. 

“왕비님께서 지금 너를 찾는다는구나. 소식을 듣자하니, 에리한 왕자님이 오전에 도착한 것 같아. 이제 슬슬 너와의 혼인을 준비하는 게 아니겠느냐?”

“꺄! 정말요? 에리한 왕자님께서 도착하셨다고 하셨나요?”

“그래, 녀석 참. 그렇게 좋으냐?”

손뼉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는 여식의 모습에, 자하만 백작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걸렸다.

백작의 말에 위나는 볼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둘러 왕비궁으로 향하기 위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려 거울을 봤다.

거울에 비친 그녀는 은은하게 빛나는 은색 실크 옷감에 어깨 쪽은 붉은 장미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위나의 눈에 자신이 무척 촌스럽게 느껴졌다. 거울을 한 번 쳐다본 위나는 옷장 문을 열고 드레스를 다시 고르려고 했다. 

이미 바닥에 가득 쌓인 드레스를 정리하는 것도 힘들 텐데……. 시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또 몇 벌의 드레스를 내팽개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위나가 옷을 다시 고르려 하자 자하만 백작이 서둘러 딸을 말렸다.

“위나! 시간이 없다, 다시 드레스를 입으면 너무 늦을 게야.”

“아버님, 하지만…… 이 드레스는 너무 밋밋해 보이는 것 같아요!”

“괜찮다. 너 자체가 이렇게 화려한데 옷 따위는 상관이 없어.”

“그, 그래도…….”

자하만 백작은 옷장을 유심히 살피려는 위나를 돌려 세웠다. 투정을 부려도 강경하게 나오는 백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마차를 탔지만, 위나는 여전히 드레스에 불만이 가득했다. 

어쩌면 에리한 왕자를 만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더 눈에 띄는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계속 같은 생각만 하고 있는 동안 마차는 어느새 왕비가 있는 궁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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