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00)

050.

“흠, 아무래도 전령의 내용이 바뀐 것 같구만. 에리한은 내가 많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것 같소.”

“네……? 전하가요?”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이첸이 에리한 대신 왕비를 보며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들은 왕비는 크게 웃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어떻게 그런 내용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브만에 감사 선물을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에리한이 다급히 도이첸에게 물었다.

“그럼 아버님이 다쳤다는 건 사실이 아닌 겁니까?”

“그래. 나는 요즘 다친 일도 없고, 아픈 적도 없었다.”

“이럴 수가…….”

에리한의 얼굴에 허탈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거짓을 말하던 사브만 왕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고의적으로 그런 말을 한 걸 텐데, 무슨 이유로?

에리한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무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사브만으로 가야했다. 자신에게 거짓을 말한 왕자가 소리오닌을 어떻게 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참 말이 없던 에리한이 불안한 마음에 다시 사브만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못 들은 전령의 내용 말고, 내가 보낸 전령의 내용을 듣고 싶지 않나?”

“필요 없습니다.”

왕비가 혼란스러워하는 에리한을 지켜보다 천천히 물었지만 에리한은 단칼에 잘랐다. 왕비가 뭐라고 보냈든 소리오닌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소리오닌은 아직 사브만에 있는지, 아니면 진짜 마차로 자신의 뒤를 따라 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왕비와 말장난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아니, 전령 내용을 알아야 할 텐데? 지금 사브만에 다시 가려고 하는 거지? 소리오닌 때문인가?”

“잘 아시는군요. 사브만 측의 질 나쁜 장난 때문에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가 보겠습니다.”

“가 봤자 소용없어.”

왕비의 단호한 대답에 에리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슨 뜻입니까.”

“가 봤자 소용 없다고. 이미 소리오닌은 사브만의 왕자와 결혼을 하기로 되어있거든.”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보낸 전령의 내용이 그거였어. 린셀 대신 소리오닌을 신부로 보낸다는 것. 그러니 소리오닌이 사브만에 남아 있는 이상, 그 쪽에서 신부를 다시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게 왜 린셀을 빼돌렸니?”

뭔가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순간 에리한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몇 십 개가 넘는 함정에 빠져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브만의 왕자도, 눈앞에 있는 자신의 어미도. 모두 자신을 속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은 그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인데. 

절망으로 가득한 에리한의 눈빛에 도이첸은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자신이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에리한이라면 사브만에서 어떻게든 소리오닌을 데리고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워낙 비상한 아이고, 소리오닌을 보는 눈빛 또한 변함이 없어서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브만의 거짓말에 안 그래도 왕비와 신경전을 벌이던 에리한이 더 큰 고비를 맞았다. 이 일을 어쩐다.

사브만에서 그런 거짓말을 해서까지 소리오닌과 에리한을 떨어트려놓은 걸 보면 소리오닌을 신부로 맞이하겠다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둘의 사이를 어떻게 알고 그런 계략을 짠 것인지가 의문이었다.

에리한은 바론으로 돌아오는 내내 애써 참고 있었던 고단함이 갑자기 몰려오는 것 같았다. 

급격히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문고리를 꼭 잡은 에리한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는 소리오닌 님을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사브만으로 가겠습니다.”

“하, 미쳤습니까? 대체 어느 왕자가 이렇게 멋대로 일을 벌인답니까? 벌써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나 성을 비웠습니다.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는 걸 어떻게 겨우 달래 놓은지 아십니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당장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도록 하세요.”

“어마마마.”

“어리광은 거기까지만 하세요.”

왕비가 크게 소리쳤다. 에리한 역시 그녀를 노려보는 눈빛을 감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싸늘해진 공기에 도이첸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한. 우선 궁에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오는 길에 고생이 많았던 것 같구나. 그리고 왕비의 말도 맞다. 너는 바론의 왕자야. 그게 최우선이다.”

“아버님!”

생각지도 못한 왕의 냉정한 말에 에리한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이첸은 엄한 얼굴로 에리한의 질문 따위 받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에리한은 입술만 꾸욱 깨물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쾅! 세게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왕비는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웬일로 자신의 편을 들어준 도이첸을 보며 왕비가 싱긋 웃었다. 

“잘하셨습니다, 전하. 에리한은 조금 있으면 왕위를 이어받게 될 텐데 사소한 것에 휘둘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이제 위나를 불러 둘의 혼인식을 빨리 진행해야겠습니다.”

“혼인은 그렇게 빨리 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순간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왕비가 곧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답했다.

“위나도 곧 성인식입니다. 그 전에 혼인을 하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이에요.  어차피 할 혼인인데 신부가 가장 아름다울 때 해야지요.”

“왕비는 정말로 에리한을 위나와 혼인시킬 겁니까?”

“당연한 걸 왜 물으시나요?”

“에리한의 저런 얼굴을 보는 것이 좋나 물어보는 겁니다.”

도이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질문에, 기분 좋게 휘어져 있던 왕비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욕심 좀 버렸으면 하는 뜻에서 말한 겁니다.”

왕은 날이 잔뜩 서 있는 왕비의 대답에 짧은 한숨을 뱉었다.

“무슨 욕심 말입니까? 욕심은 제가 버릴 게 아니라 전하께서 버리셔야죠.”

“왕비!”

“과거의 자신이 못 한 걸 에리한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게 아닙니까?”

한쪽 입술만 올려 웃은 왕비는 점점 굳어가는 왕의 표정을 보면서도 터져 나오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제가 하는 건 지극히 정상입니다. 전대 전하께서 부리셨던 게 욕심이고, 이기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하시오! 더 이상은 들어주지 않겠습니다.”

“왜요,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아니겠죠. 너무 맞는 말이라 전하께서도 할 말이 없으신 겁니다.”

결국 도이첸은 왕비의 악에 받친 소리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방을 나가 버렸다. 자신을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에 왕비는 더욱 화가 났다.

도이첸의 아버지, 전대 왕은 자신의 어머니와 어린 시절부터 결혼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 전대 왕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 때문에 왕가와의 결혼만 믿고 기다리던 자신의 어머니는 결국 제일 낮은 지위의 귀족과 결혼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원망을 듣고 자란 왕비의 마음에는 점점 왕가에 대한 악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취소된 결혼 대신 자신을 인심 쓰듯 왕비의 자리에 앉혀준 전대 왕의 앞에서 최고점을 찍었다.

언제나 친절하지만 사랑은 없는 남편. 그와 그 부모님을 탐탁지 않게 보는 자신. 이런 자신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과 사이가 좋을 리 없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풀 수조차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권력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힘. 손가락 하나로도 사람의 목숨을 움직일 수 있는 이 희열을 절대 포기할 수 없지. 

“거기.”

“네, 왕비마마.”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장이 그녀의 부름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위나를 불러 와.”

“네. 알겠습니다. 왕비님의 궁으로 모실까요?”

“그래, 그리고 재단사도.”

“네.”

왕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시녀장이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

엉망진창인 상태로 돌아온 에리한을 본 시종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그를 따라 방으로 올라왔다.

“와, 왕자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혹시 어디 다치신 건 아니시죠?”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우선 좀 씻으시겠습니까?”

옆에서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들도 다 귀찮아진 에리한은 모두 물러가라고 한 뒤, 커다란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전령의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 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자신의 어리석음에 후회해봤자 무턱대고 사브만으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며칠 밤 잠도 못 자고 달려오는 바람에 머리는 깨질듯이 아프고, 온몸은 휴식을 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도저히 눈이 감기지 않았다. 

소리오닌은 알고 있을까. 사브만에서 그녀와 자신을 이렇게 떨어트려 놓은 이유를? 

똑똑.

에리한이 이제는 멍해지기 시작한 머리를 붙잡고 있을 때였다. 그의 방문을 열고 도이첸이 들어왔다.

“아직도 그 상태 그대로인거냐.”

“아, 아바마마!”

에리한은 재빨리 일어나 흐트러진 의복과 머리를 수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은 그의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응접실로 가시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정리하고 찾아가겠습니다.”

“괜찮다. 편하게 얘기하러 왔는데, 뭘. 그냥 앉아라.”

“네.”

옆에 앉아만 있어도 아들의 절망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도이첸은 에리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달려왔겠지. 수척해진 모습에 왕은 맘이 아팠다.

“소리오닌 양이 그렇게 좋으냐?”

“……네.”

“그 아이는 공녀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속국인 초크센 사람이다. 너만 좋다고 해서 다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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