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위나. 내리자꾸나. 왕비님이 기다리시겠어.”
“네, 네!”
자하만 백작과 위나는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갔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왕비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시종이 그들을 안내하고 응접실의 문을 닫았다. 저번에 왔을 때와 또 바뀐 응접실의 장식품들을 보던 위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 왕비님께서는 참으로 미적 감각이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어쩜 이렇게 매번 아름다운 것들로만 채워 놓으셨을까요?”
“하하, 왕비님은 정말 심미안이 뛰어나시지. 나도 볼 때마다 놀란단다.”
“저도 왕비님께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나중에 비교되지 않게요.”
위나는 자신이 왕비가 되었을 때 지금의 마리딘 왕비에게 비교당하지 않도록 더더욱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왕비가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왕비님!”
백작과 위나는 벌떡 일어나 왕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에 손을 들어 답한 왕비는 제일 화려한 소파에 앉았다.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오늘도 화려한 왕비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붉은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그보다 더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위나, 오늘도 예쁘구나.”
“가, 감사합니다. 왕비마마도 언제나 아름다우십니다.”
오랜만에 만난 왕비의 분위기에 압도된 위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아, 에리한이 오늘 아침 돌아왔다. 이따 만나보고 가렴.”
“네. 무사히 돌아오셨나요?”
“그래.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네에.”
위나는 사실 에리한의 안부보다 더 궁금한 것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 그 얘기를 꺼내도 되나 하는 마음에,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왕비님. 근데 그 무도회에서의 여자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번에 같이 떠났다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역시! 위나는 옆에 있던 백작이 꺼낸 말에 주먹을 꾹 쥐었다. 제일 궁금했던 것을 대신 말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녀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아, 소리오닌. 그 여자애 말입니까.”
“네, 네. 초크센에서 끌고 온 그 계집애 말입니다! 그 때문에 속 썩은 것만 생각하면! ……흠, 제대로 해결이 된 겁니까?”
“백작께서 많이 속을 많이 끓이셨나 봅니다.”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치를 떠는 백작의 모습을 본 왕비가 대뜸 몸을 돌려 위나의 손등을 슥 쓸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왕비의 차가운 손에 위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위나, 너도 속이 많이 상했지?”
“네? 사실…….”
상냥하게 물어보는 왕비에게 답을 하는 위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슬퍼서 나는 눈물이 아닌, 분함에서 오는 눈물이었다. 하지만 자하만 백작의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슬픈 눈물이었다.
자하만 백작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위나의 어깨를 감싸며,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얼마나 곱게 키웠는데, 어디서 나타난 질 떨어지는 계집애 때문에 그 중요한 무도회에서 위나가 망신당한 걸 생각하면……! 자면서도 몇 번이나 벌떡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아, 아버님.”
“그러니 왕비님께서 제대로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에 관련된 일이라 그런 걸까, 백작은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행동을 했다. 왕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역정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위나가 옆에서 그를 말렸지만 백작의 입은 닫히지 않았다.
“왕자님도 그렇습니다! 어디서 그런 덜떨어진 것과 같이 다니실 생각을 했는지. 이게 다 전대 왕이 잘못 버릇을 들인…….”
“그만.”
왕비의 말이 날카롭게 응접실을 울렸다.
헙!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갔다 싶은 발언에 백작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에리한이 돌아왔다는 좋은 소식을 듣고 왔는데, 혼인에 대한 말도 꺼내기 전에 쫓겨나게 생겼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앞으로 이토록 지나친 발언을 듣고 넘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네네!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속이 상해서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그래요. 위나를 생각하는 백작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당히 하셔야죠. 듣는 귀가 많이 있습니다.”
“무, 물론입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위나는 아버지가 망쳐 놓은 분위기에 화가 나 눈썹을 구겼다. 아직 왕비에게서 그 계집애에 대한 대답도 못 들었는데!
“소리오닌 양은 사브만의 왕자와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네?”
난데없는 왕비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브만의 왕자라면…… 분명히 에리한의 동생인 린셀과 혼인하기로 한 것이 아니었나?
“어쨌든 소리오닌은 다시 바론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셨습니까?”
“아, 아하하! 이보다 더 완벽한 답이 어디 있습니까? 위나, 그렇지 않으냐?”
“네! 이제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왕비마마!”
위나와 백작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크게 웃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눈엣가시가 없어졌다. 한참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던 왕비는 본격적으로 그들을 불러들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슬슬 혼인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혼인은 최대한 빨리 할수록 좋지요.”
이제 자신은 왕비의 아버지다! 권력의 정점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자신의 모습에 감격한 백작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의 옆에 앉은 위나 역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 성큼 다가오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왕비가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재단사를 불렀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치수만 측정하도록 하지요. 제일 화려한 혼인이 될 텐데, 최고의 드레스를 입어야 하지 않겠니?”
“네, 네! 이렇게 저를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감동이에요. 왕비님,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라니, 앞으로 한 가족이 될 사이인데. 그런 걸 따져서 되겠니.”
인자한 미소를 지은 왕비는 다시 한번 위나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그녀의 차가운 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위나는 흥분해 있었다. 어느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온 응접실에 재단사가 도착했다.
“왕비마마를 뵙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올린 재단사는 왕비 옆에 있는 위나와 자하만 백작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녀는 바론에서 제일 유명한 재단사로, 왕비의 드레스를 전담으로 맡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평범한 귀족들은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그 재단사였다.
위나 또한 스무 살 생일 때 딱 한 번 선물로 받아본 게 다였다.
“어, 어머! 설마. 저 분이 제 드레스를 맡아주실 건가요?”
“그렇단다.”
위나에게 대답한 왕비가 재단사를 보며 말했다.
“자네가 예비 왕자비를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주게.”
“너무 좋아요! 평소 왕비님의 드레스를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시다니, 너무 행복해요!”
정말 감격한 얼굴로 왕비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한 위나가 재단사의 앞에 섰다. 재단사는 말없이 그녀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했다. 꼼꼼하게 기록을 한 재단사는 왕비에게 물었다.
“왕비님, 측정은 끝났습니다. 어떤 드레스를 원하십니까?”
“으음, 글쎄. 위나. 평소에 입고 싶었던 드레스가 있니?”
흐음, 위나가 고민에 빠졌다. 금색은 전에 무도회에서 소리오닌이 입은 걸 본 후로 손도 대지 않았다. 은색은 뭔가 허전하고……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붉은색, 붉은색이 좋겠어요. 최고로 아름답게 빛나는 붉은 원단으로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의견을 여쭈러 오겠습니다.”
재단사가 물러나고 다시 세 사람만 응접실에 남았다.
“그래, 화려한 붉은색이 너와 잘 어울리지! 너의 붉은 머리색과 같은 원단이면 최고로 예쁘겠구나.”
“아버님도 참. 이제 그만 하셔요! 왕비마마께서 흉보시겠습니다.”
딸 사랑이 못 말릴 정도로 지극한 백작 때문에 오히려 위나가 민망해졌다. 하지만 왕비는 부드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괜찮다. 보기 좋은 걸. 그나저나 위나, 늦기 전에 에리한에게 한 번 가 보렴.”
“아, 네! 근데 정말 제가 가 봐도 될까요?”
“이제 곧 너와 결혼 할 사이인데 못 가볼 건 무엇이니?”
“그, 그렇죠. 결혼.”
결혼이란 단어에 홀린 듯이 일어난 위나는 왕비에게 인사를 건네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딸의 뒷모습을 보던 자하만 백작은 편하게 소파에 기대앉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왕비님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라버니. 이제 오라버니도 경거망동하지 마시고 체통을 지키셔야합니다.”
“네! 제가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듣는 귀가 많은 곳이 바로 이곳 아니겠습니까. 흥분하시면 될 일도 그르칩니다.”
차갑게 울리는 왕비의 충고에 백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은 그녀의 비위를 맞춰야했다.
곧 왕비가 자신의 비위를 맞춰야할 때가 오겠지만……. 자하만 백작은 고개를 숙인 채 한쪽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
왕비의 궁을 나온 위나는 빠른 걸음으로 에리한의 궁으로 향했다. 소리오닌을 두고 혼자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그도 혼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그런 권력도 없고 얼굴도 볼품없는 초크센의 공녀 따위가……. 나랑 비교조차 될 수 없는걸!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궁 안으로 들어간 위나는 눈에 띄는 시녀를 불러 에리한에게 자신이 왔다는 걸 고하라고 명령했다.
“아, 저…… 에리한 왕자님께서 오늘은 쉬고 싶으시다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하는 시녀를 보는 위나의 눈이 싸늘해졌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에리한 님에게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아무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