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00)

018.

“누가 또 왔나 봐요?”

“그러게, 잠깐만 있어 봐. 얼른 봐 주고 올게.”

세리에게 맛있는 디저트를 주고 싶었던 소리오닌은 돌아가려는 세리를 다시 자리에 앉힌 뒤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리오닌 님. 카일입니다.”

덜컹거리는 문을 열고 바라본 곳에는 전에 무도회에서 만났던 왕비의 시종장인 카일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무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찍 부를 줄은 몰랐다. 소리오닌이 깜짝 놀라 카일에게 인사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카일은 소리오닌을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왕비의 전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소리오닌 님, 왕비님께서 무도회 때 말씀하셨던 얘기를 이어서 하길 원하십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그의 정중한 부탁에 소리오닌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를 하기 위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세리, 나도 왕궁에 가야할 일이 생겼어!”

“네? 소리오닌 님이 지금 왕궁을요?”

“응, 왕비님이 부르셔.”

왕비가 소리오닌을 부른다는 말을 들은 세리는 너무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소, 소리오닌 님……. 혹시 초크센에 있을 때처럼 무례하게 행동하신 건가요? 그래서 끌려가시는 거예요?”

“뭐? 아냐, 나한테 부탁하실 게 있다고 해서 가는 거야!”

세리의 황당한 추리에 소리오닌이 펄쩍 뛰며 말했다. 그녀의 답을 들은 세리는 소리오닌보다 더 황당한 얼굴을 했다.

“소리오닌 님께 부탁을요? 어째서죠?”

“음, 글쎄? 그래도 우선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두 사람 모두 대체 왜 소리오닌을 부르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카일이 생각나 서둘러 나왔다.

“나오셨습니까, 마차를 준비해 뒀으니 타고 가시죠.”

“감사합니다.”

진주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흰색 마차를 가리킨 카일은 소리오닌이 타기 편하도록 손수 문을 열어줬다. 그의 배려에 감사 인사를 한 소리오닌의 눈에 울타리 근처에서 멀뚱히 서있는 세리가 보였다. 

“잠시만요.”

“네?”

“세리, 이리 와. 같이 타고 가자. 너도 왕궁으로 갈 거지?”

소리오닌은 마차에 한 쪽 발을 올린 채 큰 목소리로 세리를 불렀다.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소리오닌의 모습에 카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순식간에 돌아왔다. 

당연히 소리오닌과 따로 갈 생각으로 그녀가 가기를 기다렸던 세리는 소리오닌의 부름에 토끼눈을 했다.

“어, 저……. 그치만, 그 마차에 제가 타도 되나요?”

카일과 주위에 있는 시종들의 눈치를 본 세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어차피 왕궁에 갈 거 같이 가면 되는 거지. 안 그런가요?”

“큼! 그렇……죠. 너도 어서 타거라. 늦었다.”

마차에 얻어 타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지 이해를 못한 소리오닌이 카일을 보며 말했다.

평소 같으면 절대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소리오닌에게 책잡힐 일을 만들지 말라는 왕비의 엄명에 카일은 어쩔 수 없이 세리를 마차에 태워야 했다.

마차 안에 같이 앉은 세리와 소리오닌은 소풍을 가는 어린아이들처럼 신나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특히 세리는 난생 처음 타 보는 고급 마차를 둘러보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한편, 자신의 눈앞에서 정신 사납게 떠드는 두 사람을 보는 카일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왕비님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두 사람 모두 당장 마차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다행히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차는 왕비궁의 앞에 멈춰 섰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만 공주님 성으로 가 볼게요. 소리오닌 님, 제가 시간 날 때 또 들리겠습니다!”

“응, 응. 잘 가, 또 놀러 와야 해?”

“네! 그럼 다음에 뵈어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반복한 세리가 뒤돌아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공주의 성을 향해 뛰어갔다. 세리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소리오닌도 얼른 왕비에게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온통 붉은 융단으로 꾸며진 왕비의 응접실에는 소리오닌이 오기 전 이미 자하만과 그의 딸 위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왕비님, 이제 계획이 다 완성된 겁니까?”

자하만 백작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왕비에게 물었다. 그의 옆에 앉은 위나도 왕비의 얼굴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거창한 계획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소소한 부탁일 뿐이죠.”

두 부녀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본 왕비는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하얀 깃털이 가득 달린 부채를 살살 움직였다. 부채가 움직일 때마다 보일락 말락 하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거봐라, 아버지가 왕비님만 믿으라고 했지 않느냐.’

‘그러게요, 정말 다행입니다.’

왕비가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했기에, 자하만 부녀는 서로 눈으로만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눈엣가시인 초크센의 공녀가 곧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에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웃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군.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창밖을 슬쩍 보던 왕비는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똑똑.

얼마 뒤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몸을 바짝 긴장시킨 자하만 부녀는 곧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오닌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소리오닌은 카일의 안내로 화려한 금빛의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왕비에게 인사를 한 뒤, 먼저 와 있었던 건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하만 부녀를 쳐다봤다. 

“너는 눈이 없니? 사람을 보고 왜 인사를 안 해? 네가 여기서도 공녀인 줄 아는 거야? 웃기고 있어, 정말.”

위나는 백작과 자신을 보고도 인사도 없이 뻣뻣하게 서 있는 소리오닌을 째려보며 말했다. 

저게 진짜! 소리오닌 역시 성질 같아서는 같이 한 마디를 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에리한의 어머니 앞이라 아무 말도 못하고 살짝 고개를 숙인 뒤 0.1초 만에 들어올렸다. 

그녀의 성의 없는 태도에 인사를 받았음에도 더 화가 난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소리오닌에게 퍼부으려고 할 때였다.

“소리오닌 양,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자하만 백작과 위나 양은 이제 곧 가실 겁니다.”

“네? 아니, 저기, 왕비님!”

왕비가 자신의 맞은 편 자리를 가리키며 소리오닌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당연히 자신들도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하만 백작이 왕비의 축객령이 떨어지자 당황한 얼굴로 왕비를 보았다. 그러나 왕비는 백작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자하만 백작님. 제가 할 말은 끝났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적당히 하고 그만 가 보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싸늘한 시선에 움찔한 백작은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말 없이 일어나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던 위나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따랐다.

“하, 궁에 오면서 거지같이 입고 와서는……”

문을 나서기 전 소리오닌을 스쳐 지나가며 한마디 내뱉는 위나의 눈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무도회에서 입었던 드레스는 단 하루를 위한 의상인 모양이었다. 지금 그녀는 평민도 안 입을 만큼 초라한 원피스를 입은 채 갈색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다.

활동하기 편해서 좋기만 하구만……. 소리오닌은 별 거 가지고 다 시비라며 속으로 삐죽거렸다. 

위나 자하만은 기어이 소리오닌의 어깨를 툭,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친 다음에야 문을 열고 사라졌다. 위나의 유치한 행동에 짧게 한숨을 내쉰 소리오닌이 왕비가 가리킨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았나요?”

“아닙니다, 마차를 보내 주신 덕분에 엄청 편하게 왔어요!”

소리오닌은 왕비의 상냥한 물음에 손을 내저었다. 전에 끌려올 때 탔던 마차에 비하면 시내버스와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의 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엄청 푹신하고 부드러웠던 마차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초라한 차림의 소리오닌을 유심히 쳐다보던 왕비는 시녀를 시켜 쿠키와 차를 내오게 했다. 

“마셔요. 너무 갑작스럽게 불러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걸요?”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소리오닌의 모습에 왕비는 빨간 입술을 올려 마주 웃었다. 붉은 머리와 검붉은 색의 드레스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왕비는 화려한 장미처럼 빛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왕비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한 소리오닌은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왕비는 소리오닌의 시선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렇다고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얼마나 실례인지도 모르는 건가……? 내가 이렇게 멍청한 계집애까지 신경 쓰게 만들다니 가만 안 놔두겠어. 

속으로 자신의 아들과 왕에 대한 원망을 살벌하게 읊조린 왕비는 소리오닌을 향해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곧 시녀가 향긋한 꽃 차와 과일이 박혀 있는 쿠키를 가져왔다. 왕비는 소리오닌에게 마실 것을 권하며 그녀의 앞으로 쿠키를 옮겨줬다. 

소리오닌은 거절하지 않고 왕비가 친절하게 권한 차를 홀짝 홀짝 마셨다. 대체 어떤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흠. 저 왕비님, 혹시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가……”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거라고, 결국 궁금함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소리오닌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 그게 궁금했군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돼요.”

“네에, 그럼 어떤 일을……?”

아니, 그러니까 뭘 시킬 건지부터 얘기를 해 주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왕비는 자신의 머리색과 똑같은 붉은 색 찻잔을 잡고서 차의 향만 맡고 있었다. 그녀를 보던 소리오닌은 속이 답답해졌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소리오닌을 본 왕비는 한쪽 입술 끝을 올려 그녀를 향해 짧은 비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인내심이 없어서야. 대체 초크센에서는 애를 어떻게 키운 건지……. 쯧.

“소리오닌 양.”

“네?”

드디어 말하는구나! 왕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에리한의 여동생을 알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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