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00)

019.

“……?”

갑자기 에리한의 여동생 얘기가 왜 나오는 거……? 아, 여동생이 어디 아픈가? 왕비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오자, 소리오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 들어서 알겠지만, 저의 여식은 소리오닌 양과 같은 나이이지요.”

아니요. 들어본 적 없는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저는 제 나이도 모르고 있습니다. 왕비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소리오닌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나이 23살이면 이제 슬슬 혼인을 할 나이지 않습니까?”

“혼인이요…….”

아, 내가 23살이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소리오닌은 잊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속으로 23을 되뇌었다. 

그런데 좀 전부터 왕비와 하는 대화가 점점 이상한 주제로 빠지는 것 같았다. 뜬금없이 등장한 공주라는 말도 혼란스러운데, 거기에 더해서 혼인이라니?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소리오닌에게 싱긋 미소를 지은 왕비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얘기를 이어갔다.

“소리오닌이 직접 공주의 혼인 약조 편지를 상대방에게 전해줬으면 좋겠어요.”

“네? 제가 직접……?”

“네. 소리오닌 양은 초크센의 공녀였지만, 이제는 바론의 국민이 되었지 않습니까. 공주의 혼인을 위해 힘을 써주세요. 소리오닌 양의 신성한 능력이 공주의 혼인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의 인생이 달린 일이니까요.”

소리오닌은 진심으로 자신의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듯한 왕비의 표정에 홀딱 넘어가 버렸다. 혼인 약조 편지 정도야, 그냥 우체부 아저씨처럼 배달해 주고 오면 되는 거잖아?

자신이 가진 능력 밖의 어려운 부탁이면 어떡하나 고민했던 소리오닌은 생각보다 간단한 부탁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비님, 정말 편지만 전해 주고 오면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해 줄 수 있겠어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소리오닌은 편지 배달이라는 말만 듣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 그녀를 본 왕비는 눈까지 휘며 그녀를 향해 짙은 미소를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오닌은 왕비의 웃음을 보고 마주 웃었다.

“소리오닌 양, 정말 고마워요. 솔직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네? 아니에요! 어려운 부탁도 아니신데…….”

부채를 들고 소리오닌을 곁눈질로 힐끔 쳐다본 왕비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놀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얘기를 안했군요!”

“……?”

어디를 가야 해? 공주님의 신랑감이 사는 곳이 이 근처가 아닌 건가? 왕비의 과장 된 몸짓을 본 소리오닌은 뭔가 싸한 기분을 느꼈다. 얼굴을 굳힌 소리오닌이 왕비의 붉은 입술을 쳐다봤다.

“사브만이라고, 소리오닌 양도 들어봤죠? 그곳의 왕자님과 혼인을 진행할 예정이랍니다.”

“아, 그렇군요. 근데, 아예 다른 나라네요……?”

“그렇긴 한데…… 제가 지도와 기본적인 나침반은 드릴 거니, 너무 걱정 마세요. 이번 부탁을 선뜻 들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소리오닌이 사브만에 대해 뭐라 더 묻기도 전에 왕비는 급하게 카일을 불러 그녀를 응접실에서 내보냈다.

순식간에 왕비의 성에서 쫓겨 난 소리오닌은 머리를 쥐어 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 멍청이! 진짜 사브만이 어딘데! 제일 중요한 건 안 물어보고 쉬울 것 같다고 홀라당 승낙하다니! 망했네!

내비게이션도 아니고, 인터넷 지도도 아니고. 종이로 만든 지도랑 나침반이라니. 지금 그거 들고 해외로 나가라는 거지? 내가 무슨 콜럼버스냐!

천박하게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뜯는 소리오닌을 본 카일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초크센에서는 명망 있는 집안의 공녀라 들었는데, 평민도 안 할 행동을 하고 있고만.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멍청함에 슬퍼하고만 있다 번쩍 고개를 든 소리오닌은 카일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

“카, 카일 님! 사브만은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 곳인가요?”

다급한 얼굴로 묻는 소리오닌의 모습에 카일은 움찔했다. 무,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손아귀 힘이 센 거야? 아릿한 팔뚝에 잠깐 눈썹을 꿈틀했던 카일은 곧 평상시의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와 친절하게 답하기 시작했다.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꼬박 열흘이 걸리는 곳입니다. 소리오닌 님은 좀 더 느리게 가실 테니 2주는 걸리겠군요.”

“하, 하하. 2주요……?”

왕비님한테 다시 가서 못 한다고 하면 감옥에 가려나? 역시 무슨 말이든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건데!

자신의 대답에 아예 실성한 듯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 쳐다보는 그녀를 카일이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마차에 실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푹신한 마차에 앉아 가고 있지만, 속은 돌덩이를 씹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럼, 조만간 필요한 물품을 챙겨서 오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요.”

“아, 네……. 안녕히 가세요.”

그래도 여기까지 데려다 준 카일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한 소리오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집 문을 열었다.

“먀먀!”

문을 열자마자 야옹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놀란 소리오닌이 창가에 앉아 있는 야옹이의 앞으로 뛰어갔다.

꽤나 오래 기다렸는지 야옹이는 삐진 듯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야옹이를 얼른 안아 든 소리오닌은 야옹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야옹아, 오래 기다렸어? 미안해! 내가 잠깐 어디 좀 다녀오느라…… 배고프지?”

“먀아아.”

홀쭉하게 들어간 야옹이의 배를 한 번 문지른 소리오닌이 부엌에서 고기와 빵을 가져와 야옹이 앞에 놓아줬다.

그녀가 준 음식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 야옹이는 잠시 뒤 찹찹 소리를 내며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야옹아, 나 당분간은 여기에 없으니까 다른데서 놀다 와야 해. 알았지?”

어느새 고기와 빵을 다 먹어치운 야옹이를 데리고 손가락 장난을 치던 소리오닌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야옹이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주 아주 중요한 심부름을 하게 됐어. 근데 자신이 없다. 하아…….”

입만 열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에리한이 왕비의 부탁을 거절하라고 말했던 것도 왜 이제야 생각이 나는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듣는 것이 분명한 야옹이는 계속해서 그녀의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칠 뿐이었다. 소리오닌은 귀여운 야옹이의 행동에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사브만이 대체 어디 있는 걸까? 걸어서 2주나 가야 한다니……. 흐어엉!”

소리오닌은 결국 야옹이를 꾹 껴안은 채 크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 때문에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야옹이의 눈이 번쩍 빛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

에리한은 평소와 같이 아침 운동을 마치고 자신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자잘한 상처들이 있는 그의 복부와 등은 점점 더 단련된 근육들로 잘 짜여 가고 있었다. 

요즘은 일부러 상처를 만들지 않고도 소리오닌에게 갈 수 있을 만큼 친한 사이가 되었다. 무도회가 끝나고 못 본 지 좀 됐으니 그녀의 집으로 오후에 한 번 가볼까 생각하던 때였다. 

“오라버니!”

쾅! 커다란 나무문을 부술 듯이 힘차게 열어젖힌 린셀이 얼굴을 붉힌 채로 뛰어 들어왔다. 괴팍한 동생의 행동에 미간에 주름이 진 에리한은 린셀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 했다.

“어머니가 그 공녀를 만나서 제 혼인 약조 편지를 사브만까지 가져가라고 했대요!”

자신의 동생에 입에서 나온 청천벽력 같은 소리만 아니었다면……

사브만이라니?! 어제 자신이 사냥터에 간 사이 소리오닌을 불러들였던 것이 분명하다. 제길, 당분간 성을 떠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몰랐던 터라 방심했다.

린셀의 말을 들은 에리한은 속으로 자책하며 급하게 방을 나섰다.

식당에서 에리한에게 줄 물을 떠오던 바임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 댓바람부터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닐 테고. 뭐지? 

바임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에리한을 따라 가려고 할 때, 그의 손을 누군가가 꽉 잡아왔다. 

“……?”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엉엉 울고 있는 린셀을 본 바임은 이게 대체 뭔가 싶었다. 물 뜨러 간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분위기가 왜 이래?

“저, 공주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우선 눈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린셀부터 달래야 할 거 같아 바임은 창틀에 물컵을 올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밝은 갈색 눈동자에 더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온 린셀은 딸꾹질까지 하며 울었다.

“흐, 흐흑……. 어머님이…… 저를 사브만에, 시집 보내려고 해요……. 흑, 저는 가고 싶지 않아요!”

“네?”

“하지만 어머님께서 혼인 약조가 써 있는 편지를 그 공녀에게 가져다 주라고 했어요.”

하……. 그래서 왕자님이 그렇게 급하게 뛰어간 거였구만. 아무리 눈에 거슬려도 여자 혼자 사브만에 보낼 생각을 해? 

꽤나 위기라고 느꼈던지 자신의 딸까지 이용해서 소리오닌을 치워 버리려는 왕비의 계략에 바임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린셀이 여전히 간헐적으로 떨고 있었기에 우선 바임은 창가에 뒀던 컵을 건넸다. 자신이 준 물을 마신 린셀은 눈물 때문에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바임 님, 저를 이렇게 다른 사람과 혼인하게 두실 건 아니죠?”

“공주님!”

이래서 린셀이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꼭 백마 탄 왕자님처럼 보는 저 눈빛. 어렸을 때부터 변하지 않는 저 눈빛 때문에 웬만하면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짧게 한숨을 내뱉은 바임은 린셀의 몸을 돌려 공주의 성으로 향하게 했다. 아직 그에게서 아무 대답도 못들은 린셀은 발에 힘을 주고 가지 않으려 버텼지만, 성인 남성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우선 방에서 기다려주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바임 님, 저도 어머니께 가면 안 될까요? 제가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리면…….”

“공주님의 몇 마디에 왕비님의 생각을 돌릴 수는 없으실 겁니다. 제가 왕자님과 상의해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울지 마시고…….”

바임의 살짝 차가운 듯한 손가락이 린셀의 눈가를 스쳤다. 그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간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린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슬며시 미소를 지어 준 바임은 왕비궁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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