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화려한 무도회가 끝난 뒤 조용해진 성 안을 빠르게 가로질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앞에 린셀이 불쑥 나타났다.
“오라버니!”
“음……?”
늦은 시간까지 여기서 기다린 건가 싶어 동생을 보는 에리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오늘 그 여자가 한 리본, 그거 저한테 들어온 선물 맞죠?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요?”
“아아, 그랬나?”
린셀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자신이 입은 드레스에 딱 어울릴만한 리본이라서 꼭 숨겨뒀던 건데!
어떻게 찾아서 가져다 바쳤는지는 몰라도 그 리본을 찾느라 무도회를 즐기지 못한 것이 억울했다. 분명히 내 거라는 걸 알았을 텐데 뻔뻔한 태도 좀 보게?
“‘그랬나?’ 라니! 무슨 말이 그래요? 정말 못됐어요!”
“더 따질 게 있으면 바임한테 가서 따져. 난 바임이 준 걸 가져간 것뿐이라고.”
“……바임 님이?”
에리한의 입에서 바임의 이름이 나오자 펄펄 뛰며 소리치던 린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동생의 얼굴이 점점 발갛게 변하는 걸 본 에리한은 한쪽 입술만 올려 그녀를 비웃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별 말없이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에리한 님, 다녀오셨습니까?”
“아, 바임. 복도에 나가 봐. 린셀 와 있는데, 너 보면 좋아하겠네.”
자신의 방에서 침대를 정리하던 바임이 에리한이 들어오자 곧바로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바임의 인사에 대충 손을 흔들어 준 에리한이 린셀이 와 있다고 얘기하자,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일부러 이러십니까?”
“응? 뭐가?”
“제가…… 린셀님을 부담스러워 하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의 주군에게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툭 내뱉은 바임의 말에 에리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도 참, 쉬운 길을 놔두고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나 모르겠단 말이지.”
“……네?”
갑자기 튀어나온 에리한의 알 수 없는 대답에 바임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린셀이랑 결혼하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아? 너, 왕비한테 그렇게 안 휘둘려도 되고.”
“?!”
어…… 어떻게. 눈치는 채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자신에게 티낼 거란 생각을 못했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바임이 아무 말도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걸 본 에리한은 제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짧은 침묵이 지난 뒤 정신을 차린 바임은 바닥 곳곳에 떨어져 있는 에리한의 옷들을 주워들었다.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에리한이 자신을 빤히 보는 걸 느낀 바임은 결국 짧게 한숨을 쉰 다음 자신의 주군을 바라봤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왕자님이 무슨 벌을 내리던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응? 아냐, 난 너의 잘못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니야. 그래도 우리가 본 날이 몇 년인데. 이정도 일로 내가 널 내칠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럼 이제까지 조용히 묻어두던 일을 갑자기 꺼내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임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에리한의 속내에 점점 더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냥. 너한테 쉬운 길을 알려 주는 거라니까?”
“왕자님,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그래, 맞아. 사실, 앞으로 네가 계속 어머니의 첩자 노릇을 한다면 나도 널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거든.”
“…….”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이용한다는 에리한의 말에 바임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왕비에게 볶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왕자에게까지 약점이 잡혀 휘둘리게 생긴 탓이었다.
“그러니까 린셀을 잘 꼬셔 보라고. 나도 이제 전처럼 쉬엄쉬엄 넘어갈 생각이 없어졌으니…….”
선전포고하듯 말하는 에리한의 얼굴에는 살벌한 만큼 아무 표정도 자리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왕비가 했던 짓들을 알고도 귀찮아서 모른 척했다는 건가?
그럼 그렇지. 왕과 왕자는 이미 왕비의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만이 자신이 그들을 휘두른다 생각했던 것이었나 보다.
아까보다 더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한 바임은 에리한에게 물었다.
“지금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소리오닌 님 때문이십니까?”
“음…… 뭐.”
아니라는 부정은 하지 않는 에리한을 보며 바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신이 어디로 줄을 서야 할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왕자님의 말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리한에게 깊게 고개를 숙인 바임은 조용히 그의 방을 벗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에리한 님의 말을 듣는 게 내 목숨, 그리고 동생의 목숨까지 좀 더 오래 붙여 놓을 수 있는 방법이겠지.
바임은 에리한의 방을 벗어나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눈에 기둥 뒤에 삐죽이 튀어나온 라임색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흠……. 잠시 걸음을 멈춘 바임은 바짝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드레스의 주인에게 향했다. 예전 같으면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쳤겠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될 이유가 생겨 버렸다.
“안녕하십니까?”
등 뒤에서 들리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린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돌아봤다.
“어, 어머. 바임 님! 우, 우연이네요?”
바임의 앞에서 긴장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삑, 어긋난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린셀은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그녀를 보던 바임은 어느 순간,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린셀을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공주님 궁이 아무리 가까워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제가 데려다 드려도 될까요?”
“헉…… 저……정말요?”
“네. 물론 린셀 님이 허락해 주신다면요.”
“허락하죠, 몇 번이라도!”
혹여 바임이 내뱉은 말을 취소할까 봐 급하게 그의 팔뚝을 붙잡은 린셀은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를 데려다 주는 길. 바임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어지러웠다.
***
요즘은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혹 귀족가에서도 소리오닌의 집을 찾아왔다.
그 덕에 식량이 좀 더 풍부해진 그녀가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빵과 고기, 디저트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소리오닌 님!”
울타리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히 바론으로 끌려오던 내내 자신의 옆에서 종알거렸던 목소리가 분명했다.
소리오닌이 반가운 마음에 정리하던 것들을 내려놓으며 집 문을 활짝 열고 나갔다.
“세리?”
“소리오닌 님! 흐아앙!”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오닌을 본 세리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리오닌은 자신을 보며 대성통곡을 하는 세리를 겨우 달래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세리의 앞에 따뜻한 꽃차 한 컵을 놓았다.
“소…… 소리오닌 님! 제가 챙겨야 하는데!”
“아냐. 나도 이제 스스로 다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의미 그대로,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주인이 고생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또다시 눈이 글썽글썽해졌다.
정작 얼굴이 많이 상한 건 본인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걱정하는 세리를 보는 소리오닌의 얼굴에 안쓰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소리오닌 님. 얼굴 상한 것 좀 봐요. 백옥 같던 피부가 이게 뭐예요!”
“아아, 내가 텃밭 좀 가꾸느라…… 괜찮아.”
“텃밭이요?”
“응! 요즘은 과일이 잘 열리더라고, 좀 먹어 볼래?”
부엌에서 손질하다 만 과일을 하나 가져온 소리오닌이 세리에게 웃으며 과일을 건넸다. 그녀는 평소 이국의 과일이나 고기 종류에만 입을 댔었다. 그런 소리오닌이 노지에서 나는 흔한 과일을 맛있다는 듯이 먹고 있는 것을 본 세리는 다시 울컥했다.
소리오닌은 의아하여 세리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내민 과일을 받아 든 세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얘는 아직까지도 내가 뭐만 하면 울고 그러냐! 마차 안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세리의 모습에 결국 소리오닌은 크게 웃어 버렸다.
“응? 킁, 왜 그렇게 웃으시나요?”
갑자기 배를 움켜잡고 웃는 소리오닌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세리가 말간 눈으로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세리, 나는 정말로 네가 좋아. 무사해서 다행이야. 보고 싶었어.”
세리가 잘못되지 않아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소리오닌은 세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얘기를 들은 세리는 볼을 붉히며 자신도 그렇다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근데 세리,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 저는 다행히 감옥이 아니라 린셀 공주님의 궁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어제인가? 왕자궁에서 저를 찾는다는 말씀에 깜짝 놀라서 갔더니 소리오닌 님의 집을 알려 주셨어요. 얼른 가 보라고…….”
“역시! 그랬구나!”
에리한이 자신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이렇게 세리를 찾아서 보내줬다는 사실에 소리오닌은 다시 한번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꽤나 오랫동안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얘기하는 도중에도 가끔씩 소리오닌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며 세리는 그녀의 능력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리오닌 님은 정말 어떻게 이때까지 그런 훌륭한 능력을 숨기고 계셨나 몰라요? 초크센에 있을 때는 조금만 걸어도 발목이 아프다고 화를 내셨잖아요.”
“그…… 그러니까! 그때는 왜 치료할 생각도 안 했나 모르겠다, 그치?”
“그러니까요! 소리오닌 님, 정말 멋있어요!”
박수까지 치며 얘기하는 세리의 말에 소리오닌은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똑똑,
한참 얘기를 나누던 세리가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누군가가 소리오닌의 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