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어머, 어머. 소리오닌 님, 너무 예쁘시다!”
“하핫, 제가 드레스를 입은 게 아니고 드레스가 저를 입은 것 같아요. 사장님 덕분에 저 정말 공주님 같은 걸요!”
소리오닌은 드레스 가게 사장의 도움으로 무도회에 갈 준비를 무사히 마쳤다. 자신의 몸에 맞게 수선을 해서 입으니까 가게에서 봤던 것 보다 더 예뻐 보였다.
와, 진짜 나 공주님 같네! 이곳의 여자들이 이런 불편한 걸 입는 이유가 있구나. 예뻐!
속으로 몇 번이나 감탄한 소리오닌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봤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에 박힌 크리스털들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여사장이 뭔가 생각난 듯 박수를 쳤다.
“맞다, 머리 장식할 걸 안 가져왔네요! 머리를 풀어내려도 괜찮긴 하지만, 목선이 예뻐서 머리를 올리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음…… 아, 저 리본 있는데 그걸로 묶을까요?”
아쉬운 듯한 여사장의 말에 집에 뭐가 있나 생각하던 소리오닌이 전에 에리한이 주고 간 리본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녀가 내민 리본을 본 여사장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머, 이거 요즘 유행하는 리본인데! 어디 보자, 다행히 색도 잘 어울리네요, 제가 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도회 가서 즐겁게 있다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리오닌 님은 무도회 많이 가 보지 않으셨어요? 근데 꼭 처음 가는 사람처럼 설레 하는 거 같네요.”
“아, 너무 오랜만에 가는 거라서 그래요. 바론에서 하는 무도회는 처음이기도 하고…….”
또 너무 좋아하는 티 냈구만. 화려한 인생을 살던 공녀의 몸속에 현재 머물러 있는 건 소시민 김희은의 영혼이니 이런 거 하나하나에 들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자꾸 주위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있는 게 걱정이지만…….
소리오닌의 어설픈 변명에 풋, 웃음을 터뜨린 사장이 그녀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높게 묶은 머리를 돌돌 말아 리본을 고정한 뒤에 몇 가닥 내려서 최대한 청순한 느낌으로 꾸며줬다.
“역시! 머리를 올리는 게 훨씬 예쁘네요! 평소에도 이렇게 묶고 다니지. 아무리 집에만 있는다 해도 꾸미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다고요.”
집에서 트레이닝복만 입고 있는 백수 딸을 나무라는 듯한 사장의 말에 소리오닌은 난감한 웃음만 지었다.
평소 그녀는 꾸미는 데에 특별한 취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이렇게 하라고 한다면 절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네, 앞으로는 머리 묶고 다닐게요.”
“네, 네! 거기다 이렇게 예쁜 리본이 있는데, 방치해 두기만 하는 건 안 되죠!”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퍼부을 생각인지 그녀의 집을 둘러보기 시작하는 사장의 시선을 막아선 소리오닌이 급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이제 곧 에리한 님이 오기로 해요. 다음에 한 번 저희 집에 오시겠어요? 제가 차라도 한 잔 대접할게요!”
“네……? 잠깐, 누구요?! 어머?”
“안녕히 가세요!”
소리오닌의 말을 들은 사장이 그녀의 말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소리오닌에게 그의 정체를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사장이 또 잔소리를 할 거라 생각한 소리오닌은 그녀를 마당까지 배웅한 뒤 문을 꼭 닫았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 남자는 흑발이었는걸…….”
눈앞에서 닫힌 문을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던 사장은 곧 자신이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가게로 향했다.
사장을 보낸 소리오닌은 탁상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자신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확실히 예쁘네. 한국이나 여기나 화장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핸드폰이 있으면 셀카 100장은 찍을 타임인데. 핸드폰은커녕 전화기조차 없는 곳에 떨어져 버려서…….
이곳에 온 뒤로 제일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탕탕탕!
한참 거울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을 때였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리한인가 보다! 소리오닌은 에리한을 꽤나 오랜만에 본다는 기쁜 마음에 후다닥 달려 나갔다.
“에리한 님, 어서 오세요!”
“아…….”
에리한은 활짝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오닌을 보았다. 그리고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그녀의 모습을 넋 놓고 보기 시작했다.
다른 색 하나 없이 오직 황금빛으로만 빛나는 드레스는 레이스와 크리스탈로 반짝였다. 팔꿈치를 덮는 풍성한 소매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더 강조해서 청초해 보이기까지 했다.
진주로 된 목걸이 하나만으로 액세서리를 끝낸 것도 오히려 소리오닌의 반짝이는 초록색 눈을 더 부각시켰다.
소리오닌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만 뚫어지게 보는 에리한의 모습에, 드레스가 안 어울리나 싶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이런 데 센스가 없는 자신이 보기에도 드레스는 정말 예뻤다.
흠, 그럼 내 얼굴이 잘못된 건가? 윽, 그건 좀 슬픈데…….
에리한은 소리오닌이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중에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소리오닌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리한 님, 이 드레스 저랑 안 어울려요?”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한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그제야 멍한 눈빛을 푼 에리한이 소리오닌에게 웃음을 보였다.
“네……? 아, 아닙니다. 정말 잘 어울립니다.”
“그래요? 다행이다. 에리한 님도 오늘 정말 멋있어요!”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에리한의 하얀 손을 본 소리오닌이 그의 손을 잡고 어두운 밤에도 환하게 빛나고 있는 왕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바임.”
“……왕비님.”
“에리한은 어디에 있길래 너 혼자 있는 거지?”
급하게 준비를 마친 왕자는 소리오닌을 데리러 간다고 순식간에 자릴 비웠다.
자신이 말릴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한숨을 푹푹 쉬며 뒷수습을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타이밍도 거지같이 왕비가 왕자를 보러 직접 찾아와 버리고 만 것이다.
“아, 음, 준비할 것이 있으시다 하여……. 무도회 시작 시간에 맞춰 오실 것입니다.”
“왕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 한 것 같은데. 내 말을 허투루 들었나 보구나.”
표정의 변화 없이 떨어지는 왕비의 말에 크게 놀란 바임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흠. 내가 지금 널 어찌 하겠느냐?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구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 내가 너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지? 너의 동생도 너만 믿고 있을게야.”
왕비는 동생 얘기에 하얗게 질리는 바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뒤 몸을 돌려 왕자의 방에서 멀어져갔다. 그동안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왕비에게 말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안 느꼈을 리 없다.
하지만 동생의 목숨을 쥐고 있는 왕비의 명령을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얼마나 좋아. 갑자기 그 공녀한테 꽂혀가지고…….
요즘 들어 점점 입장이 난처해지는 바임은 왕비가 나간 문을 쳐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
“이, 이걸 타고 가라고요?”
“네, 제가 안 떨어지게 잡아드리겠습니다.”
에리한은 소리오닌과 함께 집에서 나오자마자 울타리 앞에 있는 말을 가리켰다.
딱 봐도 덩치 좋고 성격 나빠 보이는 검은 말의 모습에 소리오닌이 겁먹은 얼굴로 에리한을 바라봤다.
“아니, 그래도……. 저 드레스 입었는데 괜찮을까요?”
“드레스 안 망가지게 조심히 가겠습니다.”
그냥 걸어가는 건 안 되는 거야?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것 같았다. 기필코 저 검은 말에 태우겠다는 각오로 왔는지, 에리한이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근데 저 말에 올라가는 법도 몰라요.”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가기로 맘을 굳힌 소리오닌이 짧은 한숨을 내뱉고 솔직히 고백했다.
제주도에서도 말 한 번 타 본 적 없는 사람이 저 커다란 말에 무슨 수로 올라가겠는가…….
공작가에서 말 타는 법도 안 배웠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에리한은 오히려 말갛게 웃었다. 응? 소리오닌이 의아함을 담아 에리한을 쳐다보자 그는 탄탄한 근육으로 이뤄진 팔을 내밀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으어억!”
갑자기 시야가 훌쩍 높아진 소리오닌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귀족가의 아가씨답지 않은 비명을 들은 에리한은 결국 배를 접으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소리오닌은 민망해져서 에리한을 힐끔 보았다.
“너무 시끄러웠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소리오닌 님은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서 좋아요.”
대체 어떤 기대를 하고 있기에……? 걸걸하게 소리 지른 것에 대한 사과를 하던 소리오닌이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뒤로 훌쩍 올라탄 에리한이 소리오닌을 뒤에서 안는 자세로 말의 고삐를 잡았다.
둘의 덩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소리오닌은 그에게 둘러싸여 드레스가 아니면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다시 한번 그녀를 편한 자세로 바로잡아 주는 에리한으로부터 신선한 숲의 향이 훅, 풍겨왔다.
평소에도 가까이 있던 적이 많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그의 체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에리한도 무도회라고 신경 좀 많이 썼나 보다. 향수가 있을 줄 알았으면 나도 좀 사서 뿌릴 걸 그랬네.
혹시 자신에게서 흙냄새라도 날까 봐 신경이 쓰인 소리오닌이 자신의 냄새를 맡았다.
“뭐 하십니까?”
“아, 꼬박꼬박 씻긴 했는데 혹시나 이상한 냄새가 날까 봐요. 우리 너무 가까우니까 뒤에 있는 에리한 님이 불쾌해할까 싶어서.”
“네? 하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꽃향기가 나는데요?”
어쩜, 말도 저렇게 생긴 거랑 똑같이 할까! 참으로 건전하고 올바른 에리한의 대답에 소리오닌은 풉, 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의 대답을 맘에 들어 하는 듯한 그녀의 웃음에 에리한도 입술을 올려 같이 미소 지었다.
말을 타는 게 처음인 소리오닌에게 맞춰 에리한이 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리한과 같이 타서인지 생각보다 말 타는 게 무섭지는 않았다. 소리오닌은 그의 배려에 큰 불편함 없이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 앞에 멈춰선 두 사람 중 에리한이 먼저 내리고 소리오닌을 잡아주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녀는 그의 키만큼 길쭉한 팔을 잡고 검은 말에서 내렸다. 성문은 이미 도착해서 서 있는 온갖 크기의 마차들과,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 다 모이는 거예요? 사람들 엄청 많네요!”
“아,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다른 나라의 귀족들도 초대받아 와서 더 많게 느껴지실 거예요.”
“그렇구나.”
친절한 에리한의 설명에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리오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드레스 때문에 자꾸 발이 꼬여 힘들어하는 그녀를 본 에리한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배려에 고맙다는 눈빛을 보낸 뒤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어머, 왕자님?”
“왕자님!”
“저 여자는 누구야?”
“왕자님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