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무도회 때문인지 밤에도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는 성에 도착할 때쯤이었다. 소리오닌을 둘러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귓가를 지나치는 그들의 말을 들은 소리오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까치발로 서서 에리한의 귀에 속삭였다.
“여기 근처에 왕자님 있나 봐요. 에리한 님, 안 가 봐도 돼요?”
“네?”
“성에서 일하신다면서요. 눈도장 찍고 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한국에 있을 때는 무조건 상사의 눈에 들기 위해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이세계이기는 하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니까 똑같지 않을까 싶어서 한 말인데.
에리한의 반응이 영……. 에리한은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으로 소리오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소리오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왜 그런 표정으로…….”
“에리한 님!”
소리오닌은 에리한에게 하던 말을 마저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에리한을 부르는 바람에 그 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 사람은 꽤 오랫동안 에리한을 기다렸는지 그를 보자마자 한 걸음에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아, 바임.”
바임의 초조한 듯한 부름에도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눈치만 볼 뿐, 서두르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에리한의 모습에 바임의 속만 바짝 타들어갔다.
“에리한 님! 대체 지금 시간이 몇 시입니까? 다들 기다리고 계신다구요, 이번 무도회의 주인공께서…….”
바임은 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크게 소리를 낼 수 없어 낮고 빠르게 말한 뒤 에리한을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다.
에리한 역시 예상했던 시간보다 꽤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선 소리오닌에게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리오닌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 파악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과 바임을 번갈아 쳐다보는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은 꿀꺽, 침을 삼키고 말을 시작했다.
“소리오닌 님? 사실은 제가 바론의 왕자입니다. 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소리오닌 님이 저를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요.”
긴장한 듯 잔뜩 굳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소리오닌은 에리한이 한 말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에리한이 보여준 말들과 행동들을 생각해보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왕자라는 게 진짜라는 건데……. 이런 일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소리오닌은 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머릿속이 엉망이라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결국 소리오닌은 눈을 커다랗게 떴을 뿐, 에리한의 말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런 소리오닌을 보는 에리한의 얼굴에 점점 여유가 사라졌고, 그런 그를 보는 바임의 속도 점점 뒤집어지고 있었다.
“소리오닌 님……. 화나셨습니까?”
“네? 아니요, 화난 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어서.”
손을 내저으며 화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에리한은 진심으로 화난 게 아닌가 의심스런 눈으로 소리오닌을 빤히 바라봤다.
“진짜 아니에요! 조금 놀랐을 뿐이지, 따지고 보면 저도 에리한 님의 직업에 대해서 자세히 안 물어봤는걸요. 그냥, 친한 동네 친구가 하루아침에 엄청난 연예인이 된 느낌? 뭔지 알겠어요?”
“연예인이 뭡니까?”
순간 동시에 말문이 막혀 버린 두 사람은 그저 서로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진도가 안 나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바임이, 그들을 둘러싸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한번 조용히 에리한에게 말했다.
“왕자님, 서두르시죠. 늦었습니다.”
“음, 그래. 소리오닌 님, 가시죠.”
“네? 네!”
눈치 없게 왕자의 옆에서 꼭 붙어 쫓아오는 소리오닌을 본 바임은 자신도 모르게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이젠 이름도 없어진 나라의 공녀 주제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왕자의 관심을 독차지해 버리다니……!
저 여자 때문에 한바탕 뒤집어질 무도회를 생각하자 머리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각자 복잡한 생각을 가진 세 사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성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성의 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저마다 화려한 색의 드레스와 제복을 입은 사람들. 홀을 가로질러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연주곡,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까지.
소리오닌은 자신이 정말로 영화나 만화에서만 봤던 무도회에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왕자님이랑 친해지니까 이런 데도 오고…….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거지! 뿌듯한 마음도 잠시, 난생 처음 보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도회 전경에 소리오닌은 입을 벌린 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소리오닌 님. 잠시 어른들께 인사 좀 하고 오겠습니다. 여기 그대로 계세요.”
“네. 다녀오세요!”
에리한은 그녀를 홀 중앙 여러 음식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 뒤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며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갔다.
에리한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던 소리오닌은 시선을 돌려 본격적으로 성 안 구석구석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소리오닌이 잘 있나 다시 한번 확인한 에리한은 걸음을 빨리해 왕과 왕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붉은 융단이 깔려 있는 단상 위에는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자하만 백작과 그의 딸 위나 자하만도 함께였다.
왕족도 아닌 그들이 같이 있는 걸 본 에리한은 눈썹을 한번 꿈틀했지만 이내 표정을 감춘 뒤 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 오늘은 왕자를 위한 무도회인데 주인공이 늦으면 안 되지. 근데 너와 함께 온 숙녀분은 누구인고?”
자하만 백작과 같이 있는 자리가 못마땅했던 왕 도이첸은 에리한와 함께 들어 온 소리오닌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홀 중앙에서 무도회를 구경하느라 바빠 보였다.
에리한은 왕의 물음에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소리오닌을 한 번 쳐다본 뒤 슬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초크센의 공녀 소리오닌 알몬느라고 합니다. 제가 초대했습니다.”
에리한의 입에서 초크센이란 단어가 나오자 소리오닌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무, 무슨! 지금 왕자님의 성인식에 직접 초크센의 공녀를 초대했다는 것입니까?”
“아……. 말도 안 돼!”
자하만 백작은 얼굴이 벌게진 채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저 여자에게 밀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는지 위나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비 또한 에리한이 정말 앞뒤 생각 없이 저 공녀를 데려올 줄은 몰랐기에 아들의 행동에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왕비와 측근들이 시시각각 보여주는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도이첸은 그들에게 비웃음을 지은 후 일부러 소리오닌을 보며 얘기를 이어갔다.
“저 숙녀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는가?”
“몇 달 전 포크힌에서 어깨를 다쳤을 때 저를 도와주신 분입니다.”
“호오? 비록 초크센에서 온 사람이긴 하지만, 너의 은인이로구나! 편히 즐기다 가시라고 전해 주거라.”
“네, 알겠습니다.”
에리한과 왕의 대화를 듣고 있던 왕비가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는지, 자신의 아들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아무리 왕자에게 은인이라 해도 엄연히 저희에게 속한 국가의 국민인 것을. 다른 나라 손님들도 많이 오신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감사의 표현은 개인적으로 하도록 하세요.”
“그, 그렇습니다, 왕자님. 오늘 무도회는 왕자님의 성인식이자 왕자비가 될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인데. 너무 경솔하셨습니다.”
왕비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자하만 백작도 그녀의 옆에서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에리한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들이 걱정하는 건 국격을 떨어트리는 여자를 데려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아마 그들 가문에서 왕자비가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겠지.
왕비와 백작의 시커먼 속이 빤히 보였지만 에리한은 모르는 척 그들에게 화사한 미소를 보이며 명심하겠다는 대답을 전했다.
“그럼, 잠시 손님들을 뵙고 오겠습니다.”
에리한은 자신의 자리에 앉지 않고 바로 홀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무리 귀찮아도 성인식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는 해야 했다.
“에리한 님!”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도회 홀로 나가려는 에리한의 뒤를 위나가 황급히 쫓아갔다.
“아, 네. 위나 님.”
“오늘 성인이 되시는 걸 정말 축하드립니다.”
볼을 발갛게 붉히고 그를 올려다보는 위나 자하만의 모습은 그녀가 입은 핑크색의 드레스와 정말 잘 어울려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왕비와 그 친척들 등쌀에 질린 에리한이 느끼기에는 자신을 옭아매기 위한 도구로 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짧게 인사를 마친 에리한은 가던 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에리한의 태도에 순간 자존심이 상한 위나는 빨간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자신의 시야를 벗어난 에리한을 찾던 위나 자하만은 아직 홀 중앙에 있는 소리오닌을 발견하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한편, 소리오닌은 여기저기서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해 오는 상황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소리오닌 님, 맞으시죠?”
“네? 네…….”
“저번에 저희 집에서 일하는 시녀장이 그 집에 가서 팔꿈치가 완전히 나아서 왔잖아요! 팔꿈치 때문에 몇 년을 고생했는데……. 소리오닌 님 덕분에 요즘은 팔팔 날아다녀요.”
“아, 그랬나요? 다행이에요.”
인상 좋게 생긴 무인의 칭찬을 시작으로 물밀듯이 몰려들어 그녀의 치료에 대한 간증을 떠들어 댔다.
대부분 직접 왔던 사람들이 아니고 소문으로만 들어서 그런가, 나오는 주제가 점점 과장되어 가긴 했지만. 나중에는 소리오닌이 손만 대도 빛이 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