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에리한이 소리오닌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읊조리자, 그의 손바닥에 있던 빨간 리본이 하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코 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아서 소리오닌은 자신도 모르게 얼른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였다.
대박……! 에리한이 마법도 쓸 줄 알았어?! 그동안은 그냥 몸 쓰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한 에리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그가 주문을 외는 것과 동시에 빨간 리본이 나풀거리며 춤을 추더니 꽃 모양으로 변해 소리오닌의 머리 위를 살랑거리며 돌아다녔다.
“웬일이야, 너무 예뻐요! 에리한 님, 마법도 할 수 있었어요?”
눈으로 하늘거리는 리본을 쫓으며 함박웃음을 짓는 소리오닌의 물음에 에리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희 집안에는 대대로 마법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힘을 강하게 물려받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라뇨, 엄청 대단한데요? 진짜 멋있다. 에리한 님, 이걸로 돈 벌어도 될 것 같은데요? 이벤트 회사, 그런 거!”
돈이야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평생 펑펑 써도 남아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에리한은 딱히 그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리본이 다시 에리한의 손바닥으로 살며시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리본을 받아 든 그가 소리오닌에게 리본을 건넸다.
“이거, 선물입니다.”
“어? 아녜요, 오늘은 뭐 치료해 드린 것도 없는데……”
선뜻 받아 들지 못하는 소리오닌의 손에 리본을 쥐어준 에리한이 별 거 아니라는 듯 얘기했다.
“비싼 거 아닙니다. 누이가 사용하지 않는 거라 받아 왔을 뿐이에요. 부담 갖지 마십시오.”
“음…….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린셀이 들으면 까무러칠 말이었지만 에리한은 어떻게든 소리오닌에게 리본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고 말았다.
소리오닌 역시 에리한의 담담한 말투에 그 리본이 돈 주고도 못 구한다는 물건인 줄 꿈에도 생각 못한 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그럼 본격적으로 무도회 준비를 하러 가실까요?”
에리한이 상점가에 위치한 드레스 가게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아, 맞다! 우리 오늘 무도회 준비하러 온 거죠? 깜빡할 뻔했어요.”
에리한의 말을 듣고서야 오늘 나온 목적이 생각난 소리오닌이 그를 따라 드레스 가게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장미향이 확 풍겼다. 온갖 화려한 드레스들이 가득 찬 가게 안의 모습에 소리오닌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처음에는 옷이 엄청 불편하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제대로 갖춰 놓은 드레스들을 보니 자신도 여자인지라 눈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 소리오닌 님?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아, 안녕하세요! 손은 좀 괜찮으세요?”
“네, 지금은 멀쩡해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시간에 맞춰서 납품할 수 있었답니다!”
전에 자신이 손목을 치료해 준 여자가 이 드레스가게의 사장이었나 보다. 소리오닌을 반갑게 맞은 사장은 무도회 얘기를 듣고는 본인이 더 신나는 표정으로 그녀를 데리고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홀연히 사라져 버린 두 사람을 본 에리한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드레스는 직접 골라 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소리오닌의 인맥이 두터운 덕분에 자신이 나설 타이밍을 뺏겨 버렸다.
흠……. 어쩔 수 없지. 에리한은 로비에 앉아서 소리오닌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가게 안의 여성들은 자기네들끼리 호기심이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저 남자는 누구야? 흑발 좀 봐, 정말 잘 어울린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지 않아? 저런 얼굴이 어디에 또 있겠어, 진짜 잘생겼어!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이 그를 주제 삼아 속닥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리한은 그저 드레스를 입은 소리오닌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
소리오닌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온 사장이 샘플로 만들어 놓은 드레스를 뒤적이며 물었다.
“근데 어느 무도회에 가시나요? 요즘은 왕궁에서 하는 무도회를 준비하느라, 귀족가에서 하는 무도회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네, 맞아요. 저 궁에서 하는 무도회 가요!”
“네에? 어머, 어머! 어떻게 초대 받으셨어요?”
궁에서 하는 무도회에 간다는 그녀의 대답에 크게 놀란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어, 저랑 같이 온 분 보셨죠? 그분께서 궁에서 일하시는 분이라 초대해 주셨어요.”
“아, 그 잘생기신! 어머, 설마…… 두 분이 교제하시는 건가요?”
사장은 소리오닌의 옆에 꼭 붙어 있던 흑발의 잘생긴 청년을 떠올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웃음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소리오닌이 손사래를 치며 웃기 시작했다.
“아녜요, 저렇게 큰 덩치로 얼마나 많이 아픈지……. 매번 다쳐서 우리 집에 오시는 단골 환자랍니다.”
“흐음……. 그래요?”
“네. 이번 무도회도 저분의 상관이 초대한 거라고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그러면 소리오닌 님 소문 듣고 부르는 건가 봐요.”
“소문이요?”
이건 또 무슨? 설마 그 소문이라는 게…….
“네, 네. 소리오닌 님, 그 묘한 재주 있잖아요! 손만 닿으면 다 낫게 해 주는.”
역시나군. 일일이 아니라고 변명하기도 지친 소리오닌은 그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에 가서까지 치료해 줘야 하는 건가? 심란하네…….
“음……. 오, 여기 있다! 소리오닌 님, 이거 어떠세요?”
소리오닌이 무도회에 가서 어째야 하나 걱정을 하고 있는 사이, 사장은 옷장 끝에서 드레스 한 벌을 가지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우왓, 정말 예뻐요! 직접 만드셨어요?”
“그럼요! 소리오닌 님 눈 색이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 번 거울로 보실래요?”
사장이 이끄는 곳으로 간 소리오닌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무도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드레스뿐만 아니라 구두와 악세사리까지 한 짐 가득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저녁이 다 된 시간이라 집에 들어가기도 애매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인사를 했다.
“아마 제가 무도회까지는 바빠서 못 올 것 같습니다. 그 날은 시작 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근데…… 혼자 준비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드레스 가게 사장님이 도와주신다고 했어요. 걱정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리한은 소리오닌을 향해 싱긋 웃은 뒤 등을 돌려 성으로 향했다. 평생 잊지 못할 무도회가 되겠군…….
***
“이게 뭐야? 내가 분명히 황금빛 드레스를 가져오라고 했잖아!”
자하만 위나는 시녀가 가져 온 핑크빛의 드레스를 바닥으로 집어던지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왔다. 그에 버금가는 새빨간 입술은 반짝이며 하얀 얼굴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줬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올라간 눈썹과 치켜 뜬 노란 눈은 짜증을 내고 있는 그녀의 인상을 더 무섭게 만들고 있었다.
“그, 그게 이번 무도회에 같은 색을 원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아가씨가 말씀하신 드레스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방에 모여 있는 시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시녀가 앞으로 나서며 얘기했다. 오늘 열릴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아침에 갑자기 바꾸라고 하면 대체 어디서 가져온단 말인가!
분명히 그녀가 원하던 드레스와 장식으로 몇 주 전부터 준비해 뒀었다.
이제 와서 온갖 걸로 트집을 잡기 시작하니 시녀들은 억울해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손이라도 날아올까 봐 아무 말도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위나는 방에 있는 물건들을 던지며 한바탕 난리를 친 다음에야 다시 핑크색 드레스를 입으며 무도회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왕자님께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야 하는데! 안 그래도 요즘 왕자가 어떤 여자한테 푹 빠져 있다는 소문이 들려서 하루하루가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분명히 귀족은 아닐 거야. 왕자의 관심을 받고도 조용히 있을 것들이 아니니까. 그럼 대체 누구인 거지? 설마 무도회까지 초대한 건 아닐 거야. 왕자가 나한테 그럴 수는 없어!
똑똑.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무도회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의 방에 자하만 백작이 들어왔다. 그는 새초롬한 장미처럼 예쁘게 빛나는 자신의 둘째 딸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위나. 오늘 정말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아버님, 열심히 준비하기는 했는데 왕자님 맘에 들지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냐! 너보다 예쁜 여자는 없어. 걱정 말거라.”
자하만 백작의 말에 수줍은 웃음을 짓던 위나의 얼굴이 곧 우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자, 자하만 백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위나를 바라봤다.
“아버님, 사실…… 제가 소문을 들었습니다. 왕자님께서 다른 여자를 맘에 두고 있다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왕자님만 바라보고 오늘만 기다렸는데……. 어쩌죠?”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오른 위나의 모습에 자하만 백작은 기분 나쁜 말을 들은 듯 미간을 좁혔다.
“위나. 그건 그냥 소문일 뿐일 게다. 그리고 그 소문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왕자비의 자리는 어차피 너의 것이야. 이 아비와 왕비님을 믿어. 그딴 소문 신경 쓰지 말고 왕자님께 예쁘게 보이는 것만 신경 쓰거라. 걱정하지 마렴.”
“정말인가요? 그러면 좋겠지만…….”
“그럼! 정말이지, 너무 걱정하면 예쁜 얼굴에 주름이 생기니 그러지 말거라.”
자하만 백작은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로 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위나는 언제 울먹였냐는 듯 새침한 웃음을 지으며 백작의 팔에 매달렸다.
“역시, 저는 세상에서 아버님이 제일 든든하답니다! 정말 감사해요. 오늘 확실히 왕자님 눈에 들게 잘할게요!”
“허허. 그래, 내 딸은 잘할 거야! 네가 아니면 누가 바론의 차기 왕비가 될 수 있겠니.”
“어머, 아버님도 참. 너무 띄우지 마셔요!”
자하만 백작과 위나는 둘만의 세상에 빠져 왕자의 옆자리는 자하만 가의 것이라는 걸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무도회는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첫 걸음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