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내 이능력은 기억을 가진 환생, 영원한 삶이거든.”
“하핫, 참. 이 할머니가 진짜.”
“….”
“아니 좀 그럴싸한 거짓말이면 또 몰라, 어디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늘어놔요. 그런 건 속아줄 기분도 안 든다구요.”
“….”
“당신이 환생자라구요? 그럼 나는 빙의잔데. 빙의 알아요? 소설 속 인물에 빙의하는 건데, 이게 지금 그 소설 속이거든요?”
“….”
말을 두두두 늘어놓는 나를, 벨라야는 꼭 어깃장을 놓고 깐족대는 아이를 보듯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건 자기면서, 기억을 가진 환생이라니. 너무 당황스럽잖아.
“당신 정체가 뭐야, 그날 이곳으로 날 날려 보낸 게 당신 짓이야?”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벨라야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어떻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된 건지, 그건 나도 몰라. 내 힘이 아니니까. 다만 너를 꿈에서 봤을 뿐이야.”
벨라야의 설명은 이랬다.
그날 벨라야는 여느 때처럼 이른 시각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잠에 빠져들었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잠들기가 어려웠단다.
그리고 어렵게 잠을 청했을 때, 그녀는 꿈속에서 동제국의 수도를 보았다 했다.
오래전 그녀가 알던 동제국 황실.
그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외양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벨라야는 꿈속에서 동제국 황실과 수도를 마음껏 걸어 다녔다.
그리고 갑자기 마물로 변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만이 투명인간처럼 홀로 서 있었다.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더라고, 이상했지. 꿈속이라 그런가? 그러다가 널 봤어.”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알았다고 했다.
저 녹색 눈의 아이, 치료제구나.
미안한 마음에 내가 치료제의 꿈을 꾸는 거구나.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마지막으로 벨라야는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틀 후에 이렇게 너를 만난 거야.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처음엔 확신할 수 없어서 말하지 못 했는데, 방금 너와 닿고 나서 모든 게 명확해졌어.”
긴가민가 확신할 수 없는 건 바로 나였다.
이 할머니가 그 날의 상황을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거지?
나는 지금 요물에게 홀리고 있는 건가?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벨라야의 말이 모두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여자가 치료제라면, 어쩌면 저주를 풀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거잖아?
“차분히 들을 테니까,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요.”
“그래.”
그 뒤로, 벨라야의 길고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면서 내가 내린 저주에 고통 받는 이들을 보았어.
내 피를 이은 아이들과 그의 짝인 치료제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단다.
처음엔 가까이서 봤어, 황궁 시녀로 들어갔었거든.
그 남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시 태어나서 자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황궁으로 갔지.
그 남자의 얼굴을 빼다박은 아이, 그리고 동시에 내 얼굴을 빼다박은 아이가 고통 받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치료제가 죽는 것도.
기분? 이상했어, 별로에 가까웠다.
그에게 죽고 환생해서 십여 년이 흘렀을 때, 내 아이는 성인이 되어 있고 그 남자는 제 잘못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들을 지켜보며 견디기 힘들어 하더구나.
괴로워하는 그 얼굴, 그 표정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마지막엔 내가 그를 죽였어.
내가 리베르 5세를 독살한 시녀였거든. 물론 나도 사형 당했지.
리베르 황족들이 어렸을 때부터 독에 내성을 기르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지 아마.
그리고 그 남자가 죽고 없어진 세상에 다시 태어나 그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이 저주에 시달리는 걸 지켜보았단다.
기분이 좋지 않았어.
내 복수의 대상은 이미 없는데, 죄 없는 아이들과 치료제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서 나야 말로 더 큰 죄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거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고?
미안, 내 능력은 환생뿐이야.
그래서 난 황가가 보이지 않는 서제국으로 도망을 왔단다.
보지 않으면 생각나지도 않을 테니까.
그런데 오늘 이렇게 널 마주하고 말았구나.”
“….”
그녀는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낯을 들고 마주하기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순간 살짝 길어진 입매가 그녀가 민망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날 보는 게 민망해요?”
“당연하지, 나는….”
“당신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지금은 민망하고 말 때가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할 때에요.”
“….”
내 말에 흠칫 시선을 떨어트린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단다. 변명하자면 그때는 그 남자도 그의 소원도, 그 모든 것들을 망가트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래서 그랬어. 이런 미래일 줄 몰랐다. 내 저주로 인해 희생될 여자들은 생각도 못 했어.”
“그럼 도망가라는 목소리, 당신이었나요?”
동제국에 있을 때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벨라야의 목소리와 결이 달랐고, 여럿의 목소리이긴 했지만 혹시나 그녀가 포함돼 있지 않을까 싶었다.
“목소리? 아니, 아마 나는 아닐 거야.”
“….”
서서히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긴 설명 속에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할 내용이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내용이라 끝에 가서 말하려는 거겠지, 방법이 없기 때문은 아닐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힘을 내 그녀에게 질문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꽁꽁 숨어 있던 거죠? 원하면 언제든지 정체를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요.”
“내 계속 되는 환생이라는 속성이 다른 것과 섞이면 그것에도 어떤 영원성의 성질이 생겨나는 모양이야. 나와 섞인 리베르의 이능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잡혀가서 이용당하고 실험당하고. 그런 걸 자주 겪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 또 다시는 싫었어. 그래서 꽁꽁 숨어 살았어.”
“….”
“근데 들리는 거야. 내 저주 때문에 아무 죄 없이 희생된 아이들의 원성이.”
몸을 일으킨 벨라야가 다가와 내가 앉아 있던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안하구나.”
“….”
멋대로 오열을 시작한 그녀 앞에서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또 누가 노크도 없이 멋대로 문을 열었다.
빛이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니, 로건 역시 벙찐 표정으로 방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
“분명 사과를 받았는데 더 나빠져 버린 이 기분은 뭘까요.”
“….”
벨라야가 나간 방엔, 나와 로건 둘이 우두커니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나였다.
“내가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저 여자와 관련된 거였다니.”
벨라야가 그녀의 능력을 이용당한 것은 동제국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운 좋게 귀족으로 태어났을 경우, 그 이후의 삶을 위해 부를 축적했다.
가난한 이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그전에 모았던 돈을 찾았다.
그러다 꼬리가 밟히고 만 것이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람이 죽은 이가 숨겨놓은 돈의 위치를 알고 찾아가는 모습을 누군가 주목했다.
그때 벨라야는 서제국 황실에 죽임을 당하고 몸을 빼앗긴다.
오래전부터 의사소통이 가능한 마물 병사를 연구하던 서제국은 그녀의 몸을 연구에 이용한다.
벨라야의 몸의 일부가 독약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그전까진 사람의 몸에 달라붙지 않고 사라져버리던 마물의 기운이 사람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에겐 한 가지 선택지가 더 생겼어요.”
“….”
전쟁에 이용할 마물을 만들어내는 독약을 성공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서제국의 막내 황녀가 실수로 독약을 마시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아주 소량이었으나 어린 소녀의 몸은 흉측하게 일그러졌고, 서제국 황실에겐 마물화된 사람을 원래대로 돌리는 해독제 따위 없었다.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몰라요. 확신하진 못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말을 하더군요.”
서제국 황실이 가진 성물 중 하나가 필요한 일이었다.
벨라야는 자신과 그 성물이 갖춰지면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했다.
“어떻게 할래요, 로건.”
“….”
“첫 번째 선택지는 원래의 방법이에요. 나일에게 돌아가 그를 완전히 치료하고 전 죽는 거죠. 이 방법의 장점이라면 해왔던 방법이라 익숙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없다는 거죠. 적어도 그는 확실하게 치료되고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거예요. 단점이라면 저주의 근본을 없애버린 것은 아니니 리베르 황가는 계속 나와 나일, 당신 같은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는 점이겠죠.”
“….”
“두 번째 선택지는 서제국의 막내 황녀를 치료하는 대가로 성물을 받아내 저주를 아예 뿌리 뽑는 방법이죠. 이 방법의 장점이라면 리베르 황가는 기나 긴 저주를 이번 대에서 끝내버릴 수 있다는 거죠. 단점이라면 백 퍼센트 확실한 방법은 아니라는 거예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건이 말을 얹었다.
“두 번째 선택지엔 장점이 하나 더 있잖아.”
“있죠.”
“….”
“어쩌면 내가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
“난 두 번째 방법이 끌리는데 당신은 어때요.”
“….”
확실한 방법과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방법.
불확실한 것을 싫어하는 로건의 성격대로라면 그는 첫 번째 방법을 골라야 했다.
내 목숨에 거는 가능성보다 그는 확실하게 나일을 살리는 방법을 선택할 거라 여겼다.
“나도 두 번째가 마음에 드네.”
“….”
“아마 나일도 그렇겠지.”
“좋아요. 그럼 우리 목적지를 바꾸죠.”
*
서제국 황실이 비밀리에 진행해 온 마물화 연구의 피험체들은 대부분이 불우한 자들이었다.
보육원의 어린아이들처럼 부당한 일을 당해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 하는 고아들, 심지어는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파악이 어려운 자들.
그러나 운 나쁘게도 피실험체들 중엔, 끔찍한 일을 당한 내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를 가진 이들도 여럿이었다.
신체의 일부분이 괴물로 변한 내 자식이 끌려갈까 봐 대놓고 소리 내지는 못 했으나, 그들은 암암리에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내 자식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비슷한 증상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더라, 그들이 치료를 위해 어떤 시도를 했고 또 효과는 어떠했다더라.
혹시라도 치료법이 있지는 않을까 그들은 늘 세상을 향해 귀를 열고 살았다.
그리고 듣게 된 것이다, 홀연 나타난 마법사가 마물로 변한 아이들을 치료해준다더라.
그런데 이제껏 그 어떤 마법사도 하지 못 했던 일인 만큼, 이 치료는 마법사의 몸에 굉장한 무리가 되는 일이라고 한다.
하여 마법사가 치료해줄 수 있는 아이의 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더라.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제 몇 자리 남지 않았을 치료 기회를 얻기 위해 다급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값비싼 것들을 챙겨 들고서 마법사가 머물고 있다는 마을을 찾았다.
- 황금을 이만큼이나 가져왔소. 내 아이부터 치료해주시오.
- 순서를 어길 생각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당신의 아이에겐 차례가 돌아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이 정도 황금으로는 부족한 것이오? 그럼 내 집도, 땅도 다 드리리다.
그 마법사는 황금도 보석도 땅도, 그 무엇을 내밀어도 받지 않는다더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몇 자리 안 남은 치료의 기회를 내 아이에게 돌릴 수 있단 말인가.
그 마법사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황금도 보석도 원치 않는다면 황제가 온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치료를 원하는 자들의 마음은 들끓었다.
그리고 그들 중, 내가 원하는 자의 마음 또한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