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제 발로 올까 싶다.”
“….”
햄과 치즈가 두툼하게 썰려 들어간 샌드위치를 베어 물기 전, 로건이 중얼거렸다.
가까이 앉은 나를 힐끔 바라보며 그는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아니, 맹맛이야. 서제국놈들 입맛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치즈를 이렇게나 많이 넣었는데도 맛이 안 느껴져. 이게 치즌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 로건이 불쑥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맛볼래?”
베어 물었던 잇자국이 선명한 샌드위치를 보고서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우리가 한 음식을 사이좋게 나눠 먹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로건은 한 치의 머쓱함도 없는지 넉살 좋은 표정으로 내밀었던 샌드위치를 도로 가져갔다.
“그 말엔 나도 공감을 하는데, 이곳에서 동제국에서의 경험을 공유할 상대는 안타깝게도 너 하나뿐이잖아. 내 처지도 좀 생각해 줘.”
“….”
그러더니 로건은 맹맛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먹고 나서 가볍게 손을 턴 그가 말을 이었다.
“너는.”
“저요?”
“너도 뭘 먹어야 하지 않겠냔 소리야.”
“….”
음식 말고 다른 그것.
그것으로 포만감을 채워버리면 내 안의 다른 무언가가 텅 비어갈까 봐 도저히 가득 채울 수 없는 그것을 로건은 말하고 있었다.
“나 적당히 타협했어요. 치료해주면서 조금씩.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니까. 이 정도는 받기로 했어요.”
변명처럼 말해놓고 민망함이 올라와 고개를 수그리자.
“발전했다, 너.”
그가 가볍게 내 이마를 톡 쳤다.
“잘했다는 소리야.”
“….”
“잘했어.”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비난 중이긴 했지만, 타인에게서는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다.
이유야 어쨌든 잘했다는 말과 함께, 내게 닿는 것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그의 행동이 조금은 내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 준 건 사실이었다.
“언제 오려나… 너 정말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로건이 묻는 대상은 서제국의 황족이었다.
“더 급한 쪽이 움직이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난 내가 급하다는 티를 낼 생각이 없어요. 우리가 얻어내야 하는 물건은 그들에게도 하나뿐인 물건이에요. 성물의 능력을 한 번 사용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기까지는 성물마다 달라도 최소 1년은 걸리잖아요. 그 능력을 빌리는 일이니까요. 쉽게 내주려 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먼저 제안하는 쪽이 더 급하다는 걸 드러내고, 그럼 더 큰 걸 걸게 될 거예요. 근데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한정돼 있잖아요.”
“서제국의 황제는 막내 사랑이 대단하다 하니 더 여유를 부려보자고 그럼.”
“근데 왜 여태껏 동제국은 그 성물을 이용할 생각을 못 한 거예요? 무력으로라도 빼앗아 왔어야죠.”
되게 멍청이들 같아,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로건은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성물이 발동하려면 실행자가 직접 해야 한다고. 몇백 년 전 인물이 현존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 것 같아?”
“….”
하긴, 너무 단박에 납득을 해버려서 할 말이 없어졌을 때였다.
“마법사님.”
“응?”
브로도가 살짝 문을 열고 들어와 예의 바른 자세로 섰다.
“벨라야 할머니께서 손님을 맞고 계신데요.”
“그런데?”
나대신 전면에 나서서 손님을 맞고 있던 건 벨라야였다.
치료만 해주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주겠다는 말에도 우리는 족족 거절로 손님을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손님이 얌전히 체념하고 돌아가는 경우, 벨라야는 딱히 나와 로건을 찾지 않았다.
“두 분께서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고 전해 달라셨어요.”
“손님 봤어? 어떻게 생겼지?”
“음… 머리가 허옇게 센 할아버지였어요.”
그 소리에 로건이 벌떡 몸을 일으키곤 바람 빠지듯 웃음을 흘렸다.
“맞네, 대단한 막내 사랑. 가지.”
“근데 만나도 되는 거예요?”
“뭘?”
방을 나가다 말고 로건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당신과 서제국의 황제요. 전쟁 중에 나일은 후방 기지에 머물며 전략을 짰다지만, 동제국 황제와 당신은 전장을 누볐잖아요. 당신이 그의 외모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도 당신을 알아볼 수 있지 않냐는 말이에요.”
로건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를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2황자야 종전 협상에서 만났다지만 황제는 만난 적 없어.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것뿐이야. 그도 내 정보를 가지고 있겠지만 은발에 벽안이라고 해서 다 나인 건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 서제국 황제는 동제국 황제처럼 직접 전장을 누비는 타입이 아니니까.”
“….”
“만약에 알아보면 오늘 이곳이 2차 대전의 발발지가 되겠지.”
웃으라고 한 농담이 분위기를 싸늘하게 얼렸다는 걸 깨닫고도 로건은 히죽 웃음 지을 뿐이었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안 되면 죽기밖에 더하겠냐고.
“후….”
점점 어깨를 짓누르는 긴장감을 한숨으로 털어버리고 복도를 걸었다.
*
응접실로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브로도의 말대로 머리가 잿빛으로 세어버린 노년의 남자였다.
젊었던 시절에는 진한 갈색 머리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회색빛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갈색빛이 얼룩지듯 남아있었다.
그러나 올려 뜨는 보라색 눈동자만은 빛바래지 않아서, 맞춰오는 보랏빛 시선이 꿰뚫듯 날카로웠다.
“소문의 마법사시군.”
그의 말과 함께 등 뒤로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응접실 안엔, 나와 로건, 벨라야, 그리고 서제국의 황제, 그의 보좌관으로 보이는 자까지 총 다섯이었다.
황제가 준비된 차 한 모금과 함께 미소를 머금었다.
“….”
나는 고개를 깊게 숙이는 것으로 예를 다했다.
그가 일개 귀족이었다면 충분했을 테지만, 양분된 대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서제국의 황제를 상대로는 턱없이 부족한 인사법이었다.
나는 서제국 사람이 아니니 당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그러니 당신이 내게 무엇을 원하든 쉽지는 않을 것이란 예고였다.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너무 건방졌으려나?
아이 그럼 죽지 뭐, 흡혈귀처럼 사는 것도 지겹다, 라는 게 그때 내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보랏빛 시선이 나를 몹시 흥미로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만나서 반갑소. 내가 누구인지는 칼빈 부인이 보낸 아이를 통해 들었을 테니 더 말은 않지.”
“….”
칼빈 부인은 벨라야를 뜻했다.
긍정의 의미로 침묵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목적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요건부터 말하지.”
“….”
“내 딸을 치료해 줘야겠소, 어디서 왔는지 모를 마법사.”
거절의 말을 내놓기도 전에 서제국 황제의 보좌관이 움직였다.
응접실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 위로 종이와 깃펜이 올라왔다.
“듣자 하니 황금도 보석도, 그 무얼 가져와도 내친다 들었네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만 가지 물건 중에 원하는 것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대는 인간이오, 신이오?”
“….”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 말을 잘 경청하고 있는 그 태도로 보아 그대가 신은 아닌 것 같소.”
아, 이 사람 2황자의 아비 되는 자였지.
묘하게 사람 기분을 긁어대는 말투에서 그 자식놈이 떠올랐다.
그가 테이블 위 종이를 주름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기 원하는 걸 적으면 내 준비하지. 원하는 게 있어야 할 거야.”
“….”
“내가 그대에게 원하는 게 있으니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종이를 잠시 바라보았다.
저 흰 종이 위에 성물의 이름을 적으면 과연 그가 “마법사가 원하는 게 있어서 참 다행이구만.” 반가워하며 성물을 내어 줄까.
적막 속에서 나를 지켜보는 벨리야와 로건의 시선을 느꼈다.
나는 말없이 테이블 위 종이를 집어 들었다.
“서제국의 황제시여.”
“….”
“원하는 걸 들어주신다 하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황제께 원하는 게 없습니다.”
황제의 보좌관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울렸다.
원하는 게 없다는 내 대답은 나 네 딸 치료 못 해, 라는 말과 같았으니까.
나대신 내가 든 종이를 노려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계속 그의 아들을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마법사.”
“….”
“방금 그 대답은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충분해야 할 거야.”
황제도 아픈 딸 앞에서는 속이 타는 아버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짐작은 어느 정도는 맞아 들었다.
치료를 할 수 있다는 마법사를 데려오기 위해 대리인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던 서제국의 황제는 이곳에 직접 방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놓친 사실이 있었으니, 그가 2황자 테오 세리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2황자의 꼬인 성격이 황제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순순히 내어주지 않을 것 같아.’
종이에 성물을 적었을 때, 황제가 쉽게 그러겠다 말한다면 문제 될 게 없겠으나 아닌 경우라면 곤란해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적힌 성물을 보고 황제가 “이건 네가 원한다 해도 쉽게 내어줄 만한 물건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한 번 거부한 제 의사를 번복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예감이었다.
이미 한 번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성물을 고집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나겠지.
딱 한 번 거절당하면 그걸로 끝일 거야.
‘어쩌지, 어떻게 백 퍼센트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을까.’
“신중한 건 참 좋은데 말이야, 기다리는 건 지루한 일이야. 마법사.”
꼈던 손깍지를 풀며 황제가 내게 시선을 던졌다.
“저는 제국이 아닌 작은 왕국에서 태어나 세상을 돌고 있는 마법사입니다. 제 작은 손에서 피어나는 마법이 신기하고 또 신비롭습니다. 내로라하는 서제국의 마법사들도 하지 못 했던 치료를 제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제가 마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저는 제 마법을 발전시키는 일 외에는 원하는 게 없습니다. 마법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물건은 황금도 보석도 땅도 아니죠. 세상의 다양한 마법을 보러 돌아다녀야 하니 땅은 불필요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과 보석이 있어도 마법을 살 순 없죠. 제가 마법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그게 뭐지?”
그가 답을 재촉해왔다.
‘황제가 내 요구대로 성물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야만 해.’
헌데 그런 게 있나?
내가 적는 게 아닌, 저쪽에서 먼저 내게 성물을 주겠다 말하게 할 수는 없을까.
상대방이 먼저 제안하는 일이야말로 백 퍼센트 거절당하지 않는 일이잖아.
“접니다. 마법을 계속 해나가려면 그 실행자인 제가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만 하죠.”
내 대답이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콧방귀를 뀌는 것으로 시작한 황제는 곧 대소했다.
“푸하하핫, 여러 의미로 아주 대단한 마법사구만.”
이 다음 순간이 중요했다.
슬쩍 로건을 바라보자, 계획과 다른 말을 내뱉는 내게서 불안을 느꼈는지 그가 입을 벙끗거리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입니다. 제가 폐하께서 제안한 일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