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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06)화 (106/134)

106화

아까 자신이 공중에서 다리를 잡고 매달린 탓에, 무릎 위까지 올라가 있어야 할 스타킹이 종아리 중간에 걸려있었다.

손가락을 한 개 걸어서 잡아당기는 것만으로도 헐렁하게 늘어난 스타킹이 힘없이 끌려 내려왔다.

그런데.

“….”

사라졌는지를 확인하기 전에, 어떻게 행동할지부터 정확히 정하는 게 먼저가 아닌가.

만약 문양이 남아있다면 살려서 나일에게 데려가야 했다.

필사적으로 매달린 이유는 그것이었으니까.

그럼 사라졌다면? 음….

사실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답은 명확했다.

깨끗한 발목을 두 눈에 담는 순간 제거한다.

아, 그러니 어쩌면 이 여자가 지금 눈을 감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로건이 미처 다 끌어내리지 못 했던 스타킹을 잡아당겼다.

희미하지만 분명 남아있는 문양을 확인하고 로건이 말을 잃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

남아있었군.

그럼 정해진 거네.

“으….”

때마침, 소동물처럼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여자가 인상을 구겼다.

잔뜩 찡그린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누운 제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곤 이내 벗겨진 제 스타킹을 확인하고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다가, 발목에 문양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채 버린 모양이었다.

발목을 보며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여긴 어디야.”

“…?”

정신을 차리고 나서 로건과 눈이 마주친 후, 그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황궁에서 이곳으로 이동한 건 너잖아.”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가 참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여기로 도망쳤잖아 너. 아무 능력도 없는 줄 알았는데 방심했어. 마법을 사용할 줄이야.”

“….”

도망쳤다는 말에는 당당하게 아니라고 받아칠 수가 없었지만 그 뒤로 이어진 말에는 아니었다.

“나도 내가 이런 거면 좋겠네. 마법도 쓸 줄 알고.”

“….”

“그 이상한 빛도 모르겠고, 여기가 어딘지는 더 모르겠으니까 나한테 묻지 마요. 그렇지 않아도 짜증나니까.”

쳐다보면 알 수 있냐?

눈에 거짓말 탐지기라도 다셨나 봐.

“후, 도대체 뭐야 그럼.”

로건은 자신을 노려보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잠시 후 시선을 돌렸다.

눈빛이 마치 거짓말만 늘어놓는 범죄자를 취조하는 형사 같았다.

“깬 지 얼마나 된 거예요?”

“뭐가.”

“당신이 나보다 먼저 깬 거 같은데 정신 차린 지 얼마냐 됐냐구요.”

“이삼십 분.”

주섬주섬 일어나 옷에 달라붙은 풀을 털어냈다.

동부기지에서 날 치료해주었던 사제가 건네준 옷이었다.

“당신도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거죠.”

대답하지 않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해가 높이 솟아있었다.

눈을 뜬 지는 30분이 흘렀지만, 이상한 빛에 휘감긴 그 순간으로부터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까맣던 밤에서 낮이 되어버렸으니.

“앞장서.”

멍히 서 있는 내게 로건이 턱짓했다.

그의 턱이 가리킨 끝에 숲길이 보였다.

“나도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은 아닌데, 왜 내가 앞장을 서야하죠?”

“내가 널 못 믿으니까.”

“….”

“네가 그 작은 머리통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지, 얌전히 다시 나일에게 돌아가 내 말대로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안 보이잖아 내 눈엔.”

“….”

“숲을 빠져나가는 동안, 내 앞에서 네가 걷는 꼴을 봐야겠으니 앞장 서.”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척,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가다 홱 돌아서서 로건을 노려보았다. 

“앞장은 당신이 서. 위험한 숲인지도 모르는데 앞에 가다 뭐라도 튀어나와서 내가 죽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

비틀리려 하는 입매를 애써 숨기는 남자의 표정이 보기 좋았다.

“방금 봤잖아? 아직 발목에 있는 거. 날 소중히 모셔야지. 안 그래?”

“….”

노려보는 눈길에 맞대응하던 로건이 날 비껴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아주 귀하신 몸이지. 보이지 않아도 발걸음 소리 다 들리니까 늦장 부리지 말고 붙어서 따라와. 한눈팔지 말고. 네 말대로 모르는 숲이니까 말야.”

바스락바스락 남자가 부츠로 풀을 밟으며 걸어 나갔다.

상대가 하든 내가 하든 비꼬는 말은 한 번으로 족했다.

사족을 붙일 기운이 없기도 했고.

여긴 도대체 어디일까.

날 이동시킨 건 그 빛일까.

지금쯤이면 황궁 앞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일은, 알렉스는.

“….”

“내가 딱 붙어서 따라오라는 말 안 했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니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진 모양이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로건과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글쎄, 했었나.”

“했어. 갑자기 튀어나오는 무언가에 죽고 싶지 않으면 딱 붙어서 따라와.”

“어, 했네. 이래도 저래도 당신이 날 죽이겠단 말은 했어. 기억나.”

“잘 기억하네.”

“….”

그가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로건의 말대로 내가 무슨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도 정말 모르겠는데.

내가 나일에게서 도망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도망가.

안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던 누군가의 도망가라는 목소리가 날 혼란스럽게 했다.

누굴까, 누구길래 나한테.

약간 떨어져서 앞서 나가는 로건은 하얀 제복 차림이었다.

그의 등에 묻은 흙먼지가 보였다.

그는 나보다 치료제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눈치던데.

‘당신, 치료제에 대해 뭘 더 알아? 알려줘.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어.’

물어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

여기가 동제국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면 좋으련만.

앞장서 걷는 까만 장화의 속도보다 조금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망할 놈의 보폭이 엄청 컸으니까.

*

조금만 가면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던 놈의 장담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기요.”

“….”

“나도 웬만하면 쉬자는 소리 안 하고 조용히 가고 싶거든요?”

“….”

“근데 다리가 너무 아파요. 좀 쉬죠.”

등 뒤로 내가 털썩 흙바닥에 주저앉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가던 걸음을 멈췄다.

쳐다보는 눈빛이 꼭, 고작 이 정도 걸었다고 앓는 소리냐?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연약한 귀족 영애, 게다가 고귀한 치료제. 당신은 튼튼한 군인. 차이가 있잖아요?”

“….”

얄미운 태도로 빈정거릴 줄 알았던 로건은 나를 따라 바닥에 앉아 등을 기댔다.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다리를 쭉 펴고 앉으니 좀 살만한 기분이었다.

“아, 진짜 다리가 욱씬욱….”

- 꼬르륵.

“….”

“….”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다 들릴 만큼 고요한 숲속이긴 했지만, 한 번이라면 어떻게든 시치미를 떼 봤을 텐데.

- 꾸르륵.

“맞네. 차이가 있네. 다리는 약해 빠졌는데 장은 건강하다 못해 아주 우렁차네.”

- 꾸륵.

좋은 사이건 나쁜 사이건 이런 건 차별 없이 민망하구나.

배에서 천둥소리가 날 만도 했다.

마지막 식사가 어제 점심이었으니, 지금까지 배고픔을 못 느낀 게 오히려 용하지.

배를 웅크리면 소리가 좀 덜 날까 싶어서, 무릎을 끌어와 등을 굽혀 앉는데 그가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되도록 근처에 있을 거야.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소리 질러.”

“나 못 믿는다며. 도망가면 어쩌려구 자리를 비워요?”

“그렇게 배고파서 도망갈 힘은 있을까 싶다.”

“….”

“소리 지를 힘은 있지? 뭐 목으로 소리 지를 힘이 없으면 네 배한테 부탁해보든가. 잘 질러줄 것 같은데.”

하, 이 공작 x끼.

*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로건의 손엔 사냥당한 토끼 두 마리가 들려있었다.

그가 너무 보는 앞에서 토끼를 분해하면 어쩌지 싶었는데, 다행히 그는 내게서 등을 보인 채 토끼를 손질했다.

“구울 거죠?”

“왜, 고기 익힘 정도도 맞춰드려?”

“아니. 당신이 손질하는 동안 불은 내가 피우려구.”

주워온 나뭇가지는 일단 옆에 잘 쌓아두고, 가장 평평하고 굵직한 가지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여기다 작은 구멍을 내서, 얇은 가지를 넣고 막 비비면.

“….”

안 되네.

그냥 연기조차 날 기미가 없군.

“뭐라도 하겠다는 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말야.”

“….”

“고기 손질이 옛날에 끝나버려서 말이지. 나와, 도움 안 되니까.”

결국 그가 불을 피우고 고기를 익혔다.

건네준 고기를 허겁지겁 먹는 내게 그가 말을 붙였다. 

“먹고 바로 일어날 거야. 어두워지기 전에 나가야 하니까.”

“어딘지 조금도 예상이 안 가요?”

고기를 발라 먹고 남은 부위를 내려놓고서, 로건은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나무들의 수형이 익숙하지 않아. 적어도 수도 근처는 아닐 거란 소리야.”

그렇구나.

반가운 소리는 아니었지만 숲을 빠져나가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동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실세를 지닌 자와 함께이니까.

“일어나죠.”

로건은 먼저 먹고서 눈으로 나를 독촉 중이었다.

그래도 고기도 구해줘, 불도 피워줘, 내 배를 채워준 게 저놈인지라 얌전히 먹고서 몸을 일으켰다.

“왜 멍청하게 서 있는 거지? 가자는 말 아니었나?”

“….”

그래, 이제 가자고 일어나자고 한 거 맞는데.

이상했다.

방금 토끼 한 마리를 잡아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속이 허했다.

왜 허기가 가시지 않은 거지?

아니 오히려 먹기 전보다 더 배가 고파진 느낌이기도 했다.

“어디 안 좋아? 얼굴이 하얗네.”

그의 말에 볼과 목을 만져보다가, 뒤통수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손을 집어넣자 식은땀이 차 있었다.

“아프면 피곤해.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나도 동의하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바람과 달리 몸이 좀 이상한 거 같아.

“가벼운 몸살이 아닌가 싶어요. 어젯밤부터 너무 긴장 상태였고 쉴 틈이 없었으니까, 이건 아무래도….”

몸살이라기엔 점점 강해지는 이 허기가 설명되지 않았지만, 몸의 상태만 본다면 몸살에 가까웠다.

“참 피곤하네. 배를 채워줬더니 이번엔 아프기나 하고. 못 걸을 정도야? 병이 났다면 더더욱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어쩔 수 없어. 걸어.”

야속한 말이었지만 야속하지 않았다.

친한 사이인 사람이 날 저따위로 대한다면 속상했겠지만, 저 자식은 뭐 날 냉담하게 대하든 어쩌든, 나도 상관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마. 여기 있으래도 움직일 거니까.”

“넌 거슬리면 바로 말이 짧아지는 게 참,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

피식 날 비웃는 로건의 얼굴을 바라보며 발을 뗐다.

짜증이 났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숲속의 밤은 놀라울 만큼 일찍 찾아오니까.

밤을 만나지 않으려면… 어?

“하, 가지가지 하네 진짜.”

여전히 차갑기만 한 남자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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