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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07)화 (107/134)

107화

창백한 얼굴로 보란 듯 앞으로 걸어 나가던 피비의 몸이 힘없이 무너질 때를, 순발력이 좋은 로건은 놓치지 않았다.

고개마저 떨군 탓에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꼬는 말에도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신을 잃은 듯했다.

“이봐, 진심이야?”

로건은 일단 여자를 풀숲 위에 눕혔다.

상태가 어느 정도로 나쁜 건지 확인해야 했다.

고열에까지 시달리고 있다면 최악인데.

그는 늘 끼고 있던 흰 장갑을 벗어 여자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로건은 소스라치며 닿아있던 손을 뗐다.

다행히 열은 없었지만….

‘잘못 봤나?’

그럴 리가 없는데, 생각하면서도 로건은 다시 여자의 발목을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사라지기 직전인 듯 희미했지만 분명히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내 손에 전해진 그 감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닿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신의 모든 흐름이 제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전해 듣기만 했던 그 감각.

급하게 손을 뗐지만 부정하기엔 너무 생생한 감각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여자의 목에 손을 댔다.

똑같은 감각이었다.

“….”

문양이 사라지고 난 후 치료제가 겪는 일.

저주로 가득 찬 몸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이의 생명력을 빨아들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몸이 되는 것.

그 일이 왜 지금 문양을 가진 이 여자에게 일어난 것일까.

이유야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자리 깔고 있는 게 답을 구하는 길은 아닐 것이다.

로건은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아 들었다.

이미 많이 걸어왔으니 곧 밖이 보였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

조금 덥다는 생각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이 볼을 간질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나무 골조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분 좋게 얼굴에 닿던 바람은 침대 바로 옆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지.’

몸의 이상을 느낀 그 순간에 어이없어하는 로건의 목소리를 들었던 거 같다.

그래도 이렇게 침대에 날 눕혀놓은 걸 보면 숲을 잘 빠져나와 근처 마을에 도착한 거겠지.

안고 왔든 들쳐업고 왔든 고생 좀 했겠군, 생각하며 그가 덮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이불을 치웠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려놓자, 나무 바닥이 삐그덕 하는 소리를 냈다.

허기도 허기였지만 갈증이 더 문제였다.

사람 사는 집으로 보이니 어딘가에 물이 있을 텐데.

‘아.’

조리대 위에 물병과 물잔이 보였다.

만 하루 만에 마시는 물은 정말이지 달고 시원했다.

물을 마시고 나니, 참고 있던 허기짐이 더 뚜렷하게 느껴진 건 별로였지만.

“후.”

그 순간, 어디선가 짧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집은 따로 방이 없는 작은 원룸 형태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충 한 바퀴를 다 둘러본 참이었다.

분명 나 말고 사람은 없었는데?

어딜 간 건지 모르겠지만 로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집에 키우는 동물이 있는 것 같은 흔적도 없는데, 어디서.

게다가 그건 사람의 숨소리였는걸.

“누구세요?”

“….”

“누구 있어요?”

집주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지만, 집주인이라면 당당히 나올 테지 몰래 숨어서 숨소리만 내지는 않겠지.

그러나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숨을 공간도 없는 집이고, 어?

그때 구석에서, 이제까지 곡식 자루나 잡동사니를 넣어놓았을 거라고 여겼던 거대한 포대가 움찔했다.

하, 싫다 진짜.

이 자식은 어딜 간 거야, 귀한 치료제를 혼자 놔두고 말야.

물병 옆에 보이던 식칼을 꾹 손에 쥐고 포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건넸다.

“나 무서운 사람인데, 진심 무서운 사람인데 말 잘 듣는 사람은 좋아해요.”

“….”

“그러니까 하나 둘 셋 했을 때 나오면 해치지 않을 거예요.”

“….”

내 귀로 내가 듣기에도 이상한 말을 지껄여봤지만, 거대한 포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 애초에 말을 잘 들을 사람이었으면 왜 저러고 있었겠니, 피비야?

그냥 내가 나갈까?

저 포대를 벗겨서 굳이 안을 확인해야 할까?

어떻게든 하기 싫은 일을 그대로 하지 않기 위해 합리화를 해보려 해도 답이 없었다.

로건이 날 여기에 뒀다면 다시 이곳으로 올 텐데 어딜 나가냐. 

결국 나는 벽에 세워져 있던 용도를 알 수 없는 긴 나무막대기 한 개를 손에 들었다.

왼손엔 식칼을, 오른손엔 나무막대기를 들고 조금 더 다가간 후, 푹.

포대의 중간쯤을 막대기로 찔렀다.

“끄아아아악!”

포대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 후 들려온 대사는 전혀 예측할 수 없던 말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 달리니?

“이거 그냥 나무막대기예요.”

누가 들으면 내가 뭐 식칼로 찌른 줄 알겠네.

나도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주 살짝 찌른 거라 약간의 닿는 느낌만 있었을 텐데 왜 저렇게 난리람.

그러니까 아까 말로 나오라고 했을 때 순순히 나왔어야지.

쓰러진 사람은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포대 안에서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괜찮으니까 나오세요. 혹시 나오기 어려운 상황인가요?”

“묶여있어서 벗을 수가 없어요.”

포대의 끝을 잡고 빼내자, 등 뒤로 손이 묶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30대로 보이는 남자는 내가 테이블에 올려둔 식칼을 보고 놀라 다시 한번 자지러졌지만, 몰라서 대비용으로 둔 것이라고 안심시키니 진정이 되는 듯 보였다.

“풀어드릴게요. 근데 어쩌다가 이렇게.”

“하얀 제복을 입은 귀족처럼 보이는 남자가 들어오더니….”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 집의 집주인이었다.

숲에서 약초와 유용한 풀을 캐다 시장에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 남자의 집은 그래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 초입에 있었다.

마을에 다녀온 직후였다고 했다.

놀랄 새도 없이 들어온 은발의 남자가 자신을 때려눕히더니 겁박했고, 포대를 씌웠다 했다.

자신이 돌아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 자그마한 어떤 소리든 내면 죽인다는 협박이 이어졌다.

그래서 남자는 내가 일어나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던 것이다.

“….”

묶인 손을 풀어주려던 나는 남자의 설명을 듣다가 손을 멈췄다.

설명 속에 등장한 은발의 남자는 로건이겠지.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 남자를 겁박했을까?

이 남자의 설명이 다 진실일까?

나는 반쯤 풀린 매듭을 다시 한번 꽉 조인 후 남자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왜, 왜, 왜 풀다가 말고….”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던 남자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죄송해요. 확인할 게 남아서요. 그것만 확인되면 바로 풀어드릴게요. 그때까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저, 정말 나쁜 사람 아닙니다. 집주인인 것도 맞고 다 사실인데.”

“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서요. 죄송합니다. 확인 후에 바로 풀어드릴게요.”

“….”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대답하자 남자는 수긍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럼 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조리대에서 채워 온 물잔을 내밀자 남자는 고맙다며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였다.

“저 그런데, 제가 지금 묶여있어서.”

“아, 그렇네요.”

손을 쓸 수 없는 남자의 상황을 알기에, 조금 더 다가가 그의 입으로 물을 흘려 넣을 때였다.

남자가 숙였던 고개를 쳐들며 내 턱을 가격했고, 내가 고통으로 몸을 움츠리는 잠깐 동안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식칼로 묶인 끈을 잘라낸 것이었다.

“착한 척 굴더니 나쁜 X.”

욕설을 내뱉긴 했지만 딱히 식칼로 나를 위협한다거나, 다른 행동은 없었다.

그는 단순히 이곳에서 도망갈 생각뿐이었던 건지, 급하게 달려가 문을 열었다.

은발의 남자가 서 있긴 했지만.

*

“어, 어어….”

“이럴 줄 알았다.”

저건 뭐지.

로건의 한 손엔 처음 보는 갈색 자루가 들려있었다.

로건을 보며 기겁한 남자가 뒷걸음질 치자, 너무 자연스럽게 쥐고 있던 자루로 남자를 가격하려던 로건은.

“아, 맞네.”

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바닥에 얌전히 자루를 내려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남자를 도망치게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가벼운 손짓으로 발을 얼려버렸으니까.

“사, 살려….”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소리를 내면 어떻게 된다고 했었지?”

“….”

발이 얼어붙은 남자의 곁을 로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쳐 내게로 왔다.

“어떻게 눈만 떼면 사고를 치냐. 너 나 좋아해? 내가 계속 바라봐줬음 좋겠어서 그러는 거야?”

“미쳤어요?”

“나한테 빠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닌데, 그래도 나는 너를 어떻게든 죽이겠다고 말한 사람 아니냐. 근데도 좋으면 변태 아냐?”

“미쳤냐구.”

“하.”

피식 웃고서 그는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몸은 어때. 아팠잖아.”

“살만해요.”

“살만한 정도로는 안 되지.”

턱을 만지던 손이 손목을 낚아채 갔다.

그가 나를 발이 얼어붙은 채로 서 있는 남자 앞에 세웠다.

“내가 묶어두고 나간 남자가 왜 자유롭게 서 있는지 설명해 봐.”

“나야말로 묻고 싶어요. 이 사람을 왜 그 모양으로 겁박해두고 사라진 거예요? 이 사람 말로는 집주인이라던데.”

“어, 맞아 집주인.”

마치 자신을 없는 사람인 양 취급하며 대화하는 우리 둘을 보는 남자의 얼굴은 공포로 가득했다.

“턱을 맞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면 이제 그만 놓아주죠. 무서워하잖아요.”

“닿았어?”

“뭐요?”

“닿았냐고. 턱을 맞았잖아. 몸싸움하다가 살이 닿았냐고.”

당연히 내 턱과 남자의 머리가 닿긴 했겠지만, 그걸 왜 묻는 거지.

“그랬겠죠. 내 턱 안 보여요?”

“별일 없었어?”

“별일이 있었죠. 상처 난 거 안 보이냐구요.”

“흠….”

묘한 눈빛으로 그가 날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사람 발을 저렇게 얼려둬도 동상 안 걸려요? 이제 그만….”

“만져 봐.”

“….”

“저 사람 만져보라고.”

난데없는 그의 요구에 황당해 얼빠진 표정을 했지만, 로건은 고집스러웠다.

“아, 팔을 휘두를까 봐 겁날 수도 있겠네.”

발을 얼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서 있는 남자의 팔을 향해 손짓하자.

바닥에서 뻗어 나온 얼음 줄기가 남자의 팔목을 얼렸다.

이제 내 앞에는 두 팔과 두 다리가 겁박 된 남자가 서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말 그대로. 저 남자를 만져보라고. 옷 위로 말고 살이 드러난 부분을. 음, 목을 만져보면 되겠네.”

“….”

“간단한 일이잖아?”

겁에 질려 혼이 빠질 것 같은 얼굴의 남자가 나를 향해 연신 입을 벙끗거리고 있었다.

로건이 무서워서 소리를 낼 수는 없으니 몰래 입 모양만으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를 남자는 반복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당신 말대로 잠깐 닿기만 하면 이 사람 살려주는 거예요.”

“네가 닿고 난 후에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망설임 없는 로건의 대답에, 속박된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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