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도망 가.
그와 닿았던 언제가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
잘못 들은 거라고 치부해버렸던 목소리가 안에서 울려 퍼졌다.
-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도망 가.
안에서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나일이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당신 누구야, 나한테 왜 이래. 도망을 가라니, 무슨 말이야. 시끄러워. 조용히 해.’
의문의 목소리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추가 될 뿐이었다.
- 싫어, 내 목숨을 저울에 올리지 마. 싫어, 싫어.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데. 그걸 왜 나한테 하라는 건데. 아파, 몸이 아프잖아. 싫다고. 황자를 살려야 한다고? 나는 나를 살릴 건데?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왜 내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악에 박친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았지만, 계속 들려오는 소리들을 차단할 순 없었다.
“아… 어….”
“피비? 괜찮아요?”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내려 침을 크게 삼켰다.
나일이 걱정스러운 듯 이마를 맞대며 내 얼굴을 살펴왔다.
그의 얼굴을 봐야지.
그와 눈을 맞춰야지.
그럼 안심이 될 거야,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공포심에 감았던 눈을 떴을 때였다.
‘보라색 눈?’
먼 거리라서, 눈동자의 색을 알아챈다는 게 불가능했는데도.
나일의 어깨 너머로 잡힌 시야에서 보라색 눈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보라색 눈?’
- 서제국이 원했던 결과가 이건가? 동제국의 수도를 들쑤셔 놓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주었으니 성공에 가까우려나.
‘이 테러를 일으킨 장본인들은 지금 어디 있지?’
사라졌나?
원래 계획했던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면 사라졌겠지만, 수도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게 과연 그들의 계획이었을까? 이건 전쟁선포 수준의 테러인데?
수도를 파괴하고 수많은 동제국 사람들을 죽이는 덴 성공했지만.
‘동제국의 주요 인물은 한 명도 죽질 않았어.’
사람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는 거리임에도 보였다.
어깨 너머로, 한 남자가 보라색으로 일렁이는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수, 숙여요!”
그의 목을 끌어 앉고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마치 그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점처럼 작았던 화살이 날아오면서 점점 크기를 불렸다.
등을 바닥에 대는 순간, 느낌이 왔다.
아 우리는 저 거대한 화살을 피할 수 없겠구나.
곧 그와 나는 몸이 꿰뚫리겠구나.
‘어?’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지랑이 피어나듯 일렁이던 공간이 길게 찢어졌다.
나일의 바로 등 뒤였다.
알렉스.
공간을 열고 나온 알렉스의 손에서 작은 단검 한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찰캉하는 소리를 내며 작은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진 순간.
날아든 화살이 서 있던 알렉스의 배에 박혔다.
압축된 마나로 이루어진 그것은 화살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크고 굵었다.
접혔던 허리가 펴지며 알렉스의 몸이 이미 나일을 안고 누워있는 내 옆으로 떨어졌다.
“쿨럭.”
그가 핏물을 몇 덩이나 토해냈다.
저기 있는 서제국 놈들을 잡아오라는, 누군가의 명령과 함께 이동하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
“어.”
놀라서 몸을 일으킨 나일을 뒤로 하고 알렉스에게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어, 어….”
배가, 배가 반이 없잖아.
사람의 팔목만 한 굵기의 활이었다.
그런 활을 맞아 생긴 상처가 얕을 리 없었다.
이걸 어떡하지.
“누굴 좀 데려와요!! 사제!! 사제를 데려와!!”
“시끄러워, 머리 울리니까 조용히 해봐.”
“야,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말간 핏물을 흘리면서 알렉스는 실없이 웃어보였다.
“무슨, 쿨럭, 무슨 짓이긴. 저 자식 죽이려고 숨어있었지.”
“….”
“서제국 놈들이 못 죽이면 내가 죽이려고. 저 자식이 없으면, 네가 죽을 일도 없잖아.”
“흐어어어엉, 야 말하지 마봐. 사제 좀 데려오라고요!!”
알렉스의 고운 민트색 머리카락이 핏방울로 더럽혀져 있었다.
“아 그런데 저기서 활을 쏘는 게 보이잖아. 그럼 너도 같이 맞을 텐데.”
“….”
“네가 없고, 저 자식 혼자였다면 나는 아마 숨어서 박수나 치고 있었을걸. 하….”
그가 말하는 중간 중간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야, 말하지 말라고.”
“나 어차피 몇 마디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냥 조용히 하고 내 말이나 들어.”
“….”
“첩자로 활동하는 대가로 서제국한테, 쿨럭, 이것저것 받기로 했거든. 그럼 그걸로 너랑 도망쳐서 살고 싶었어.”
“….”
“쫄딱 망했지만.”
“흐어어어엉.”
“피비야, 살아. 살고 싶지 않아? 피비야.”
“….”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
“….”
“야, 알렉스.”
“….”
“야.”
“….”
“야!!!”
“….”
눈을 감은 알렉스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게 나일이 물어왔다.
“이 자는 누구에요? 당신이 죽을 거라는 말은 또 뭐구요.”
“….”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했다.
아무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각하, 사제가 왔는데요.”
“됐어. 이미….”
“아뇨! 여기요! 사제님 여기 와주세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제를 향해 절규하다시피 외쳤다.
그런 나를 향해 로건은 싸늘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목숨이 붙어있다 해도 반역자일 뿐이야.”
“사제님 아직 늦지 않았을 거예요! 여기 와주세요 제발.”
로건의 눈치를 살피던 사제가 내 얼굴을 보고선 입술을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어….”
알렉스를 앞에 두고, 사제는 말을 잇지 못 했다.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표정을 숨기려 노력하는 게 내 눈에 다 보일 뿐이었다.
“피비.”
“….”
나일이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나일.”
그리고 그런 나일의 이름을 부른 건 내가 아닌 로건이었다.
“너 뭘 알아? 알고 있으면 대답해.”
“….”
그가 대답해줄 리가 없지.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나일은 몹시 답답한 모양이었다.
“죽어요 나.”
“네?”
이제껏 하지 못 했던 말이,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왔던 말이 뱀이 기어나오듯 스르륵 흘러나왔다.
“너!”
화가 난 로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저 눈이 감긴 알렉스의 평온한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잠든 것 같은 그 아이의 얼굴이 나를 솔직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일, 치료제는 저주를 치료하는 게 아니에요. 흡수해요. 저주가 몸 안에 쌓이죠. 그럼… 죽게 된대요.”
“….”
“당신이랑 닿을 때마다 내가.”
충격을 받았을 테니 하얗게 질린 얼굴일까?
그가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하고, 내가 살려면 그를 죽게 나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엄청 놀랐을 텐데.
그 표정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 나는 계속 알렉스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래서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피비, 지금 무슨 말을….”
알렉스는 정말이지 누구보다 예쁜 눈동자를 가졌었는데.
물기를 머금은 투명하고 맑은 민트색 눈동자.
“나 살고 싶나 봐요.”
“….”
“….”
순간, 심장 부근이 저릿하다는 느낌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내 주위가 환한 빛으로 물들었던 것 같다.
무게가 사라진 듯 몸이 가벼웠고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잡아! 나일, 잡으라고! 아직 문양이 사라지기 전일지도 몰라!!”
다급한 로건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일이 하얀 빛기둥 안에서 붕 떠오르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향해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닿으면….”
무어라 중얼거리며 그가 곧게 뻗었던 손끝을 오므렸다.
“잡으라고!!”
중력이 사라진 듯 가볍던 몸에 갑자기 무게가 느껴졌다.
발목을 움켜쥔 누군가의 손을 느끼며 눈이 감겼다.
*
눈을 뜨자마자 느껴진 것은 깨질듯한 현기증이었다.
머리가 울리는 느낌에 로건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
어떻게 된 거지.
마지막 기억을 되짚었다.
환한 빛에 둘러싸여 공중으로 떠오르는 여자의 발목을 급하게 손으로 움켜쥐었고.
잡은 순간, 그의 몸도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로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여자.’
여자는 어디에 있지.
그제야 부여잡았던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고개를 뒤로 완전히 꺾었을 때, 로건은 약 1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풀숲 위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보였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다가간 로건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피비의 코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대는 일이었다.
그의 손등 위로 여자의 따듯한 숨이 드나들었다.
“후….”
살아 있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가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이제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문양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아직 있는지, 나일과 닿아 사라져버렸는지.
발목에 머무르던 로건의 시선이 피비의 감긴 눈꺼풀 위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이미 한 번 강압적으로 문양을 확인했던 전례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땐 여자가 정신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잠이 든 건지, 깨어나지 못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이 여자를 불렀다.
“이봐.”
“….”
“이봐 너, 그만 눈을 뜨지 그래.”
“….”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그가 여자의 팔뚝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봐, 정신 차리라니까.”
“….”
여전히 대답이 없는 여자를 뒤로하고 로건은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니,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이나 하고 있을까.
몇 번씩이나 나뭇잎을 투과하고 나서야 흙바닥에 도착한 덕에, 피비와 로건 주변을 감싸는 햇빛은 이미 흐리고 약해진 상태였다.
기둥이 굵은 오래 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울창한 숲.
로건은 경각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한낮의 숲을 살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람의 발이 풀을 밟고 지나다닌 흔적이 보였다.
매끈하게 잘 정비된 보행로는 아닌 것으로 보아 인구밀도가 높은 큰 영지는 아니겠지.
하지만 적어도 사람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소리였다.
아마 이곳이 깊은 숲속은 아닐 것이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도움을 받을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있겠지.
‘아니, 여기가 어디인지 다른 사람한테 물을 필요가 없지.’
이 여자가 있는데.
분명 어딘지 모르겠는 이곳에서 눈을 뜬 이유는 피비의 의도대로 된 일일 거라고.
로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와 자신, 단둘이 이곳으로 떨어진 이유는 이 장소로 도망치려는 여자를 제가 잡았기 때문이라고.
“이봐, 강제로 깨우기 전에 일어나서 여기가 어딘지 말하는 게 좋을 거야.”
“….”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저 감긴 눈이 찝찝했지만 확인할 건 확인해야지.
로건이 피비의 왼 다리로 손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