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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04)화 (104/134)

104화

로건이 무대 앞에 말을 세우자마자 뛰어내려 나일에게로 달려 나갔다.

나를 발견한 그가 환한 얼굴로 내려와 나를 안아들었다.

“다친 덴 없어요? 도대체 누가, 아니 일단 됐어요.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에요.”

양 볼을 손에 쥐고 그가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아….’

살이 닿는 느낌에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조금 어색해 하며, 볼을 감싸 쥔 큰 손에서 얼굴을 빼내자 내 기분을 기민하게 눈치챈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 문양이 사라지고 나면 치료제는 몸에 닿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력을 흡수하기 시작해. 마치 살아있는 저주처럼, 주변에 닿는 모든 것의 생명력을 앗아가지. 

설마 방금 닿은 걸로 문양이 사라지진 않았겠지?

다행히 나일은 어디 한 곳 다친 곳이 없어보였고, 그렇다면 나는 그와 접촉을 피하며 가능한 문양을 유지해야 했다.

문양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시한부와 다름없는 몸이 될 테니.

“울 애기!”

나를 발견한 파베라가 멀리서 줄기로 변한 양 팔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니 왜 저러구 있어?

“할머니 왜 그러구 있어? 정체가 탄로 났어?”

나를 끌어안는 그녀에게 속삭이자, 파베라도 내 귓가에 작게 말을 건넸다.

“어, 그렇게 됐어. 그래서 봉사중이야. 넌 실종됐었다며? 어떻게 된 거야? 할머니 놀랐잖아.”

“어, 나도 그렇게 됐어. 이제 괜찮아.”

저 녹색 줄기를 보고도 나일도 황제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뭔가 합의가 된 거겠지.

다만 파베라의 진짜 모습을 처음 본 로건만이 유심히 그녀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나일.”

그도 지금 중요한 문제는 파베라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일을 불렀다.

“란셀롯 영애를 납치한 건 서제국 놈들이었다. 그리고 영애가 이 사태를 만든 독약을 손에 넣었어.”

“독약? 알레나 멘데는?”

나일의 물음에 로건이 고개를 저었다.

“구해내지 못 했어.”

“그랬군.”

“독약의 성분을 분석하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는 소리에 나일은 크게 반가워했다.

그리고 몇 마디의 대화를 더 주고받은 둘은, 해독제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고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결계를 부순 후, 가능한 마물이 된 이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외진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결계를 부수고 있어.”

무대 중앙을 보니, 마치 불의 화신처럼 불타는 남자가 서 있었다.

황제가 끊임없이 위로 불을 내뿜는 중 이었다.

뜨거운 열기에 숨통이 막혀왔다.

“안 돼요. 황제 폐하를 멈추게 해야 해요. 중앙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봤어요. 이 결계 정말 낮고 작아요. 좁은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다 죽어갈 거예요.”

만약 결국 황제가 결계를 태워 없앤다 해도, 그 전에 사람들이 많은 연기를 흡입하게 될 터였다.

불타 죽지는 않겠지만 연기에 중독 돼 죽겠지.

“공간이 넓었다면 가능한 방법이었을지 몰라도, 안 돼요. 멈춰야 해요.”

고개를 끄덕인 그가 황제에게로 달려갔다.

아들의 설명을 이해했는지, 활화산처럼 불을 뿜어내던 몸에서 불씨가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택한, 결계를 부수는 제2의 방법은 나일의 능력을 쓰는 것이었다.

황제가 대기 중의 수분을 다 날려버린 탓에 로건의 능력을 쓰긴 어려웠고, 나일의 능력은 결계 안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을 테니 가장 적임이었다.

나일이 흘러내린 소매를 다시 걷어 올렸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완전히 능력을 되찾았으니까요.”

웃는 얼굴로 무대 위에 선 그가 내게 눈을 맞췄다.

완전히 능력을 되찾았다는 그의 말은, 결계를 부수는 데 능력을 써도 치료해줄 내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는 능력을 써서 결계를 부수고, 녹초가 된 몸으로 나를 끌어안겠지.

이미 거의 사라질 듯한 문양이니 아마 닿는 순간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건 최대한 문양을 유지하며 살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내 계획과는 완전 다른 길이지만.

‘이게 최선인 거 같네.’

당신에겐 내가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의미로 눈을 찡긋해보였다.

가까이서 그런 나와 나일을 바라보는 로건의 시선이 느껴졌다.

괜히 억울하네.

네놈이 무서워서 이렇게 결정한 거 아니거든?

나일에겐 이 일이 끝나고 나서 상황을 설명해야지.

지금 말했다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주저할거고 결국 해내지 못 할 것이다.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아.

무대 위로 나일이 올라섰다.

파베라는 그 아래서, 나일이 집중할 수 있도록 그를 향해 달려드는 마물들을 줄기로 내치고 있었다.

사방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동제국군이 빠르게 상황을 잘 진압한 것 같기도 했고, 마물로 변한 이들의 수가 예상보다는 적었던 듯싶었다.

난장판임은 분명했지만 예상보다는 아비규환이 아니었다.

‘서제국이 원했던 결과가 이건가?’

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성공이라고 여길까 실패라고 여길까.

동제국의 수도를 들쑤셔 놓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주었으니 성공이라 여기려나.

“….”

나일의 몸을 타고 푸른 전류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이내 그의 손 위로 거대한 푸른 창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상체를 뒤로 젖혔다가 있는 힘껏 창을 던지자, 날아간 창이 푹, 결계에 박혔다.

한 번으론 부족하다 여겼는지, 그의 손 위로 다시 작은 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창은 순식간에 사람의 세 배만큼 몸집을 불렸다.

창을 던지는 한 번 한 번이 커다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 같았다.

‘곧 결계가 찢어지겠구나, 그럼 나는….’

뭐지?

갑자기 등 뒤에 누군가가 다가와 서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말을 타고 달렸던 병사 중 한 명이었다.

“각하께서 영애를 바로 곁에서 보호하라 하셨습니다.”

“….”

보호는 개뿔.

이건 감시였다.

내가 죽기 싫다 도망갈까 봐 붙여놓은.

“결계를 친 자가 이 안에 남아있을 수 있다. 수상한 자를 보면 놓치지 마라.”

상황을 정리하며 로건은 나를 한 번, 그리고 나일을 한 번씩 번갈아 주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나일에게 얘기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 살 방법 같은 건 없어.

단호한 그의 말이 생각났다.

정말일까?

아직 찾지 못한 것은 아니고?

아니, 있더라도 폭발하기 전까지 방법을 찾지 못 하면?

동제국 황족이 다 머저리들은 아니었을 거 아냐.

자신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누구보다 열심히 저주와 치료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찾지 못한 방법을 내가 몇 개월 만에 찾아 낼 수 있어?

“….”

고개를 드니, 결계에 몇 개의 창이 박혀 있었다. 

어느새 나일은, 마지막 창을 준비 중이었다.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나일에게 말해선 안 돼.’

어차피 죽게 될 거라면, 그가 자신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할 필요가 없어.

호수에서 나를 지키지 못 했다는 죄책감으로 이미 크게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똑같은 상처를 두 번이나 줘서 뭐하게.

싫잖아 그런 거.

- 쩡

귀가 아플 정도의 소음이 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결계가 사라지며 아주 작은 크리스털 조각 같은 먼지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먼지 사이로, 이제껏 빠져나가지 못 하고 있던 자욱한 잿빛 연기들이 하늘로 올랐다.

무대 위 나일이 힘이 다 빠진 듯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가. 내 말을 기억해라.”

다가온 로건이 내게 고갯짓 했다.

뭐. 네 말대로 안 하면 내 지인들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거?

나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나일에게로 걸음을 뗐다.

터벅터벅 앞으로 나아갔다.

힘들어 보이는 그는 나와 닿고 나서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니까 걸음이 이렇게 무거워서는 안 되는 일인데.

“아주 녹초가 돼서 흐물흐물해졌네요?”

“당연하죠. 방금 엄청난 일을 했다구요.”

눈을 크게 뜰 힘조차 다 써버린 건지, 가늘게 눈을 뜨고 웃는 나일은 많이 노곤해보였다.

“그리고 이게 다.”

“….”

“당신이 있어서 할 수 있던 일이었다는 거.”

느릿하게 말하며 그가 내게로 양 팔을 벌렸다.

그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으며 품속으로 파고들자, 나일이 벌렸던 팔을 오므리며 나를 감쌌다.

“그러네, 다 내 덕분인 줄 알아요.”

살이 닿은 부분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그의 턱 언저리에 닿아 있는 내 볼과, 그의 큰 손이 움켜쥐고 있는 내 목.

닿은 부분에서 일어난 간질거림이 점점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사라지기 직전이라 이러는 건가?’

간지러운 정도에서 끝났다면 참을 수 있었을 텐데.

간지러움이 조금씩 찌릿함으로 바뀌어 나갔다.

이내 문양이 새겨진 발목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겁기 시작했다.

-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삶이 다시 충만할 수 있도록 기꺼이 당신에게 제 모든 것을 드리겠나이다.

치료의 시작을 알렸던 대사를 속으로 외쳤던 그 순간처럼.

왜 그때 발목이 아팠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건 일종의 경고였던 것이다.

황자에게 내 모든 것을 드리겠다 말하는 치료제의 맹세가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발목이 뜨겁다 못해 달군 인두에 지져지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일의 몸을 끌어안았다.

“왜 그래요?”

“아뇨. 아무것도요.”

문양이 사라지는 순간도 이런데,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주로 꽉꽉 들어찬 몸이 계속 이렇게 아프게 되는 건가?

로건이 말했던 주변에 닿는 모든 것의 생명력을 앗아가게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생명력을 앗아간다는 말은 살생한다는 말 아니야?

그럼 폭발하기 전까지의 몇 개월의 삶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고작 몇 개월 더 살기 위해 무언가를 죽이면서….

“느낌이 이상한데.”

내가 있는 힘껏 그의 허리를 끌어안는 게 평소와 다르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얼굴 좀 봐 봐요.”

“싫어요.”

“오늘 너무 많은 걸 겪어서 놀랐구나.”

“….”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좀 들어봐요.”

그저 단순한 투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나일은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가벼운 이야기 거리를 늘어놓았다.

“당신이 있는 곳이 서쪽이라는 이야길 듣고 갔었는데….”

거짓 정보라는 걸 알고서 자신이 얼마나 실망했었는지.

사라졌다는 걸 안 아침부터 온종일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그는 그런 내용들을,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니 별거 아닌 일이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늘어놓았다.

다 날 안심시키기 위한 말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의 뜀박질이 멈추지 않았다.

발목도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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