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S THE RAIN
그의 냉장고에는 지난번에 가져다 놓은 여러 가지 김치가 조금도 줄지 않고 그대로 쉬어 있었다.
화란은 작게 한숨을 쉬며 새로 가져온 김치를 넣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그냥 두려다가 무엇엔가 이끌려 휴대폰을 들었다. '수연'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화란은 가슴에서 독기가 치솟는 걸 느꼈다.
냉정히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오수연의 태도는 여전히 건방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샤워 중이라는 말에 놀라서 흥분한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회사라고 둘러대며 자신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네까짓 것한테 이름을 밝힐 순 없다는 것 같아서 더 자극을 받았다.
화란이 더 냉소적인 목소리로 대답하는 도중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시건방진 것!
오수연이 정말 회사에 있는 거라면 거기서 지환의 집까지 오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화란은 건방지고 얄미운 계집의 화를 좀 북돋워줄 생각을 했다. 지난번 가게에 왔을 때 그녀는 웬 훤칠한 미남과 함께였다.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으로 들어와 급기야 반지까지 나눠 끼고 좋아서 미치겠다는 듯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란은 뜻밖의 광경에 들떠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석지환의 심장은 이미 산산조각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남자의 반지를 낀 여자를 되찾겠다고 캐러밴을 빌리고 사설탐정까지 고용했다.
화란은 그것이 지난 세월에 대한 미련이며 앙금이라고 단정했다. 이번에야말로 과거에 묶인 그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란은 입고 있던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벗고 지환이 벗어 놓은 와이셔츠를 입었다.
핸드백 속에서 향수를 꺼내 방 여기저기에 뿌리고 침대 시트를 어지럽혀 놓았다.
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 잔의 커피를 만들었다. 물을 붓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시간은 정확한 아가씨군."
화란이 인터폰까지 걸어가 모니터에 비친 오수연의 얼굴을 확인하는 동안 초인종은 무려 5번이나 더 울렸다.
"누구세요?"
"나, 난 오수연이에요. 석지환 만나러 왔어요."
"아, 우리 지환 씨랑은 어떤 관계이신지……."
"들어가서 얘기할 테니까 문부터 열어줘요."
"흠, 그러시죠."
문을 열어주자마자 오수연이 총알같이 뛰어들어 왔다. 화란 역시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5분 후면 지환이 샤워를 마치고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뭔가 강한 펀치를 먹이고 싶었다.
"지환 씬 아직 샤워 중인데……. 커피 마실래요?"
화란은 오수연의 시선이 자신의 맨다리와 지환의 와이셔츠에 꽂히는 걸 유유히 즐기며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그녀가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잤어요?"
화란은 느닷없는 직격탄에 놀라 평정을 잃고 돌아보았다.
"뭐라구요?"
"오빠랑 잤어요?"
이 구제불능의 아가씨는 끝까지 건방지고 제멋대로에 무례했다.
화란은 철딱서니 없는 막내 여동생 같은 오수연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담배만 길게 빨았다.
"왜 대답 못해요? 저, 정말 잔 거예요?"
"내가 왜 대답해야 하죠?"
"아, 이제 기억났어. 당신 그 카페 사장이죠?"
"그래요. 그 카페 사장이자 석지환을 사랑하는 여자고, 보다시피 우린 이런 관계에요. 더 알고 싶은 거 있나요?"
"이, 이런 관계라니 무슨 뜻이죠?"
"시간 없으니까 간단히 말하죠."
화란은 접시에 담배를 끄고는 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의 오수연에게 차갑게 말했다.
"우린 8년 전 맨해튼에서 처음 만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한 번도 그와 떨어진 적이 없어요. 난 그를 사랑해요."
"사랑? 오, 오빠도요? 오빠도 다, 당신을 사랑하나요?"
"그건 당신 오빠한테 직접 물어보도록 하죠. 근데 도대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화란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시니컬한 어조로 말했다.
"언젠가 석지환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죠. 자길 계속 만나려면 심장은 두고 오라고.
자기 심장은 한국에 어떤 여자에게 두고 왔기 때문에 자긴 지금 빈껍데기라고 말예요. 난 상관없다고 대답했고 지금도 상관하지 않아요."
오수연은 대단히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그런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화란은 한 걸음 다가서며 협박하듯 호소했다.
"그러니까 이제 제발 지환 씨 좀 놔줘요. 난 빈껍데기라도 상관없으니까, 그 사람 이제 풀어줘요.
당신은 석지환 심장을 가졌으니까, 그걸로 만족할 수 있지 않아요?
끔찍할 정도로 고집 센 사람이니까 죽을 때까지 당신은 그 사람 심장일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 덜컥하고 욕실의 문이 열렸다. 뿌연 수증기와 함께 검은 가운을 입고 나타난 지환이 그녀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수연아, 네가 어떻게……."
"오빠……."
멀쩡하게 서 있던 여자가 갑자기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사람처럼 힘없이 앉아서는 넋을 놓은 표정으로 지환을 보았다. 화란은 여자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찡그린 눈으로 오수연을 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화란은 어디서 폭탄이라도 투하되는 것처럼 놀라며 오수연의 몸을 감싸안는 지환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지환이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의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게 못마땅한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비난하는 게 느껴졌다.
화란은 분노가 끓어 매서운 눈으로 오수연을 공격했다.
"연극하지 말고 일어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서 나를 다그치던 사람이……."
"오빠……."
화란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오수연이 힘없이 지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안겨드는 것이었다.
지환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며 볼의 근육이 차갑게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화란은 너무 억울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만 나가 줘."
"정말이야. 난 그냥 내 얘기를 했을 뿐이야. 정말 기가 막혀!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해야 되는 거지?"
"더 듣고 싶지 않다, 양화란."
"지환 씨!"
"내 셔츠도 벗어주면 고맙겠군."
바늘 끝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닫은 지환의 냉랭한 태도에 화란은 파랗게 질려 버렸다.
지환은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여자의 연기를 간파하고 여자의 눈물에 흔들리지 않는 남자라고 알고 있었다.
예전에 지환에게 그 방법들을 쓰다가 들통 나 창피 당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환이 오수연의 한숨 한 번에, 교활한 작전에 저토록 쉽게 넘어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오수연을 가볍게 안아 들어올리는 지환을 본 화란은 질투에 미칠 것 같았다.
지환에 관한 한 자존심도 다 버렸고 더 이상 상처 받을 일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화란은 자존심이 뭉개지는 소리를 들었다.
가슴에 피멍이 맺히는 것 같았다.
"내 말은 들어볼 생각도 않는 거야? 내가 저 여자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지환 씨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를 몰라? 내가……."
"듣기 싫다고 말했을 텐데."
화란이 벗어놓은 원피스와 핸드백을 들고 지환이 다가왔다. 화란은 분노에 타는 눈으로 지환을 노려보았다.
"셔츠는 다음에 돌려줘."
"석지환!"
"양화란, 잘 들어. 수연이한테 접근하지 마. 너라도 가만 안 둬."
"뭐, 뭐라고?"
화란은 팔이 아프게 잡혔다. 지환의 억센 손에 질질 끌려 문 앞까지 밀려났다.
화란은 너무나도 큰 충격에 몸이 덜덜 떨려서 말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 어떻게…… 어, 어떻게 나한테……."
문 앞에서 버텼다. 너무 억울해서 이대로는 나가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짐승 몰듯이 내몰려 쫓겨나는 건 정말 치욕적이었다.
"저 여자밖에 없어? 난, 난 사람도 아니니?"
"나한테 여잔 오수연밖에 없다. 더 듣고 싶어?"
화란은 부르르 떨리는 손을 올려 지환의 뺨을 올려붙였다.
"나쁜 자식!"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그한테 한 여자밖에 없다는 것도, 그게 자신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고 있는 그를 몰래 덮쳐서 안아 달라고 졸랐을 때, 한여름 파리처럼 쫓겨났던 그때에도 이렇게 비참하고 서럽진 않았었다.
자존심 상하고 분해서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몇 번을 결심하고도 결국은 그의 곁에서 맴돌았던 자신이 이토록 한심하고 밉고 후회될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닫힌 문을 보며 화란은 이를 갈았다. 셔츠바람으로 서서 굵은 눈물을 삼키며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언젠간 꼭 석지환의 가슴에 이 피멍을 되돌려주고 말 것이다.
자신에겐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지환의 잔인한 모습을 보고 수연은 움찔움찔 놀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환의 저 섬뜩한 눈길이 자신에게로 향해진다면 자신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 마시자."
수연은 너그러운 팔에 기대어 물을 마셨다. 검은 가운 위의 뺨이 불그스레한 빛을 띠는 게 보였다. 순간 팟! 하고 분노가 치솟았다.
제까짓 게 뭔데, 제까짓 게 뭔데 내 오빠한테 손을 대. 보면 눈물부터 나는 사람인데, 어떻게 때릴 수가 있어. 나쁜 년.
수연은 분노에 주먹을 부르쥐었다.
끝내자고 말해 놓고는 여자 목소리에 눈 뒤집혀 한달음에 뛰어온 자신이 말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용서가 안 되었다. 지
환이 무슨 잘못을 했더라도 다른 여자가 지환의 몸에 손을 대는 건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지환이 다른 여자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은 더 끔찍했다.
지환이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 것조차 싫었고 다른 여자와 말하는 것도 끔찍하게 싫었다.
그냥 막연히 안 보면 그만이라고 대답했었지만 막상 지환의 곁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보니 눈이 뒤집히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서
숨이 멎을 것처럼 화가 났다. 가슴속에서 참을 수 없는 질투가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어떻게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오빠의 곁에 있을 수 있나.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런 게 가능하다니, 그런 게 가능할 수 있다니, 말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좀 괜찮아?"
수연은 대답 없이 지환의 침대에 몸을 뉘였다. 목이 메게 그리웠던 체취 대신 여자의 향수 냄새가 거기에 있었다.
그 여자의 입에서 지환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건 숨을 멎게 하는 고통이었다. 수연은 새삼 가슴이 답답해져 조급한 어조로 물었다.
"그 여자랑 잤어?"
"……아니."
"그럼? 그럼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잘 계획이었는데 내가 방해한 거야?"
제발 아니라고 말해. 아니라고 말해 줘.
"쓸데없는 상상하지 마. 친구일 뿐이다."
수연은 뾰로통한 표정을 했지만 지환의 말에 안심이 되어 날카로웠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뺨에 닿는 검은 실크의 시트가 차고 부드러웠다.
지환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 검정 일색의 집을 보았다. 사무실처럼 딱딱하고 썰렁한 느낌의 집이었다.
침대가 있는 것만 빼면 회사의 지환의 방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검은 책상, 검은 침대, 검은 유리창의 집은 임시 거처의 느낌밖에 나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건 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 그 여자에게 지환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긴장감 속에서 경직되어 있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너무도 당당히 선 여자 앞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데 갑자기 지환이 등장한 것이다.
지환의 얼굴을 보는 순간 팽팽히 조여들었던 신경이 팩, 하고 힘을 놓아버렸다.
여자가 지환을 놓아달라고 했다. 수연은 그때의 미칠 듯한 공포가 플레시백 되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놓아달라고 하다니. 이런 건 줄 몰랐어. 이런 기분이 되는 건 줄 몰랐어. 아, 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무리 힘들어도, 죽어도 못 놓겠어.
그 여자의 말 때문에 지환을 다시 잃을 수도 있다는 게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사랑해도 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수연을 보기 좋게 비웃은 거였다. 너무 괴로웠다.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악물고 버텼다.
그런데 눈앞에서 딴 여자가 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생각이 가물가물했다. 최초에 지환의 집으로 달려오려고 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잠시 후에야 핸드백 속에 든 사진이 떠올랐다. 하지만 수연은 추궁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눈물만 나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잊어버렸어."
수연은 눈물에 메인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고는 흐느낌을 삼켰다.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다 잊어버리고 묻어버리기로 했는데,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안 되려나 봐.
우린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생각뿐이었나 봐. 아무리 상처 받아도 오빠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다시 또 그렇게 아파도 오빠랑 한순간만이라도 행복하게 웃어보고 싶어. 예전처럼…….
꾹꾹 눌러 삼킨 울음에 어깨가 떨렸다. 침대 옆에 가운 차림으로 서 있던 지환이 수연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수연은 재빨리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왜 그래? 왜 울어?"
지환이 당혹한 표정으로 수연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수연은 따뜻하게 감싸오는 지환의 손을 잡고 그 손목 안쪽의 상처를 보았다.
하얀 살이 오돌토돌 올라와 가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수연은 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엄지로 살살 어루만졌다.
"수연아……."
"이제는 안 아픈 거지?"
"이거 때문에 운 거야? 그럴 거 없어. 다 지난 일이다."
"지금 난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돼.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돼서 무서워. ……오빠가 무서워."
"왜 내가 무서워……."
지환은 손목 상처에 닿는 수연의 입술을 느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수연은 혀끝으로 지환의 상처를 부드럽게 핥았다.
암컷이 자신을 얻으려고 싸운 수컷의 영광스런 상처를 핥아주듯이…….
"오빠가 날 오빠 마음대로 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오빠는 오빠 마음대로 안 됐으면 좋겠어.
난 오빠 몸에 상처가 나는 것도, 다른 여자한테 가는 것도 참을 수가 없어.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미쳤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진심이야."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은 수연은 다소의 후련함과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져 자신에게 천벌을 내릴 것만 같았다.
수연은 깊은 한숨과 함께 명치에 걸려 있던 울음을 토해 내고 터질 것처럼 벅차오른 가슴을 움켜잡았다.
가슴속에 맺혀 있던 멍울들이 빠져나오려고 소요를 일으키는 듯했다. 수연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수연은 지환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고 다가와 안으려는 지환의 가슴도 밀어냈다.
"그만 가야겠어."
"수연아……."
"가야겠어."
수연의 고집에 지환은 한숨을 내쉬며 옷장 쪽으로 갔다.
"잠깐만 기다려. 데려다줄게."
"아냐. 쉬어."
그리고 수연은 안쓰러운 눈으로 지환의 얼굴을 쳐다보며 걱정했다.
"피곤해 보여. 일 너무하지 말고 잠 좀 많이 자. 얼굴이 까칠해."
"데려다줄 테니까 기다려."
"아니, 혼자 가고 싶어."
수연은 자신을 잡으려고 다가오는 지환의 손을 가만 잡고서 침착한 어조로 제지했다.
"걱정하지 마.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래."
수연은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따라 나오려는 지환을 가까스로 제지하고 오피스텔 건물을 벗어났다.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장미 향이 진하게 풍겼다. 수연은 묵묵히 걸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게도 싸워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어. 아무리 괴로워도 놓칠 수 없는 게 있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끊어지지 않는 줄에 매어져 있는 것 같아. 무서워서 미칠 것 같은데도 한없이 빨려 들어가.
아무 생각도 않고 빨려 들어가면, 거기에 오빠가 있다는 걸 아니까 어쩔 수 없어. 행복해지고 싶어.
다시 상처 받아도 좋으니까 한 번만이라도 오빠와 함께 하고 싶어.
이틀간 수연을 보지 못했다. 증권연수원 기업분석 전문가 교육으로 도고에 갔기 때문이다. 내려가 어떻게 있는지 보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오피스텔에 들이닥친 이유가 박휘문과 김하루를 찍은 사진 때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걸 보았으면서도 따지지 않고 그냥 간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수연의 심경에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걸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환도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 저녁, 혼자 수연을 보내고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던 지환은 결국 차를 몰아 수연의 집까지 갔었다.
수연은 한참이나 지나, 지환이 거의 경찰에 실종 신고라도 하고 싶은 심정에 도달할 때쯤 터벅터벅 걸어서 왔다.
오피스텔에서부터 내내 걸어온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심각한 생각에 잠긴 듯 무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성이 밝아, 심각한 것에는 잘 도망치고, 무엇이든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힘든 건 피하려 들고, 복잡한 건 풀 생각도 않고 놓아버리는
수연이 드디어 진지하게 붙잡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것을 만들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연의 것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이나, 예쁜 옷이나, 신발, 즐거운 친구들을 넉넉히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연은 그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았다. 그 중 어떤 것이 없어져도 수연은 알지 못했다.
수연은 자기 물건을 친구들한테 나눠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어떨 땐 제 것이었던 줄도 모르고 줬던 걸 다시 얻어 와서는 좋아한 적도 있었다.
수연이 아끼는 건 특별했다. 아버지가 나무를 깎아 만들어 준 연필꽂이는 매일 수연의 손길과 입맞춤을 받았다.
그게 너무 질투 난 지환이 연필꽂이를 숨겨버렸다가 수연이 울어서 열이 40도까지 끓어오르는 바람에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지환은 수연의 것이 되기 위해서 혼신을 다했다. 아버지의 연필꽂이 옆에 자신이 만들어준 액자가 놓였을 때 지환은 날듯이 기뻤었다.
수연의 것이 된다는 건 황홀한 기쁨이었고 지환의 일생을 건 목표였다.
기업 탐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장마가 일찍부터 시작된다더니 빗줄기가 제법 여름다웠다.
지금쯤은 수연이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인데, 마중을 가도 좋을까 망설여졌다. 인내는 바닥이 났고 갈망은 커져만 갔다.
거기다 수연이 그대로 달아나버릴 것만 같아 초조감이 일었다. 어디로 가면 수연을 볼 수 있을지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건 엄청난 고통이었다.
떨어져 있는 고통보다 보고 있으면서도 다가갈 수 없는 고통이 더 큰 것이었다. 가까이 있으니 고통마저 달다고 생각했던 건 자만이었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었다.
이제는 수연을 보면 가슴부터 아팠다. 멀리서 수연의 향기가 밀려오고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억제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고
통을 끝내는 일은 수연의 것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초조해졌다. 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 이대로 박제될 것만 같다.
지환은 본가의 주위를 몇 바퀴나 돌다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방향을 틀었다.
5층의 낮은 건물에, 그것도 1층의 호텔식 원룸을 임대한 것은 본가에 대한 향수 탓이었다.
역겹다고 생각하는 그 집의 영향으로 창으로 나무가 보이고 꽃향기가 스며들어야 안정이 되었다.
싫다고, 증오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집을 그리워하고 있는 이 묘한 감정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지환은 고집스럽게 푸른 나무가 많은 이 오래된 오피스텔을 임시 거처로 잡은 것이었다.
무성한 초록 잎이 빗물에 젖어 무섭도록 왕성한 생기를 발했다. 물기에 젖어 일렁이는 초록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섹시한 미녀의 입술처럼 벌어진 장미 꽃잎이 이슬을 머금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움찔움찔 떨면서 교태를 떠는 그 꽃잎의 관능미에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져갔다.
열쇠를 꺼내는 손바닥이 끈적끈적했다. 땀이 아니라 대기의 습기에 온몸이 눅눅해지는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간 지환은 먼저 빗소리가 들리도록 창문을 활짝 열었다. 노트북을 책상에 올려놓고 넥타이를 풀었다.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침대로 시선이 갔다. 수연이 누웠던 자리, 수연의 향기가 스쳤던 자리다. 지환은 억지로 시선을 떼고 양복을 벗었다.
샤워를 하고 텔레비전을 켜 케이블 방송 뉴스채널에 맞춰두고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화란이 가져다 놓은 김치가 보였다.
화란, 그날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무척 자존심이 상하고 화도 많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후회의 전화라도 한다면 화란은 계속해서 상처를 받을 것이다.
화란이 좋은 사람이란 건 알지만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자신의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유학 시절, 시간에 쫓겨 냉동식품으로 겨우 끼니를 때웠던 지환은 토할 것처럼 지겨워하면서도 다시금 냉동된 완제품을
냉동실 가득 채워두고 있었다. 습관과 지겨움에 양다리를 걸치고선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미트볼, 스파게티 같은 것에서 가끔은 포장된 닭매운탕이나 갈비탕과 같은 것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었다.
전자렌지의 전원을 켰다. 지환이 오늘 선택한 것은 맨해튼의 고층 빌딩에 앉아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자장덮밥이었다.
밥과 자장 소스를 데워 큰 접시에 같이 붓고는 비벼먹었다. 석간신문을 읽으며 저녁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끓이고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이를 닦고 컴퓨터를 켰다. 비가 포탄 소리를 내며 무섭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지환이 뒷덜미를 끄는 후끈한 기운에 놀라 눈을 들었을 때 시계 바늘은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재깍재깍 울리는 아날로그시계의 박동에 맞춰 지환의 심장도 쿵쿵 힘찬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점점 빨라지고 거세어진 심장 박동 소리는 창에서 몰아치는 폭우 소리를 제압하려는 듯 피치를 올렸다.
지환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으로 들어온 비가 카펫을 적셔놓았다.
보통 때의 깔끔한 지환이라면 물기를 닦느라 여념이 없었겠지만 지금의 지환은 달랐다. 무엇인가가 잡아끌고 있었다.
지환은 콰르르 울리는 소리에 이어 번쩍하고 쪼개지는 하늘을 보았다. 느낌은 점점 더 강렬하게 지환을 끌어 심장박동을 최고조로 올려놓았다.
급기야 지환은 우산조차 챙기지 않고 오피스텔을 뛰어나왔다.
계단을 달려 내려와 빗줄기에 선 순간 지환은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헉!"
눈앞에 수연이 비를 맞고 서 있는 것이었다. 끌림은 이런 거였다.
빗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는 수연이 잠재의식 속에서 지환을 불러낸 것이다.
어쩌면 잠을 잘 수 없는 수연을 지환이 끌어낸 것인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폭우의 마력이 공통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을
잡아끄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어느 쪽이건 두 사람은 폭우가 쏟아지는 이 밤 다시 만났다.
미친 듯이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수연이 먼저 다가왔다. 아연실색한 지환은 자신의 앞에서 고꾸라지는 수연을 받쳐 안았다.
"……포기할래."
수연의 입이 달싹이며 움직였다. 지환이 두 팔로 흠뻑 젖은 수연의 몸을 안아 올리자 수연의 팔이 목을 두르며 바짝 매달려왔다.
"달아나는데 지쳤어.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
힘없이 머리를 떨군 수연은 마치 자신의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지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환은 믿기지 않는 희열감에 떨며 수연의 젖은 이마에 뺨을 댔다. 자신의 착각이 아니길 기도하며, 이것이 생생한 현실이길 빌며,
수연의 몸을 안아 자신의 오피스텔로 옮겼다.
우선 식탁 의자에 수연을 앉혔다. 두 사람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지환은 재빨리 욕실로 가 커다란 수건을 가져왔다.
젖은 얼굴과 머리를 닦아주는데 수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약속 하나 해줄 수 있어?"
"뭐든지."
"다, 다시 날 떠나게 되면……, 떠날 수밖에 없게 되면……, 그땐 내 기억 없애줘.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오빠에 대한 기억 없애주고 가."
"수연아……."
닦아주었는데도 수연의 뺨은 계속 젖어 있었다. 지환은 붉게 젖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서 손을 멈추었다.
수연이 완전히 무너져 애원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존심도 오기도 다 버린 눈이었다.
"그래줄 수 있어?"
"그런 일 절대 없어."
"나……, 노력해도 될까? 꿈꿔도 될까?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면서 살아도 될까?
정말 노력할 건데, 오빠한테 정말 잘 하고 열심히 살 건데, 그럼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이든 뭐든, 지금 이 순간부터 지옥이라고 해도, 너 안 놓쳐."
단호하고 굳은 지환의 약속을 수연은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을 오랫동안 확인한 뒤에야 훌쩍이며 말했다.
"샤, 샤워하고 싶어."
지환은 얇은 면 원피스 차림의 수연의 몸을 보다가 욕실로 갔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온도를 맞추고 수연을 데리러 왔다.
"혼자 할 수 있겠어?"
"그냥 비 좀 맞았을 뿐이야."
"차는 어쩌고, 택시라도 타고 올 것이지."
"나도 몰라. 그냥 무작정 나와버렸어. 미쳤나봐."
"……감기 들겠다."
지환은 젖은 수연을 두고 욕실에서 나왔다. 무언가 뜨거운 걸 준비하려고 부엌을 뒤졌지만 줄 것이라곤 커피와 우유밖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우유를 데우고 커피도 끓였다. 생각처럼 기분이 달뜨지는 않았다.
수연을 되찾으면 기뻐서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해졌다.
오히려 수연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긴장되고 흥분되었었다.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진 거였다.
마라토너가 골인 후에 바닥에 쓰러져 보는 희뿌연 하늘처럼 어질어질하고 몽롱한 느낌.
수연은 지환의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머리엔 수건을 뱀의 똬리처럼 묶어 올린 채 지환의 검은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흰 피부와 검은 가운이 대조를 이루며 묘한 색기를 띄었다. 가운의 허리끈이 한참이나 돌아가 수연의 잘록한 허리에서 묶여 있었다.
"커피 향 좋은데?"
"우유부터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알았어."
수연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의자에 앉아 뜨거운 컵을 감아쥐었다.
수연은 한쪽 발을 의자 끝에 올리고 등을 구부정하게 굽혀서는 세운 무릎에 팔을 올렸다.
"이상하네."
"뭐가?"
"빗소리가 저렇게 나는데도 이제 불안하지가 않네. 참 이상해."
수연은 비를 보았고 지환은 비를 보는 수연을 보았다. 자신의 검은 가운이 이토록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가운의 벌어진 깃 사이로 보이는 매끄러운 피부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이를 박고 싶을 정도로 탐스런 목덜미를 보았다.
톡톡 튀는 동그란 눈망울과 달리 갸름한 턱선은 수연을 여리고 섬세하게 보이도록 했다.
동그란 뺨은 혀를 대고 핥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고, 촉촉하게 젖은 입술은 거친 야성을 불러일으켰다.
지환은 뜨거운 숨을 내뱉는 대신 뜨거운 커피를 삼켰다. 가슴에 뭔가 지잉 울렸다.
처분에 맡기겠다는 듯 얌전히 앉아 있는 수연의 모습이 지환을 흥분시켰다.
공황 상태에서 회복되자 그때부터 가슴이 점점 벅차오르더니 숨소리가 거칠어질 만큼 맥박이 뛰었다.
드디어 내 작은 새가 내 품으로 날아온 건가!
지환은 끓어오르는 격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물었다.
"로션 줄까?"
"여자 거 있어?"
"아니."
"그럼 안 바를래. 귀찮아."
"여전히 게으르구나."
"응, 여전히 게을러."
"또 여전히 날 놀라게 하고."
"그렇지? 난 좀 그런가 봐. 좀 변하면 좋을 텐데 잘 못 변해. 여전히 단순하고, 여전히 겁쟁이야.
여전히 의지박약에, 여전히 급하고, 여전히 수다스럽고, 여전히……, 여전히 오빨 사랑해."
그 말의 느낌이 가득 담긴 눈과 마주쳤다. 지환은 타오르는 불길을 제어하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수연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파르르 떨렸다.
내 사랑, 내 사랑하는 동생, 내 사랑하는 여인, 내 유일한 사랑.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단순한 욕정이든, 집착이든, 증오이든, 뭐라고 해도 좋다. 난 결코 널 놓지 않을 거다.
이 세상 끝내는 그날까지 넌 내 거다, 오수연.
수연의 눈은 슬픈 듯 외로운 듯, 혹은 애원하는 듯 간절했다. 그 눈을 보는 지환은 심장이 튀어 올라서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지환의 눈은 끓어오른 욕망으로 붉게 물들어갔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어떤 눈?"
"게슴츠레한 눈."
"뭐?"
금세 도끼눈을 하는 수연을 보고 지환은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더 짙은 색정으로 변색되어 갔다.
지환의 미소를 본 수연이 다시금 그 게슴츠레한 눈을 했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듯이 보는군. 애절하게 보고 있어. 안아달라고 조르는 눈이야. 각오되어 있지 않으면 그런 눈으로……."
"각오되어 있어."
수연의 말에 지환은 꿈틀대는 갈망을 자제하기 힘들었다. 몸이 벌써 뜨거워지고 수연의 향기에 야성이 일어 괴로웠다.
자신이 쓰는 그 비누, 자신이 쓰는 그 샴푸의 향기일 텐데도 수연에게서 풍기는 향기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아마도 수연의 피부에 배어 있는 그 원초적인 향기가 더해진 탓일 것이다.
방 안엔 두 사람의 갈망에 찬 호흡과 기세 좋은 빗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지환은 잔뜩 긴장한 몸을 억제하며 낮게 쉰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각오?"
대답은 않고 가만 보던 수연이 천천히 입술을 열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아줘, 오빠."
지환이 망설인 건 지금 당장 수연의 말대로 했다간 그녀를 부셔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북받치는 욕망에 끓어오르는 정열이 더해서 지환의 눈은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 데일 듯이 뜨거운 눈을 보면서도 수연은 조금도 떨지 않고 다가왔다.
"포기했다고 했잖아. 더 이상 달아나는 거 못하겠어."
수연의 손이 다가왔다. 뺨을 쓸어내리며 보는 눈이 너무 다정해서 온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지난 12년간 원해 왔던 것, 앞만 보고 달려왔던 목표가 눈앞에 있었다. 지환은 벅찬 희열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서로의 동정을 가졌던 12년 전 그날 밤처럼 가슴이 쿵쾅 뛰고 손끝이 떨렸다.
"그냥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래. 다른 건 생각하지 않을래. 그냥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할 거야."
지환은 뺨에 닿은 수연의 손을 잡아 키스했다. 섬세한 손가락에 입 맞추며 뜨겁게 이는 갈망을 조금이나마 달래었다.
그렇게 해두지 않으면 수연이 겁먹을 정도로 몰아붙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리 말리자."
가만히 수연을 끌었다. 침대에 앉혀두고 드라이어를 가져와 뒤에 섰다. 수건을 푸니 젖은 머리칼이 반짝거리며 흘러내렸다.
드라이어의 따뜻한 바람과 소음이 두 사람의 침묵을 편안하게 감쌌다.
"왜 잘랐어?"
"마음에 안 들어? ……잘라도 소용없었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있어도 오빠는 안 됐어."
손가락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좋았다. 가는 머리카락이 점점 더 부드러워지며 향기롭게 날렸다.
"마음에 들어. 중학교 때 같다."
"내가 참 안 늙지?"
수연은 스스로의 농담에 쿡쿡 웃었지만 지환은 웃을 수가 없었다.
머리칼 밑으로 드러나는 귀와 가느다란 목덜미가 너무 고와서 웃을 수가 없었다. 저절로 손이 움직여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드라이어는 내팽개쳐지고 덜 마른 수연의 머리칼도 뒷전이 되었다.
지환의 손가락이 성욕을 띠며 매만지자 수연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지환의 얼굴은 붉은 기운이 돌아 뜨거웠고 수연의 피부를 쓰다듬는 손길에도 점점 욕망의 의지가 담겨갔다.
수연은 천국의 쾌감을 약속하며 다가드는 접촉에 기꺼이 온몸을 내맡기려했다.
"아직도 너 참 하얗구나."
지환은 들뜨기 시작하는 수연의 목에 달아오른 입술을 갖다대었다.
"속이 다 비치는 것 같다."
"마음까지 다 비쳐? 그러면 안 되는데……."
수연이 달뜬 목소리로 답했다. 두 눈을 감고서 지환이 파고드는 목덜미를 내어주며 쾌감에 전율했다.
"나 지금 되게 무시무시한 생각하고 있거든. 다시 오빠가 날 떠나면……, 그땐 오빠 진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있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죽여 버릴지도 몰라. 무섭지?"
지환은 손을 뻗어 수연의 턱을 잡아 뒤로 돌렸다. 지환이 열망에 겨운 눈으로 보자 수연이 애절하게 속삭였다.
"미안해, 오빠."
"뭐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줬는데, 혼자서 다 이겨내고 이렇게 멋있고 근사한 남자 돼서 내게 돌아와 줬는데, 그런데 밀어내기만 했어.
미안해. 나약하고 옹졸하게 굴어서 미안해."
"아니. 미안하고 고마운 건 나야. 네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살았어. 한눈팔지 않고 살 수 있었어. 넌 내게 그런 존재야.
바르게 성실히 살도록 만들어 주는 존재. 너 생각하면 바르고 떳떳하게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돼. 네가 날 지켜줬어."
"난 아닌데. 난 심술로 가득 차서 될 대로 되라고 살았는데."
"안 그랬을 거야. 내가 널 알아. 겉으론 그랬을지 몰라도 진심으로 그랬을 리가 없어."
"미안해."
"뭐가 또?"
"다른 사람한텐 줄 수가 없어. 힘들어도 내 옆에 있어 줘."
지환은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고는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응해 오는 수연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부드럽고 뜨거운 입 안을 거침없이 휘저었다.
완전히 자신의 의지를 잃은 수연은 그대로 지환의 가슴으로 쓰러졌고 지환은 아기를 안 듯이 수연을 보듬어 안았다.
드디어 자신의 손아귀에 수연이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