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란,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뜨거운 마음
"그렇게 걱정되면 엄마가 직접 전화를 해보면 되잖아? 왜 엄만 자기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 거야?"
수연은 12시가 되어 가는데도 아버지가 들어오시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수연이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접대 때문에 늦으실 거 같다는 얘기를 전했는데도 어머니는 또 전화해 보라고 다그쳤다.
아버지가 퇴원하신 이후에도 일은 조금도 줄이지 않고 술도 담배도 예전처럼 많이 하신다는 게 어머니의 걱정이었다.
걱정이 되는 건 수연도 마찬가지였지만 막상 아버지가 들어오면 한마디도 않는 어머니가 답답해서 싫은 소리가 자꾸 나왔다.
"아빤 엄마가 싫어한다고 지환 오빠를 못 받아들이시겠대.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기나 해?"
"아빠한테 지환이 얘기를 했단 말이니?"
"했어. 아빠가 너무 힘들어하시는 거 같아서, 지환 오빠라도 써보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어.
아빠는 엄마가 오케이하면 지환 오빠 도움 받으실 거야."
"그 앤 안 돼."
"엄마만 생각하지 말고 아빠를 좀 생각해. 지환 오빠가 도와주면 아빠는 한결 편하실……."
"너 그 녀석 만나지?"
"엄마, 제발……."
"회사 당장 그만둬. 안 그러면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만두게 만들 테니까. 그 전에 네가 알아서 그만둬. 알겠니?"
"엄마!"
"그 녀석은 받아들일 수 없다. 절대로."
대국의 꺾꽂이가 한창인 5월에도 어머니의 손은 항상 정갈했다. 늘 흙을 만지는 사람의 손이라고는 믿지 않을 만큼 희고 고왔다.
아버진 그 손을 지키려고 일을 하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은 한 번도 아버지에게 닿지 않았다.
아버지가 몇 번인가 외도했다는 걸 알고 있고 어머니가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자임에도 수연은 아버지에게 연민했다.
싸우지 않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지키려면 싸워야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에 냉담함으로 응수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머니는 지키고 싶지 않은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틈이 없는 어머니의 벽과 싸우는 데에 지친 수연은 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불을 끄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휴대폰에 뜬 이름은 박휘문인데 저쪽에선 대답이 없었다. 수연은 전화기의 볼륨을 높이고 휘문을 불렀다.
"휘문 씨?"
"나, 나 지금 만나."
"지금?"
"집 앞에 있으니까 나와."
그리고 전화는 뚝 끊겼다. 수연은 커튼을 열고 대문 앞 쪽을 내려다보았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희뿌연 것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물을 끼얹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는데 밤늦게 무슨 일일까. 수연은 옷을 챙겨 입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휘문 씨?"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휘문이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어두워 표정이 잘 보이지가 않았지만 어쩐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괜찮아?"
물으며 다가서는데 갑자기 휘문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팔을 낚아챘다. 수연은 그대로 벽에 밀쳐져 휘문의 몸에 가두어졌다.
술 냄새가 확 끼쳐왔다.
"내가, 내가 어떡하면 돼?"
"왜 이러는 거야?"
휘문에게 잡힌 팔이 아팠다.
"이것 좀 놓고 애기해."
하지만 휘문은 막무가내로 수연을 다그쳤다. 수연은 점점 공포를 느꼈다.
"말해 봐. 내가 어떡하면 되는지.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울고……, 무릎 꿇고 빌라면 빌게.
네가 시키는 대로 다할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날 버리지 마. 떠나지 마."
그 느낌을 알고 있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같이 참혹하고 쓰라린 기분,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기분, 다시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 같고,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자신은 지환에게 받은 그 기분을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걸까.
다른 사람에게 그 지독한 기분을 맛보게 하는 걸로 복수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있었던 걸까.
수연은 슬퍼졌다. 스펀지를 파고드는 물처럼 슬픔이 온몸을 적셨다.
"이러지 마, 휘문 씨. 휘문 씬 잘못한 거 없어. 내 잘못이야."
"뭐래도 좋아. 내 잘못으로 해도 좋고 내가 미친 거라도 좋아. 난 정말 널 잃고 싶지가 않아. 잃을 수가 없어."
"아, 휘문 씨 정말 미안해."
수연은 무너져 내리는 휘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측은하고 애달파서 정말 뭐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하며 휘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질 거야. 나 때문에…… 정말 미안해."
"처음엔……, 그래 처음엔 그냥 가볍게 한번 사귀어볼까 정도였어."
수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휘문이 고백했다.
"남자들이 꿈에 그리는 여자, 그 여자가 나 좋다는 게 기분 좋아서 으스대는 기분으로 사귀자고 한 거였어.
하지만……, 하지만 오수연, 이걸 알아야 해. 커플링 줄 때, 그때 난 정말 너랑 결혼한다고 마음먹었던 거였어.
너랑 오순도순 살겠다고, 너한테 안착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었어. 알겠니? 알아?"
"미안해. 미안하단 말밖에 할 말이 없어."
"그런 말 듣고 싶은 게 아냐!"
홱 머리를 든 휘문은 이마가 닿을 듯 가까이 있는 수연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석지환이랑 싸울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나한테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줘. 응?"
조르는 휘문의 눈은 어둠이 드리워져 매우 검게 보였다. 그 검은 빛은 수연에게 지환을 떠올리게 하고 가슴을 떨리게 하고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지 마. 휘문 씨만 상처 입을 뿐이야."
휘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싸워봤자 질 게 뻔하다는 수연의 말은 그녀의 감정이 이미 지환에게로 기울었다는 걸 의미했다.
지환은 너무 강력하고 휘문은 약하다고 생각하는 수연의 밑바탕에는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수연은 자신의 말이 무엇을 뜻하지도 모르고 휘문의 가슴을 할퀴어댔다.
"지환 오빤 위험한 사람이야. 강철 같고 칼 같은 사람이야. 몸 사리지 않고 무슨 짓이든 할 거야. 휘문 씬 당해 내지 못해.
내가 휘문 씰 붙잡고 있으면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거야. 난 지금 얼마나 무기력한지 몰라.
오빠가 놓아주라고 할 때 놓아줬으면 괜찮았을 텐데……. 정말 미안해."
"오수연이 무기력하다구! 석지환을 조종하고 있는 건 너야! 네가 악착같이 내게 매달리면 석지환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지금 핑계를 대고 있는 거야. 내 곁에서 떠나려고 석지환을 방패삼고 있어!"
"그게 아냐. 난, 읍!"
휘문의 거친 키스에 말문이 막혔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덤벼드는 휘문의 키스는 차라리 처절했다.
수연은 안지도 뿌리치지도 않은 채 휘문이 하는 대로 두었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생각이 얽혀들고 있었다.
언젠가 지환 오빠는 휘문을 방패로 내세우지 말라고 했고, 지금은 또 휘문이 지환 오빠를 방패삼지 말라고 한다.
코너에 몰려 두려울 때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방패로 내세웠던 것일까. 혼자선 이겨낼 수 없으니까 두 사람 뒤에 숨어 싸웠던 건가.
난 정말 그렇게 비겁한 얌체였나. 잠재의식 속에서 남자들을 괴롭히고 증오하고 복수하고 있었을 만큼 음흉한 사람이었던가.
그때 갑자기 목덜미가 시원해지는가 싶더니 가슴이 열렸다.
브래지어 속으로 파고드는 손길을 느낀 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대로 뚝 굳어버렸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아, 안 돼."
……할 수 없다.
"안 돼."
수연은 두려운 눈으로 휘문의 몸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욕정에 휩싸인 휘문은 듣지 않고서 수연의 목덜미를 게걸스럽게 탐하며 파고들어왔다.
휘문의 입술이 핥고 빠는 축축한 소리를 내며 가슴 쪽으로 움직였다.
"휘문 씨, 제발……."
"수연아, 수연아……."
나쁜 귀신이라도 씐 사람처럼 격렬하게 파고드는 휘문의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수연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반항하던 수연의 움직임이 멎자 휘문은 달콤한 소리를 내며 수연의 가슴에 입술을 댔다.
혀끝으로 간질이며 헐떡이는 신음소리를 내고는 손으로 수연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안 돼."
수연은 벽에 밀쳐진 채 잔뜩 굳어서 검은 허공을 보며 거부했다. 너무 경직되어서 목소리조차 빳빳했다.
"안 돼."
점점 더 위험스럽게 파고드는 휘문의 손길에 머리가 지끈 울렸다.
"안 된다고 했잖아!"
무섭게 소리치며 밀어내는 힘에 휘문은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수연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몰랐다.
다만 자신의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가 몸과 마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는 걸 느낄 뿐이었다.
수연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휘문을 일갈하고서 그대로 집으로 들어와버렸다. 가슴이 또 터질 것처럼 무섭게 뛰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손발이 싸늘했다.
'넌 오빠 거야. 네 몸은 오빠 거야. 거긴 오빠 거야.'
되울림 소리에 구토가 일었다. 수연은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를 끌어안고 헛구역질을 하는 순간 지난 12년간 되풀이되는 이 지긋지긋한 주술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은 지환의 주술에 걸린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다른 남자의 손이 몸의 깊은 곳으로 향할 때마다 느끼는 이 구토 증세는 스스로의 최면인 것이다.
지환의 것이 되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생긴 자기 방어술이었던 것이다!
수연에게 치한 취급을 당하고 술이 떡 되도록 취한 휘문이 전화한 건 하루에게였다.
휘문은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나온 하루를 안고 모텔을 찾았다.
그날 밤 휘문은 하루를 안고서 분노를 발산하고 상처를 씻었다.
모든 것을 다 알겠다는 듯이 쓸어 안아주는 하루를 나중에는 휘문이 보듬어 안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주는 하루가 고마워서 안았다가 끝에는 사랑스러움에 욕정이 일어서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휘문은 매달려오는 하루를 안으며 수연을 외쳐 불렀고, 하루는 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삼키고 휘문을 밀쳐냈다.
휘문은 걸레처럼 망가진 채로 허름한 모델에서 싸늘한 하룻밤을 보냈다.
"양희 씨가 몸살 기운이 있어서 못 나온다는군. 대직을 누가 좀 서줘야겠는데……."
"오수연 씨가 하면 되겠네요. 별로 하는 일도 없으니까."
잔뜩 무시하는 말로 깔아뭉개 놓고선 거기에다 지환의 비서를 하라고 하니 수연은 팍 기분이 상해서 가시 돋친 목소리로 대응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장 대리님! 제가 왜 하는 일이 없어요? 복사도 하고 팩스도 보내고 커피 심부름도 하고……."
"야, 그런 일은 아무 자리 앉아서도 다하는 거야. 제 살 깎아먹지 말고 시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뭐라구요!"
화가 나 씩씩거리며 소리치는데 회의실 문이 열리고 지환이 들어왔다. 수연은 그대로 앉아 모닝미팅을 할 기분이 절대 아니었다.
어제 헛구역질한 것도 그렇고, 그 원흉인 휘문과 지환을 보는 것도 그렇고, 눈앞에서 속을 박박 긁어대는 재수 없는 장 대리를
보는 것도 모두 치가 떨리게 싫었다. 그래서 수연은 몸서리를 치며 그대로 회의실을 나와버렸다.
"정말 확 때려치워버릴 거야!"
쾅! 문을 닫고 나온 수연이 무서운 속도로 걷는데 뒤에서 윤 대리가 불렀다.
"거기 서, 오수연!"
"싫어요!"
"야, 이 싸가지야!"
"뭐라구요!"
수연은 파르르 화를 내며 윤 대리를 쏘아보았다.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가 들고 있던 수첩으로 윤 대리의 가슴을 팩 쳤다.
"내가 왜 싸가지예요!"
"넌 도대체 회사 뭣 하러 다니냐?"
"그렇잖아도 그만 둘 거예요! 흥!"
"야, 한 번 최선을 다해서 부딪쳐 보고 그런 얘기해라. 남들은 못 들어와서 아등바등인데 뭐가 잘났다고 그만 둬.
쥐뿔도 없는 게 아버지 재산 믿고 까불래?"
"뭐, 뭐예요!"
덤비려던 수연은 강한 손에 손목이 잡혀 질질 끌려갔다. 윤 대리는 안 끌려가려고 버티는 수연을 휙휙 잡아끌면서 나무라는소리를 했다.
"내가 너 진짜 내 여동생 같아서 하는 소린데 말이다. 진짜 내 여동생이었으면 반 죽여 놨다."
"내가 왜 윤 대리님 여동생이에요! 자긴 순 바람둥인 주제에!"
"입 다물고 거기 앉아."
수연은 물건처럼 내팽개쳐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말려 올라 간 치마를 끌어내리며 몸을 가누는데 분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취급한 사람은 없었다. 화가 난 지환이 완력을 쓰더라도 자신은 늘 소중하게 다뤄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무용지물 다루듯이 막무가내로 휘둘러지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나 다음달에 천안으로 내려간다."
"네?!"
"내 여자가 거기서 교편 잡고 있어서 지점으로 발령내 달라고 했어."
"흥! 자, 잘됐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연은 가슴이 철렁하게 아쉬웠다.
회사에서 누구보다도 말이 잘 통하고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윤 대리를 다시 볼 수 없다니 마음이 엄청 허전해지려 했다.
"내가 이 투자분석팀을 나가도 저 자리엔 또 다른 사람이 와 앉을 거야. 내가 하던 일을 하고 내가 해야 할 일도 하겠지.
조직에서 구성원은 참 아무것도 아냐. 차 부속 갈아 끼우듯이 갈아 끼우면 그만이거든. 사장이 없어 봐. 그 일 누군 못할 거 같아?
그 만한 일 할 사람은 또 얼마든지 있다구. 근데 사람은 달라. 일은 그래도 사람에게 사람은 대신하기가 쉽지 않아.
집에 있는 여자가 내 마음에 있는 여자 대신할 수 없었거든. 그거 됐으면 이혼은 안 했지. 나 나가면 오수연이 좀 쓸쓸하겠지?"
"치, 누가……."
"있는 동안 사람들한테 최선을 다해서 해. 꼭 일을 열심히 하란 소리는 아니지만,
일 열심히 해서 인재라고 기억되는 것도 나쁘진 않단 걸 좀 배워 봐. 여기서 나가서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금 만큼 못해.
재능 있는 일 찾을 순 있겠지만 여기 사람들처럼 익숙한 사람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사람이 재산이야. 재산 좀 아껴.
알았냐,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야."
"모두 나 싫어하잖아요. 윤 대리님도 나 재수 없다고 했으면서……."
"그럼 이제부터라도 재수 있게 해봐. 네가 한다면 다 도와줄 거다, 인마. 석지환 이사한테 기대서 네 자신 잃진 마.
아무리 사랑해도 네가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상대가 힘든 법이다."
"잔소리 좀 그만해요. 근데 회의는 어떡하고 나왔어요?"
"네가 그러고 나가니까 다들 나보고 나가보라잖아. 장 대리는 김 과장님한테 엄청 구박 맞고.
봐봐, 네가 어디 가서 저렇게 좋은 사람들 만나겠냐."
"치……, 치."
투덜투덜하면서도 수연은 눈을 들지 못했다. 눈이 빨개져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하고 있어. 커피 마실래?"
"그, 그래서 언제 간다구요?"
"왜, 따라 올래?"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자리가 났어요? 요즘 지점에선 충원 안 하려고 한다던데."
"석 이사가 힘 좀 써줬지. 아무래도 내가 너랑 사이좋은 게 눈엣가시였나 봐. 말 꺼내자마자 얼른 자리 만들어 주대."
"설마, 말도 안 돼."
"그냥 내 짐작이야."
윤 대리의 짐작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환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인해 볼 생각도 화도 나지 않았다.
이제야 지환이 자신의 주위 사람들을 경계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에 말이다.
수연의 가슴에는 지환이 떠난 빈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렇듯이 지환의 가슴에도 수연이 떠난 빈자리가 비어 있었고,
지환은 어떻게든 그곳을 채우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연과 연결된 다른 줄들을 모두 끊으면
결국 수연이 그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수연은 그런 지환의 생각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자신 역시 지환이 떠난 빈자리로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이 너무나 두려울 정도로…….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리로 돌아오는 걸 보고서 수연은 쭈뼛쭈뼛 장 대리에게로 갔다.
"저……, 장 대리님. 아까는 제가 무례했어요. 사과드릴게요."
"뭐, 됐어."
"아니에요. 제가 건방지고 싸가지 없이 굴었어요. 죄송해요."
"그만해라, 낯 뜨겁다."
사람들 이목 때문에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마는 장 대리였지만 수연은 화내고 있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윤 대리의 말이 옳았다.
낙하산으로 들어와 잘하는 일 없이 비비적거리고 다니는 자신을 이 사람들은 참 잘 받아들여 주었다.
낙하산이라고 놀리기도 하고 싫은 눈치도 많이 줬지만 치명적으로 괴롭힌다거나 내쫓으려고 안달을 하진 않았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지금에는 가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족, 그건 수연에게 참 어색한 단어면서 동경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자, 그럼 전 양희 씨 자리로 갈게요. 저 없어도 열심히들 하세요."
"어이, 살아 돌아오길 바래."
"건투를 비네, 졸병."
수연은 웃음을 참으며 간단한 소지품을 챙겨 지환의 방으로 갔다.
지환의 책상과 비서의 책상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컴퓨터만 주시하고 있는 지환과는 그렇게 부딪칠 일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발이 저릴 정도로 긴장되었다. 누군가의 기원대로 살아 돌아가길 바라는 수밖에.
"뭐가 이렇게 많아?"
수연은 책상 달력에 쓰여 있는 메모를 읽었다.
"7시30분 모닝미팅, 12시 30분 GT 도우성 사장과 점심, 오후 4시 UI 기업 탐방, 6시 SPF 채원일 상무이사와 저녁…….
회사가 사람을 아주 잡네, 잡아."
그때 갑자기 인터폰에서 소리가 났다. 수연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가 간신히 버튼을 누르고 대답했다.
"네, 이사님."
"잠깐 들어와요."
굵은 저음이 사무적으로 말하고 사라졌다. 방 안에 그 울림이 흐르는 동안 수연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건 어떤 걸까.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 되는 건가? 좋아, 시키는 일은 열심히 해주지.
수연은 긴장을 감추며 애써 씩씩한 걸음으로 지환의 방으로 들어갔다.
"부르셨……."
"이거 팩스 좀 보내. 리스트는 팩스기 옆에 붙어 있을 거야."
"네."
수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툭 던져주는 서류를 들었다. 몸을 돌려 나오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돌려 지환을 보았다.
넓은 어깨며 빠르게 뭔가를 쓰고 있는 손가락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어깨에 기대어 부드러운 손길에 쓰다듬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 상상에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 수연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 느끼고 흠칫 놀랐다.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뭐야, 바보같이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근데 사람이 들어갔는데 왜 쳐다보지도 않아?
아는 체도 안 하고. 어디 아픈가…….
그 이후에도 지환은 사적인 눈으로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전화를 연결시킬 때에도 사무적으로 받을 뿐이었고 복사를 시키거나
공문 발송을 지시할 때에도 여간 냉정한 게 아니었다. 지환은 평소 일하는 그대로일지 몰랐지만,
늘 다정한 눈으로 혹은 뜨겁게 바라보던 지환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게 신경에 거슬렸다.
수연은 비서실에 혼자 앉아 묘한 외로움에 빠졌다. 지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기분은 수연을 짜증스럽게 만들었다가 나중에는 초조하게 했다.
지환이 점심 약속을 끝내고 돌아온 뒤 겨우 점심을 먹고 오라고 허락해 줘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텅 빈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으려니 처량한 기분도 들고 이게 정말 직장 생활인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간섭을 하거나 혹은 괴롭히거나, 혹은 어울려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고마운 느낌마저 생겼다.
뒤늦게 철난 수연은 복잡한 개미집에 놓인 미아처럼 두리번두리번하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양희가 메모해 놓은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다가 지환의 방에서 퍼져 나오는 짙은 커피 향에 콧날을 찡그렸다.
일손을 놓고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둔 주전자를 꺼냈다. 준비한 것을 들여가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지환이 나타났다.
수연은 얼떨결에 돌아서서 비서의 자세를 취했다. 찻잔이 놓인 쟁반을 든 채 굳어 있으려니 지환이 눈길을 주었다.
"그거 내 거야?"
"아, 네."
수연은 들고 있던 쟁반을 쑥 내밀었다. 지환은 안의 내용물을 보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게 뭐야?"
"시, 식혜."
"식혜?"
"너무 커피만 마시니까……."
지환이 커피를 즐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특히 일에 열중할 때는 커피를 줄담배처럼 달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오늘 내내 신경이 쓰였던 참이었다.
"그래서 사왔어?"
"아까 점심 먹을 때 구내식당에서 좀 얻어왔어요. 맛있더라구요."
수연은 지긋이 바라보는 지환의 시선에 눈을 어디에서 둬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구두 속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벽에 걸린 시계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지환이 손을 뻗어 잔을 집더니 벌컥벌컥 식혜를 마셨다.
수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너무 단데."
"쓴 것만 마시지 말고 단 것도 좀 마셔요. 그래야 몸이 균형을 이루지. 그러다 카페인 중독되면 어떡하려고…… 요."
수연은 비서의 입장이라는 걸 상기하고서 잔소리가 되려는 걸 간신히 무마했다.
바르게 서서 지환의 손에서 컵을 받아들어 얌전히 쟁반에 놓았다.
"바로 퇴근할 테니까 시간되면 퇴근하도록 해. 급한 연락 있으면 휴대폰으로 해줘."
"네."
돌아서 쟁반을 내려놓은 수연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다. 지환이 문손잡이를 잡고서 멈추어 서 있었다.
순간 수연은 긴장해서 지환의 등을 보았다,
"너, 카페인 중독될까 봐 걱정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직장 상사도, 네 오빠도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느닷없이 진지한 지환의 물음에 수연은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네가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긴 한데……."
잠깐 말을 끊은 그 몇 초 동안 수연은 너무 긴장돼서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내가 너한텐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지환은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렇게 사라져준 것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이쪽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간 건 불만이었다. 수연은 새삼스럽게 깨닫는 일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말해 주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어떻게 꽁꽁 얼어서 한마디도 못했을까.
수연은 털썩 자리에 앉아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결혼은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어떻게 하더라도 불행한 결말이 뻔한데 날더러 뭘 어쩌란 말야.
엄마 아빠가 순순히 허락하실 리가 없어. 전쟁이 따로 없을 거야. 결국은 전부 상처투성이가 될 게 뻔한데, 뻔한 길을 왜 가.
생각 없이 저지르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열다섯일 때는 어리다고 참아줄 수도 있지만, 이 나이에 무책임하게 저질러서 어떡하겠단 거야.
이성적으로 판단하자, 오수연. 이젠 어른이니까 실수는 용납 안 되는 거야.
수연은 고집스럽게 마음의 경계를 풀지 않았다.
요구하는 쪽은 지환이고 자신은 응해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수연은 자신이 지환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게 되면 칼자루는 지환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의 처분에 따라 자신은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지환을 원하는 마음의 간절함보다 아직은 두려움이 더 큰 수연이었다.
서류 작성을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몰입했었다는 것에 본인도 놀라면서 뿌듯한 느낌에 기지개를 켰다.
목이 약간 뻐근했지만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책상을 정리했다.
이만하면 임무 완수인가.
스스로 흡족해서 사무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윤 대리가 고개를 배꼼 디밀었다.
"퇴근 안 해?"
"지금 하려구요."
"딱정벌레, 공장에서 아직 안 나왔지? 태워줄까?"
"좋죠. 뒷정리 좀 하고 나갈게요."
"오호, 깔끔한 마무리를 하시겠다? 사람이 확 달라졌네. 못 알아보겠는걸."
놀리는 윤 대리에게 눈을 흘기고 작성한 서류를 결재판에 끼워 넣었다. 들고서 지환의 방으로 갔다.
지환의 방은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비서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책상 위에 결재판을 올려놓고 돌아서 나오려는데 문득 'ECONOMY21'이라는 표지의 주간지 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봉투가 보였다.
수연은 무심코 그 봉투를 휙 뺐는데 그 바람에 봉투 속에 든 사진이 카펫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에이 참."
투덜거리며 주우려고 몸을 굽히는 수연의 시선에 사진 속의 인물이 잡혔다. 멀리서 찍은 듯 흐릿했지만 그건 분명 휘문이었다.
어느 어두운 골목길 담벼락에 서서 어떤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수연은 천천히 손을 뻗어 사진들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올렸다.
어느 사진엔 여자의 등이 보이고 어느 사진엔 여자의 입술에 키스하는 휘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에는 눈을 감고 키스에 취한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여자는 다름 아닌 하루였다.
"세, 세상에!"
수연은 충격에 빠져 비틀거렸다. 사진을 움켜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막막하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쿵쾅 뛰었다.
꼭 자신이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처럼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안 나오고 뭐해? 어, 어디 갔지?"
밖에서 윤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연은 다급히 사진을 감추고 후닥닥 걸어 나가며 바쁜 척을 했다.
"아, 그걸 깜빡했네. 안 되겠어요, 윤 대리님. 먼저 가세요."
"왜? 뭐 잊어버렸어?"
"네, 양희 씨가 오늘 꼭 보내라고 한 공문이 있는데 깜박했어요."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어떡해? 오래 안 걸리면 기다리고."
"아니에요. 먼저 가세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알았어. 모처럼 일 좀 하겠다는데 말릴 순 없지. 그럼 내일 봐."
"네……."
윤 대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수연은 얼어붙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질 않았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수연은 의자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졌다.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서 불쑥불쑥 치솟았다.
박휘문이 날 배반한 걸까?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아니, 이 사진이 진짜이긴 한 걸까? 오빤 또 어째서 이런 사진을 가지고 있는 거지?
결벽증이 의심될 정도로 꼼꼼한 사람이 이런 사진을 버젓이 책상 위에 두고 가다니, 혹시 나 보라고 일부러 두고 간 건가?
도대체 오빤 이런 걸로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루야. 둘이 정말 사랑이라도 하는 거라면…….
기분이 이상했다. 휘문에게 혼이 나갈 정도로 마음을 빼앗긴 것도 아니면서 하루에게 키스하는 걸 보니 아무리 사진이라도 약이 올랐다.
고약한 심보인 줄 알면서도 속이 찜찜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제는 징그러운 버러지를 대하듯 밀쳐냈으면서도 하루를 안고 있는 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사람인데 나 때문에 상처만 받았어. 아, 진심이라면 응원해 줘야 되는 거겠지?"
수연은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고서 다시 한번 사진을 보았다.
"각도 한번 절묘하네. 어떻게 이런 사진을……."
그제야 수연은 지환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진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머리로는 궁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환이라면 미운 짓들을 많이 생각해 낼 게 분명했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수연은 화를 내며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지환의 휴대폰 번호를 누르고 통화가 되기를 기다렸다.
"여보세요?"
"어,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나 보네요."
"석지환 씨 찾으시나요?"
"네? 네. 아, 근데 누구시죠?"
수연은 나긋나긋한 젊은 여자 목소리가 의미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듣고 있자니 두개골이 화끈 달아오르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지금 막 샤워하러 들어갔는데 누구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뭐, 뭐라구요?"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손끝이 달달 떨릴 지경이었다.
"샤, 샤워 중이라니! 지금 거기 어디예요? 설마 호텔은 아니겠죠?"
너무 놀라는 수연의 목소리에 기가 죽었는지 상대는 잠깐 말이 없었다. 답답해진 수연이 다시 물으려는데 저쪽에서 물어왔다.
"……누구시죠?"
"난…… 여긴 회사예요. 이사님 지금 어디 계시죠?"
"아…… 지금 집인데……."
수연은 그대로 수화기를 부서져라 쾅 내려놓았다.
여자랑 집에서 뭘 하는 거야! 샤워 중이라니, 미쳤어!
수연은 자신이 왜 이렇게 머리가 울릴 정도로 화가 나는지 생각지도 않고 냅다 사무실을 뛰어 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선 지환이 사는 오피스텔 이름을 댔다.
비상연락망이 든 수첩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을 알고 자신의 부주의함에 엄청 짜증을 부렸다.
윤 대리에게 전화를 해 주소를 알아내고선 분노의 칼을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