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3화
라떼는 내 시선을 따라 입구를 살폈다.
“기다리던 분이 오신 모양이네요.”
“아, 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꼭이요! 리어먼드가로 서신 보낼게요.”
신이 나서 멀어지는 셋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사이에, 앨라이가 눈앞에 와서 섰다.
“어떻게 그 일을 아셨습니까? 저조차도…… 아니, 신전의 누구라도 몰랐을 겁니다. 저처럼 사고뭉치가 그런 중요한 직책을…….”
그는 대신관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담되는지 말끝을 흐리며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구는 그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으세요. 앉아서 얘기하죠.”
“……네.”
손에 난 땀을 사제복에 닦으며 겨우 자리에 앉은 앨라이는 오늘 새벽, 제가 대신관에게 불려 갔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얕게 떨리는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 초점이 흐릿했다.
“……차기 대신관 후보를 고르는 건,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가 부름을 받았노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본론부터 이야기하다니. 정말 마음이 급하긴 급했나 보네.’
점원이 다가와 찻잔을 채워 주고 돌아가는 동안 잠깐 입을 닫고 있던 앨라이는, 우리의 대화를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부족한 제게 그런 자리가 돌아오냐고 여쭈었더니, 신의 안배는 지금은 알 수 없는 거라고만 하시고…… 그래서…… 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런 자리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
“앨라이 님.”
“몇 번이고 고사했지만, 대신관님께서는 이것은 피해 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마음의 준비를 빨리하는 게 좋을 거라고만 하셨어요.”
“하실 수 있어요. 그러니까…….”
“대신관님께서는 그렇게 정정하신데…… 어디가 아프신 건지…… 저같이 불민한 자가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하염없이 흔들리기만 하는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했다.
게임 속의 그는, 새하얀 수도복을 차려입은 채로 온갖 이들의 아픔과 기도를 의연하게 들어주는 이였으니까.
그렇게 되기까지, 이 여린 사람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을까 싶어서.
난 새끼 새처럼 걱정을 한꺼번에 털어놓는 가엾은 앨라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요. 잘할 거예요. 백 퍼센트 확신해요. 그렇게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어요.”
내 말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확신이,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것 같았다.
앨라이는 길고 흰 속눈썹을 위로 치켜뜨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이커스의 시선이 사람을 끌어당겨 그의 품에서 죽고 싶게 만드는 매혹 같다면, 앨라이의 눈빛은 하나도 더럽혀지지 않은 완전무결한 백지와도 같아서 눈을 맞추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그 새하얀 눈꽃 같은 시선으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어제 제게 했던 말은, 그리고 지금 해 주신 말은…… 그냥 응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이미 알고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거든요.”
‘내가 그렇게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감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신성력으로 판별까지 하는 거 아냐?’
어차피 앨라이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야말로 내가 이 게임 속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다른 희생자들도 믿을 만했지만 앨라이는 무려 플레이어인 나를 숨겨 주려다 내 눈앞에서 살인마에게 습격당하기까지 한 자였다.
최종장 직전의 일이었다.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나중에는 거의 뼈만 남다시피 해서 계속 누워 있었다. 그 와중에도 살인마의 연쇄살인은 끊기지 않았었지.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거다. 그가 무너지면 나 역시 기댈 곳이 없어질 테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할 것도 없이, 수백 번 머릿속으로 반복해서 생각해 왔던 일들을 가만히 입에 담았다.
“잘 들어요. 전 사실, 이 파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린가…… 지방 출신이라는 말씀인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전 아예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에요. 이 몸도 제 것이 아니고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어요.”
앨라이는 그 특유의 좋은 감으로 내 말이 진실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놀란 표정으로도 내 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떻게든 내 이야기를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는지, 흰 속눈썹이 일 초에도 몇 번씩 깜박여 댔다.
나는 그의 이해가 따라오길 기다리는 대신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게 이 세계는, 이 파크라는 곳은 게임 속 세상이었어요. 게임이라는 게 뭐냐면…… 동화책이나 소설책 같은 건데, 거기 배역이 되어서 내용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거예요.”
한번 털어놓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를 끌어들이려고 고백한 것뿐이었는데, 어쩐지 나도 모르게 점점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속에 응어리져 있던 말들이, 둑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알고 있는 거예요. 앨라이 님이 앞으로 어떻게 되실지, 이 파크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그리고 난 사건 수첩을 꺼내 보여 주고, 파크에서 활동하는 살인마에 대해 내가 아는 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앞으로 나올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앨라이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연쇄살인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는 파크 속에서 살면서 이미 들어 보았을 테지만, 미래에 생길 피해자를 미리 알아낼 수 있다는 것에는 꽤 놀란 눈치였다.
내 말이 끝나자, 우리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살롱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현악기 연주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앨라이는 아주 느리고 길게 숨을 내뱉고서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주인공이 되어서 내용을 바꿔 나갈 수 있다. 마치, 그게 아르비체 님의 지금 상황 같군요.”
‘……이렇게 단박에 이해해 줬어!’
그의 작은 중얼거림에, 내 가슴속에 잔잔한 기쁨이 번졌다.
“정말? 정말로 제 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믿어 주시는 거예요? 저조차도 받아들이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앨라이가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하는 말이 진짜라는 것은 알 수 있어요. 정신병에라도 걸린 게 아닌 이상, 당신의 말이 진짜겠죠. 그리고 당신도 제가 받아들이지 못할 일을 이미 믿고 있었잖아요.”
대신관 이야기가 앨라이에겐 그렇게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 댔는데도, 앨라이의 눈에는 아직도 신뢰가 가득했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르비체 님께서 경험하신 일이, 그리고 지금 경험하고 계신 게 어떤 일인지 저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희 신전에서는 이 세상은 서로 수없이 많은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연결이라면…….”
“소설책도, 동화책도 원래 있는 세계를 투영해 주는 연결 고리일지도 몰라요. 말씀하셨던 그 게임…… 이라는 것도요.”
그는 나보다도 훨씬 내 상황을 잘 이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잘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내 불합리한 상황이 더 답답했다.
“그게 말이 돼요? 거기에 제가 왜 불려 가냐고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힘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당신이 뭔가를 해결해 주길 바라는, 당신이 이 책의 마지막을 완성하고 덮어 주길 바라는 건지도 모르죠.”
누가 나를 선택한단 말인가?
내가 <살인자들의 밤>을 밤낮없이 열심히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굳이 내가 왜 그런 일을 떠맡아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뭔가 반박하는 말을 입으로 내뱉으려는 순간, 아주 최근에 제가 바라본 적도 없는 거대한 임무를 어깨에 짊어지게 된 앨라이의 잔잔한 시선과 눈이 맞닥뜨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그 짧은 순간 충분히 서로의 부담감을 이해했다.
‘대신관과 내가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난 그의 눈을 보면서 불평을 억지로 삼켰다.
“……왜 제가 선택된 건진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전보다는 이 상황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일 수 있는데 이렇게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앨라이는 살며시 입술을 당겨 웃었다. 긴장과 불안 때문에 여전히 창백한 낯이었지만 그래도 어색하나마 웃으니까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는 테이블보를 손안에서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아직 앳돼 보이는 그 희디흰 얼굴을 똑바로 들고 말했다.
“존경하게 됐습니다.”
“네?”
“처음에는 그냥…… 일반인 중에 신의 목소리를 듣는 자가 있다는 그런 걸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저를 왜…….”
“저는 그래도 처음부터 신의 종이 되고자 봉사하고 싶다는 의지를 갖추고 신전에 들어간 거니까요. 그런 제게 닥친 일이 아무리 이례적이라고 해도, 이 또한 어느 정도는 제가 바랐던 일입니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앨라이의 투명한 하늘색 홍채는 설원의 얼음처럼 청량해 보였다. 그 맑기만 한 눈으로, 그는 내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르비체 님은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죠?”
“자신의 의지와 조금도 상관없이 이런 막막한 곳으로,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떠맡게 된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도망가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고 그렇게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신 거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찾아 제대로 페이지를 덮으려고 하시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희생자가 될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할 건 아니에요.”
난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냥, 나는 살고 싶을 뿐이야. 난 <살인자들의 밤>을 게임으로 체험했었으니까 제대로 살아남으려면 모든 걸 해결해야겠다고, 진엔딩을 봐야겠다고 추측하는 것뿐이고.’
하지만 내 생각이 어찌 되었든 앨라이는 이미 제 안에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토끼 같은 그의 눈동자 위로 사르르 흰 눈꺼풀이 덮였다 올라갔다.
“저도, 받아들일게요. 아르비체 님께서 내리신 결단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결단이지만요.”
앨라이가 혼자 뭔가를 곱씹듯 생각하는 사이, 호감도 알림이 떴다.
[앨라이 쿠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210/297)
호감도 퀘스트 : 살롱 완료 보상으로 호감도 추가 상승 +50
Lv.3(260/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