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42화
“네, 제가 아르비체가 맞긴 한데요…….”
난 웅얼거리며 내게 말을 건 이들을 살폈다.
그 세 명의 여인은 척 보기에도 꽤 잘 사는 집 자제들이었다. 깃이 바짝 세워진 화려한 모자 하며, 그중 둘은 드레스가 아니라 유행에 맞는 결 좋은 바지 정장을 입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난 누군지 물어보려다가 문득 모자에 가리지 않은 셋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어디에서 봤는지를 떠올렸다.
‘세상에…… 마탑주의 손녀이자 차기 마탑주 내정자, 외상 전문 병원 병원장, 상단길드에서 크게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상단주 삼인방이잖아?’
게임 속에서 공략하기 어려운 캐릭터 중 손에 꼽히는 삼인방.
상류 귀족 가문 자제들일 뿐만 아니라 각기 이 게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와 관계된 이들이라 사교계의 가십을 쥐락펴락하는 삼인방으로 유명했다.
궁정 연회장에서 가진 돈을 다 털어 비싼 선물 공세를 하면 호감도를 조금 높일 수 있다는 공략을 봤지만, 그렇게 해서는 돈이 부족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결국은 말을 걸어도 거절만 당하고, 한 번도 친해져 본 적 없는 이들인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난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그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중 가장 키가 작고 앳된 얼굴을 한 새까만 단발머리에 인형같이 붉은 볼의 소녀, 마탑주의 손녀인 라떼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저, 다짜고짜 성함부터 물어서 죄송해요. 실은 너무 궁금해서요.”
허리 절반까지 오는 긴 보라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여자. 병원장 르뮈에가 말을 이었다.
“요 며칠 동안 살롱에 올 때마다 화제의 중심에 아가씨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말하는 사람마다 내용이 다른 데다가…….”
마지막으로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회색 머리에 쇼트커트를 한 상단주 밀로라드가 말을 받았다.
“이야기만 들어 보면 겨우 일주일 사이에 리어먼드 가문을 아주 휘어잡았던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서 말을 섞어 보고 싶었어요. 무례하게 느껴진다면 미리 사과하죠.”
내가 너무 얼떨떨해서 뭐라고 말을 못 꺼내고 있자, 라떼가 얼른 말을 받았다.
“제발 드레스 이야기만이라도 들려줘요. 레이커스 님이 드레스를 사 줬다는 게 정말이에요?”
르뮈에와 밀로라드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보다 다과회 이야기를 해 줘요. 레이커스 님에게 꼬리 치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악기를 바리바리 싸 들고 모인 곳에서, 말 한마디로 리베아 백작 영애를 납작하게 해 줬다면서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둘이 너무 무례하게 느껴진다면 말해요. 제가 치워 줄 테니까.”
난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수다스러운 둘과 그 둘을 말리려는 밀로라드를 향해 작게 웃어 주었다.
“일단…… 일단 앉으세요.”
라떼와 르뮈에가 신이 나서 의자를 당겼고, 밀로라드가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다.
“약속이 있어서 오신 것 같은데, 저희가 시간을 뺏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워낙 일찍 나온 거라서요.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으면 좋죠.”
밀로라드가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레이커스 님께서 선택하실 만큼 너그러운 구석이 있으시군요.”
선택이라니…… 그건 아닌데.
난 내 앞에서 빛나는 세 쌍의 눈동자를 향해 어설프게 웃었다.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가십거리까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씀하신 건 대부분 사실이긴 해요.”
“꺅!”
“어머!”
“과연…….”
셋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걸어도 받아 주지 않던 이들이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한번 듣겠다고 쪼르르 달려와 눈을 빛내는 모습이 어딘가 귀여웠다.
난 그들이 물어 오는 소문에 대해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런 부분은 맞고, 이런 부분은 과장된 것 같다고.
생김새는 전혀 다른 이들이 세쌍둥이처럼 나란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니까 생각보다 길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뭐, 공작님과 아무 사이 아니라는 말은 전혀 먹히지 않은 것 같지만.’
난 약속 시각이 다 되어 가는 것을 보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이제 호기심이 좀 풀리셨어요?”
밀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 피곤한 일인데, 이렇게 기꺼이 이야기를 해 주다니 마음이 정말 넓군요.”
“아니에요.”
“그리고 공작님과의 사이는 꼭 숨겨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뇨. 숨길 만한 사이도 아니라니까요?”
“드레스도 사 주시고, 어딜 가도 함께하고 싶어 하시는데…… 아무 사이가 아니라니…… 공주님께서 마음 다치실까 염려돼서 그러시는 거예요?”
나머지 둘이 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쩜, 레이커스 님의 그 얼굴을 보면서도 의리를 지키시다니.”
“저 같으면 레이커스 님이 그렇게 구애를 하면 일 초도 못 버틸 텐데.”
“정말 심지가 굳으신 분이세요.”
내가 말도 안 되는 오해에 어쩔 줄 몰라서 그냥 웃기만 하자, 라떼가 앞으로 나서서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사실, 저희 셋 다 샤인과 루나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데 그 아이들이 그렇게 따른다고 하니까……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틀림없이 좋은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듣기 좋았다.
“그건…… 아이들이 잘 따라 준 거죠.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아니에요. 공작님께서 얼마나 까다로운 분인데,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분이 아니면 그렇게 믿고 맡기실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내가 샐쭉 웃자, 셋이 서로를 마주 보고 뭔가를 속삭이더니 내게 차례로 말했다.
“괜찮다면 다음에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이렇게 듣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맞아요. 다음에 우리 모임에 와 줄래요? 이렇게 시간 뺏지 않고, 정식으로 초대할 테니까요.”
“그래요! 꼭 와 주세요. 이번엔 마탑에서 일어나는 재밌는 일들을 얘기해 줄게요. 응? 마탑에서 최근 일어난 사건의 부검을 맡아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면 뒤지지 않는다니까요?”
라떼와 르뮈에, 밀로라드의 모임에 이렇게 간단히 초대될 수 있다고?
플레이어일 때는 정말로 가진 돈을 셋에게만 퍼부어도 가능할까 말까 했던 일이었다.
깜짝 놀라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셋이 기쁜 얼굴로 가볍게 손뼉을 쳤다.
[라떼 라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45/99)
호감도 이벤트 부검 개방
호감도 이벤트 마탑 개방]
[르뮈에 라루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45/99)
호감도 이벤트 외과 병동 개방
호감도 이벤트 해부 개방]
[밀로라드 드라셀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45/99)
호감도 이벤트 상단길드 개방
호감도 이벤트 비밀 상점 개방]
호감도 창이 한꺼번에 위로 밀려 올라갔다.
‘……세상에.’
그것을 훑어보는 내 눈에 딱 들어온 건 ‘부검’이라는 이벤트와 ‘비밀 상점’이라는 이벤트였다.
둘 중에 겪어 본 건 ‘비밀 상점’인데, 이것도 딱 한 번 겨우 겪어 본 이벤트였다.
그곳에서는 평소에는 살 수 없는 효율이 굉장히 좋은 아이템들을 구매할 수 있다.
그리고 부검…….
‘캐서 헌트의 부검 결과가 나왔다는 지금, 저 이벤트가 나오다니 완전 행운인데? 이벤트 제목만 들어도 어떤 내용일지 바로 알겠잖아.’
플레이어일 때는 나온 적도 없고 나올 필요도 없었던 이벤트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정말 필요한 루트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공략 루트를 해금했다’라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오랜만에 실컷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여기에서 친해진 이들이라면 정말로 많았고, 호감도를 올린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내 고용주이거나 나이 대가 완전히 다르거나, 혹은 서로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들처럼 편하게 느낄 수는 없었다.
“저기…….”
“네?”
“그 모임, 꼭 초대해 주셔야 해요. 저도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곧 약속이 있어서 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요.”
“어머.”
“정말이죠?”
“기꺼이 그래야죠.”
셋이 내 말에 각기 더 환한 얼굴을 해 보이는 것을 보니, 내 마음도 어쩐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저 멀리 살롱의 입구에 머리카락부터 바닥에 끌리는 옷깃까지 전부 새하얀 색으로 도배된 남자가 한 명 들어서는 게 보였다.
앨라이는 어제 보았던 모습처럼 왜소해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아주 혼란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듯, 자꾸 기둥에 부딪칠 뻔하면서 걸어오던 그는 점원의 안내를 받아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를 발견한 순간, 그의 물기 어린 눈이 반짝 빛났다. 마치 사막에서 혼자 오래 헤매다 갈 길을 겨우 발견한 순례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