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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 걸맞게 조용히 지한을 따라 참석하는 자리이니 그에게 누가 되지 않는 옷이면 되었다.
더는 토를 달지 않았고 그들이 챙겨주는 액세서리와 신발을 신고 단장을 마무리했다.
평소 입지 않던 옷에 화려하게 꾸민 모습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새롭기도 했고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혼자 생각에 빠져 있으니 실장이 말을 전해왔다.
“대표님이 기다리십니다.”
“네? 차 대표님요?”
“네. 파티 시간에 맞춰 가셔야죠.”
윤 실장의 재촉에 밖으로 나가니 지한이 턱시도를 입어보고 있었다. 보타이를 한 그는 평소보다 더 돋보였다. 가현을 등지고 선 지한은 거울 너머로 보이는 가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윤 실장. 다른 거 입혀.”
“…네. 대표님.”
그의 한마디에 정성껏 단장한 가현은 쇼퍼들에게 등 떠밀려 다시 룸으로 들어왔다.
“이게 최고라고 하셨잖아요.”
“클라이언트인 차 대표님이 아니면 아닌 거죠.”
결국 어깨가 드러난 롱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나갔지만, 곧바로 퇴짜를 맞았다.
실장이 항변 한마디를 했지만 행커치프를 채우는 채우던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짓했다.
“대표님, 이 옷이 고객님의 몸매를 살릴 수 있는….”
“그러니 다른 걸 입혀.”
“아, 네 알겠습니다.”
가현의 보기 좋은 몸매를 살리려 했지만 지한의 의도를 알게 된 눈치 빠른 실장은 곧바로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서야 허락을 받았다.
지한은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가현을 보고서야 돌아섰다.
“파티 늦겠어. 가지.”
가현은 종종걸음으로 지한을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차를 타고 가는 길을 직원들이 배웅했다.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던 실장이 떠난 차 꽁무니에 대고 한마디 했다.
“어지간히 남한테 보이기 아까운가 보네. 진작 말을 해줬으면 우리도 고생 안 했잖아.”
“정말요.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잖아요. 처음 입은 드레스 예뻤는데.”
“그럼 뭐해. 남자가 싫다면 그만이지. 나라도 저런 남자가 싫다면 취향도 바꾸겠어.”
윤 실장이 웃으며 말하자 모두가 동의한다며 웃었다.
쇼퍼들이 건물로 들어가며 지한과 가현의 관계를 연인이라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파티장으로 가는 차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숨이 막혀도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도 눈치 보여 창가를 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늘 자리에서 최대한 말을 아껴. 난 말 많은 건 딱 질색이니까.”
기존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벗어 뒷좌석에 놓인 셋톱박스 안 주얼리 상자에 넣었다. 그러곤 그가 착용했던 시계보다 더 고급스러운 손목시계를 바꿔 차며 가현에게 당부했다.
“…네.”
“실수는 용납 못 해”
“그렇겠죠.”
실수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니 당연하다 싶지만 늘 고압적으로 말하는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듯 가현도 마찬가지였다. 항변은 할 수 없으니 불만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현의 삐딱한 말투조차 무시했다.
파티장에 도착해 관련 스텝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리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울, 그것도 가장 중심지라는 삼성동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우거진 나무와 잘 가꾸어진 중정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한이 못마땅하게 쏘아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죄송해요.”
추운 날씨도 잊고 있던 가현은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그제야 한겨울의 한기가 느껴져 두르고 있던 퍼 숄을 붙잡았다. 입고 있는 옷매무새를 다듬는 그의 옆으로 얼른 뛰어가 옆에 섰다.
로비를 지나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성대한 파티와 이국적인 옷차림이 한국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걸어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파티의 주최자인 한부현 총장이 다가왔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친한 사이인지 악수를 하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웬일이십니까? 차 대표님이 파트너와 함께 오시고 새해에는 놀라운 일이 있으려나요?”
“작년에 기억 안 나십니까? 파트너 동반 파티를 만드셔서 저희 비서실이 마비될 지경이었죠. 이건 한 총장님 때문입니다.”
서슴없이 한 총장 탓을 하는 지한을 보고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서글서글한 웃음이 잘 어울렸다.
“제 탓이 인연을 만든다면 옷 한 벌은 벌었군요. 제 큰 그림을 이제야 이해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한부현 총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정가현입니다.”
“오늘, 제 수행비서입니다.”
지한이 무료하게 덧붙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비서님이 하루 파트너라면 차 대표님은 행복한 분입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한 총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그와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지한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다가와 인사하는 사람들로 그의 주변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와 함께 온 가현을 궁금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처음 파트너와 참석했으니 모두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가현은 턱시도를 차려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가현이 지한에게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상태를 알렸다.
“대표님, 저 조금 힘든데, 사람들 없는 곳에 가 있겠습니다.”
“여기서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 해. 날 곤란하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는 가현보단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입지가 중요하다 말했다. 이 남자에게 동정을 바라지는 않았으니 오히려 속 편했다. 이를 악다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네, 그럴게요.”
가현이 높은 힐을 신경 써 걸으며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구석진 자리로 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안이 없어 가현을 대동했지만 역시나 도움보단 여기서 쓰러질까 신경 써야 하는 독을 택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그녀가 멀어지자 뒤도 아니고 눈앞에서 그에게 칼을 꽂고 싶어 안달이 난 미친놈이 다가왔다.
누가 봐도 깡패로 보이는 덩치가 산만 한 최치수가 건들거리는 태도로 이곳에서까지 똘마니를 몰고 왔다.
이 자식이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곳까지 올 수 있다?
“많이 컸네. 최치수 이사.”
지한이 들고 있던 샴페인을 한 모금 넘기며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차지한 대표님, 요즘 너무 얼굴 뵙기 힘듭니다.”
“최치수 이사가 더 바쁘지 않나? 내가 아직 따라가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지.”
건들거리는 치수를 내리깔아보며 지한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그의 악수를 무시했다.
“여전하시네. 이 바닥에 발 들이셨는데 그러다 다치십니다.”
“둔하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 최 이사 걱정이나 해.”
치수의 눈에 살기가 가득해졌고, 지한의 언행에 뒤에 선 똘마니들이 되려 더 씩씩거렸다. 자기들이 모시는 형님이 당하는 꼴을 못 보겠는지 이런 자리에서 설치는 꼴에 지한이 픽 웃었다.
“이제 검은 손까지 다 섭렵하셔서 어디 건드릴 자가 있겠습니까?”
“나는 사업가일 뿐이지. 그곳까지 손에 넣었다면 내 등에 칼을 꽂으려 노릴 수 있겠어? 감히…….”
지인보다는 적을 경계하는 상대의 목소리에 지한의 눈이 매서워졌다. 치수의 말을 받아치는 그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지한이 한 수 위였다.
“너무 무시하신다. 차지한 대표님. 이제 저도 이런 곳에 올 정도는 됩니다.”
치수의 매서운 눈빛이 지한을 향했지만 조소하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치수를 찍어 눌렀다.
지한이 더는 상대할 마음이 없어 뒤돌아섰다. 그런 그의 뒤에서 화가 난 치수가 경고했지만, 그조차 무시했다.
“깡패가 쉽게 바뀌나? 특히 최치수가.”
“그러게. 깡패 근성은 쉽게 바뀌지 않아서 몸조심하쇼. 파티같이 온 계집애도.”
지한이 샴페인 잔에 남은 술을 마저 입안으로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그가 술잔을 치수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치수가 술잔을 한 손으로 받았다.
“이거나 받아.”
걸어가는 지한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치수가 받은 술잔을 움켜쥐었다. 가느다란 술잔 손잡이가 부러져 샴페인 잔이 바닥에 산산조각이 났다.
***
가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쥐 죽은 듯 그의 옆에 서 있기만 했었다.
그리고 가현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지자 조금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오늘은 일진이 나쁜 날이었다. 아직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힘겨웠다. 역시 무리였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본 곳엔 자신을 싫어하는 또 다른 이가 날을 세웠다.
“설마, 정가현 씨?”
라윤의 몸매가 드러나는 스팽글이 달린 화려한 드레스가 샹들리에의 크리스탈 빛을 받아 빛이 났다. 긴 웨이브를 한쪽으로 늘어뜨려 드러난 귀에 걸린 긴 드롭 귀걸이가 긴 목선과 몸매가 더해져 눈길이 갔다.
“와, 여기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데요.”
“안녕하세요. 백라윤 본부장님.”
가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이슈 없이 파티에 머무르는 시간까지 자신이 버텨주길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연말 파티 기대 많이 하고 왔는데 그쪽 때문에 난 고민이 많아졌어요.”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