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들여지는 밤-15화 (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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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를 머금고 있던 라윤은 굳은 가현을 보고 표정을 지웠다.

들고 있던 화이트 샴페인을 빙글 돌린 그녀가 진심 없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림 같은 미소엔 표정이 없어 긴장됐다. 라윤이 가까이 다가오며, 가현을 훑었다.

“차지한이 파트너를 데리고 왔다길래. 설마 설마 했는데…… 왜 하필 정가현 씨죠?”

가현을 삐딱하게 보는 라윤의 깎아내리는 태도에 사실을 설명할 수 없어 오히려 답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녀의 말이 불쾌하긴 가현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이렇게 곱게 치장을 해줬을까? 차지한이면 나 많이 삐뚤어질 것 같은데.”

라윤은 이미 삐뚤어져 있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속뜻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기억도 없는데 기억 없는 삶에 누구라도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현은 그녀의 오해를 풀고 싶었다.

“차 대표님 수행비서로 참석했습니다.”

“수행비서가 아니라 파티 파트너겠죠.”

“…….”

“내가 아는 차지한은 수행비서로 여자를 대동하고 파티에 참석할 남자가 아니니까.”

라윤의 단정 짓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차지한이 어떤 사람인데 냉정한 그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속 시원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차지한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백 본부장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저에게 비서 이상의 어떤 감정도 없으세요.”

“그렇죠. 내가 차지한을 너무 잘 아는데 그쪽 말대로 감정은 없어도 이렇게 옆에 붙여놓는 것도 할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죠.”

표정은 온화하지만, 그녀가 화가 났다는 건 느껴졌다.

옆을 지나가던 스태프에게 샴페인 잔을 준 그녀가 팔짱을 끼고 가현의 앞에 섰다. 라윤은 한발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백라윤, 내 비서 그만 괴롭혀.”

지한이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라윤이 지한을 마주 보며 쏘아보았다.

비꼬는 라윤의 말투에도 지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가현 씨. 로비에 나가 있어.”

“네, 알겠습니다.”

가현이 라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이미 온몸의 진이 다 빠져 버렸다. 다리를 끌 듯이 가현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라윤은 가현을 쳐다도 보지 않고 지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왜 나가 있으라고 해? 같이 이야기해 봐야지. 차지한 대표의 심경 변화.”

그 와중에 그의 시선이 가현을 향한 것을 보고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녀가 사라지고서야 지한의 시선이 라윤에게 향했다.

“달라진 건 없어. 파티 파트너가 무슨 큰일이라고 이러지?”

그녀가 진심으로 그에게 부탁했다. 얼마나 더 참아질지 모를 일이었다. 가현이 나타나고부터 차지한이란 남자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날 보면서 말은 정가현 씨에게 하네? 오빠, 나 그렇게 착하지 않아. 자꾸 자극하지 말아줄래.”

“백라윤 말도 안 되는 불필요한 질투는 그쯤 해.”

귀찮음이 묻어나는 표정의 지한은 파티라면 진절머리 난다는 태도로 옆에 있던 소파에 앉았다.

“불필요한 질투라기엔 오빠가 평소와 너무 달라. 겨우 유형 그룹 비서님 모시고 오려고 내 제안 거절했어?”

비꼬는 말투가 날이 서 있었다. 이 잔인한 남자는 독한 말만 내뱉어 화를 부추겼다. 늘 듣던 말인데 오늘은 유난히 거슬렸다.

“나와 엮여서 너한테 좋을 게 없어.”

“난 오빠와 엮이려고 노력 중인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잖아.”

이제는 고상한 척 숨기는 것도 지친 라윤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알아주지 않는 마음이 답답했다.

옆을 지나가던 스태프가 가져가던 샴페인 잔을 라윤이 낚아채 마셨다. 평소 온화하던 라윤은 사라지고 날을 세워 화를 내었다.

“난 옆에 여자 둘 생각 없다고 분명히 말했어.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야.”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인상을 잔뜩 쓰고는 라윤을 슬쩍 보았다. 라윤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결혼도 비즈니스처럼 해.”

“결혼을 왜 꼭 해야 하지? 라윤아. 난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부모도 없고 상대의 재력을 결혼으로 가질 마음도 없어. 내 인생에 결혼은 없어.”

“그럼, 다른 여자도 아니란 말이지?”

“날 세우지 마.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하게 만드는 건 이번 한 번으로 족해 이건 경고야.”

그가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역시 파티는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이런 분위기 만들고 가려고.”

“너와 이따위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아. 가야겠다.”

라윤의 마음을 아는 지한은 또 한 번 선을 그었다.

라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지한에게는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는 일말의 감정도 없어 보였다.

라윤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초등학교 때 처음 지한을 만난 이후로 라윤에겐 지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음이 없는 걸 알고 있어 자존심이 상했다.

라윤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은 가현이 신경 쓰였다. 특히 지한의 옆에 있는 모습에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더해져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가 파티장을 나가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오빠 옆에 있는 걸 내가 볼 수 있을까?’

몸서리치게 싫어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마음과 머리 어느 쪽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로비에 선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또 호흡곤란으로 쓰러질까 긴장했던 몸이 가라앉아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도 힘겨웠다. 그래도 파티장 안에서 큰일 없이 지나가 다행이었다. 지한을 기다리던 가현은 생각지 못한 부름에 무심결에 돌아보았다.

“서가현?”

돌아본 곳에는 자신 또래의 남자가 가현이란 이름을 불렀다. 턱시도를 입은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가현의 얼굴을 몇 번이고 훑었다.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재차 부르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려 보았다.

“가현이 맞지? 서가현.”

‘서가현?’

가현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똑똑히 자신과 눈을 맞추고 불렀다. 분명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낯선 남자에게 시선이 뺏겨 넋을 놓고 있을 때, 지한이 파티장을 빠져나와 불쾌한 표정으로 가현을 재촉했다.

“돌아가지. 눈도장은 찍었으니 이만하면 됐어.”

“저 잠시만요.”

지한의 몸에 가려 자신을 부르던 남자의 시선이 차단됐다.

“더 있다가 또 누굴 곤란하게 만들려고 지금 네 얼굴 꼴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

“저 기억 잃기 전에 알던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지한을 지나쳐 뒤를 보았지만 조금 전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정·재계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야.”

아무나 올 수 있는 파티가 아닌 건 알았다. 하지만 분명 자신을 아는 사람이었다. 지한은 어째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의 확신이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혹시 모르잖아요. 정말 절 아는 사람이면 제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요. 잠시만요.”

가현이 그를 비켜 좀 전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남자를 찾아보았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지친 가현의 몸이 그대로 지한의 손에 딸려갔다.

“이젠 헛것까지 보나?”

지한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도 그 남자가 보이지 않으니 변명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잘못 보지 않았다.

“정말 제 이름을 불렀어요.”

“그 이름 내가 지어줬지 않아?”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인식하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기억 너머의 이름은 알지도 못했다. 가현이란 이름은 교진의 성을 따라 지한이 지어주었다. 그제야 남자를 찾던 가현이 포기했다. 순간 힘이 들어갔던 몸이 축 처졌다.

지한이 그녀의 팔을 놓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차 타기 전까지 정신 놓지 마.”

자비라고는 없는 그의 태도에 서러웠다. 가현은 기억도 없어 세상에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홀로 남겨진 기분은 추운 연말 날씨에 살이 에일 듯했다. 스태프가 건넨 퍼 숄을 여며 잡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지는 거 같았다.

겨우 차에 탄 가현은 따뜻한 차 안에서 긴장이 풀려 힘겨웠다.

저택에 도착해 정원을 걸어 들어갔다.

그가 앞서가던 걸음을 멈추고 가현을 돌아보았다.

가현은 로비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를 생각하며 걷느라 지한이 멈춘 것도 모르고 걸어가다 그의 가슴팍에 부딪혀 뒷걸음질을 쳤다.

뒷걸음질로 풍성한 치마에 걸려 넘어지려 했다.

“어, 어.”

지한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에 다시 안기는 꼴이 되었다.

그가 가현을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매서운 겨울 추위가 고작 그의 품에 안겼다고 괜찮아졌다.

길들여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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