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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에 명 비서도 긴장했다. 지한은 감정을 내려놓고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백 본부장은 안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지한을 보고 명 비서는 아차 싶었다. 그가 라윤과 남녀 관계로 엮이지 않으려 극도로 예민하게 굴며 조심하고 있었다.
“차 대표님 비서실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겠습니다.”
“…….”
그의 말대로 이제 3시간 후면 꼭 참석해야 하는 연말 파티가 시작되었다. 그 시간 안에 파트너를 물색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작년에도 파트너 없이 참석해 원성이 자자했다.
그걸 막아야 하는 것은 비서실이었고 명 비서는 작년 뒷수습을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올해 유형 그룹의 입지는 더 굳건해졌고 그만큼 주목을 받았다.
더군다나 지한의 외모까지 더해져 그의 작은 행보에도 말과 가십이 뒤따르는 건 당연했다.
명 비서는 올해는 많아진 일 외에 막을 수 있는 일은 미리 수습해 시간 낭비는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규칙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다음 솔깃한 설득 방법은 효율성뿐이었다.
“대표님 작년 기억하십니까? 연말 파티에 혼자 15분 참석하시고 비서실이 뒷수습하느라 업무가 마비되었습니다. 이게 시간 낭비입니다.”
응접실을 가로지르던 지한이 고개를 돌려 쏘아보았다. 여전히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말해보라는 마지막 기회였다.
“올해 우리 회사 기업순위가 얼마나 올랐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주목은 더 받고 있고 만약 비서실이 작년보다 더한 업무 마비가 온다면 이건 효율성에서 차질이 큽니다.”
틀린 말은 아니라 지한이 자리를 잡고 명 비서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그러니 잠시 참석하더라도 파트너를 동석한다면 작년 같은 시간 낭비는 줄어들 겁니다.”
그때, 응접실 옆으로 소란스럽게 몇 명의 사용인과 가현이 지나고 있었다.
가현은 사용인이 입혔는지 처음 보는 원피스를 입고 엉거주춤 끌려가고 있었다.
“아니 가현 씨 이런 신이 내린 날씬함을 그런 옷으로 감추고 있어? 이거 난 들어가지도 않아 그러니까 한번 거울 보라니까?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저는 괜찮은데….”
“겸손은 거기까지 해.”
사용인들의 호들갑에 가현이 난감해했다. 가현이 눈을 돌릴 때 응접실에 선 두 남자를 발견했다. 표정 없는 지한의 가느다랗게 뜬 눈과 마주쳤다.
가현의 놀란 눈을 보고 사용인들도 그제야 지한을 인식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다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 했다.
“정가현 씨.”
“……네?”
“이리 나와 봐.”
우물쭈물하며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비싼 원피스는 아니어도 몸매가 드러나는 흰 드레스 형태의 원피스가 썩 잘 어울렸다.
흰 피부에 흰 원피스가 그녀의 몸매를 돋보이게 했다.
“돌아봐.”
“네?”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가현이 지한을 올려다봤다.
“제자리에서 돌아봐.”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가현도 사용인들도 당황했다. 가현이 천천히 제 자리에서 돌았다.
“한 번 더.”
가현이 다시 제자리에서 돌고는 울상이 되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지한의 지시는 가현을 난감하게 했다. 또 무슨 불호령이라도 내리려나 싶어서였다.
“비서실 업무 효율성을 위해 정가현 씨가 오늘 수고해 줘야겠어.”
“네?”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지한 때문에 매번 바보스러운 대답만 하고 있었다. 가현은 부끄럽기도 하고 알아듣게 말하지 않는 그가 미웠다.
가현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은지 역시나 지한은 마음대로였다.
“명 비서, 정가현 씨 내 담당 쇼퍼에게 데려가서 적당하게 꾸며서 파티 전에 데려와.”
“저 대표님. 저는…….”
“빚 갚아야지.”
그의 눈이 토 달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 싫다는 말도 못 하도록 그는 한마디로 입막음했다.
생각지 않은 지시에 가현도 명 비서도 놀라 응접실에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지한은 사라졌다.
난감해하며 명 비서가 가현에게 다가갔다.
“가현 씨 사실은 오늘 연말 파티에 대표님이 참석해야 해요. 말을 하자면 긴데….”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두 사람 다 고개를 돌렸다.
사용인 몇몇이 눈을 반짝이며 명 비서의 말을 함께 경청 중이었다. 명 비서가 헛기침했다.
“허흠…. 음. 가, 가현 씨 서재에서 잠시 이야기하죠.”
“네.”
가현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응원하는 사용인들을 머쓱하게 돌아보며 가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에게 텃세를 부리던 그들이었다. 지한이 침대에 기절한 가현을 던지고 갔던 날 이후 많은 소문이 돌았고 가현의 기억상실증을 알게 된 이들은 행동이 바뀌었다.
살갑게 대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가현을 가여워했다.
서재에 서서 고민 중이던 명 비서가 가현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말을 쏟아냈다.
“가현 씨 이번 파티 엄청 중요한 파티예요. 우리나라 정·재계 인사들은 다 모이는 자리라고요.”
“명 비서님.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어어, 내가 좀 흥분했죠.”
그가 높아지던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차분하게 설명했다.
“우리 대표님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이게 그런 자리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가현 씨가 오늘 비서실 대표로서 대표님 파트너로 파티에 참석해 줘야겠어요.”
“네? 제가 어떻게 그런 곳을 가요?”
눈을 동그랗게 뜬 가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긴 한데 비서로 대동한다 생각해요. 지금부터 3시간 후면 파티가 시작돼요. 지금 쇼퍼에게 연락할 거고 준비할 테니까 가현 씨는 얼른 몸만 가면 돼요.”
“아니, 명 비서님.”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한 번만 도와줘요. 우리 비서실 살린다 생각하고 한 번만 눈 딱 감아요.”
시계를 보던 그는 재빠르게 핸드폰 전화번호를 검색해 전화 연결을 했다. 그 와중에도 가현의 등을 떠밀며 정신없이 재촉했다.
가현은 얼떨결에 차에 태워져 저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어 난감했다. 유난히 번지르르하게 꾸며진 편집숍 앞에 멈춰 선 차를 향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 세 명 중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문을 열었다.
주춤 차에서 발을 내려 일어나 건물을 올려다볼 겨를도 없이 셋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여자가 가현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오늘 고객님의 쇼퍼를 맡은 김지윤 담당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시죠.”
따라 들어간 건물 내부는 외관보다 더 화려했다. 촌스럽게 고개를 들어 구경하는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기 바쁜 쇼퍼들은 지시받은 것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지지 않고 체크했다.
그녀를 꼼꼼히 체크하고는 손과 머리 그리고 피부 마사지를 시작했다.
머리 색부터 머릿결까지 탈바꿈하고 네일을 한 손과 발은 남의 손 같아 보였다.
“고객님 손가락이 길고 가늘어서 네일 하시니 너무 잘 어울리세요.”
쇼퍼들은 하나씩 공을 들여 완성되어 갈 때마다 뿌듯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생을 한 만큼 성과가 최상이라면 좋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화장을 꼼꼼하게 마친 편집숍 직원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 잘 어울리세요. 오늘 파티에서 주인공이 되실 거예요. 장담해요.”
“설마요. 아직 고객님 모습을 제대로 못 보셔서 그래요. 속눈썹 길이도 유난히 길어서 따로 안 붙여도 될 것 같아요. 잠시만요 이것만 마치고 거울 보여드릴게요.”
쇼퍼들의 칭찬에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기억 속에 있는 자신은 그저 수수하게 준비되어 있는 옷만 입을 뿐 특별히 꾸미지 않았다.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었고, 옷은 치마에 블라우스이거나 슬랙스 바지에 티 정도였다.
가운을 입은 거울 속에 보이는 여자가 낯설었다. 기억에서 지워진 예전에는 이렇게 꾸미고 다녔을까? 얼굴을 돌려보며 화려하게 잘 가꿔진 자신을 감상했다.
“여기에 옷에 액세서리까지 하면 완전 다를 거예요.”
몸을 숙인 메이크업직원이 가현을 일으켜 옆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이동 행거에 화려한 드레스들이 한가득하였다. 머리에 화장까지 곱게 한 가현을 보고 콘셉트별로 준비된 옷을 찬찬히 살피던 실장은 안경 너머로 눈을 반짝였다.
“이게 딱일 것 같습니다.”
옷걸이에서 꺼낸 옷은 의외였다.
가현은 신발이 밟힐 것 같은 긴 드레스를 상상했지만, 살짝 짧아 보이는 드레스보단 원피스 같은 의상을 보고 살짝 실망했다. 자신도 공주 놀이 같은 지금 상황이 설레어 예쁜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었다.
쇼퍼를 따라 들어가 옷을 입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몸매가 드러나는 머메이드 치마가 무릎 조금 위까지 올라갔다.
어깨까지 살짝 드러나니 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부끄러웠다.
“옷 불편하세요?”
“불편하진 않지만, 몸매가 너무 드러나서 어색해요.”
어색해 옷을 쓸어 내리는 가현에게 실장이 오히려 정색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이런 드레스 아무나 못 입어요. 고객님처럼 몸매가 좋으셔야만 입으실 수 있죠. 우리나라에 유명한 톱스타인 우유인 씨도 입고 싶은데 요즘 살이 찌셔서 못 입는다고 아까워하시며 가셨어요.”
이미 오늘은 자신의 취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길들여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