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떠오르는 단어를 연결하여 어떻게든 뜻이 통하는 문장으로 만들어 보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샐리는 시무룩하게 키보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화면은 여전히 공백 상태였다. 항상 열정적으로 기사 작성에 몰두하다보면, 단어들은 마술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샘솟듯이 솟아나 늘 감탄할 만한 문장이 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빈 화면뿐이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슬럼프에 그녀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전혀 겪어 보지 않았었기에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울고 실을 만큼 지루한 취재 대상에 대해 어떻게 기사를 작성할 수 있겠는가? 이 기사는 정말이지 지겹고 또 지겨워서 속이 메슥거릴 지경 이었다!
브롬이 그렉의 사무실로 불려갔다가 돌아왔다.
"출장"
그가 책상 위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뮌헨으로 간다네."
샐리가 의자를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흥미 있는 일이야?"
"TV 회담 취재야. 회원국 간에 문제가 있대. 이번엔 좀 심각한 모양이야. 다녀와서 보자고."
"그래 "
샐리는 말을 건네며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브롬은 그녀의 책상 옆에 멈추어 서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 잘못됐어? 샐, 벌써 몇 주 동안 계속 축 쳐져 있잖아, 의사한테 가 봤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안심시켜 주었고 그는 곧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컴퓨터로 시선을 돌리고 화면을 노려보았다. 의사를 만날 필요는 없었다. 지루함을 치료할 수 있는 약 같은 것은 없으니까! 정말이지 얼마나 더 사무실만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건지? 그렉은 그녀가 발로 취재하며 기사를 얻을 때 최고의 기사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싱턴에서 돌아온 뒤로 3주가 지났지만 아주 하찮은 일조차 맡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책상은 누구라도 쓸 수 있을 기삿거리들로 흘러 넘쳤다 최선을 다해 참았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랐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그렉이 고의로 그녀에게 적당한 일을 주지 않는다면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결단을 내린 샐리는 컴퓨터를 끄고 그렉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자리에 없었기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화는 점차로 가라앉았지만 굳건한 결심만은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천성적인 끈기야말로 끝까지 기사를 따내 그 분야에서최고가 된 원동력이었고, 오늘도 그렉이 왜 그녀를 무시하고 있는지 진상을 규명할 때까진 절대로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게 했다. 그렉과 그녀가 이룬 업무상의 관계는 존경과 애정이 혼합된 최고의 관계였지만 이제 그렉은 그녀가 하는 일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렉이 돌아오기까지 거의 40분 넘게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문을 열리고 거기에 앉아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 경계와 걱정이 뒤섞인 표정이 잠시 나타났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안녕, 샐, 기사는 잘 돼가나?"
그가 인사조로 말을 건넸다.
"아뇨"
그는 그녀의 퉁명스러운 선언에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앉았다. 잠시 연필을 굴리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가 말을 꺼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끔씩 문제가 생기지. 기사가 왜? 뭐 잘못됐나? 할 말이 뭐지?"
"지겨워요. 아주 지겹죠."
그녀가 노골적으로 말하자 그렉이 움찔했다.
"왜 내게 그런 허섭스레기 같은 기삿거리들을 던져 주는 건지, 이유를 몰라서 물어 보려고요. 왜죠? 난 늘 내 일을 잘 해 왔다고 생각했는데요? 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해 주지 않는 거죠? 내가 퇴사하도록 압력을 넣는 건가요? 라이가 그의 아내가 일하는 것을 보기 싫은데, 해고해서 모양새가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 이런 수를 쓰는 건가요?"
그렉은 긴장한 얼굴로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왜 이렇게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거지, 샐?"
그가 중얼거렸다.
"그냥 잠시 동안 일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되겠어7"
"안 돼요!"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가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미안해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당신은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주저 없이 맡겼잖아요. 라이 때문이죠? 그렇죠?"
"그래. 자네가 해외 취재 나가는 것을 전격 금지시켰어."
그렉이 긍정했다. 비록 그와 같은 이유일 거라고 스스로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실상 말로 직접 듣고 나니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충격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의자에 앉은 그녀의 체격이 더욱 작아 보였다 출장 금지라고!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라이가 떠났을 때, 그에게 보냈던 모든 정열을 일에 바쳤다. 그 후로 일에서 얻는 성취감은 그녀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심리학자가 그녀를 분석한다면 그녀의 직업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며, 남자나 사랑을 대신한다고 말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7년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독립적이며 성숙한 성인이었다. 그런데 지금그녀는 손에 장애가 와서 무기력하게 된 음악가처럼 그녀의 삶이 갑자기 시들어 버린 것 같았다.
공포로 탁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왜요?"
"이유는 모르겠어."
그렉이 대답했다.
"이봐, 샐,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그가 자네의 해외 출장을 전면 금지했다는 것뿐이야. 여전히 미국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뭐든 다룰 수 있어. 그 동안 몇몇 사건들이 일어났었지. 하지만 여기 계속 있게 한 건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네가 대신 취재를 나갈 수도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세상일이란 게 늘 비상사태가 있잖아.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지. 잡지를 위해 최선의 길을 택하려고 했지만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으면 자네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좋아,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 자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요구하게나. 말만 하라고. 자네한테 맡길 테니"
"이젠 상관없어요."
그녀가 침울하게 말하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샐리가 이렇게 좌절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샐리의 모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분노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아니, 다시 생각했어요. 좋아요, 하겠어요. 어떤 거라도! 만일 6개월 동안 떠나 있을 수 있게 해 준다면 그 역시도 좋아요. 지금 기분으론 라이를 죽이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그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거니까요. 내가 해외 출장 금지를 당한 것은 비밀 유지가 되어야 하는 건가요?"
"그렇진 않을 거야"
그렉이 부인했다.
"내가 자네한테 말하지 않은 건 다른 업무에 만족하고 적응할 수 있었으면 해서였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으니…. 그건 왜 묻지?"
"왜냐하면 내가 라이한테 같은 질문을 할 생각이니까요"
샐리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번졌다.
그렉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싸움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는 샐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샐리를 지탱해 왔던 에너지가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에 무척 걱정스러웠지만 이제 보니 그녀는 전보다 더 생기가 넘치는 듯했다. 샐리는 아무리 거칠고 험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끈질긴 점이 그녀를 최고의 기자로 만들었으니까.
"최선을 다하라고. 난 현장에 복귀한 자네가 필요하니까"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의 비서인 아만다 미드는 샐리를 보자 미소 지었다. 아만다는 예전 편집장의 비서이기도 했었기 때문에 잡지사의 모든 직원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우 신중하기도 했다. 그 증거로 그녀는 라이와 샐리가 나눈 사적인 면담에 대해서 사내에 소문을 퍼뜨리지 않았다. 물론 샐리는 그것이 더할 수 없이 고마웠다. 그녀는 그들에 대한 어떤 소문도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라이가 소문의 확산을 막기 위해 샐리를 해고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안녕하세요, 샐리"
아만다가 그녀를 맞았다.
"제가 도와 줄 일이 있나요? 아니면 보스를 만나러 온 건가요?"
"보스요. 시간이 가능하다면요"
샐리가 대답했다.
"몇 분은 가능해요"
아만다가 확인했다.
"하지만 12시에 월리엄스 양과 점심 약속이 있기 때문에 잠시 뒤엔 나가셔야 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샐리가 약속했다.
"면담이 가능한지 물어 봐 주세요."
샐리는 아만다가 인터폰을 통해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몇 초 후에 그녀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요, 시간이 있다고 하시네요. 최근 들어서는 보스의 기분도 좋았답니다."
샐리는 웃어야 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뭐… 임금 인상을 부탁할 생각은 아니지만요"
라이의 사무실로 들어간 그녀는 아무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지 못하게 문을 꼭 닫았다. 라이는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서 밀치듯 움직이고 있는 분주한 군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커프스단추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소매 끝은 드러난 근육질의 팔뚝에 둘둘 감겨 있었다. 그가 돌아서자 넥타이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잡지사의 사주라기보다는 기자처럼 보였고, 다른 어떤 남자도 필적할 수 없는 남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안녕, 베이비"
그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의 허스키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녀의 심장이 평소보다 몇 배는 빨리 뛰게 만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꽤 오래 걸렸군. 당신이 신중하게 처신하기로 결심했나 생각하던 참이었어."
무슨 뜻이지? 그렉이 라이에게 귀띔하는 전화라도 한 걸까? 아니, 그녀는 막 그렉의 사무실을 나왔고, 어쨌든 그렉은 그녀에게 일을 계속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잡지밖에 모르고 혈관 속에는 피가 아니라 프린터 잉크가 흐르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렉이 그랬을 리는 없었다.
"이해할 수 없네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래 걸렸다니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해외 출장 기자 명단에서 제외했다는 걸 깨닫는 것 말이야"
그가 미소를 짓더니 그녀에게 다가서며 대답했다. 피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앞에 서더니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의 단단하고 뜨거운 손길에 샐리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전화했던 날 밤에 말하려고 했었는데, 당신이 전화를 끊어 버려서 말이지"
느긋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나한테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
샐리는 평소 자신의 예민한 감각을 축복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발 예민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가 사용한 애프터 쉐이브의 향기와 함께 그의 남성적인 체취가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7년이 흘렀는데도 정장을 입을 때 셔츠만 입는 그의 버릇은 여전했다. 그런 버릇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그는 그녀의 가까이 와 있었고, 그녀는 그의 얇은 셔츠 천을 통해 그의 맨가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서 좀 더 시선을 올려 그의 턱과 긴장을 푼 채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 그리고 좀 더 높이 있는 검은 눈썹 밑의 어두운 회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지만 곧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모든 의지력을 끌어 모아 그의 육체적인 매력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반쯤 속삭이는 목소리로 샐리가 말했다.
"왜죠? 내가 해외 취재 업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요. 왜 내게서 그 일을 빼앗아 간 거죠?"
"내가 기자이기만 한 게 아니니까"
그의 냉담한 말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흥분해서 그녀의 팔꿈치 위로 손을 움직여 책상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책상 끝에 기대어 그녀가 그의 다리 사이에 서도록 그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그런 자세에서 그녀와 좀 더 비슷한 눈높이가 되었고 매혹적인 회색 눈동자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의 매력에 저항하지 못하게 했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용케 말을 건넸지만 그녀의 음성은 더 이상 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드러난 팔뚝 위를 어루만지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을 위험 가능성이 늘 잠재되어 있는 지역에 보낸다는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어."
그가 부드럽게 설명했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은 정치적인 시한폭탄이고, 그 폭탄이 터졌을 때 당신이 그 중 한 나라에 있을 가능성은 항상 있지. 유럽. 요즘은 유럽조차 공항이나 거리에서 납치, 테러, 폭발 등이 발생하고 있고.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그런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당신의 해외 취재를 금지했지. 내가 그렇게 지시를 내리니까 그렉 편집장이 거의 발작을 일으키더군. 당신이 최고의 기자 중의 하나라면서 말이야. 제기랄! 그가 당신을 취재 내보냈던 지역들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어"
"그렉은 프로예요."
샐리가 거친 목소리로 항변했다.
"나도 그렇고요. 이런 도움은 필요 없어요, 라이. 무기를 다루는 훈련도 받았고, 호신술 강좌도 들었어요. 내 몸 하나 정도는 스스로 돌볼 수 있단 말예요. 여기 이렇게 사무실에 머물러서 미적지근한 이야기를 기사로 다루고 있다간 미쳐 버리고 말 거예요! 마치 내가 퇴물이 된 것 같다고요!"
그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땋은 머리를 잡고 그녀의 어깨 위로 늘어뜨려 가슴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는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꼬임 부분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서 땋은 머리를 가지고 장난하기 시작했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꼭 사자 갈기 같군,"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과 산랑을 나누는 동안 이 땋은 머리를 풀어 베개 위에 펼쳐놓고 봤으면 좋겠는데"
샐리는 그의 말을 듣고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얼굴마저 창백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당황한 그녀는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욕망에 들끓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그가 갑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단단한 다리와 그녀를 감싼 팔 때문에 샐리는 완전히 그의 몸에 갇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렬하고 뜨거운 육체의 접촉에 숨을 헐떡거렸고 항상 그랬듯이 그가 그녀를 어루만지자 그녀의 감각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켰다. 치솟는 감각을 억누르면서 그녀는 놔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팔이 더욱 세게 그녀의 몸을 끌어당겨 안는 순간 그의 고개가 내려왔다. 너무나 뜨겁고 강한 그의 키스로 감각까지 마비되었지만 샐리는 아무런 반응도보이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면서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온 힘을 다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한계에 다다랐을 때까지 입을 꽉 다문 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돌진하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잠시 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욕망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입을 열어"
그가 쉰 목소리로 명했다.
"내가 당신과 얼마나 키스하고 싶은지 알잖아. 다시 달콤한 당신을 맛보게 해 줘"
그리고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을 때 그녀의 의지력은 더 이상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의 감각들은 그의 입술이 건네준 감촉에 쾌감으로 폭발했고, 그의 혀가 간절하게 욕구를 호소하며 움직이자 그녀는 입을 열어 그가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그는 즉각 그녀의 달콤한 입 안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신음을 흘리며 더욱 강하게 그녀를 껴안았고 그에 반응하듯 그녀의 손이 그의 팔에서 어깨를 타고 목으로 올라갔다. 그의 키스에 몸이 떨렸고 의식도 하지 못한 채 그에게 기대었다. 그녀는 그의 입술이 주는 마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격정에 찬 흐느낌만 내뱉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었다. 그들이 나누었던 첫 키스부터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순간까지, 그들이 공유했던 감각들은 강력했으며 즉각적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다른 연인을 원하지 않았었다. 본능적으로 그 어떤 남자도 라이처럼 환상적인 감각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저항해야 할 수많은 이유들이 있음에도 그녀는 그에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육체는 그녀의 마음과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고 몇 분 후엔 저항하고 싶은 마음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감각과 신경세포들이 발산하는 수많은 쾌락의 신호들에 압도당한 그녀는 그의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미쳐 버릴 것처럼 생생한 황홀경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 그녀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 그에게 기대어야만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승리감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뜨겁게 불타올랐고, 그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지탱하고 자유로운 다른 한 팔로 그녀의 턱을 잡고서 얼굴과 입술에 짧고 가벼운 키스들을 계속했다.
"음"
그가 깊은 신음 소리를 냈다.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다이너마이트 같이 폭발적이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렇다, 키스는 여전히 다이너마이트였다. 거의 그녀의 면전에서 폭발할 뻔한! 그리고 샐리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잊게 하려고 자신의 육체적인 매력을 이용한 라이마저 용서하려는 바보였다.
"라이, 안 돼요!"
그가 계속해서 자잘한 키스를 퍼붓자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서 저항했다.
"놔줘요. 내가 여기 온 건 당신과 대화를 하려고…"
"대화, 했잖아."
그가 쉰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그의 음성은 좀 더 낮고 거칠게 변했다. 키스를 멈추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사랑을 나누고 싶어. 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 사이가 얼마나 좋았는지 잊게 만들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어."
"난 다 잊었어요!"
그녀가 다시 한 번 그의 키스를 피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그만, 이런 장난은 그만둬요! 난 내 일을 정말 진지하게생각해요. 위험에서 스스로를 돌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해외 취재를 금지시켰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받아들일 수 없어요!"
키스하려는 시도는 멈추었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욕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그 일에 대해서 말해 보자고. 하지만 다음부턴 이주제가 다시 거론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자가 스스로를 돌볼 수 없다고 말한 적은 없어. 단지 내가 걱정이 돼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위험한 지역에 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였지."
"왜 당신이 걱정하는데요?"
샐리가 놀라서 물었다.
"집을 나간 후로 당신은 전혀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이제 와서 관심 있는 척하면서 내 일을 망치지 말아요."
갑자기 그가 그녀를 놓아주었고 그녀는 서둘러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적당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 상태가 좋았다. 라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기지가 필요했고, 그와 가까이 있으면 에로틱한 상상으로 그녀의 뇌가 정상 작동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난 이미 결정했어."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이 해외 취재를 나가는 것은 금지야. 영원히!"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말에 뱃속이 요동치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영원히 라고? 차라리 음식을 먹지 말라거나, 숨을 쉬지 말라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일과 그 위험스러운 흥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수년 동안 그녀를 괴롭히고 상처 줄 일만 계획했다 해도 이보다 악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미워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고통으로 검게 변해 있었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 정도였나요?"
"물론 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그가 긴 손가락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초조하게 부인했다.
"당신을 보호하려는 거야. 당신은 내 아내고, 당신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그녀가 양 손을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일을 못 하게 하는 건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 어떤 위험보다 더 나빠요! 난 매시간 기사로 쓸 것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 빌어먹을 컴퓨터 화면을 빤히 쳐다보면서 미쳐가고 있단 말예요! 그리고 당신 아내라고도 말하지 말아요! 우리 관계라고 해 봐야 1년? 그 동안 때때로 불규칙하게 함께 잠을 잤다는 정도죠. 그러고 나서 당신은 당신 길을 갔고 나도 내 길을 갔죠. 난 이제 당신과 함께 있었던 때보다 더 많이 행복해요. 그리고 나도 부인으로서는 실패작이었지만 당신은 더 엉망이었어!"
그녀는 말을 멈추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그를 가격하거나 뭔가를 부수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위해 애썼다. 비록 화를 낸다고 해도 보통 제어가 안 될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함이 그녀의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내가 실패작이건 아니건 간에 당신은 내 아내고, 계속해서 내 아내로 있을 거야"
그의 냉담한 선언이 그녀를 내리쳤다.
"그리고 내 아내의 해외 출장은 금지야!"
"차라리 총으로 쏴 버리지 그래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며 극단적으로 물었다.
"지루한 기사로 날 미치게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총으로 쏴 버리는 게 훨씬 더 자비로울 거예요! 젠장 할! 라이! 도대체 나하고 결혼은 왜 한 거예요!"
그녀가 좌절에 몸부림치며 거의 울부짖듯 외쳤다.
"당신이 가엾어 보여서 결혼했지"
별것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알려 주는 그의 말에 3녀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당신이 나를 가엾게 여겼다고요?"
그녀는 분노로 폭발할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 있지?
"당신이 너무 외로워 보이고, 작아 보이더라고"
그는 지금 자신이 내뱉은 말에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전혀 모르는 듯 평 이한 어조로 조용히 설명했다.
"애정과 인간의 손길에 굶주린 소녀라고. 그래서 해 버리자고 생각했어. 난 스물여덟 살이었고 결혼 적령기였으니까. 그리고 거기에 보너스도 있었고"
"그랬겠죠."
조롱하는 듯한 어두운 얼굴과 냉소적인 눈동자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서 그녀가 창문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을 쫓아다니는 모든 여자들로부터의 보호막!"
라이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를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복수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는 그녀가 화를 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그녀의 뒤로 걸어갔다. 그 숨결이 그녀의 관자놀이 머리카락을 살랑거리게 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아니, 베이비. 보너스라는 건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마다 당신이 보여준 열광적인 반응이었어. 정말 조용하고 유순한 한 마리 작은 새 같았는데, 내 품에서는 들 고양이처럼 변했지, 그 둘이 같은 사람이라니! 정말 환상적이었어."
"그걸 생각하면서 꽤 많이 웃었겠군요!"
수치와 굴욕감으로 달아오른 얼굴로 밖을 응시한 채 그녀가 불쑥 말했다.
"아니. 웃었을 리가 있나."
갑자기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속사이듯 대답했다.
"사랑을 나뒀던 그 시간들은 정말 좋았어. 다른 여자들은 비교도 할 수 없었지. 당신은 거의 다 변했지만 내게 반응하는 방식만은 변하지 않았더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녀가 날카롭게 반박했다.
"그건 잊어 줘요.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당연히 의미가 있지 내가 다시 내 아내를 찾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당신이 내게 돌아왔으면 좋겠어, 샐리"
그가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몸을 돌려 그와 마주하며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농담이죠!"
추궁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꼭 그렇지도 않아"
그녀를 가깝게 잡아 당겨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어쨌든 당신을 떠나게 놔 둘 생각은 전혀 없었어."
점점 낮아지면서 유혹적으로 변해 가는 목소리로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가 일부러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이용해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안다고 해서 그의 유혹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유혹으로 흔들리는 자신의 채찍질하며 그의 유혹에 대항하려 노력했지만 그는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난 당신이 한 발 물러서서 내게 전화할 거라고 생각했어. 점점 심해져만 가는 당신의 간섭과 잔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거든. 당신의 버릇을 고치려고 단단히 결심했었지."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의 경악한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전화하지 않았어. 그리고 난 너무 바빴지.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어느 새 세월이 훌쩍 흘렀더군. 떨어져 있기에 7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지만 우리 둘 다 그 동안 많이 성숙했다고 봐. 그래서 난 당신을 놓아 줄 수 없어"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자신의 말에 힘을 더하듯 고개까지 저으며 말했다. 아직도 그가 말하면 그대로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아직도 한참 멀었다.
"라이, 우리 둘이 같이 사는 게 잘 될 리가 없어요. 이제우리 두 사람은 너무 달라졌잖아요. 난 더 이상 집을 돌보며 살림만 하는 삶에 만족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일들도 너무 많아서, 살아 있는 동안 그것들을 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란 말예요. 이제 난 움직여야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내가 계약한 다큐멘터리 촬영 건으로 여행을 꽤나 해야 할 거야. 언제든 나와 함께 여행하면 되잖아."
라이가 새로운 제안을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뭔가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 잔뜩 충격 받은 사람처럼 경직되었다.
"내 일을 포기하란 말인가요?"
그녀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라이, 당신 미쳤어요? 당신 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내 인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이건 단순한 직업이 아니에요. 내 경력이기도 해요. 당신이 그토록 함께 있고 싶다면 당신이나 당신 일을 그만둬요."
그녀가 굳게 입을 다물며 그를 도전적으로 쏘아보았다.
"난 당신보다 돈을 더 많이 벌잖아."
그가 느리게 말했다.
"그만둔다면 엄청난 바보짓을 하는 거지. 게다가 이 잡지사도 내가 소유하고 있고"
"정말 우리가 함께 산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그를 비난했다.
"그냥 조용히 이혼하잔 말예요! 위자료 걱정도 할 필요 없어요. 난 내가 벌어서 먹고 사는 게 좋으니까…"
"아니"
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로 그가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건 이혼은 없어"
"좋아요, 당신이 이혼 과정을 어렵게 만들 수는 있겠죠."
그녀가 시인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 살지 않을 거예요. 당신 밑에서 일하지도 않겠어요. 다른 잡지나 신문사, 통신 회사들도 있고, 다행히 난 내가 하는 일에선 프로예요. 당신이나 당신 잡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고? 전에도 말하지 않았었나? 나에게 힘을 실어 줄 만한 친구들이 많이 있다고? 샐리 제롬이 일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달링, 내 말을 믿어. 당신은 절대로 일할 수 없을 거니까. 아마 레스토랑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택시를 운전할 수도 있겠지만 기자 일은 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택시 운전이나 레스토랑 서버도, 내가 원한다면 그만두게 할 수 있지."
그는 그녀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지금 당신은 내 아내이니까, 난 당신을 아내처럼 대우할 거야."
그의 말 속에 내재되어 있는 위협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그가 진심으로 남편의 권리를 되찾을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녀의 신경이 미친 듯이 경보음을 울렸다.
"법원에 접근 금지 신청을 하겠어요."
그녀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를 도발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라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화가 나서 뭐든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적당한 압력이 들어가면 그 법원의 명령조차도 얻기 힘들게 만들 수 있지."
그가 그녀를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즐기기나 하는 것처럼 말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게 되면 당신이야말로 내 주변에 있고 싶다고 할지도 모르지. 전에 그랬듯이. 내가 정확하게 기억한다면, 아마 정확하겠지만, 내가 곁에 없다는 것이 당신의제일 큰 불만이었잖아, 다시 처음인 것처럼 시작해 보자고"
그가 부추기듯이 속삭였다.
"아이들도 원했었잖아. 당신이 원하는 만큼 아이들도 가지자. 지금 당장 그 작업을 시작해도 좋아!"
아이를 가지자고 말하는 그의 뻔뻔스러움에 샐리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나쁜 자식!
"그랬죠. 당신 덕분에 난 아이가 있었더랬죠."
아팠던 만큼, 아직도 그 생각만 떠올려도 아픈 만큼 그를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에 매섭게 말을 해댔다.
"하지만 정확한 내 기억으로는, 베인즈 씨. 당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죠! 난 혼자 아이를 품고 있다가, 혼자서 아이를 낳고, 또 혼자 아이를 묻었어요! 난 당신도 필요 없고, 당신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어요!"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던, 하지 않던 상관없어."
그가 말했다. 그녀의 가차 없는 말에 그의 입술 또한 냉혹한 선을 그리며 팽팽해졌다.
"난 당신이 나를 원하게 만들 수 있어. 그게 중요하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실컷 폭언을 퍼부을 수는 있어. 하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당신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 마음이나 단단히 먹도록 해. 당신은 내 것이 될 것이고, 난 당신이 떠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난 이제야 비로소 가정에 정착할 준비가 되었어. 어쨌거나 당신은 내 아내고, 난 너무 나이가 들기 전에 두세 명의 아이들을 갖고 싶어."
그녀는 목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성란 말들을 억지로 참으면서 그로부터 재빨리 떨어졌다.
"아뇨"
그녀가 맹렬하게 거절했다.
"싫어요. 모두 필요 없어요. 당신도 당신 아이들도 다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그 영광을 돌리죠! 코럴 이라면 직업을 지키는 것보다 더 간절히 당신 아내가 되고 싶어 하리라고 확신해요. 그리고 지금도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자리를 비켜 드리죠!"
성난 걸음걸이로 사무실을 빠져 나오는 그녀의 뒤로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아만다 미드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샐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분노로 떨리는 몸을 가누며, 있는 힘껏 세게 문을 닫고는 복도로 나왔다. 가장 괴로운 것은 정말로 그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라이는 그녀가 너무나 조심스럽게 애정을 가지고 혼자 힘으로 쌓아온 경력을 파괴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그녀를 원한다고 결정한다면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그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책상으로 돌아와 제법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왜 그는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심각한 것 같지 않았는데…. 심각했었나? 그의 뜨거운 키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원한 것은 단지 섹스였을 뿐이었는데 괜한 말로 그의 마초 근성을 건드려 버린 것은 아닐까? 한때 그의 것이었던 그녀가 지금 그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를 견딜 수 없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사실은 그녀가 그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언제나 황홀했었다. 그녀는 그 뜨거운 마법의 손길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잠시 동안 그와 함께 살면서 그의 곁에서 잠들고 그와 사랑을 나누는 그의 아내가 되는 달콤한 공상에 빠졌다. 하지만 곧 차가운 현실이 밀려왔다. 만일 그에게 돌아간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벌써 해외출장을 금지 당했다. 계속해서 일에서 조금씩 더 멀어지겠지. 아마도 다시 임신할 수도 있겠지. 그녀는 아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라이가 어떻게 변할지 뻔했다. 아기를 가져 점점 더 살이 찌고 배가 나오는 자신, 그런 그녀를 지겨워하는 라이. 그리고 결국 과거는 반복되어 그녀가 임신한 것을 유감스러워하겠지. 그를 믿을 수가 없다. 지금도 바로 곁에 다른 여자가 있는데, 나중이라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질려버렸을 때, 그녀가 직업도 없이 육아의 책임마저 지고 있다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원하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힘들 뿐만 아니라,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 헌신이 필요했다. 모든 생활을 기자라는 직업에 맞추어야 했다. 만일 지금 기자직을 그만두면, 나중에 돌아와 다시 지금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육아까지 해야 한다면 정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를 위협하는 라이에게 돌아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 보니 점점 더 무서워졌다. 선택할 수 있다면 직업을 택해야 한다! 과거 라이가 그랬던 것처럼. 일은 절대로 그녀를 배신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했다.
독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게 된 그녀로서는 고작 육체적인만족을 위해 그것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본능은 일단 행동하라고 외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다른 이름을 가지고, 다른 도시로 도망가지 않는 이상 라이는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과 노력들을 방해하고 나설 것이 뻔했다. 너무나 극단적이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샐리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다른 신분을 만드는 것과 같은 작은 일로 기세가 꺾일 수는 없었다. 이제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이 특별한 직업을 포기하는 것이 싫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라이 자체를 지워 버리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도 몇 분이 남았지만 그녀는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맸다. 그녀가 알고 있는 라이라면 즉시 그녀를 포위하기 위해서 책략을 쓸 것이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수표와 예금계좌를 개설하고 있는 은행으로 가서 모두 정지시켰다.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라이가 인출을 방해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의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없앨 필요가 있었다. 수년 동안 해온 저축으로 다른 일자리를 찾는 동안 생활하는데 경제적인 걱정은 덜 수 있었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현금과 약간의 수표를 보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녀가 더 이상 위협 앞에 무력한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라이도 알게 될 것이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에 라이와 대면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기 때문인지 위가 텅 빈 듯했다. 충동적으로 그녀는 월드 인 리뷰지가 있는 건물 모퉁이의 식당에 들어갔다. 그곳의 어두운 구석에서 빈자리를 발견했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적응할 때까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적응이 되자 그녀는 어두운 부스 한쪽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직원들 몇몇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구운 치즈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한 채 기다리고 있을 때 크리스가 와서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마이애미 출장 이후 처음이었다. 어둑어둑한 바에서도 그의 피부가 적당히 그을었음을 알 수 있었다.
"플로리다가 잘 맞나 봐"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땠어?"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와의 문제에 대해서 묻는 거라면 여전히 평행 상태. 미녀 기자 씨, 당신은 어때? 당신의 해외 출장이 전면 금지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야"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시인했다.
"위에서부터 명령이 떨어졌어."
"베인즈한테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문제인 셈이야. 나한테는 해외 출장 업무가 너무 위험하다는 거야."
크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이봐,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해외 출장 금지시키기에는 당신이 너무 훌륭한 기자라고. 솔직히 털어놔 봐, 샐. 그 날 카페테리아에서 그가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봤다니까"
"아, 그가 나한테 해외 출장 업무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야"
그녀가 주장했다.
"그냥 이유의 일부분일 뿐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전승 기념 소장품에 나라는 여자를 더하고 싶은가 봐. 불행히도 난 동의하지 않고."
크리스가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보스가 당신을 쫓아다니는군, 그렇지? 흠… 글쎄, 나도 당신이 사람을 매혹시키는 마녀라는 데는 동의하지.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당신에게 태클을 걸 정도의 배짱이 내겐 없다는 것이고"
샐리는 크리스가 그녀를 충분히 좋아하지만 결코 낭만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은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늘 가정적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크리스였다.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다 돌아왔을 때 안정된 기반을 제공해줄 수 있는 그런 여자를 원했다. 크리스가 흥미를 느끼기에는 샐리는 너무 많이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몸을 흔들며 웃는 동안 정색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갈색 눈동자는 즐거움으로 반짝거렸다.
그 후에 그들은 함께 회사로 돌아왔다. 로비로 들어서면서 크리스는 애정 어린 손길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빌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샐리가 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라이였다. 크리스가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고 있는 것을 본 라이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가늘어졌다.
"아, 이런. 문제가 생겼군."
크리스가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보고 싱긋 웃음 지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라이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고 있던 크리스가 그녀를 끌어당겨 따뜻하게 포옹하더니 그녀의 머리 위에 키스를 했다. 이로써 크리스는 자신의 죄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말았다.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보인 라이의 얼굴은 마치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흉악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