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5화 (5/11)

5장.

"바보 같아."

샐리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하면서 크리스에게 속삭였다. 라이는 평소에도 위험한 사람이지만 화가 나면 정말 무시무시했다. 손 봐 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사나웠다. 그리고 그럴 땐 정말 비열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에 걸맞게 다양한 전문적인 훈련까지 한 사람이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정장을 입은 라이의 반은 문명인이었지만 나머지 반은 전사였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크리스는 심하게 다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라이는 금방 울컥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난 그가 당신을 당연히 자기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싫어."

크리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입술 한쪽 끝을 비틀며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날 이용하라고.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의 호의에 보답해야지. 나도 당신을 이용했으니, 당신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날 앞장세워"

샐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크리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있는 척하는 그녀의 모습을 라이가 본다고?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라이를 납득시킬 만큼 그녀가 연기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또 라이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여 크리스나 다른 사람이 다치는 상황을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의는 고맙지만 그 사람 앞에서 빤한 속임수를 펼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닌 것 같아."

그녀가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 그대로의 당신 얼굴이 좋거든. 하지만 연막으로 당신 이름을 말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괜찮겠어?"

"물론 괜찮지."

크리스가 갑자기 그녀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왜 그에게서 달아나려고 하지? 그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잡지사를 사들이기 전에도 이미 라이를 알고 있었어."

샐리는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아 조심스레 설명했다.

"그는 그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는데, 난 아니거든. 아주 간단하지?"

"뭔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는 느낌이 드는 걸 제외한다면…. 어쨌든 당신을 믿어,"

크리스는 거의 혼잣말을 하듯이 말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책상으로 되돌아온 후, 샐리는 내내 라이의 호출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화는 울리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그가 좀 더 교활해졌다고 결론지었다. 그녀가 걱정을 거듭하며 점점 불안해하고 약해지도록 놔두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했다!

단번에 그녀는 작업하고 있던 기사를 중단하고 컴퓨터 화면에 새 워드 창을 띄웠다. 라이가 이렇게 비열하게 나온다면 그녀 역시 태업에 대해서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다! 지겹고 바보 같은 기사를 쓰느라 머리를 쥐어짜는 대신에 차라리 그녀 자신의 비망록이나 작성하겠다고 결심했다. 세세하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면 나이가 들어 죽을 때에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억해 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겠지!

그녀의 혈관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넘쳐흘렀고 그녀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몇 주 만에 처음으로 단어들이 쉴 새 없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쏟아져 나와서 그녀는 거의 쉬지도 않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문장으로 다듬었다. 다시 기분이 고양되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의욕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는 손을 멈추고 자신이 쓴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비망록을 쓰면서 시간을 허비할까? 자신의 경험을 이리저리 엮어서 소설로 만들면? 항상 책을 쓰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제 남다 못해 넘치는 것이 시간이었다. 새로운 경력을 시작하는 데 라이의 시간과 돈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을 만큼 통쾌했다.

넘치는 열정으로 그녀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면서 잠시앉아 있었다. 곧 첫 번째 문제에 봉착했다. 여주인공 이름은 뭐라고 해야 할지? 빈 칸으로 남겨 두고 나중에 이름을 적어 넣어도 될까? 하지만 곧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기 위해선 먼저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해 낼 인물들의 외모적 특성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기사로 만들어 내는 것과는 달랐다. 기사를 쓸 때는 일어난 사실과 사건들에 대해서 그녀의 관점에서 정리를 하면 되지만, 소설을 쓸 때는 모든 세부 사항을 그녀가 창조해야만 했다. 처음 창작 글쓰기 강좌에서의 글 쓰던 경험을 제외하고는 늘 사건 뉴스만을 다루었기 때문인지 순수 창작 쪽의 글쓰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하지만 그 날이 지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창조한 순수한 부산물 여덟 페이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퇴근할 시간을 알리는 시계를 그녀는 초조한 시선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작업 리듬이 끊기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소중한 여덟 페이지를 디스켓에 저장했다. 집에 가서 자신의 노트북으로 작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그 어떤 것도 지금처럼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 날 밤 그녀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플롯과 장면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가장 위험한 현장을 취재할 때와 같은 기분으로 엄청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도전에 직면한 기분이었다. 취재를 하며 느끼는 쾌감과 끝까지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매진할 수 있는 그런 강렬한 의욕을 느꼈다. 잠으로 낭비해야 하는 시간이 아깝고 원망스러웠지만 막상 잠이 들었을 때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 수 있었다. 몇 주 만에 가장 평온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1주일 동안 그녀는 모든 여가 시간을 글을 쓰는데 썼다. 회사로 가져가서 일하고 집에 가져와서 일하며 밤늦게까지 앉아 있다가 너무 피곤해서 자야 할 때까지 키보드를 쳤다.

라이의 전화는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었지만 작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가 행동을 취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의 침묵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았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그들의 관계를 되찾기 위해 술수를 부리지 않는 한, 그녀는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에 만족했다. 코럴 월리엄스가 빌딩을 들어서거나 나가는 것을 본 횟수로 판단하건대 라이 역시 다급한 심정이 아닌 것 같았다.

전화가 울린 건 그녀가 막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샐리는 조금 많이 놀랐다. 브롬이 여전히 출장 중이기 때문에 그녀는 수화기를 잡아채듯이 집어 들었다. 전화선을 통해 거슬릴 정도로 무뚝뚝하게 말하는 라이의 음성이 들렸다.

"사무실로 올라와, 샐리. 문제가 생겼어,"

그가 전화를 끊었지만 샐리는 전화기를 빤히 쳐다본 채 그가 말하는 문제가 무엇일지, 그리고 무엇에 관한 문제일지 생각해 보았다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의미하는 건지‥‥‥‥ 만약에 잡지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녀의 개인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어떤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녀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기삿거리를 잃을 궁지에 몰려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자 곧 기분이 좋아졌다. 샐리는 라이의 사무실로 올라가면서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 다룰지 두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만다가 라이의 사무실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재촉했다.

"기다리고들 계세요!"

그렉도 그 곳에 와 있었다. 그렉이 안절부절 하며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할 때 라이는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커다란 의자에 등을 쭉 편 채 앉아 있었다. 육체적으론 전혀 긴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번득이는 눈동자로 봐서는 정신적으론 완전 경계 상태였다.

그녀가 들어서자 그렉이 몸을 돌려 틱을 호전적으로 들고 그녀를 응시했다. 화가 났을 때면 늘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샐리는 숨을 죽였다. 라이에게 인사하지도 않고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그렉에게 물었다.

"뭐가 잘못됐어요? 누가 다쳤나요?"

2년 전, 남아메리카에서 취재 중이었던 친한 친구 하나가 살해당했었다. 그 비극 이후 그녀는 취재 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매우 민감해졌다.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지만 다른 기자가 부상을 당했다거나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녀가 긴장을 한 기색은 그녀의 평소보다 낮은 톤의 음성에서 명백히 드러났고 그렉은 즉시 그 낌새를 눈치 챘다.

"아니,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

그렉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아르티에 헨드릭스가 살해당했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울며 바닥에 주저앉았었다는 걸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앉으며 라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성이 나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샐리가 그렉을 돌아보았다.

"그러면 뭐가 문제죠?"

"사카리아 자선 무도회가 다음 주야."

그렉이 사무실을 가로질러 와 그녀의 옆에 앉더니 알려주었다.

"알고 있어요. 내가 취재하기로 했었죠."

그녀가 냉정하게 말하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라이를 쏘아보았다.

"대신 누구를 보내기로 했어요?"

"앤디 월리스와 패트리샤 킹을 보내려고 했지."

그렉이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마리나 델챔프가 개인 인터뷰 허가를 취소했어, 빌어먹을!"

그가 낭패감에 분노를 터뜨리며 의자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다 맞춰 놨는데 이제 와서 거절하다니!"

"설마요. 마리나가 그랬을 리 없어요."

샐리가 항의했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이유야 있지 ."

라이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 뭔가를 억누르듯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이 아니면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데 왜 당신이어야 하지? 개인적으로 그녀를 알고 있나?"

샐리는 아까 잠시 백일몽처럼 꿈꿨던 일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마리나라는 존재가 라이를 그야말로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그로서는 이 상황이 즐거울 리가 없겠지.

"네, 내 친구죠."

그녀가 시인했다. 라이는 그녀가 굉장히 유명한 전직 모델을 알고 있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내색하진 않았다. 마리나는 현재 사카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의 아내였으며 자선 무도회의 준비를 책임지고 있어 원하는 기자를 선택하는 정도의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었다.

"당신 대신에 패트리샤 킹과 인터뷰를 하라고 설득해 봐"

라이는 명령했다.

"아니면 전화로 인터뷰하던가."

그의 음성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번져 나왔다. 그녀는 그의 뻔뻔스런 생각에 분노로 몸이 굳을 지경이었지만 애써 화가 나는 것을 숨겼다.

이 굳을 지경이었지만 애써 화가 나는 것을 숨겼다.

"그녀가 한 나라의 재무장관 부인이라면 인터뷰를 하고 말고는 자기 마음 아니겠어요?"

그녀가 무심코 말했다.

"샐 리"

라이가 조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난 당신에게 전화로 인터뷰 기사를 따내라고 명령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안 될 것 같아요."

그녀가 순진한 척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물론 마리나가 원한다면 언제나 전화로 나와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게 그녀가 원하는 거 라면요. 하지만 그녀는 날 직접 보고 싶어 하거든요. 그리고 어쨌든 난 파티에 정식으로 초대받았죠."

그녀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끝맺었다. 원래는 다음 주에 휴가를 내서 사카리아로 날아가 파티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라이를 궁지에 밀어 넣다니! 샐리는 큰 소리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건 안 돼"

라이가 부드럽게 경고했다.

"해외 취재는 안 된다고 했잖아. 당신은 갈 수 없어."

그녀의 옆에서 그렉이 분노에 휩싸여 나지막이 욕을 하며 일어나더니 주먹 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녀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기자요!"

그가 간신히 난폭함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신은 대단한 인재 하나를 낭비하고 있단 말입니다!"

"난 그녀를 낭비하고 있지 않소."

라이가 무섭게 소리쳤다. 유연한 몸짓으로 자신의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즉각 어떤 자세라도 취할 수 있어 보였다. 순간 샐리는 그의 가늘어진 눈동자에서 위험을 읽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렉. 위험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취재에서는 모조리 제외요. 세계의 권력자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그 석유 지배권을 얻을 수 있을지 모든 교묘한 책략들이 동원되고 있을 그 빌어먹을 파티도 포함해 서요! 아무리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산유국에서 열린다고 해도 말이오."

"장님 입니까?"

그렉이 고함쳤다.

"그녀는 위험 속에서 더 신이 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위험한 일이란 일은 혼자 다 하고 다닌단 말입니다! 빌어먹을! 심지어 그냥 평범하게 버스를 타는 적도 없어요. 늘 아슬아슬하게 사고가 날 듯 말 듯 하게 타죠! 그녀가 사는 것처럼 매일을 그렇게 살아 보라고 하면 일반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백발이 될 겁니다!"

순간 재빨리 샐리는 키가 크고 잔뜩 화가 난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라이를 돌아보았다.

"만일 마리나가 패트리샤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다면 당신은 인터뷰 기사를 얻어낼 수 없을 거예요"

그녀가 원래 주제로 대화를 돌리면서 말했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 속에 승리가 번뜩였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돼요. 당신은 어느 정도나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있죠?"

그는 분노로 입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그렉을 돌아봤다.

"여기서 나가시오."

그는 거칠게 명령했고,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대답은 여전히 안 된다는 거야."

"마음대로 해요."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점잖게 사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소지품을 정리하고 빌딩을 나갈 때는 혼자서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과 동시에 라이의 사무실로 당장 올라오라는 전갈을 보았을 때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속에 원고를 넣어두는 등, 그를 기다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즐기면서 그녀는 교모하게 늑장을 부렸다. 그리고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표정에서 즐거움의 흔적을 지웠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좌절과 분노를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와 달리 그는 매우 만족한 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샐리는 불쾌감을 느꼈다.

"내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했지."

그가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서 그녀가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쳐냈다.

"아무래도 머리를 잘라야겠군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 손이 가만히 있겠죠."

"자르지 마."

그가 충고했다.

"그에 따른 결과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내가 내키면 자를 거예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 거론하지 않겠어. 하지만 경고하는데, 머리에 손 댈 생각하지도 마. 만약 머리를 자르기라도 하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그렇게 위협하고 머리에 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 없이 그녀에게 질문하듯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내 해결책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아?"

"아뇨. 당신이 좋아하는 해결책이라면 제가 싫어할 건 번하잖아요?"

그가 마리나를 설득시킬 기상천외한 방법 몇 가지를 생각해 냈을 것이라 추측하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보통은 당신도 좋아했었지. 하여튼 당신이 꽤나 좋아하는 그 사카리아에 갈 수 있겠어, 달링."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그녀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환해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폭탄선언을 했다.

"나도 함께 갈 거고"

그의 폭탄선언에 깜짝 놀란 샐리는 그를 그저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국 그녀가 꺼낸 것이라고는 미약한 반대의 중얼거림뿐이었다.

"그렇게는 안 돼요."

"아니, 그렇게 될 수 있고말고."

그녀를 오싹하게 하는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가 말했다.

"잘 알고 있겠지만, 이 잡지는 내 소유고 난 뉴스를 다루는 사람이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당신 남편이잖아. 그러니 당신과 함께 사카리아에 갈 수 있는 아주 충분히 훌륭한 이유가 되지 않겠어?"

"하지만 난 당신과 함께 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필요 없어요."

"안됐군."

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러고 나서 평상시 음성으로 바꾸어 말했다.

"빠져 나갈 길은 없어. 당신이 가면 나도 가는 거야. 당신안전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으니까"

"난 어린아이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란 말예요. 혼자서도스스로를 충분히 돌볼 수 있어요."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당신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면 미안하지만 말이야. 혹시 당신의 남자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했었어? 그 남자 이름이… 그 기자 이름이 뭐지?"

그의 음성에 담긴 위협을 감지하자 목 뒤가 선뜻했다. 그는 크리스가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던 날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는 내버려 둬요!"

그녀가 화를 냈다.

"좋은 친구예요."

"짐작할 수 있어. 워싱턴에도 당신과 함께 갔었지, 그렇지?"

라이는 거칠게 이를 갈며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에게로 끌어당겼다. "공항에서 배웅했던 사람도 그 사람이지?"

"네, 맞아요."

그녀는 그가 그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인정했다. 그가 자신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다시 한 번 경고하지."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내 아내야. 그리고 당신 침대에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느냐는 상관없어. 만일 그 자식이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자식 얼굴을 완전히 뭉개 버릴 거야. 그리고 그 다음은 당신 차례겠지.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야?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 증명하라는 건가?"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도 않고 그는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샐리의 반응을 유도하면서 입술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억지로 그녀의 입술을 벌렸다. 그가 건네는 키스와 그의 맛은 7년이라는 이별의 세월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몰아치는 욕망에 헐떡이면서 샐리는 손을 올려 그의 단단한 어깨에 매달리며 몸을 밀착시켰다. 다시 한 번 첫 키스를 나누는 것 같았다. 완전히 녹아 버린 의식과 이성이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그에게 정신없이 반응하면서도 그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가 알량한 자존심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괴로웠다. 자기 입으로 말했다시피 라이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의 육체를 갖고 싶어 했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에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다른 남자들에게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인지 라이는 그녀의 첫 남자이자 마지막이었다.

까다롭고 냉혹한 라이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의 끌림이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강한 손이 허리로 내려와 그녀의 부드러운 육체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움켜잡으며 그의 팽팽하게 부푼 남성에 가까이 끌어당길 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욕망으로 몸을 떨면서 저절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샐리"

그가 그녀의 입술에서 아주 조금 입술을 열며 중얼거렸다.

"내 아파트로 가. 여기서는 사랑을 나눌 수 없어. 방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가 열정으로 거칠어진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리자 그녀는 그 목소리에 반응하면서도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애썼다.

"놔줘요"

샐리가 거칠게 저항했다 그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샐리는 갑작스레 찾아든 공포감으로 그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짧았던 결혼 생활이었지만 그 사이에 그녀는 그의 본 모습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상기된 그의 얼굴, 점점 더 거칠어지는 그의 목소리. 욕망의 불길이 일렁이는 눈동자. 그 모든 것에서 그녀는 그가 욕망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으며 곧 장소와 상관없이 그녀를 가지려 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싫어"

그가 잔인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다.

"다시는 놔주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거칠게 저항하듯 몸부림을 쳐서 겨우 그의 품에서 벗어났지만, 왠지 그가 놓아주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볼이 뜨거워졌다.

"놔줘야만 해요."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난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방금 입증했지!"

그가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난 섹스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요. 당신의 아내 자리는 더더욱 원하지 않아요. 함께 여행하겠다는 당신을 막을 수는 없겠죠. 당신이 보스니까. 하지만 당신과 같이 자지는 않을 거예요."

"뭐라고?"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 아내고 난 당신이 돌아오길 원해. 내가 남편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데 당신이 거절할 수는 없어"

냉정하게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크리스가 떠올랐다 그녀는 순간 방패처럼 크리스의 이름을 꺼냈다.

"이봐요, 라이. 이쯤이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때도 되지 않았나요? 크리스는 내게 특별한…"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그때 라이가 그녀의 허리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단단히 끌어안더니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자와 함께 있는 게 한 번만 더 보이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말했을 텐데"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그녀가 그의 단단한 품에서 벗어나려고 그의 팔을 밀어내며 애원했다.

"그만 좀 해요. 난 당신과 코럴의 관계를 인정하잖아요!"

순간 그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당신은 인정해 주지, 그렇지."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이 점점 더 험악해지자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터뜨리며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터질 것 같은 위험을 모면해 보려 했다.

"당신도 수도승처럼 살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그녀가 그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런 것들을 다 인정할게요."

그를 진정시키려고 말을 꺼낼수록 왠지 그는 점점 더 화를 내고 흥분하는 것 같았다. 이제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들린다고 느낄 정도로 그의 분노는 확연해 보였다.

"미안, 하지만 난 그렇게 현대적이지도 마음이 넓지도 않아"

그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남자가 당신을 만지는 건 못 참아!"

"심술도 적당히 좀 부려요!"

그녀가 쏘아붙이자 그가 그녀를 꽉 움켜쥐었다. 순간 샐리는 고통에 혀를 깨물 것만 같았다.

"라이, 제발 이러지 말아요! 아프잖아요!"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손 안의 새를 놓아주는 것처럼 조심스레 손을 치웠다. 그녀는 재빨리 몇 걸음 물러서면서 무의식적으로 아픈 부위를 문질렀다. 그가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자 그녀는 이 사무실을 빠져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가 화났을 때는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가 정말로 화가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복종시킬 것이다. 지금이 거의 그런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문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자 그가 갑자기 움직여 문 앞에 섰다.

"나와 싸우려고 하지 마."

그가 부드럽지만,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당신은 결코 날 이길 수 없고, 난 당신에게 상처 주기 싫어. 당신은 내 거야, 샐리."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화를 내는 라이의 모습을 봤었지만 지금처럼 광포할 정도 사나웠던 적은 없었다.

"난 일하러 가야 해요."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그녀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월급을 주는 사람은 나야. 내가 가라고 할 때 가면 돼."

한 마디 한 마디 부러지듯 말을 내뱉는 그의 시선은 전혀 흔들림 없이 그녀에게 꽃혀 있었다. 눈길을 돌린 것은 오히려 그녀였다. 자신을 향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그의 신경을 돌릴만한 말을 찾으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도망치기로 결심을 하고 어깨에 힘을 줬다.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괴롭힘은 사절이었다. 그 동안 쌓아 온 모든 자존심과 위엄을 총동원하여 그녀는 결연히 고개를 곧추세웠다.

"날 너무 들볶지 말아요."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경고했다.

"예전의 반만큼이라도 남자답다면 내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 텐데요."

"좋아하게 될 거야, 잠시 후에는."

그가 무자비하다 여길 정도로 담담하게 반박했다. 그 말을 듣고 울컥하기도 했지만 그런 마음의 동요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과거를 미래와 혼동하지 말아요. 당신이 있어 태양이 뜨고 진다고 생각했던 날들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는 걸 알아야죠."

"좋아"

그가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당신에게 우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굳이 날 악인으로 만들 것도 없잖아."

샐리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위험이 지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사카리아 여행에 대해서 그와 더 이야기해 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가 또 다시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았다.

"정말로 일하러 가야 해요."

그녀가 주장했다. 잠시 후에 그가 한 쪽으로 물러섰다.

"좋아"

한편으로는 부드럽지만 한편으로는 경고조로 그가 허락했다.

"하지만 베이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사카리아에 가선 잠시도 당신 곁에서 떨어져 있지 않을 테니까"

그의 말이 경고처럼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가운데 샐리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뒤늦게 몸이 떨려 와서 아무리 애를 쓰며 글을 써 보려도 해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주인공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해도 결국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라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이들을 갖자고 이야기했더라면 기쁨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랜 전의 일이고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왜 그녀가 변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왜 결혼 생활을 다시 시작하자고 고집을 부리는 걸까?

단순히 질투 때문에 동기 유발이 되었다곤 믿을 수가 없었다. 질투를 하려면 우선 사랑하는 감정이 있어야 했기에 아마도 그의 소유욕이 원인이지 싶었다. 라이가 그녀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을 연결시켜 주었던 유일한 고리는 섹스였고 지금의 그가 요구하는 것도 육체적인 관계일 뿐이었다. 결국 그에게는 무작정 반응하고 마는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니 평범하고 조용히 집에만 머물러 있는 가정주부와 세계를 돌아다니는 기자가 된 그녀는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예전의 그녀는 그에게 어울리는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몇 년 동안 무시하다가 갑자기 관심을 가지게 된 걸까? 잠시 동안 마음속에서 분노가 타올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의 해외 출장을 금지하지 않고, 그녀가 계속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자리에 두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그날 오후, 결국 라이와의 언쟁 때문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으로 조퇴하고 말았다.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 몸을 누인 채 조용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잠시 긴장을 풀었다 그 후에 낡았지만 편안한 분홍색 가운을 입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현관 벨이 울린 건 저녁 7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었다. 그녀는 짜증스런 마음에 눈살을 찌푸리고 컴퓨터를 껐다. 막 현관문에 다다랐을 때 라이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기 위해 그녀를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문을 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누구세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코럴 월리엄스예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샐리는 깜짝 놀라서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녀는 자물쇠를 열고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샐리는 코럴 월리엄스를 안으로 들이면서 손으로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이런 차림이라 미안해요. 누군가 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거든요."

"괜찮아요."

코럴이 모델 특유의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색깔이 좀 더 진하게 보이도록 해 주는 담황색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세련되어 보였다.

"라이가 브로드웨이 오프닝 공연에 데려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오늘 밤 여기에 없으리라는 걸 알았죠."

아하! 샐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코럴은 경쟁 상대를 점검하러 온 것 같았지만 누가 그녀에게 샐리의 존재를 말했을까?

"다른 날에도 여기에 있지는 않은데요."

부인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동자에 담긴 유쾌함을 느꼈는지 코럴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붉혔다.

"숨기려 하지 말아요."

그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울 것처럼 목소리가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라이가 말해 줬어요."

"뭐라고요?"

샐리의 목소리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라이가 그들의 결혼을 광고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공공연히 알리는 게 그녀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한 건가?

"라이에게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요."

코럴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의 타입이 아니에요. 오직 상처만 줄 거라는 걸 알아야죠. 다른 여자들이 있었지만 언제나 내게 돌아왔고, 지금도 다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그와 너무 깊어지기 전에 당신도 아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경고해 줘서 고마워요."

샐리는 굉장히 우습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감정이 느껴졌는지 코럴이 의혹에 찬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샐리는 미소를 거둘 수가 없었다. 남편의 정부가 정식 아내인 그녀에게 너무 진지해지지 말라고 경고하다니, 너무 우스웠다.

"그 점에 대해서 걱정 말아요. 난 연애 놀음에는 관심 없으니까, 오히려 당신이 라이의 관심을 독차지해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아요."

"저도 바라는 바예요!"

코럴이 혼란스러운 듯 샐리를 힐끗 쳐다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고백했다.

"하지만 처음 당신을 봤을 때부터 라이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게다가 그는 관심을 가진 건 손에 넣을 때가지 쉽게 포기하지 않는 남자예요. 왜 그가 이번 사카리아 여행을 당신과 함께 갈 것 같아요? 만약 당신이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면 호텔 예약을 미리 체크해요. 라이라면 방을 하나만 예약했을 걸요!"

"나도 그건 알아요."

샐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정도는 이미 한 수 앞서서 생각했죠. 벌써 다른 곳에 머물 생각도 했고요. 친구와 함께 말이죠."

그녀는 그 친구가 마리나 델챔프이며 궁전에서 머물 생각이라는 것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리나가 그녀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리라는 것과 라이의 계획을 망치는 일에 기꺼이 도움을 줄 것을 확신했다. 갑자기 코럴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네요.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 정도는 있는 것 같군요. 그 한 줄로 땋은 머리 덕에 좀 더 어려보이나 봐요?"

"아마도요."

샐리는 자신과 코럴이 동갑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부드럽게 동의했다.

"당신 덕에 마음이 많이 놓였어요. 이제 그만 가봐야겠네요. 30분 후에 라이와 만나기로 했는데, 늦겠어요."

코럴이 문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갔고 샐리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었다. 여왕님을 위해 문을 여는 하녀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코럴을 돌려보내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향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미소가 완연했다. 다른 여자를 염려하는 코럴의 연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여자의 감정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쓸 거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정말로 코럴이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쓰는 것은 라이의 시간과 그의 관심일 테지. 샐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라이의 무엇이 그토록 사악할 정도로 매력적인지 생각했다.

아마도 무엇이 라이를 약하게 만드는지 안다면 그와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구체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집어낼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모든 것, 심지어 그녀를 너무나 화나게 만드는 성격마저도 라이의 매력이었다. 그는 남자 중의 남자였고 그녀가 원하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오한이 들면서 식은땀까지 났다. 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항상 그를 사랑했다는 것. 라이가 그녀를 떠났을 때 느꼈던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사랑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 감정을 없앨 수는 없었다. 어두운 잠재의식 속에서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그 감정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컴퓨터의 빈 화면을 바라보며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는 것과 같이 산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고그녀는 더 이상사랑이 전부라고는 순진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와 라이는 세기의 부조화 커플이었고 지금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맞지 않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 그는 우주의 중심이자 삶의 중심이어서 그가 부탁한다면 지옥의 입구라도 기쁘게 따라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공포와 두려움에 둘려 쌓여 있던 그녀만을 남겨 두고 혼자 가 버렸다. 그녀가 어떻게 느낄지 그가 언제 신경이나 썼던가? 그녀의 의견이나 감정을 먼저 생각해 주기엔 그는 너무나 강압적이고 자신만만했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똑같았다 지금도 그가 행동하는 방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녀의 소중하게 쌓아온 경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다시 결혼 생활로 돌아오라고 요구할 때도 그는 그녀의 계획과 목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몇 번 깊은숨을 들이쉬고 나서 샐리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라이에게로 되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대답은 간단했다. 그의 흥미가 계속 되는 한 라이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만 전념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코럴 월리엄스라는 존재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라이는 결코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육체적인 즐거움 외에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돌아갔을 때가질 수 있는 고작해야 성적인 만족감과 그와 동행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정도?

그러면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섹스였다. 그 맹렬한 이끌림은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고 불행히도 그를 비이성적으로 만들었다. 만일 코럴이 결혼하자고 조르고 있다면 그들의 재결합으로 코럴의 요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코럴이 떠난다고 해도 라이가 전혀 걱정하지 않을 거라고 했고 아니 코럴은 라이가 원하는 한 곁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라이는 두 여자를 모두 가지는 것이다.

샐리는 그런 결론에 이르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라이는 그렇지는 않았다. 그가 한 여자에게 일편단심 성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또 게임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곁에 있으려면 라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문제였다 그녀는 평범한 남편과 평범한 결혼을 꿈꾸었지만 라이는 변화도 타협도 모두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가 변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를 못마땅해 했다. 그에게 한 번 속했던 여자가 더 이상 그와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를 싫어하고 있었다. 한 때 그의 것이었던 여자를 다시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기세였고 그녀의 일과 경력이 방해된다면 그 따위 것 아무렇지 않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그에게 돌아가기를 갈망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에게 돌아간다면 그녀의 자아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이는 그녀를 숨 막히게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흥미가 없으면 또 떠나 버릴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다시 살 수 없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가야 했다. 비록 라이와 완전히 헤어진다 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와 헤어져서 살아야 하다니 참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일 다시 한 번 그에게 그녀의 감정을 맡긴다면 이번엔 그녀의 가장 소중한 개성과 자신감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자신에게 옳은 길을 선택해야했고 그 길엔 라이의 존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다른 어떤 남자도 라이처럼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도 그녀는 그 길을 택할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번 사카리아 여행이 끝나면 정식으로 사표를 쓰고 이도시를 떠날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라이는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녀는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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