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낯선 일상이 시작됐다.
불행히도 대학 생활은 나와 그다지 결이 맞지 않았다. 일단, 새 학기랍시고 술자리가 잦았다. 나도 처음에야 멋모르고 끌려갔지만, 어느 시점 이후로는 제사, 과외, 아르바이트 등 갖은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생면부지나 마찬가지인 사람들과 부어라 마셔라 술을 들이켜는 건, 차라리 고역에 가까웠다.
우리는 이따금 함께 등교했다. 우리 학교 근방 역에서 전철이 멈추어 설 때마다 마세준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며 잡은 손을 쓸곤 했다. 나는 ‘저녁 같이 먹자, 응?’ 하고 되도록 부드럽게 말한다든지, ‘이따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할까?’ 하고 마세준을 달래느라 바빴다.
마세준은 불안하다고 말하는 대신 더 자주 나를 보러 왔고, 더 많은 시간을 나에게 쏟았다. 그 덕에 우리는 거의 매일을 함께 하교했다. 학교 근처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드는 마세준을, 진지한 얼굴을 풀고 해사하게 웃는 마세준을,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날은 마세준을 개강총회에 보내 놓고 모처럼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칙칙한 버스에서 내려 아주 천천히 걷다가, 문득 마세준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 전화를 걸었다.
시시한 통화 연결음이 몇 번을 이어지도록, 마세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떠올려 보면 전혀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는데, 괜히 속이 시큰하고 서운했다. 자포자기한 채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을 때는 작고 시린 눈송이가 가슴에 와 박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다는 게, 우리가 각각 다른 사람들 틈에서 조금은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게 덜컥 실감이 났다. 그래서 겁이 났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 아빠는 안방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인사를 하자, ‘어, 잎새 왔니.’ 하고 무성의한 인사가 돌아왔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엄마 아빠는 저렇게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정말 좋겠다고.
종일 나를 기다렸을 산초를 안아 온몸에 뽀뽀를 해 주고는 대충 밥을 차려 먹었다. 혼자 먹는 밥은 더럽게 맛이 없었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내 다리에 제 몸을 비비고 가는 이산초가 그나마 내 마음을 달래 주었다.
따뜻한 물에 오래도록 몸을 씻었다. 샤워기를 잠그고는 뽀드득, 거울 속 김을 닦아 냈다. 뾰로통하게 풀이 죽은 내 얼굴이 보였다. 속 좁게……. 전화 한번 못 받은 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꼴이 조금 우스워서 싱겁게 웃는데, 빗장뼈 아래 마세준이 검붉게 남겨 놓은 흔적이 느닷없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 말라니까 꼭 이러더라, 브이넥은 다 입었네. 어느덧 거울 속 내 얼굴은 홍시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마세준은 몸을 섞으며 흔적을 남기는 걸 좋아했다. 남기는 것만 좋아하면 다행이게, 남겨 달라고 졸라 대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뭐, 나도 싫지야 않았지만 이렇게 훤히 보이는 데 남겨서야 곤란하지 않겠느냐고. 덕분에 엄마랑 같이 목욕탕 가는 건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욕실 문을 열자 개운하고 건조한 공기가 마음을 조금 달래 주었다. 방으로 들어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휴대폰부터 얼른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마세준(2)]
화면에 떠 있는 마세준 이름에 가슴이 널을 뛰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미안, 잤어?
마세준은 금세 전화를 받았다. 분명 혀가 꼬꾸라졌다거나,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애교 있게 늘어지는 목소리에서는 술 냄새가 조금 났다.
“아니, 씻느라……. 술 많이 마셨어?”
나는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복숭아뼈를 살살 만지며 넌지시 물었다.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칼에서 물이 토독, 토독 떨어졌다.
-선배들이 자꾸 따라 줘서, 조금.
어디 동굴에서 전화를 하나,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응.
“왜 취하고 그래. 괜찮아?”
-안 취했어.
“그런 목소리로 안 취했다고 하면 퍽이나 믿겠다. 걱정되잖아, 얼른 집에 들어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핀잔을 줬다. 자기 주량 빤히 알면서 준다고 곧이곧대로 받아 마시냐. 이상한 데서 물렁하다니까. 나는 매트리스에 고개를 살짝 누였다.
-이잎새, 잠깐 나올래?
“……?”
휴대폰을 시야 앞으로 가져와 시간을 확인하자, 열 시가 되기 십 분 전이었다. 엄마 아빠가 못 나가게 할 것 같은데…….
“어딘데.”
그러면서도 내 입은 날름 어디냐고 묻고 있었다.
-803호 앞.
우리 집 앞이라는 소리였다. 술 취한 몸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다는데, 아무래도 응해 주는 게 도리에 맞았다. 얌전히 기다리라며 통화를 마치고는 벌떡 일어나 양말을 하나 주워 신었다. 그편이 소음을 줄이기에 좋다.
뒤꿈치를 들고 방을 나서서, 산초에게 쉿- 하고 신호를 줬다. 산초는 귀를 뒤로 젖혀 가며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미닫이 중문을 닫을 때는 간이 다 서늘했다. 이산초, 제발 야옹 하지 마, 착하지? 누나가 갔다 와서 간식 줄게. 다행히 이산초는 내 텔레파시를 얼추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나는 한쪽 눈까지 찡그려 가며 간신히 현관 문고리를 손에 쥐었다.
“잎새, 이 시간에 어딜 나가?”
열린 문틈으로 벽에 기대 서 있는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을 때, 등 뒤에서 벼락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자, 엄마가 여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잽싸게 현관문을 닫았다.
“자, 잠깐 편의점! 생리대 떨어졌어.”
아, 하필 핑계를 대도 그게 떠오를 건 뭐야. 마세준이 다 듣고 있는데. 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구겼다.
“으이구, 밝을 때 돌아다니질 않고. 엄마가 같이 가 줘?”
“아니! 괜찮아. 뛰어갔다 오면 돼.”
“어디 새지 말고 후딱 들어와.”
“네!”
엄마가 다시 안방으로 들어서는 걸 확인한 나는, 빛의 속도로 현관을 빠져 나와서는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세준을 바라봤다.
센서 불빛 아래 볼을 붉히고 서 있는 마세준은, 정말로, 정말로 귀여웠다. 어느 정도였냐면, 꽁해져 있던 마음이 대번에 풀렸다. 살짝 풀린 눈동자가 내 안의 변태를 깨우려 했다. 볼이랑 입술은 발그레- 해 가지고.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적당히 끊을 줄도 알아야지.”
나는 괜히 엄한 목소리로 툴툴대며 마세준을 흘겨봤다. 마세준은 피식피식 웃어 댔다. 뭘 잘했다고. 귀여우면 다야?
“왜 자꾸 실실 쪼개? 잘못한 건 알아?”
“……잔소리를 해도 예쁘네.”
마세준은 그렇게 말하더니 별안간 나를 꽉 껴안았다. 내가 좋아하는 향기를 맡자 기분이 거짓말처럼 말랑말랑해졌다. 술 냄새도 조금은 났지만.
“보고 싶었어.”
참나, 보고 싶었대. 아침에 봤으면서. 나는 입술을 짓이겨 물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이런 꼬장이라면 가끔은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 짧은 말 안에는, 전처럼 붙어 있지 못해 속상하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마세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사절이거든. 수능을 어떻게 또 봐.”
“난 백 번도 봐.”
마세준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수능 백 번이라도 보겠다는 마세준에게,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돌연 센서 등이 꺼지기에, 얼른 팔을 아무렇게나 휘저었다.
“잎새야.”
“응.”
“나 언제 데려갈 거야?”
“어딜?”
“나 언제 데려갈 거냐고, 장가오라며.”
팔을 휘두르다 말고 고개를 들자, 마세준은 나를 내려다보며 세상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아니, 그거야 아주 먼 미래에나 얘기해 봄직한 거지.
“너 취했어.”
“…….”
“나이 스물에 무슨 결혼 타령이…….”
마세준은 갑작스레 부드러운 손길로 내 턱을 쥐었다. 그러고는 숨이 넘어가도록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하게 입술을 내렸다. 입술을 따스하게 포갰다가 얌전히 물러서는가 싶더니, 결국 못 참겠다는 듯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물러났다.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가글 냄새 나는 것 좀 봐. 이거, 아주 작정을 하고 왔구만. 나는 애매한 단맛이 도는 내 입술을 살짝 머금어 봤다.
“들어가고 싶어.”
마세준이 숨을 뱉듯 말을 마침과 동시에 다시 센서 빛이 소등됐다.
“무슨 소리야. 엄마 아빠 다 있는데.”
“너희 집 말고.”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 시간에 어딜 가겠…….”
“네 안.”
“…….”
양심은 엿을 바꿔 먹었나 보다. 매일같이 그 난리, 난리를 해 놓고……. 얼굴이 새빨개져서 애먼 땅만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이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후였다. 아직까지 내 입술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마세준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 말리고 자야겠다.”
또 엄한 소리를 할까 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데, 마세준은 내 젖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길 뿐이었다. 물론 은근슬쩍 귓불과 목을 만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정한 손길이 싫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복도가 다시 환해졌다.
“잎새야.”
“왜.”
“…….”
불러 놓고 말이 없는 마세준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 사랑해?”
“…….”
“응?”
“……응.”
“말로 해 줘.”
대답도 간신히 했는데, 너무 큰 걸 바란다 싶었다. 대뜸 그 말을 어떻게 해.
“……진짜 그건 도저히 못 하겠는데.”
“해 줘. 응?”
마세준은 내 목에 고개를 묻으며 나른하게 칭얼거렸다. 맨살에 뜨거운 숨이 닿자 괜스레 민망했다. 문 하나 뒤로 엄마 아빠에 산초까지 있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마세준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순순히 밀려난 마세준은 조금은 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꼭, 아까 욕실에서의 내 얼굴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
“당연히 갈 수 있겠지. 어떤 간 큰 인간이 이 미터짜리를 업어 가.”
“…….”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바보야.”
마세준은 굳은 얼굴을 풀며 웃더니, 내 볼을 움켜쥐고는 아주 길게 입을 꾹 맞췄다 물러섰다.
“예뻐, 이잎새.”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자기가 더 예쁜 것도 모르고.
“말해 봐, 너 술 다 깼지?”
“안 깼어, 진짜 안 깼어. 이잎새, 나 머리 아파.”
마세준은 다시 내 목으로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언제는 안 취했다더니, 이제는 술 안 깼다고 난리다. 말하자면, 떼쟁이 대형견에게 깔려 눕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세준의 목을 쓰다듬으며 입술 언저리에 입을 맞추고는,
“얼른 들어가,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그렇게 말했다. 마세준은 낮게 웃으면서 내 얼굴을 꼭 쥐었다.
“불 다 질러 놓고 또 가래.”
나는 조금 더 강경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린이를 혼내듯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씁! 하고 삿대질을 했다. 마세준은 마지못해 내 손을 놓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문이 안 닫혔다. 이유야 뻔했다.
“빨리 열림 버튼에서 손 떼.”
“…….”
또 마세준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거겠지. 단호한 내 목소리에, 곧 마세준의 웃는 얼굴이 문틈으로 사라졌다. 나는 층계 사이의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놓고는 마세준을 배웅했다.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며, 마세준은 연신 뒤로 걸었다. 이 밤에 내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을 건데 뭘 보겠다고. 지저분한 창틀에 팔을 괴고 마세준을 바라봤다. 저 거구가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일까. 그 말, 많이 연습해서 얘기해 줘야지. 마세준 맨정신일 때, 세 번쯤 말해 줄 거다. 엄청 좋아하겠지.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뒤를 돌았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엄마가 하품을 하며 안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세준이는, 집에 갔니?”
“어, 가는 거 보고 들어오는…….”
너무 자연스러운 물음에 나도 모르게 진실이 튀어나왔다. 뒤늦게 이 요망한 입을 막아 봐야 별 소용 없었다.
“으이그, 생리대는 무슨. 지난주에 생리 끝난 애가.”
“…….”
엄마는 다 안다는 듯 짓궂게 웃었다.
“붙어 다니는 건 좋은데, 일찍 일찍들 다녀. 알아 몰라.”
“알겠어요.”
역시 귀신은 속여도 엄마는 못 속인다. 괜히 거짓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엄마는 졸려 죽겠다고 손을 흔들더니 다시 안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약속대로 산초에게 간식을 챙겨 주고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산초가 간식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간식을 순식간에 동낸 이산초는 개운한 얼굴로 내 무릎에 몸을 비벼 왔다. 작은 몸을 낚아채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산초는 내 다리 사이로 따듯한 몸을 누였고, 나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쥐었다.
[이잎새잘자]
띄어쓰기도 없이 마세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아, 얠 어쩌면 좋지.
“잘 자, 세준아.”
나는 휴대폰 화면을 애틋하게 쓸어 보았다. 자꾸 웃음이 났다.
* * *
{일곱 시까지 갈게. 시험 잘 봐.}
나는 소파에 축 늘어져서는 마세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응원 삼아 후하게 하트라도 하나 붙일까 하다, 낯이 간지러워서 말았다. 그러고는 소파 등받이 틈에서 낚싯대를 꺼내 무성의하게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이산초는 식탁 아래서 엉덩이를 씰룩대다 바람같이 달려왔다. 저렇게 좋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평일 벌건 대낮에 집에 누워 있는 건 꽤 오랜만의 호사였다. 오늘은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이른 오후에 시험을 마친 나와는 달리, 마세준은 오후 7시에나 시험이 끝난다고 했다. 꽤 긴 시간이 떠버린 터라, 나는 먼저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험 기간 겹친 게 어딘가 싶으면서도, 집에 오는 내내 적적해 혼이 났다.
“잎새, 오늘 세준이 만난다고 그랬니? 아빠가 저녁에 오리 백숙해 준다는데.”
엄마가 냉장고 문을 열다 말고 내게 물었다.
“응. 먼저 드세요. 난 이따 마세준이랑 먹을 거야.”
“그래, 시험도 끝났는데 간만에 스트레스 좀 풀고 와. 백숙은 세준네 불러서 같이 먹어야겠다. 가만있어 봐, 장아찌가…….”
엄마는 ‘이게 익었으려나?’ 하며 양파 장아찌를 아삭아삭 씹더니, 별안간 홱-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근데 잎새 너는 남자 친구를 뭐 그리 정 없게 불러? 마세준이 뭐니? 마세준이.”
“뭐 어때. 성 붙여서 부른다고 다른 사람 되나. 마세준이 마세준이지.”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조금 더 성의껏 낚싯대를 흔들기 시작했다.
“살갑게 좀 대해 줘. 세준이는 아주 그냥 다정함이 철철 흐르던데. 너 산초한테 하는 거 반만 해 줘도 세준이 입 찢어지겠다, 얘.”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마세준한테 얼마나 잘 해 주는데.
“마세준은 내가 뭘 하든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댔어.”
“아이고, 그래. 왜 아니겠어.”
엄마는 깔깔깔 웃으면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요거트 하나를 내 앞에 놓아 주었다. 복숭아 요거트네. 나는 웃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잘해, 이것아.”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마세준이 날 좋아하지.”
내가 요거트를 뜯으며 투덜대자, 곁에 앉아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던 엄마가 샐쭉 웃었다.
“참, 세준이 신검은 잘 받았다니? 아휴, 너도 너지만 세준네 내외는 또 애를 얼마나 끓이겠어. 세준이는 또 무슨 고생이고.”
그러더니 문득 화면 속 밀리터리 영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게 묻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작게 혀를 찼다.
별안간 묵직한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입대 때문에 휴학하는 선배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왜 나는 여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왜 마세준은 나한테 일언반구 말이 없었을까.
“아이고, 여태 못 들었어? 세준이가 부러 말 안 했나 보네……. 너 걱정할까 봐서, 응?”
얼빠진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자, 엄마가 내 얼굴을 살피며 급히 말을 덧댔다. 나는 소파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스웨터와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들었다.
“벌써 나가게?”
“바람 좀 쐬려고. 저녁 먹고 들어올게요.”
정전기가 나거나 말거나, 나는 옷을 아무렇게나 껴입고는 곧장 집을 나섰다. 버스에 오르는 대신 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으며 생각했다. 내게 아무 사실도 전하지 않은 마세준보다,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내가 더한 게 아닐까, 하고.
20개월,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세준이랑…… 마세준이랑.
열 살 이후로, 마세준과 떨어져 지낸 적은 거의 없었다. 마세준이 홀로 영국에 갈 때가 아니고서야 우리는 항상 같이 있었다. 마세준과 다퉈서 냉전 중일 때도, 최소한, 마세준은 내 시야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마세준네 학과 건물 앞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무릎을 껴안고 죄 없는 손끝을 깨물어 가며 마세준을 기다렸다. 미워 죽을 것 같았고,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이잎새.”
가슴이 먹먹하도록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세준이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왜 나와 있어. 옷은 또 왜 그렇게 얇고. 아침저녁으로 아직 쌀쌀한데.”
하필 오늘따라 목소리가 더 다정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기서 나보다 옷 두껍게 입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불쑥 화를 내는 대신, 나는 얼른 일어나 마세준의 허리춤을 껴안았다. 얘 없이 어떻게 2년을 버텨. 진짜 너무한다.
“이잎새,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마세준은 조심스레 나를 떼어 내더니, 경직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별수 없이 시야가 뿌옇게 번지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
눈물이 뚝뚝 흘렀다. 아무렇게나 턱을 쓸어 내며 마세준을 노려보자, 주저하던 마세준이 곧 내 눈물을 찬찬히 닦아 주었다. 내가 이러는 이유를 짚어 낸 모양이었다.
“왜 말도 안 해 줬냐고. 나도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래야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지. 어떻게 한마디도 없을 수가 있어.”
말을 하는 내내, 억눌린 목소리가 따끔하게 목을 조였다. 나는 딱딱한 얼굴로 마세준의 손길을 밀어냈다.
“너 시험 앞두고 괜히 속상할까 봐 그랬어.”
“그래도 말했어야지! 언제 얘기하려고 그랬는데. 어? 말해 봐.”
나도 모르게 쏘아붙이듯 말을 해 놓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후회했다.
“잎새야, 나 좀 봐 봐.”
“나 네 여자 친구잖아. 꼭 이렇게 네 얘기 전해 듣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
마세준은 나를 마주 보고 선 채로 내 어깨를 감쌌고, 나는 마세준을 뿌리치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10초도 못 되어 마세준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잎새, 내 말 들어 봐.”
“…….”
이제라도 어른스레 굴고 싶었는데, 입꼬리가 의지를 배반하고 축축 처지더니 보란 듯이 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세준이 미워서가 아니라, 내가 한심하고 답답해서.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하면 될 걸, 왜 더 화를 내고 있을까. 마세준 속도 말이 아닐 텐데.
“나 당장 입대하는 거 아니야. 유예할 거고, 조만간 말하려고 했어.”
“……그래도!”
마세준은 덜컥 나를 껴안았다. 이러면 내가 화도 제대로 못 낸다는 거 다 알면서.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
“미안해, 잎새야. 걱정 끼치기 싫어서 그랬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이 나쁜 새끼야. 너랑 헤어지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 그거 모르는 거 아니잖아……. 근데 왜 그랬어.”
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마세준을 끌어안았고, 마세준은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웅성대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속이 타 죽을 것 같았다.
“미안해.”
“…….”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마세준, 나 두고 가지 마.”
“……응.”
“아무 데도 가지 마. 응?”
“그래.”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려도, 마세준은 그러겠다고만 했다. 그러고는 내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나를 달래 주었다.
* * *
이제 막 긴 시험을 마치고 나온 애한테 아무래도 너무했던 것 같아, 나는 마세준을 정문 근처 선술집으로 데려갔다. 눈에 보이는 걸 아무거나 시키고는, 맥주에 소주까지 주문했다. 옆으로 나란히 앉은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마세준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내 머리칼을 넘겨 주었고, 나는 어린애처럼 칭얼댔던 게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가게 안은 말 그대로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머리 풀고 달리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험 끝나는 날 아무 생각도 없이 대학가에 발을 디딘 건 나였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잎새야.”
“…….”
“내일 꽃구경 갈까.”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마세준이 살살 어르듯 다감하게 물어 왔다. 꽃이 어딨어, 벚꽃은 초저녁에 다 졌는데…….
“……어디로 갈 건데.”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마세준을 흘끔 올려다보며 물었다. 더 투덜거려 봐야 아까운 시간만 지나간다. 마세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얼굴을 제 가슴에 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마세준이 웃는 낯으로 내 얼굴을 쥐고 입술을 짧게 붙였다 떼었을 때, 주문했던 음식이 서빙되기 시작했다. 종업원이 광대를 씰룩이며 웃음을 참기에, 나는 마세준 허리춤을 살짝 꼬집었다. 마세준은 그래도 좋다고 웃고 있었다.
“이거 마시고 화해하는 거로 해.”
나는 마세준 앞으로 차가운 맥주잔을 밀어 주며 말했다. 탁한 소리를 내며 묵직하게 잔을 부딪치고는, 마세준이 잔을 손에 쥐기도 전에 혼자 잔을 기울였다. 따끔하고 시원한 것이 개운하게 목을 씻어 줬다. 아, 이래서 술들을 마시나. 더럽게 맛이 없더니, 처음으로 술이 달다는 생각을 했다. 술이 달면 인생이 쓴 거라고 하던데.
“목말랐어?”
마세준은 잠자코 내가 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가, 노릇노릇한 새우튀김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날름 그걸 받아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안 고파?”
“……고파.”
마세준은 테이블 위의 안줏거리를 돌아보더니, 호출 벨을 누르며 싱긋 웃었다. 한바탕 울고 나면 언제나 먹을 걸 찾는 나를, 마세준은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화해주를 핑계 삼아 내키는 대로 맥주를 마셨다. 내가 생맥주 다섯 잔에 소주 반병을 비우는 동안, 마세준의 술잔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마세준은 연신 먹을 걸 내 입으로 넣어 주거나, 천천히 마시라며 잔을 빼앗아 내려놓기도 했다. 그래도, 그만 마시라는 말은 안 했다. 자기가 나 속상하게 했으니 술은 실컷 마시게 해 주겠다, 뭐 그런 건가.
결국, 나는 마세준 등에 업힌 채 봄밤을 걷고 있었다.
“세준아…….”
“응.”
“세준아.”
“…….”
“내가 마세준이라고 부르면 싫어?”
머릿속이 띵한 가운데, 엄마의 핀잔이 문득 생각나 물었다. 정말 정 없이 들렸을까,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었는데.
“아니.”
“그럼?”
“좋아.”
뭔들 다 좋다는 말로 들렸다. 거봐, 마세준은 내가 뭔 짓을 해도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고 그랬다니까.
“얼마만큼?”
“…….”
“있잖아, 별이 세 개밖에 없네.”
나는 고개를 한껏 뒤로 꺾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껏 물어 놓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는 건 까맣게 몰랐다. 내가 상체를 잘 가누지 못하며 휘청이자, 마세준이 얼른 내 엉덩이를 추켜올렸다.
“별이 세 개밖에 없어?”
“응.”
마세준은 자상하게 되물었고, 나는 푸우- 숨을 뿌리며, 마세준 목에 얼굴을 비벼 댔다. 좋은 냄새. 안기고 싶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꽉 껴안고, 입 맞추고, 쓰다듬고, 뜨겁게 바라보고…….
“세준아, 우리 쉬러 갈까.”
“……너 술 깨면.”
“술 언제 깨는데? 난 지금 하고 싶은데.”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뱉어 댔다. 뭐 어때, 내일 아침에는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되지.
“내가 말했나?”
“…….”
“네가 침대에서 얼굴 막 찡그리고 내 이름 부를 때, 진짜 좋다.”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이렇게 뽀뽀해 줄 때도 좋고. 만져 줄 때도 좋고.”
마세준은 대답 대신 짙게 웃었다. ‘미치겠네.’ 그러면서.
“그럴 때마다 눈물 날 것 같아. 네가 나 사랑하는 것 같아서 좋아.”
“…….”
“…….”
나는 말을 멈추고 다짜고짜 마세준의 귀를 붙잡아 당겼다. 술기운 때문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랑해, 세준아.”
그러고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마세준은 걸음을 멈추더니, 한참 뒤에야 반쯤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마세준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반대쪽으로 몸을 꺾으며 소리를 내 웃다가, 잘생긴 볼에다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마세준은 귀를 새빨갛게 붉히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꿀을 먹었나, 아무 말도 안 하네.”
나는 마세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잠시 뒤, 마세준은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따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웅얼거리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말로는 못 해.”
뭘 말로는 못 해? 그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그 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바람이 제법 따스했고, 기대어 있는 마세준의 등은 더욱이 그러해서, 자꾸만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