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 중의 균 마세균, 잠복기만 15년-15화 (15/17)

15장.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간신히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엄마는 모임이 있다더니 일찍이 나간 모양이었다. 이산초는 어딜 간 거지.

입이 타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앓는 소리를 쏟아 내며 간신히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관자놀이를 짚은 채로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발을 훌쩍 내놓고 자고 있는 마세준이 보였다. 이산초는 마치 세트처럼 마세준 허리춤에 똬리를 틀고 자고 있었다. 뭐지……. 어제 마세준이랑 술을 마셨고, 등에 업혀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하면서 집으로 향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정작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기네 집 코 옆에 두고 굳이 또 여기서 자냐. 엄마 아빠도 그렇지, 애를 집에는 보내야 할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비죽비죽 웃음을 흘리며 주방으로 가 물을 한 잔 따랐다. 그래도 좋았다. 마세준이 여기 있으니까. 천천히 소파를 향해 다가가면서 달게 물을 삼켰다. 기척을 느낀 이산초가 졸린 눈을 희끄무레하게 뜨더니 느릿느릿 다가왔다. 보드란 몸을 안아 올리며 얼굴을 비비자 기다렸다는 듯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이산초, 세준이 형이랑 같이 자니까 좋아?”

“냐…….”

“이 짜식이, 형아 왔다고 바로 누나 버리고. 어?”

이산초는 돌연 귀를 젖히고 눈을 세로로 뜨더니 바닥으로 내려가 버렸다. 나는 테이블 위에 물 잔을 내려 둔 뒤 마세준 앞에 무릎을 접은 채 쭈그려 앉았다.

상의가 훌쩍 올라가 있기에 얼른 내려 주고는, 마세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넘길 것도 없는 짧은 머리칼을 괜스레 넘겨주었다. 그제도 밤새워 공부했다더니 피곤했나 보네……. 쌔근쌔근 잠든 얼굴에 가만히 시선을 내려놓고 있자니 별수 없이 가슴이 바삐 뛰었다. 거의 매일 마세준의 얼굴을 보는데도, 뜻하지 않게 마세준을 보니까 가슴이 다 불긋해지는 기분이었다. 떨려…….

언젠가, 미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김용호가 그렇게 좋냐고. 미호는 내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할 대답을 내놓았었다. 좋긴 한데 마냥 좋지만은 않은 거라고. 좋은 마음 안에 이것저것 있다고. 그 뜻을 조금은 알 듯도 했지만, 솔직히, 잘은 모를 이야기였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마세준을 향한 내 마음에는 분명 사랑 외에도 많은 것들이 엉켜 있겠지만,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다. 햇살이 내려앉은 마세준의 얼굴에서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이 하나둘 겹쳐 보였다.

다시 만났던 열 살 무렵의 마세준, 뾰로통한 얼굴로 커다란 사탕 바구니를 건네던 중학생 마세준, 잼을 발라 주고 물티슈를 쥐여 주던 마세준, 좋아한다고, 도망가지 말라고 말하던 마세준,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사랑한다고 말해 주던, 어리고 커다랬던 마세준. 그런 마세준이 내 곁에 있는 건, 마치 매일 밤 이불을 덮듯 당연한 일이었다.

앞으로는 우리 뜻대로 흐르지 않는 순간들도 있겠지. 다툴 수도, 괜한 오해로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떨어져 있어야 할 수도 있어. 근데 세준아, 마음이 닿은 뒤로는 행여나 네 마음이 변할까 두려웠던 적,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

“……더.”

그렇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먹먹한 생각을 고르는데, 마세준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깼어?”

“더 만져 줘.”

마세준은 반쯤 눈을 뜨더니, 내 손을 살포시 쥐고 제 볼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샐쭉 웃으면서 마세준의 볼을 쓸어 줬다.

“목 안 타? 물 좀 마셔.”

마세준은 내가 내민 물 잔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나를 향해 하얗게 미소 지었다.

“좋다.”

“뭐가?”

물 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묻자, 마세준은 내 얼굴로 손을 뻗더니 부은 눈가를 찬찬히 매만졌다. 따스한 손길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작은 나비 떼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눈 뜨자마자 너 보는 거.”

“…….”

낯이 간지럽다는 게, 정말 간질간질하다는 거였어. 나는 무릎으로 고개를 푹 묻고는 간신히 시선을 올려 마세준을 바라봤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테지만.

“그럼…….”

“그럼?”

어느덧 일어나 앉은 마세준이 자상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천천히 미소가 번지는 마세준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나는 느릿느릿 다시 입술을 뗐다.

“우리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까.”

하고 싶은 말을 아껴 두거나 감추어 두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마세준은 나를 제 무릎 위로 당겨 안았다.

“그럴까, 잎새야.”

“응.”

작은 목소리로 답하자, 마세준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쉴 새도 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마세준의 뺨을 손에 쥐고 가만히 입술을 맞대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시선이 엉켜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마세준의 왼쪽 가슴에 고개를 누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뛰는 심장 소리에 괜히 눈물이 나려고 했다.

* * *

마세준은 속은 좀 괜찮냐고 묻더니, 있는지도 몰랐던 황태를 찾아서는 해장국을 끓여 준다고 했다. 이산초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껄떡대자, 마세준은 황태를 조금 불려 주었다.

나는 식탁 위에 수저를 놓다 말고, 조리대 앞에 서 있는 마세준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뒤에서 허리춤을 껴안았다. 마세준은 내 손을 잡아다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더니, 곧 가스레인지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마세준의 등에 볼을 기대며 마세준을 따라 걸었다.

“배 많이 고파? 거의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아니.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마세준은 국을 뜨다 말고 몸을 굳히더니, 내 손을 풀어내며 뒤를 돌았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고개를 기울인 마세준의 입술이 천천히 내 것을 향해 다가왔다. 목을 끌어안으며 소리 내어 웃자, 입술을 떼어 낸 마세준이 마주 웃어 왔다.

거의 다 됐다는 마세준의 말처럼 곧 아침상이 차려졌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로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레 국물을 떠넘겼다. 얼큰하고 시원한 데다 간까지 완벽한 해장국이었다. 문제는, 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라면 마세준 입에는 지독하게 매울 거라는 거다.

“맛있다. 근데 왜 빨갛게 끓였어, 미안하게.”

“너 칼칼한 거 좋아하잖아.”

나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며 식탁 아래로 마세준의 발끝을 톡 쳤다. 그러고는 뜨끈한 국물을 연거푸 떠넘겼다. 마세준은 물을 따르다 말고 피식 웃더니, 바쁘게 아침을 먹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왜 안 먹어?”

“이잎새.”

나는 수저를 내려놓는 대신 마세준에게 시선을 옮기며 눈을 맞췄다.

“매일 이렇게 아침밥 차려 줄게.”

“…….”

말을 마친 마세준은 그제야 시선을 피하듯 수저를 손에 들었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잊은 채, 조금씩 붉어지는 마세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벌써 코가 꿰여도 몇 번은 꿰인 것 같은데, 또 반할 것 같다. 대체 왜 그리 오랜 시간 동안 마세준을 기다리게 했을까. 아까워 죽겠다.

“밥에 콩도 빼 줄 거야?”

숟가락을 손에 든 채 묻자, 마세준이 달아오른 얼굴을 끄덕였다.

“콩자반은?”

“절대 식탁에 안 올려.”

단호한 대답에 웃음이 헤실헤실 새어 나왔다. 그깟 콩이 뭐라고, 우리가 나누는 것이 사랑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분 좋은 울림이 가슴을 간질였다. 무겁고 신중한 약속을 나눌 수는 없어도, 언젠가 이렇게 마음을 써 주겠노라고 말하는 마세준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마세준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고, 더 많은 곳을 가 보고 싶다. 세상에 놓인 모든 감정을 나누고 싶고, 허락된 시간을 아낌없이 쓰고 싶다.

“……세준아, 우리 꽃 말고 바다 보러 갈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맨살을 맞대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거였다. 세준아- 하고 부르는 건.

“바다?”

“응. 같이 가 본 적 없잖아, 우리.”

* * *

“응, 엄마. 그렇게 됐어. 막차 늦게까지 있으니까 외박은 안 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기왕지사 거기까지 간 거 하루 정도 쉬다 와. 시험도 끝났는데.

엄마는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외박에 이렇게 후할 줄 알았으면 괜히 초조해하지 말고 진작 전화하는 건데. 괜히 겁먹었다.

“그래도 집에는 들어가야지.”

-얘는, 야밤에 돌아다니는 게 더 위험해! 엄마 어젯밤에 세준이도 걱정돼서 그 좁은 소파서 재웠잖아. 그러니까 늦을 것 같으면 내일 날 밝거든 오라고. 용돈 넉넉히 보낼 테니까 맛있는 것도 좀 사 먹고, 응?

“……알았어. 문자 남길게요.”

-잎새야.

“네.”

-너무 속 시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스트레스 잘 풀고 와.

“응……. 엄마, 고마워.”

통화를 마친 나는 멀찍이 서 있는 마세준을 향해 뭉그적대며 걷기 시작했다. 마세준은 ‘네. 알았어요.’ 등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몇 발자국쯤 떨어져 멈추어 서자, 얼굴에 웃음을 걸친 마세준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낯선 터미널을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조금씩 밀려오는 바다 내음과 낯선 풍광에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 서늘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이 든 간판을 스쳐 걷는 내내 손을 잡았다. 분주한 전통 시장을 구경하다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정겨운 떡집 사장님이 건네는 찰떡도 넙죽 받아먹었다. 밥을 먹은 뒤에는 카페에서 한숨을 돌렸다. 그러고는 해가 저문 바닷가를 거닐었다. 운치 있다는 겨울 바다도 청량한 여름 바다도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달빛이 여러 갈래로 스며든 수면 위로 잔파도가 밀려왔다 흩어지길 반복했다. 바다 냄새, 파도 소리, 서걱거리는 백사장의 모래알……. 내 곁에는 마세준이 있었고, 내 마음은 공허한 곳 없이 딱 저 달빛만큼 빼곡히 차 있었다.

“밤바다 되게 좋다.”

나는 마세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떼며 말했다. 그러고는 파도의 끄트머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마세준을 이끌었다. 손을 놓으며 털썩 주저앉자, 마세준이 씩 웃더니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마세준은 제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리 춥지도 않은데. 냉랭한 바람이 마세준의 얼굴을 스쳐 가는 걸 멍하니 보다가, 가까스로 시선을 뗐다. 그러고는 파도 위로 눈길을 옮겼다.

“우리 같이 못 해 본 거, 사실 엄청 많겠지?”

“다 해보자.”

마세준의 시선이 내 얼굴로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나는 무릎을 껴안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멀고 먼 파도를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마세준.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게, 있잖아……. 꼭 하늘이 파랗고 여름이 뜨거운 것처럼,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

“그런 느낌이야. 파도 같아.”

왜인지도 모르게 고여 있는 눈물을 살짝 닦아 내고는 마세준을 돌아보자, 가슴 떨리는 미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희미한 시야 속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잎새야.”

“응?”

“내년 봄에는 꽃 보러 갈까.”

마세준이 내 손을 잡아 오는 찰나, 흘러내린 옆머리가 바닷바람에 가벼이 날렸다. 멈춰 버린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손끝에 닿은 마세준의 체온이 선연했고, 가슴이 울렁였고, 작은 폭죽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밤의 바다 내음이 얼마나 향긋했는지, 까끌까끌한 모래 조각들마저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나는 언제까지고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래.”

어쩌다 우리 사이에 흐린 날이 오고 겨울이 와도, 하늘이 개고 여름이 돌아오듯 그렇게 내내 같이 있자고. 나는 조용히 마음을 건넸다. 마세준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실어 왔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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