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그날은 알람도 없이 번뜩 눈이 떠졌다. 팔을 들어 눈을 비비자, 곁에서 자고 있던 산초가 꼬물꼬물 몸을 뒤척이는 게 느껴졌다. 귀여운 이마를 쓰다듬었더니, 얼마 안 가 크릉크릉 소리가 났다.
따뜻한 이산초를 안아 들고 거실로 나가자 구수한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빵이 아닌 모양이었다. 엄마 아빠는 도시락 준비로 바빠 보였다.
“그냥 대충 싸 줘도 되는데.”
“잎새, 일어났어?”
민망하다는 듯 말하자, 엄마가 뒤를 돌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미지근한 물줄기 아래 한참을 서 있었더니 노곤한 몸이 차차 깨는 것 같았다. 머리를 꼼꼼히 말리고 문을 열자, 식탁에 앉아 있는 엄마 아빠와 마세준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세준이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잎새, 얼른 와 앉아. 오늘은 따끈하게 죽 먹자.”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세준 옆에 가 앉았다. 마세준은 식탁 아래로 자연스레 내 손을 잡았다 풀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우리의 아침 인사였다.
“전복죽이네? 소고기도 넣었어?”
“그럼. 19년 동안 고생했는데, 오늘은 내 새끼들 이 정도는 먹여야지.”
“왜 마세준이 엄마 새끼야?”
나는 엄마랑 마세준을 번갈아 보면서 놀리듯 물었다.
“그럼, 내 새끼나 진배없지. 세준아, 아줌마랑 아저씨가 오늘까지는 세준이 꼭 챙겨 주고 싶어서, 엄마 아빠한테 아침 먹이게 세준이 보내 달라고 부탁했어. 혹시나 엄마 아빠한테 서운해하지 마, 응?”
“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감사합니다.”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마세준을 잠시 보다가, 나도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엄마가 괜히 그런 말을 해 갖고, 기분이 뒤숭숭했다. 오늘이 아니어도 당분간은 이렇게 모여서 아침밥 먹을 수 있는데.
정성이 깃든 죽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일어서자, 아빠가 마세준 손에 도시락 통을 건네며 어깨를 두드렸다.
“세준이, 고생했다. 조심히 다녀와.”
“그래, 긴장하지 말고. 응? 잎새도 세준이도 열심히 했으니까,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을 막 나서려는데, 마세준이 느닷없이 뒤를 돌더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또 오겠다는 뜻이었다. 나도 엉겁결에 마세준을 따라 인사를 올렸다. ‘우리 애들 정말 다 컸네.’ 하며 엄마가 눈물을 흘리자, 아빠가 껄껄 웃으면서 눈물을 닦아 줬다.
우리는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어젯밤 내린 비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었고, 먼지 냄새와 흙냄새가 조금 났다.
“마세준, 있어 봐. 내가 좋은 거 줄게.”
나는 어젯밤 고이 챙겨 두었던 사탕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홀로그램 비닐에 싸인 봉지 사탕은 거의 반쯤 녹아 비닐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걸 마세준 앞으로 내밀자, 마세준은 이게 뭐냐는 듯 눈을 마주쳐 왔다.
“이거 뭔지 알아? 이거, 네가 열네 살 때 준 거다. 기억나지? 네가 막 마트에서 열불 내다가 사 준 거. 거기 들어 있던 거야.”
“왜 안 먹고 남겨 뒀어.”
마세준은 옛 생각에 잠겼는지,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도 우연히 찾은 거야. 서랍 바퀴가 빠져서 잘 안 열리길래, 겸사겸사 통째로 정리했거든. 원래 공부 안 될 땐 괜히 막 정리하고 싶잖아. 근데 서랍 밑에 샤프랑 머리끈이랑 같이 떨어져 있더라.”
“그랬어?”
“응, 부적이야. 네가 갖고 있어.”
먹지도 못할 사탕을 주는데 양심의 가책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어린 마세준이 내게 준 마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별수 없이 살살 녹아내린 모양이, 꼭 지금의 내 마음 같기도 했다.
마세준은 그 작은 사탕을 커다란 손으로 쥐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마워.”
“네가 준 거로 생색내니까 좀 그렇다.”
나는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곧 마세준이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자, 하얗게 웃고 있는 마세준이 보였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마세준은 내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이건 내 부적.”
주변에 서 있던 애들이 우리를 돌아보는 게 느껴질 즈음, 다행히 저 멀리 내가 탈 버스가 보였다. 도시락을 툭 부딪쳐 건배를 하고는, 날름 버스에 올랐다. 추위에 코끝이 붉어진 마세준이 싱그럽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줬다.
* * *
텅 빈 도시락 통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한숨이 새어 나와 뽀얗게 흩어졌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 냈다.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냥 나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고생했다고.
집에 가서 마세준한테 전화를 하고, 산초랑 놀아 주다가, 맛있는 거 배달 시켜서 영화도 봐야지. 어떻게 해야 잘 놀고먹을지 궁리하며 엘리베이터 문틈을 나서는데, 우리 집 앞에 기대어 선 마세준이 보였다.
마세준은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고, 나는 주저 없이 다가가서 마세준을 꽉 끌어안았다.
“고생했어.”
이상한 일이었다. 마세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로 착 내려앉자, 불안함에 둥둥 부유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포근해졌다.
“응, 너도 고생했어.”
나는 익숙한 향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이만한 위로가 또 있을까. 나는 너른 마세준 품으로 자꾸 파고들었고, 마세준은 나를 힘주어 안아 줬다. 복도 센서 등이 꺼지고 엘리베이터가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할 때까지,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산초가 토각토각 발톱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산초는 내 무릎과 마세준 무릎을 번갈아 비비더니, 빈 도시락 통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산초에게 간식을 챙겨 주는 동안, 마세준이 베란다에서 장난감을 한 아름 들고 나왔다. 쥐돌이에 낚싯대, 어묵 꼬치까지 보였다. 오늘은 나도 합세해 이산초의 한을 풀어 주었고, 결국 이산초는 삼십 분도 안 되어 러그 위에 뻗어 버렸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숨을 헉헉대는데,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진이 빠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소파에서 마세준 무릎을 베고 누워서 배달 앱을 뒤적였다.
“나 엄청 배고픈데, 도저히 못 고르겠어. 어떡하지?”
“다 시키면 되지.”
이럴 줄 알았어. 마세준은 맨날 다 먹으라고 한다. 나는 고개를 반쯤 틀어 마세준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마세준은 대뜸 고개를 숙여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술을.
“너, 어떻게 시험 끝나자마자 그러냐.”
나는 두 손으로 얼른 내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착하게 기다렸잖아.”
절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기세였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마세준은 그간 정말 착하게 기다렸다. 지난 한 해 동안 손을 잡거나 얼굴에 뽀뽀를 하는 일은 있었지만, 입을 맞춘 적은 없었다.
내가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을 즈음, 마세준이 내 손목을 쥐었다.
“이잎새, 아니야?”
그러고는 아주 쉽사리 내 손을 떼어 내며 물었다.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가 무척 낮고 새카맸다. 분위기가 오묘했다. 내가 대답을 않자, 마세준은 곧 나를 일으켜 앉혔다. 그러니까, 나는 마세준 허벅지 위에 떡하니 앉게 되었다. 순식간이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발바닥이 따끔거렸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나, 이만하면 착하게 기다린 것 같은데.”
“…….”
쫑알거리는 마세준 입술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분명 상은 미리 줬던 것 같은데…….”
가까스로 입술에서 시선을 떼 눈을 맞추며 말하자, 마세준이 장난하냐는 듯 피식 웃었다.
“받다 말았던 것 같은데.”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세준의 입술이 내 입술을 찾아들었다. 웬일로 가만히 입술을 마주치다 물러선 마세준은, 의아해할 틈도 없이 다시 달려들더니 내 아랫입술을 살살 빨아 당겼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내 입술을 깨물었다. 화들짝 놀라 마세준의 가슴을 작게 치자, 마주 닿은 입술이 웃는 게 느껴졌다. 곧 낯익은 혀가 내 안을 파고들었다. 매끄러운 것들이 맞붙어 뜨거운 온기를 만들어 냈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번졌고, 가슴이 제멋대로 일렁였다. 민망한 소리가 쏟아져 나오다가도 서로의 입안으로 흩어져 갔다.
내가 몸을 굳힌 건, 헐렁한 스웨터 아래 감춰져 있던 내 살갗에 마세준의 손끝이 닿았을 무렵이었다. 나는 마세준의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적당히 하라는 뜻이었다. 마세준은 곧 낮게 탄식하며 입술을 뗐다.
이런 키스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세준이 저렇게 야한 얼굴을 보여 준 적도 없었다. 마세준과 닿은 몸 곳곳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열이 오른 마세준의 입술은 빨갛게 젖어 있었다.
“…….”
“…….”
우리는 이마를 맞추고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세준의 두 눈은 혼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 아직 그러면 안 돼, 그러지 마. 알겠지?”
“…….”
“왜 대답 안…….”
마세준이 다시 내 입술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내 얼굴을 꼭 쥔 채였다. 음식은커녕 빵 한 쪼가리 못 먹고 저녁 내내 입술을 마주하고 있었다.
* * *
마세준이 합격 통보를 받은 그 다음 주 화요일, 나는 모니터 앞에서 펑펑 울다가 엄마 아빠에게 차례로 전화를 했다. 그러고는 마세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세준.”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잎새, 축하해.
그게 어떤 종류의 떨림이었는지, 마세준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농구를 하고 있던 마세준은 5분도 안 되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마세준의 목을 껴안으며 냉큼 품에 안기자, 마세준은 내 몸을 번쩍 안아 들고 거실로 데려갔다. 나는 마세준에게 매달려,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베란다에서 새를 감상하고 있던 이산초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귀를 젖히고 우리를 바라보더니, 곧 새소리를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울어, 잘 됐는데.”
“너무 좋으니까 그렇지.”
마세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이잎새는 울어도 예쁘네.”
“나 예쁜 거 하루 이틀 일 아니거든?”
“하루 이틀 일 아니지.”
“…….”
“손 더러워서 못 닦아 주겠다.”
따뜻한 입술이 내 눈가를 쓸어 주다 물러났다. 마세준이 멀어지는 게 싫어서, 붕 떠 있던 다리를 마세준의 허리춤에 휘감았다.
“……키스해 줘.”
“…….”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마세준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따뜻한 목을 쓸면서 눈을 맞춰 봐도, 목울대를 울리며 멀거니 서 있을 뿐이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짙은 눈빛을 받아 내고 있자니 더욱이 그랬다.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 봐.”
“……됐어. 그냥 안 할래.”
“한 번만.”
커다란 손이 허리 아래쪽을 살살 쓸며 달래듯 재촉하자, 기분이 이상해지려 했다. 눈에 보이는 건 마세준 입술뿐이었다. 까짓것 한번 쪽팔리고 키스나 실컷 하자 싶었다. 달아오른 눈가로 마세준을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키…….”
기어코 한 번 더 듣겠다더니, 마세준은 결국 그 짧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을 부딪쳐 왔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다 같이 외식을 했다. 엄마 아빠랑, 마세준네 부모님이랑, 나랑 마세준이랑. 엄마는 오늘 기분 아주 날아간다며 소고기를 거나하게 쐈다.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들이 소주에 노가리로 2차를 치르는 동안, 나랑 이산초랑 마세준도 맥주를 하사받아 방으로 갔다.
“네가 먼저 마셔 봐.”
나는 파글파글 거품이 올라오는 맥주잔을 마세준 손에 쥐여 주었다. 마세준은 살짝 향을 맡더니, 별 망설임 없이 반 잔 가까이를 비워 냈다.
“어때? 맛있어?”
“별맛은 없어.”
나는 마세준이 남긴 맥주잔을 뺏어서 한 모금 마셔 봤다. 이런 걸 왜 마시나 싶을 정도로 맛이 없었다. 목이랑 코가 좀 따가웠고, 끝 맛도 알싸하니 불쾌했다.
“써, 이런 걸 왜 못 마셔서들 안달이지? 난 줘도 안 마실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고는 한 모금 더 마셔 봤는데, 그래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마세준은 말없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날 우리는 고작 맥주 한 병을 비우면서 과자를 세 봉지나 먹어 치웠다.
* * *
희미하게 마세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멍하니 누워서 정신이 들기를 기다리자, 간간이 엄마 목소리도 들려왔다. 꽤 진지한 어조였다. 긴 하품을 한 번 하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문가로 갔다.
빼꼼 문을 열자, 마세준과 엄마가 거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세상에, 이걸 다 모아 놨단 말이야?”
엄마는 심각한 눈으로 통장을 넘기며 물었다.
“과하게 주셨던 거니까요. 잎새 그간 공부하느라 워낙 고생했으니까, 시간 있을 때 한 일주일만이라도 즐겁게 해 주고 싶어요. 제가 나고 자란 곳 꼭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요. 허락해 주신…….”
“아이고, 아줌마가 이 정성에 대고 어떻게 안 된다고 그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입이 스멀스멀 벌어졌다. 마세준이 나고 자란 곳이라면…….
“지내는 건 할아버지 댁에서 지낼 생각이고?”
“네.”
“그래, 그럼 됐어. 같이 다녀와. 그리고 세준아, 비용은 어른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이건 잘 넣어 뒀다가 앞으로 세준이 하고 싶은 거 하는 데 써.”
엄마는 통장을 곱게 접어서, 마세준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쓰고 싶어요.”
“벼룩의 간을 떼 먹지, 그렇게는 못 해. 더 사양 말고 얼른 집어 넣…….”
“엄마!”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잠옷 바람으로 거실로 달려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산초가 깜짝 놀라 귀를 젖히는 게 보였다.
“진짜로? 진짜로 나 영국 보내 줄 거야?”
“으이그, 머리는 까치집을 해 가지고. 그렇게 좋아?”
엄마는 곱게 눈을 흘기며 웃었고, 나는 입이 귀에 걸려서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대박. 대박! 마세준!”
나는 엄마가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곱게 앉아 있는 마세준을 터져라 껴안았다.
“얼씨구, 얘들 봐라.”
빨갛게 귀를 붉힌 마세준은, 내 팔을 떼어 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잡고만 있었다.
* * *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네. 같이 학교 가는 거.”
나는 마세준과 맞잡은 손을 부러 크게 휘두르며 말했다. 아무래도 영 어색하고 이상했다. 이른 새벽이 아닌 어정쩡한 시간에 책가방도 없이 덜렁 맨몸으로 등교하는 것도. 그리고, 이게 마지막 등굣길이라는 것도.
“자주 만나면 되지.”
“그래도 같은 학교는 아니잖아, 가까울 뿐이지. 대학생들은 같은 학교 다녀도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데, 어떻게 자주 만나.”
마세준은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서고는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 안 보고 살려고 했어? 난 이잎새 매일 만나려고 했는데.”
그러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아차 싶어 얼른 팔짱을 꼈다.
“에이, 그 정도로 속상하다는 소리지. 내가 너 안 보고 어떻게 살아?”
살살 구슬리듯 말하자, 마세준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굳은 얼굴을 풀며 비죽 웃었다.
“근데, 졸업하면 기분 이상할 것 같아.”
“어떤 게.”
“그냥, 이상하잖아. 3년 동안 거의 매일 왔던 곳인데, 이제 안 와도 된다는 게.”
학교 정문 근방에는 꽃을 파는 작은 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오늘 누군가의 품에 안길 꽃다발들이 형형색색으로 시야를 어지럽혔다.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마지막 교문을 넘었다.
분명 학교에서 맞는 아침을 꽤 싫어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 오라고 오라고 그럴 땐 그렇게 오기 싫더니, 가라고 하니까 또 달갑지는 않았다.
긴 복도, 서늘한 교실 벽, 네모나고 텁텁한 칠판, 흙내 나는 운동장, 정신 사나운 급식소, 숨만 쉬어도 눈치가 보이던 교무실. 앞으로는 부러 떠올리지 않고서야 전부 마주할 일이 없겠지.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분명 3년 내내 많이 힘들었는데, 이래서 졸업한 사람들이 학창 시절, 학창 시절 말하나 싶었다.
예행연습을 마치고 강당에서 한참을 기다리자, 학생들보다 더 들뜬 얼굴을 한 부모님들이 하나둘 강당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우리 엄마 아빠와 마세준네 부모님도 보였다.
우리는 커다란 꽃다발을 두 개씩이나 받았다. 엄마는 중학교 졸업식 때 마세준이랑 사진을 찍지 못한 걸 두고두고 아쉬워하더니, 그 한을 풀겠다는 듯 무한대로 셔터를 눌렀다. 팔짱 좀 껴 봐라, 좀 자연스럽게 웃어 봐라, 더 다정하게 붙어 봐라. 주문 사항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세준은 끽소리 않고 엄마의 주문에 따랐고, 나중에는 시키지도 않은 뽀뽀를 내 볼에 해서는 어른들을 식겁하게 했다. 내가 미쳤느냐고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자, 마세준은 나사 빠진 놈처럼 웃었다. 나는 민망해 죽겠는데, 엄마랑 마세준네 엄마는 손뼉까지 쳐 가면서 웃었다. ‘찍었어? 세준 엄마, 찍었어?’ 그러면서 한참을 아이처럼 좋아했다. ‘못 찍으셨으면 한 번 더 할까요.’ 마세준이 기어코 한마디를 보태서 내 매를 벌었다.
마지막으로는 타이머를 켜 두고 여섯 명이서 사진을 찍었다. 마세준네 아빠 차를 타고 교문을 넘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마세준과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등굣길, 봄에는 벚꽃이 떨어지고 여름에는 매미가 무섭게 울어 대던 푸른 교정, 고래고래 소리치고 울면서 다투던 저녁의 복도, 같이 숱하게 밥을 먹었던 급식소, 마세준이 손을 흔들며 웃던 농구 코트, 하굣길에 함께 마시던 코코아. 그런 게 전부 다 기억 너머로 묻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시큰시큰했다. 옆에 앉은 마세준이 내 얼굴을 제 가슴께에 묻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터졌다.
어른들은 우리 잎새 우느냐고 놀리더니, 얘들이 이제 대학생이라니 이런 날도 다 있느냐고, 하나둘 코를 훌쩍이다 어느샌가 멋쩍다는 듯 웃었다.
* * *
“이잎새, 짐은 다 쌌어?”
이른 저녁을 먹고 어른들이 수다에 빠져 있는 동안, 나와 마세준은 놀이터로 나와 밤바람을 쐤다.
“응, 거의 다 쌌어. 이제 내일 아침에 칫솔이랑 충전기만 챙기면 돼.”
나는 흙바닥에 발을 디뎌 그네를 멈추어 세우고는 마세준을 바라봤다. 마세준은 이제 그네 따위에는 흥미가 일지 않는지, 가만히 앉아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 어른이다 이건가? 나는 샐쭉 마세준을 바라보다가 다시 발을 굴러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몸을 거의 일자로 펴고 고개를 잔뜩 뒤로 꺾은 탓에,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반복된 움직임에 어지러움이 몰려와, 바닥에 발을 디디며 멈추어 섰다. 속이 메슥거렸다. 어젯밤, 수화기 너머로 미호가 그랬다. 요즘 김용호를 볼 때마다 어지러워 죽겠다고. 이제 자기는 정말 김용호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마세준, 있잖아. 미호는 김용호 사랑한대. 되게 멋있지 않아? 어른 같고.”
턱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입안의 온기가 뽀얀 형태를 그리며 번져 나갔다. 그넷줄을 쥐고 있던 손이 시려서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넌 김용호한테 뭐 들은 거 없어? 걘 어떻대? 사귄 지 꽤 오래됐으니까 이제 김용호도 미호 사랑할까? 난 좀 신기…….”
“잎새야.”
“응?”
“나도 너 사랑해.”
내 장황한 말을 가로챈 마세준이 말했다. 불시에 생각이 멎었다.
“……너 나 사랑해?”
“응.”
주저하며 묻자, 마세준은 정답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처럼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따스한 주홍빛 아래 앉아 있는 마세준과 가만히 눈을 맞췄다. 나는 사랑 같은 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마세준은 진작 그 세상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
“…….”
마세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살며시 웃었다. 저렇게 한발 먼저 가 매번 웃으며 기다리면서, 마세준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저 미소를 정말 좋아한다. 마세준과, 마세준이 내게 주는 감정들, 모두 다.
“나는…….”
“…….”
입술이 말을 안 들어서, 잠시 말을 멈췄다. 좋아한다는 말이 잘 안 나왔다. 억울했다. 안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닌데. 심지어 마세준은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턱턱 잘하는데.
“나도 너 엄청나게 좋아해.”
“알아.”
차라리 잽싸게 끝내자는 심산으로 빠르게 말하자, 마세준은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뒤늦게 쑥스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신발 앞코로 죄 없는 흙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간질간질하니 딱 뭐라도 하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최소한 손을 잡는달지, 아니면 뽀뽀를 한달지.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올 게 안 오기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세준, 나 손 시린데. 안 잡아 줄 거야?”
부끄러워도 내 투정을 받아 줄 정신은 남아 있었나 보다. 곧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다가왔다. 힘껏 마주 잡자, 마세준은 기다렸다는 듯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또 아무 짓을 않았다. 나는 마세준을 흘끔 바라봤다. 평소에는 하지 말래도 달려들더니, 이상하게 오늘따라 신호를 줘도 줘도 못 받는다. 뭐, 그럼, 말로 하면 되지.
“마세준, 뽀뽀는 이런 분위기에 하는 거야.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고.”
마세준은 내 말에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평소처럼 날름 입을 맞춰 오지는 않았다.
“오늘은 이잎새가 뽀뽀해 주면 안 되나.”
은근히 물어 오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또 응석을 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 사랑한다는데, 그거 하나를 못 해 줄까 봐서.
“될걸.”
몸을 일으켜 차게 식은 손끝으로 마세준의 두 볼을 감싸듯 쥐었다. 고개를 기울이자 마세준의 따듯한 숨이 내 살갗을 간질였다. 단정한 얼굴이 시야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사랑한다는 말에 좋아한다는 대답을 돌려받아도 어설픈 응석을 잠시간 부릴 뿐, 마세준은 그새 다정하기만 한 눈길로 나를 쓰다듬고 있었다. 예쁜 눈에, 마세준의 진심이 다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뒤엉킨 것처럼 아렸다. 마주한 눈을 살며시 감고 입술을 맞붙였다. 좋아해, 세준아. 그 마음을 고스란히 알아주길 바라며 숨결을 건넸다.
우리는 그렇게 교복을 벗었다.
* * *
“엄마, 산초 사진이랑 동영상 매일 찍어서 보내 줘야 돼. 알겠지? 하루에 30분 이상 꼭 놀아 주고. 아빠, 산초 응가는 하루에 두 번 치우면 좋고, 정말, 정말 못 해도 한 번은 꼭 치워 줘야 돼. 안 그러면 산초 스트레스 받아.”
나는 산초를 품에 안은 채 초조한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엄마 아빠는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 이민 가? 겨우 일주일 가면서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 안 그래도 다 외워 뒀으니까, 산초는 걱정하지 말고, 가 재밌게 잘 지내다 와.”
“알겠어. 엄마, 아빠. 나 잘 갔다 올게요. 여행 보내 줘서 고마워요.”
나는 산초를 바닥에 내려 준 뒤, 엄마 아빠를 번갈아 껴안았다.
“그래. 공항 도착해서 연락 한번 하고, 응? 세준이 할아버지 댁 도착해서 또 전화해.”
“응, 자주 연락할게.”
“여권, 챙겼지?”
“응. 여기 따로 빼 놨어.”
나는 어깨에 걸친 크로스백을 한번 들어 보이며 말했다. 캐리어 손잡이를 손에 쥐자, 그제야 모든 게 실감이 났다. 산초는 커다란 캐리어를 한 번 바라보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얼굴에 대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과감하게 뒤를 돌아 문을 열었다.
아빠가 공항까지 바래다준다는 거, 우리 힘으로 해 보겠다며 극구 사양한 참이었다. 마세준한테도 괜히 올라올 것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세준이 보였다.
“마세준, 1층에서 기다리라니까.”
“산초 보고 싶어서.”
결국, 그길로 다시 집으로 들어섰다. 산초를 끌어안고 뽀뽀를 한참 퍼부은 뒤에야 뒤를 돌았다. 산초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냐- 울었고, 나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간신히 현관문을 나섰다.
집 근처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에 들어서자,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세준은 그런 나를 보더니 머리칼에 대뜸 입을 맞췄다.
“야, 사람들 있는데 왜 그래.”
“알았어. 안 할게.”
혹여나 삐칠까 봐서 팔짱을 끼자, 마세준은 내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가며 기분 좋은 표정을 해 보였다.
수속을 마치고 들어서자 면세점이 보였다. 마세준은 뭐 갖고 싶은 것 없느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막상 마세준 손에 이끌려 들어가 화장품을 보자 눈이 돌아갔다. 마세준은 졸업 선물이라며 립스틱을 두 개나 사 주었다. 더 하라는 걸 됐다고 말렸다. 나중에 이거 바르고 뽀뽀하자고 귓속말을 하기에, 팔꿈치로 허리춤을 퍽 쳤다.
게이트로 가 자리를 잡자, 곧 탑승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장내 방송이 울렸다. 나는 마세준의 손을 잡고 생애 첫 비행기에 올랐고, 얼마 안 가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했다. 생경한 느낌에 놀라 마세준을 돌아보자, 마세준이 내 손을 더 세게 잡아 주었다.
* * *
우리는 각자의 좌석에서 동시에 영화를 재생시켰다. 탄산음료를 하나씩 쥐고 홀짝이다가 곧 영화에 빠져들었다. 고맙게도 영화는 꽤 재미있었고, 우리의 120분을 순식간에 앗아 가 줬다. 까무룩 잠들었다 깼을 때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어두운 객실에는 끈질긴 기체 소음, 이따금 들려오는 사람들의 속삭임, 별 의미 없는 기내 방송이 오갔다. 나는 멍한 몸을 반쯤 돌려 앉아 마세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잠든 얼굴은 따뜻하고 예뻤다. 천천히 뜨이는 눈가에 짧게 입을 맞춰 주자, 마세준이 웃으며 내 몸을 끌어당겼다. 팔걸이를 치워 내고 담요 하나를 함께 둘렀다.
“왜 깼어. 많이 불편해?”
“아니, 그냥 갑자기 떨려서.”
마세준은 내 대답에 푸스스 웃었다. 그러자 머리를 기댄 가슴팍이 기분 좋게 진동했다.
“마세준.”
“응.”
“옷 사 입고 그러지, 왜 그 돈 다 모아 놨어?”
나는 고개를 들어 마세준과 눈을 맞추며, 내내 궁금했던 걸 넌지시 물었다. 마세준은 다정한 눈길로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뭔가 맡겨 놓은 사람처럼 그 마음을 받아 왔는데, 새삼스레 떨렸다. 이렇게 예쁜 눈에 나만 담아 준다는 게,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벅찼다.
“내 성격 참아 주면서 힘들게 가르쳐서 번 거잖아. 네 용돈도 엄청나게 들어 있었다며.”
“뭐가 힘들어. 이잎새 꼬시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마세준은 달게 웃으면서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우리 엄마 아빠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통장은 다시 마세준 손에 들렸지만,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였다. 그렇게까지 날 생각해 줬다는 게.
“너랑 있으니까 좋아, 고마워.”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마세준이 내 손등에 꾹 입을 맞췄다. 장시간 굳은 듯 앉아 있던 탓에 무릎뼈가 아프기 시작했고, 기내식은 형편없었지만, 괜찮은 여행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 * *
우리는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두 번이나 갈아탄 끝에 마세준네 고향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 앞에서 할아버지를 만나 포옹을 하고는 차에 올랐다.
나는 마세준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서,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바라봤다. 낮은 복층 건물들이 그림처럼 줄지어 서 있었고, 키가 작은 돌담 틈으로 정성스레 손질된 정원들이 보였다. 차창을 내리자, 낯선 바람에 마음이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하늘색도, 나무색도, 한국의 그것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채도를 잃은 것 같기도 하고, 빛에 바랜 것 같기도 했다. 이국적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우리를 태운 차는 아담한 시내를 지나더니, 진회색의 석조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토요일마다 같이 식사하러 오던 곳이야.”
차에서 내려선 내가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자, 마세준이 내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오간 흔적이 느껴지는, 포근하게 나이가 든 식당이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미트 파이와 커피를 택했고, 마세준은 팬케이크에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미트 파이의 풍미도 환상적이었지만, 아무 계획도 없이 여유롭게 앉아 즐기는 이른 저녁은 정말 맛있었다.
시내 모퉁이의 엽서 가게 길 건너, 할아버지네 집이 자리해 있었다. 높은 천장과 작은 벽난로,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따뜻한 거실, 구석구석 모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은, 마세준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액자가 빼곡하게 걸려 있는 현관 초입의 복도였다.
“짐 올려놨어. 올라가서 쉬자.”
“응, 잠깐만.”
나는 한 사진 앞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마세준이 비눗방울을 보며 말갛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 속 마세준과, 곁에 선 마세준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세준.”
“응.”
“나중에 나 이 사진 복사해 주면 안 돼?”
그러다 넌지시 물었다. 마세준은 입을 길게 늘이며 웃더니,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되지. 이런 아들도 낳아 줄 수 있어.”
“야!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진짜!”
아무래도 마세준은 시차 때문에 돌아 버린 게 분명했다. 낯 뜨겁게. 나는 마세준을 퍽 밀치고는 계단을 올랐다. 캐리어에서 잠옷을 집어 드는데, 마세준이 쫓아와서는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
“알았어. 이제 그런 말 안 할게.”
“웃기시네. 한 며칠 안 하다 또 할 거잖아.”
나는 마세준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벅벅 닦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크으- 하고, 아저씨 같은 소리가 절로 났다. 머리칼을 대충 수건으로 싸매고 문을 열자, 젖은 머리를 하고 창가에 기대어 앉은 마세준이 보였다.
“깜짝아, 뭐야. 왜 그러고 있어?”
내가 화들짝 놀라며 묻자, 마세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또 저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하나 본데…….
어림 있다. 잘생겼다는 건 그런 거다. 미소 한 방에 천 냥 빚을 갚는 거.
“왜 웃어.”
“그 잠옷 아직도 입네.”
“아, 맞다. 나 이거 또 사야 돼. 아예 세 벌 정도 사 가려고. 어디서 샀는지 기억나? 내일 사…….”
잠옷 상의를 펄럭이며 신중하게 말하고 있는데, 결국 말을 끝까지 뱉지도 못했다. 마세준이 내 등 뒤로 방문을 열더니, 나를 쑥 밀고 들어간 탓이었다.
“이잎새, 나 1층 가서 씻고 왔어. 양치도 했는데.”
그러고는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마세준의 시선을 피하고는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마세준이 얼른 내 뒤를 따라붙는가 싶더니, 곧 등 뒤로 너른 품이 닿았다.
“뜨거운 물로 씻었어? 너 따뜻해.”
마세준은 급기야 내 어깨에 살포시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간지러운 숨이 살갗 위로 훅 끼쳐 온 탓에, 몸이 대번에 굳는 게 느껴졌다.
“변태.”
나는 팔꿈치로 마세준 허리춤을 가격하고는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마세준이 드라이기를 들고 다가와 내 뒤로 앉았다.
“머리 말려 줄게. 이대로 자면 감기 들어.”
“……그럼 한번 말려 보든지.”
마세준은 피식 웃으며 드라이기를 작동시켰다. 젖은 머리칼 틈을 부드럽게 헤집는 손길에 따뜻한 바람까지 가세하자, 노곤하니 몸이 늘어지려 했다.
그러다 아차 싶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엄마 아빠한테 장황하게 답장을 보내면서 내일 때 맞춰서 산초 얼굴 좀 보여 달라고 졸랐다. 오랜만에 임자 사진도 조금 와 있었다. 워낙 간만이라 엄청나게 반가웠다. 웃으며 동그란 얼굴을 확대하는데,
“장가오라고 해 놓고.”
드라이기를 끈 마세준이 대뜸 그렇게 말하며 내 곁으로 와 앉았다.
“응?”
“나랑 같이 있는데 다른 남자랑 문자하고.”
“쟤가 무슨 남자야. 그냥 임자 보호자지. 봐, 대화도 거의 안 해. 그냥 고양이 사진만 한 바가지야.”
나는 친히 휴대폰을 마세준 눈앞에 대령해서는 대화창을 휙휙 올려 주었다.
“이잎새.”
“응.”
“나만 좋아해 줄 거지.”
정말 섭섭한 질문이었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자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마세준이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탓에.
“무인도에 딱 한 사람만 데려가라고 하면, 난 마세준 데려갈 거야.”
“…….”
침울한 얼굴이 꼭 억울한 강아지 같았다. 그 와중에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입꼬리가 스멀스멀 풀리려 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다른 애들은 열 트럭을 갖다 줘도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고는 볼에 입을 맞춰 줬다. 마세준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내 손을 겹쳐 쥐었다.
느닷없이 잡아당기는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아 주자, 열 오른 입술이 다가와 숨을 앗았다. 매끈한 점막이 쓸릴 때면 발끝이 저릿했고, 마세준에게서 나와 같은 향이 끼쳐 올 때면 마음이 물결처럼 도근거렸다.
마세준은 속 좁게 굴어 미안하다며, 머리를 마저 말려 주고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게 벌써 한참 전이였다.
나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어둑어둑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보송한 침구 위에서 괜히 몸을 굴려 봤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결국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까 겁도 없이 마신 커피가 화근이었다.
마세준 방문을 작게 두드리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방문이 벌컥 열렸다. 마세준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일렁이는 게 보였다. 꿈 깨라고 하려다, 그냥 말없이 방 안에 발을 들였다. 그러고는 등 뒤로 방문을 걸어 잠갔다.
“나, 잠이 안 와. 아까 커피 마셔서 그런가 봐.”
그러고는 마세준 손목을 쥐고 침대를 향해 걸었다. 안쪽에 자리를 잡고는,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얼른 와, 너 껴안고 잘래.”
“이잎새, 아까 일 때문에 이러…….”
“아닌데.”
나는 머뭇거리고 있는 마세준의 팔을 힘껏 당겨 곁에 눕혔다. 꿈쩍도 안 할 수 있으면서 순순히 딸려 오는 몸이 웃겼다.
“얼른 자자.”
마세준의 턱 아래까지 도톰한 이불을 덮어 주자, 마세준이 손목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잎새.”
“왜.”
“너 그 말 어떻게 들리는지는 알고 하는 거야?”
“알아, 너 변태잖아. 보나 마나 이상하게 들었겠지.”
나는 뜨겁고 탄탄한 팔 한 짝을 꼭 껴안으며 볼을 비볐다.
“나 졸려. 그만 떠들고 얼른 자.”
졸린다는 말에, 마세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따끈한 몸에 기대어 있자니 눈이 스르륵 감겼다.
“잘 자.”
잠에 빠져들 때쯤,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답을 한답시고 꽤 괴상한 소리를 냈던 것 같다. 웃으며 부지런히 머리칼을 넘겨 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눈을 뜨자, 마세준이 모로 누워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 멍했다. 대체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이며 여기가 어딘지 깨닫기까지는, 못 해도 5초 이상 걸렸던 것 같다. 그러다 별안간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한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도 사실이었지만, 잔뜩 풀어진 모습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머리는 까치집을 해 가지고, 저렇게 청순할 건 뭐야.
“잘 잤어?”
내가 퀴퀴하게 막힌 목소리로 묻자, 마세준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뜨끔한 구석이 있어서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 매일매일 코 고는 건 아니야. 가끔 피곤한 날만 그래. 어제는 내가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도 탔고, 여러모로 피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떨려서 잘 수가 있어야지.”
“…….”
짜식이……. 아침부터 귀엽게 군다. 새삼스레 내 볼까지 붉어지는 게 느껴져서,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눈만 어설프게 굴리며 시선을 맞추자, 마세준이 웃으며 다가와 이불을 내리더니 볼이며 이마며 뽀뽀를 퍼부었다.
“아침 인사.”
“무슨 아침 인사가 그렇게 요란해?”
“이건 얌전하게 한 건데.”
샐쭉 노려보자, 마세준이 창밖의 햇살보다 더 밝게 웃었다.
“잠 못 자도 좋으니까, 얼른 너랑 살고 싶다.”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나는 마른침이나 삼켰다. 영국에서 맞는, 아니 마세준과 함께 맞는 첫 번째 아침은, 완벽에 가까웠다.
* * *
여행을 떠나기 전, 마세준은 다른 도시에 가 보지 않아도 정말 괜찮겠냐고 여러 번이고 물었었다. 나는 그때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하지만 마세준의 말뜻을 온몸으로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마을에는 그다지 할 게 없었다. 마을 곳곳을 산책하거나, 몇 안 되는 맛집에서 식사를 하거나, 작은 기념품점과 쇼핑몰에 들르는 것이 사실상 관광의 전부였다.
물론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는 마세준이 다니던 학교 운동장에 가서 그네를 탔고, 오래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비가 내리는 오후에는 창가에 앉아서 마시멜로를 올린 코코아를 마셨고, 미호와 엄마 아빠에게 줄 선물도 양손 가득 샀다.
문제는, 이틀을 그러고 나니 더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당일치기로 다른 도시에 다녀오기로 합의를 봤다.
“일단 박물관 갔다가 점심 먹고, 뮤지컬 본 다음에 바로 기차 타러 가면 시간이 얼추 맞아. 새벽부터 일어나야 해서 좀 피곤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둘 중 하나를 포기하기는 아쉬워서. 어때? 괜찮아?”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급조된 여행 일정을 늘어놓았고, 곁에 서 있던 마세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뭐 할까? 넌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음…….”
마세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생각났다는 듯 상체를 숙여 내 입술을 가로막았다. 기가 차서 작게 웃는데, 마세준이 날 따라 웃는 게 느껴졌다. 주먹을 쥐고 가슴을 살짝 두드리자, 커다란 손이 다가와 주먹을 풀고는 깍지를 꼈다.
그날 밤, 마세준은 아침상을 미리 준비해 두겠다며 내려가서는 한참이 지난 뒤에 방문을 두드렸다.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자, 웃고 있는 마세준이 보였다. 마세준의 연회색 면 티 앞섶은 물에 젖어 먹색이 되어 있었다. 무슨 요리를 또 저렇게 요란하게 했대.
“아직 안 잤어?”
“응.”
나는 마세준의 허리춤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볼에 닿는 옷감이 조금은 차가웠다.
“오늘은 여기서 잘래.”
“그래, 내일 아침에 깨우러 올게. 잘 자.”
마세준은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 자라고 밤 인사까지 해 놓고, 안은 품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속으로 비죽 웃었다.
“가게? 너도 여기서 자.”
“…….”
“응?”
나는 대답이 없는 마세준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입꼬리가 헤실헤실 올라가는 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혼자 자기는 또 서운했던 모양이다.
“씻고 올게.”
나는 먼저 침대에 누워 마세준을 기다리다가 얼마 안 가 잠이 들었다. 마세준이 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눈을 뜨고 볼 만큼의 정신은 없었다. 곧 침대가 기우는가 싶더니 마세준이 멀찍이 누웠다. 몸을 반쯤 굴려 품으로 파고들자,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닿은 몸이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며 잠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새벽같이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곁은 텅 비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실리기도 전에 비틀비틀 부엌으로 내려가자, 마세준이 준비해 둔 샐러드와 샌드위치가 식탁 위에 올라 있었다.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던 마세준은 웃으며 뒤를 돌더니, 잘 잤느냐고 뽀뽀를 퍼부었다. 게 눈 감추듯 접시를 비우고는 번갈아 씻었다.
[할아버지, 밤늦게나 돌아올 것 같아요. 냉장고에서 아침 꺼내 드세요. 내일 저녁에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다녀올게요. -세준]
마세준이 씻는 동안 먼저 1층으로 내려와 물을 따르다가, 식탁 위에 놓인 노트를 발견했다. 다정한 글씨체를 오른손 검지로 살살 쓰다듬다가 나도 모르게 웃었다. 마세준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잽싸게 뒤를 돌아서 물을 마셨다.
끼익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밤사이 비가 조금 내렸던 모양인지 도로와 나뭇잎이 살짝 젖어 있었다. 은은한 가로등이 맥을 추리지 못하고 있는 어두운 아침, 우리는 손을 잡고 부지런히 걸었다.
역에 도착하자 마세준은 내가 주문한 대로 기차표를 끊어 왔고, 우리는 장장 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박물관 인근 역에 당도할 수 있었다.
“컨디션 괜찮아?”
마세준이 내 머리칼을 넘겨 주며 물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근데 나 배고파.”
마세준이 아침부터 밥 차려 먹인 보람도 없이 벌써 배가 고팠다. 가만 앉아만 있었는데 왜 벌써 배가 꺼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럼 밥부터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는 미리 찾아 두었던 식당 주소를 띄워 휴대폰을 건넸고, 마세준은 내 손을 잡은 채 길을 나섰다. 머지않아, 커다란 건물 1층에 자리한 식당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 외벽을 타고 늘어져 있는 노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마세준이 테이블 위로 손을 잡아 왔다.
“왜?”
“……예뻐서.”
아니, 왜 얌전히 밥 기다리는 사람 속을 별안간 뒤집어 놓냐.
“이잎새, 저 사람들 말고 나 보면 안 돼?”
여기 우리 말 알아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괜히 얼굴이 벌게지려 했다. 민망해 손을 잡아 빼려 하자 마세준이 집요한 표정으로 기어코 깍지를 꼈다.
“너 가끔 엄청 느끼한 거 알지.”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고, 마세준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마세준은 곧 턱을 괴고는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구태여 답을 들을 필요는 없는 물음이었다. 가끔 이렇게 느닷없이 설렐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저 얼굴 마주 보고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새삼스럽게.
반갑게도,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와 주었다. 나는 잽싸게 손을 잡아 빼며 포크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