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법과 사회 교과서를 뒤적이면서는 자꾸 한숨이 나왔다. 지문을 읽고 있노라면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이게 무슨 갑을병정들이야. 갑이 어쨌고 을이 어쨌는데 체포가 되네 마네. 내가 내 손으로 이 과목을 택했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아빠가 부엌에서 수박 써는 소리, 에어컨이 바람을 뿜는 소리, 내가 통통통 필기하는 소리가 거실을 메우고 있었다. 엄마는 공부에 방해된다며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마세준은 산초를 무릎에 앉혀 놓고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무슨 공부를 저렇게 담백하게 하냐. 그냥 펴 놓고 눈으로 대충 읽는 게 다였다. 저래 놓고 반에서 일등을 턱턱 한다.
한숨을 쉬며 잠시 딴청을 피우는데, 접시를 들고 일어서던 아빠랑 눈이 마주쳤다. 아빠는 장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수박을 거실로 가져다주었다.
“먹고들 해라.”
“감사합니다.”
“아빠 땡큐.”
나는 날름 수박을 하나 손에 쥐었다.
“그래,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지 말고 적당히들 하고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는 마세준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수박은 이가 시릴 만큼 차가웠다. 포슬포슬한 게 맛도 좋았고.
“잘돼 가?”
나는 마세준 손에 수박을 쥐여 주고는 티슈도 한 장 뽑아서 건네며 물었다.
“내일 볼 과목 한 번씩만 더 훑으려고. 안 졸려?”
“어, 괜찮아.”
나는 수박을 베어 무는 마세준을 잠시간 쳐다보다가, 수박을 한 조각 더 집어 들어서 먹어 치웠다. 속이 추워서 더 들어가질 않았다. 화장실로 가 손을 씻고는, 얇은 카디건을 어깨에 걸치고 거실로 갔다. 마세준은 그런 나를 보더니 얼른 일어나 에어컨을 껐다.
“놔둬도 되는데.”
“나도 안 더워.”
마세준은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씻고 왔다. 그러고는 흐트러짐 없이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간을 흘끔 확인하자 12시를 5분 남겨 둔 시간이었다. 나도 다급히 책에 코를 박았다.
우리는 등교 시간을 세 시간 남겨 두고서야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마세준은 우리 집 거실 소파에 몸을 누였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산초가 마세준을 택한 것에 서운함을 느낄 틈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맞춰 놓은 알람이 울렸다. 나는 미친 듯이 하품을 하면서 그걸 껐다. 2분 후에 또 다른 알람이 울렸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겪어 본 적도 없는 숙취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온몸의 피가 발바닥으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좀비 같은 얼굴로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누워 있는 마세준이 보였다. 마세준 얼굴 옆에서 자던 이산초가 느릿느릿 고개를 들더니, 타닥 소리를 내며 다가와 내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나는 이산초 이마를 몇 번 긁어 주고는 소파로 갔다.
“마세준, 일어나.”
이 세상 목소리가 아니었다. 쩍 갈라진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골이 울렸다. 손바닥으로 눈을 비비다 하품을 했다. 아, 졸려서 미칠 것 같다.
“마세준, 일어나라니까.”
곱게 잠을 자던 마세준은 그제야 눈을 떴다. 그러고는 다 뜨지도 못한 눈을 접으며 밸도 없이 웃었다. 아침부터 사람 속을 뒤집고 있다. 안 그래도 잠 못 자서 어지러운데.
“이잎새, 잘 잤어?”
피곤한 모양인지, 마세준 목소리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잘 자, 세 시간도 못 잤는데.”
내가 툴툴거리는 동안, 마세준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 봤다.
“이잎새.”
“왜.”
“나 일으켜 줘.”
“뭐?”
내가 황당하다는 듯 마세준을 내려다보자, 마세준은 뻔뻔하게도 손을 내밀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기껏 깨워 줬더니.
“혼자 일어날 수 있잖아.”
“있지.”
덩치는 산만 해서 투정은…….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마세준은 이렇게 늦게까지 공부하는 애가 아니라는 걸. 내가 밤새운다고 하니까 꾸역꾸역 밤잠 아껴 가며 옆에 있어 줬다는 걸. 잠시 머뭇거리다 안방 문을 한 번 흘끔 돌아봤다.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커다란 마세준 손을 뚱하니 보다가, 양손으로 쥐고는 잡아당겼다. 마세준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상체를 일으켜 앉더니, 내 손을 꽉 쥐고는 놔주지를 않았다. 외려 제 쪽으로 당기려 들었다.
“미쳤어? 얼른 놔.”
소리를 완전히 죽인 채 속삭였지만, 마세준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 대신 내 눈을 바라보며 제 엄지로 내 손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일찍 가서 공부해야 한단 말이야.”
당황한 나는 마세준 눈언저리를 보면서 말했다. 눈동자를 들여다봤다가는 말이라도 더듬을 것 같았다.
“이잎새.”
“왜!”
나는 소리 없이 소리 지르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마세준은 뭐가 웃긴지 기분 좋게 웃었고, 그 내내 내 손을 매만졌다.
“뽀뽀해도 돼? 볼에다 할게.”
“…….”
나는 아무렇게나 머리가 뻗친 마세준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렇게 진지하게…….
“안 돼?”
마세준은 재촉하듯 재차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마세준에게 잡혀 있던 손을 얼른 잡아 뺐다. 마세준도 이번에는 순순히 내 손을 놓아주었고, 나는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새빨간 얼굴 위로 찬물을 연거푸 끼얹었다. 양치를 하는 동안 조용히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세준이 교복 갈아입으러 가는 소리였다.
나는 등교하는 동안 마세준이 준 노트를 훑으며 복습했다. 마세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마세준도 별 불만은 없어 보였다. 지가 한 짓이 있는데. 아무렴.
“야, 마세준.”
나는 교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뒤를 돌았다.
“시험 잘 보면 내가 소원 들어줄게. 그러니까 잘 봐.”
선심 쓰듯 말하고는 얼른 뒤를 돌았다.
마세준이 무조건 시험을 잘 보리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뭐, 볼에 뽀뽀 정도야 해도 되겠지. 프랑스 사람들은 초면에도 볼에 뽀뽀하는데.
* * *
짧은 종례가 끝나고, 나는 마세준네 교실로 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을 나서던 마세준은 나를 보자마자 씩 웃었다. 나도 모르게 마세준을 따라 입술 끝이 자꾸 올라가려고 하기에, 얼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지만 둘 다 비몽사몽간이라, 오늘은 영화를 건너뛰기로 했다. 보나 마나 상영 내내 잘 게 뻔했다.
그 대신 우리는 초밥을 먹으러 갔다. 나는 고추냉이 때문에 코를 찡그리는 마세준한테 얼른 물 잔을 내밀었다. 안 웃으려고 해도 웃음이 나왔다. 마세준은 뾰로통한 얼굴로 물 잔을 내려놨다. 그 눈가가 붉었다. 아무래도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 놀려 주려고 그랬는데 저 얼굴을 보자니 차마 못 그러겠다.
“이거 먹고 뭐 할까? 영화 안 보니까 시간이 엄청 남네.”
나는 연어 초밥을 집으며 물었다. 영화를 보기엔 너무 졸렸고, 날도 푹푹 찌고,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 가서 널브러지기엔 아깝고.
“수영 갈까.”
“수영?”
나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되물었고,
“사람 많지 않을 시간이거든.”
시간을 확인한 마세준은 고추냉이를 걷어 내며 말했다.
“근데 수영복 입어야 하잖아.”
나는 말끔하게 초밥을 먹는 마세준을 보다가, 내 배를 한 번 내려다봤다. 초밥 조금만 먹을걸. 두드리면 통통 소리가 날 것 같다. 수영이야 정말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좀 그래…….”
“그래.”
마세준은 더 조르지 않았다. 대신 싱긋 웃었다.
전 재산 900원인 나 대신 마세준이 계산을 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찢어질 듯한 매미 울음과 함께 한낮의 폭염이 덮쳐들었다. 숨이 다 뜨거웠다. 굴복할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마세준, 가자. 수영장.”
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려웠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행히 어릴 때 입던 수영복이 아직 잘 맞았다. 어쩐지 서글펐다. 초딩 고학년 때 입던 건데 별 힘도 안 들이고 쑥 들어가다니. 어깨라도 좀 쫄리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쫀쫀한 흰색 모자에 시커먼 물안경까지 쓰고 나니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물에 들어가자 그런 생각은 싹 가셨다. 살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수영장 락스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했다. 올 방학에는 나도 수영장에 다녀 볼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시간이 애매한 덕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는 풀 초입에서 마세준을 기다렸다. 내가 이쪽에서 나왔으니까, 마세준은 저쪽에서 나오지 않을까.
혼자 물속에 머리를 담갔다가 나왔다가, 담갔다가 나왔다가. 그것만 반복해도 재미있었다.
이번에는 커다란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3시 2분 땡, 하자마자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속으로 30초도 못 세고 밖으로 나왔다. 분명 27초까지 셌는데 실제로는 20초도 안 지나 있었다. 손을 타일 위에 얹어 거친 숨을 들이마시는데, 저 멀리 마세준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헐.
나는 숨이 찬 것도 잊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미친, 마세준은 상의를 탈의하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곧 수면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중에서 길쭉한 마세준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다급히 수면 위로 고개를 뺐다. 아직 물안경을 쓰지 않은 마세준이 물에 젖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이잎새, 체조했어?”
수면 위로 대문짝만 한 어깨가 보였다. 불거져 나온 쇄골이랑 곧게 뻗은 목선에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마세준을 쳐다봤다. 물안경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필시 빨개졌을 얼굴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해롱거리는 눈을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대답도 않고 서 있자, 마세준은 이상하다는 듯 내 얼굴을 뚫어져라 살폈다.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왜 그래,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다.
별 소음도 없는 수영장이 어느 때보다도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귀에서 쿵쾅대는 소리가 났다. 옆 레일에서 수영하던 사람들이 간간이 턴을 하고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푸른 수면이 정신없이 일렁였다. 속이 어지러운 건 그 때문일까, 아니면…….
“추워서 그래? 나갈까?”
마세준 때문일까.
나는 바보였다. 마세준은 남자였고, 그것도, 어깨가 진짜 넓은 남자였다. 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마틴 하워드 때문에 앓을 게 아니라, 눈앞에 있는 마세준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봤어야 했다.
“안 추워, 좋아.”
내가 작게 말하자, 마세준은 웃으며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내 머리칼을 모자 안으로 쏙 넣어 주었다. 마세준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상체 근육이 곳곳에서 꿈틀거렸다. 아, 너무 가까웠다. 가슴 뛰는 소리가 왕왕 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어린이 풀장에서는 튜브 쓸 수 있는데, 그리로 갈까?”
마세준 눈짓을 따라가 보니, 커다란 오리 튜브가 몇 개 둥둥 떠다니는 낮은 풀장이 보였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놀 거야.”
마세준은 괜찮겠냐고 묻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나는 부디 손이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마세준의 손을 잡았다.
마세준은 거꾸로 걸었고, 나는 마세준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단단한 마세준 가슴팍이 코앞에 있어서 정신이 다 혼미해졌지만, 시원한 물결이 살갗을 스치는 건 너무 좋았다.
“마세준, 또.”
나는 타일에 상체를 얹으며 숨을 쉬다가, 마세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마세준은 기꺼이 다시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놀았다. 덕분에 나는 힘 하나 안 들이고 신나게 놀았는데, 아무래도 마세준이 맘껏 수영을 하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마세준, 나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까, 너도 수영하고 와.”
“안 심심하겠어?”
“어, 나 좀 쉬고 싶어.”
마세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맨날 자기 혼자 방학마다 수영 다니더니, 완전 날아다닌다. 누구시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코라도 꿰인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마세준을 바라봤다. 미쳤다. 어쩌지. 처음으로 마세준이 섹시해 보였다. 물살을 가르는 팔의 근육은 고딩 근육이 아니었다.
수영장을 몇 바퀴나 돌고 온 마세준은 거칠게 숨을 쉬었다. 세상에. 그걸 보느니, 나는 차라리 잠수하는 것을 택했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마세준한테 1분 동안 물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다. 내가 샤워실로 뛰어가는 동안 절대로 눈 뜨지 말라고. 마세준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잽싸게 물 밖으로 나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샤워실을 향해 달려갔다. 차박차박 물 튀는 소리가 났다. 샤워실 입구에서 뒤를 슬쩍 돌아보자, 마세준은 진짜로 수영을 하느라 바빴다.
미지근한 물에 몸을 씻고는 냉풍으로 머리를 말렸다. 900원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드라이어를 두 번이나 돌렸다. 허공에 마세준 어깨가 둥둥 떠다녀서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옷을 입고 나오자, 마세준이 데스크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티 아래로 어깨가 자꾸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마세준 눈도 못 쳐다봤다.
그 와중에 배가 고팠다. 수영하면 살이 쫙쫙 빠지는데 정작 체중 감량을 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라더니,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당장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마세준, 나 배고파.”
나는 땅을 보며 말했고, 마세준은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우리는 컵라면을 하나씩 쥐고 집으로 갔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켜 놓고 먹기로 했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3분도 안 돼서 컵라면 하나를 뚝딱 끝냈다. 마세준 쪽 상황도 다를 건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라면을 꼴랑 하나씩 샀을까.
그러고도 허기가 져서 냉장고를 탈탈 털자, 요거트랑 냉동 망고가 보였다. 냉동 망고……. 저게 언제 적 거더라. 나는 손가락으로 햇수를 셈하다 포기했다. 아마 먹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있는 거라곤 산초 간식뿐이었다. 너라도 배불리 먹으라는 심정으로 간식을 손에 쥐자, 저 멀리서 산초가 토각토각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나는 얼른 간식을 뜯어서 산초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애절한 산초의 눈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집을 나섰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고 인공 폭포 주변을 걷기로 했다. 저녁 일곱 시가 지났지만 해는 아직 완전히 지지 않았다. 그래도 내내 찬물에 몸을 식힌 덕분인지, 그렇게 무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디 숨어 있는지 개구리 우는 소리가 났다. 꾸우 꾸우 새도 울었다. 나는 간혹 모기가 달라붙는 팔뚝을 찰싹 때려 가며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어 치웠다.
조금 더 걷자 시원한 물줄기 소리와 함께 폭포가 보였다. 나는 철 기둥에 손을 얹고 마세준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인공 폭포 조명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어서, 마세준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가 레몬색으로 물들었다가 그랬다.
“마세준.”
마세준은 대답 대신 나를 내려다봤다. 그 눈이 다정해서 새삼 가슴이 뛰었다.
“시험 잘 봤어?”
“응. 잘 봤어.”
마세준은 세상 당당하게 말했다. 얼마나 잘 봤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지.
“그럼 소원 들어줘야겠네.”
나는 물이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아주 작게 말했다. 마세준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뭔데? 소원.”
참다못한 내가 눈을 도로록 굴리며 마세준을 바라보았을 때, 때마침 조명은 새빨갛게 바뀌어 있었다. 마세준은 그대로 내 볼에 입술을 꾹 찍고는 천천히 몸을 뗐다. 마세준의 숨과 입술이 닿았던 볼이 간질간질했고, 뭐 닿은 것도 없는 가슴도 따끔거릴 만큼 간지러웠다. 사람 입술이 뭐 저렇게 부드러워? 나는 철 기둥을 꾹 쥐었다.
바보, 모르는 척 입술에 해도 아무 말 안 했을 텐데. 그래도 나는 답답할 만큼 정직한 마세준이 좋았다.
바짝 붙어 서 있는 마세준에게서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잎새.”
“…….”
“한 번만 더 해도 돼?”
고개를 틀자, 이번에는 마세준이 허락도 없이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붙여 왔다. 어느덧 조명은 분홍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잘게 떨리는 마세준 속눈썹을 멍하니 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기둥 대신 마세준 옷깃을 조심스레 쥐자, 마세준이 내 볼을 만지며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마음이 저릿했다. 따스한 혀가 점막을 쓸었고, 둘의 숨이 엉켰다.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미호가 그랬는데, 키스라는 거 사실 별거 아니더라고.
그거 다 거짓말이었다.
마세준이랑 15년 만에 하는 뽀뽀였다.
마세준은 입술을 떼어 내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기 무섭게, 코앞에 서 있던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한 눈빛이었다. 왠지 오늘 엄마 얼굴을 마주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묻었다.”
마세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입술을 쓱 닦아 냈다. 입술이 밀려, 그 안쪽으로 마세준 손가락이 닿았다. 뭘 닦아 낸 건지는 나도 알았다. 민망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굴려서 옆을 봤다. 그러자 마세준이 내 턱을 살짝 돌렸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나는 볼에 뽀뽀할 줄 알…….”
당황한 나머지 여과되지 않은 말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왔고, 마세준은 영양가 없는 내 말을 그대로 삼켰다. 딱 마세준 같은 키스였다. 단정하고 깨끗한데 근성 있고 집요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숨이 모자랄 즈음, 나는 가까스로 마세준을 작게 밀쳤다. 마세준은 순순히 물러났다.
“한 번만 더 한다고 했으면서, 왜 두 번 해?”
나는 창피함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마세준이 지금껏 이걸 가지고 뭘 했는지를 떠올리고는 화들짝 놀라 그만두었다.
“이제 집에 갈래.”
내가 모기 다리만 한 목소리로 말하자, 마세준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마세준 손을 잡는 대신, 양손을 얼른 허리 뒤로 숨겼다. 마세준은 나를 내려다보다가 곧 볼멘 표정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치면 딴청을 피웠다. 내가 마세준을 한 번 훔쳐보면 마세준은 나를 두 번 훔쳐봤다.
집까지 걷는 데 길이 끝이 없었다. 행여나 손이라도 스칠까 봐서 멀찍이 걸었다. 마세준은 내가 꽃게처럼 걸을 때마다 뚱한 얼굴을 했다.
“벌써 다 왔네.”
우리 집 1층 현관에서, 마세준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왜 이렇게 멀었나 그랬는데. 마세준은 벌써 다 왔다고 아쉬워했다. 좌우지간 자꾸 아까 그 장면이 떠올라서, 더 마주 보고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나 간다, 잘 자.”
나는 땅을 보며 멋없게 속삭이고는 얼른 뒤를 돌아 뛰었다. 집 현관문을 쥐는데 가슴이 다 콩닥콩닥거렸다. 엄마랑 눈 마주치면 안 된다. 엄마는 귀신이니까 뭐라도 알아챌 거야. 너무 대놓고 피하면 더 티 나니까, 휴대폰 하는 척하면서 1초만 고개 들고 인사하는 거야. 평소처럼. 완벽한 플랜이었다.
문을 열자 천만다행으로 엄마 아빠는 거실에서 TV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녀왔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변태가 된 것 같았다. 머릿속에 마세준 입술만 둥둥 떠다녔다. 마세준은 농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키스도 잘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막…….
어우! 미쳤어. 나는 죄 없는 하마 인형을 숨 막히게 끌어안고 발을 굴렀다. 따라 들어왔던 산초가 놀라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살짝 부은 입술을 조심스레 만져 봤다.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발가락으로 떠듬떠듬 선풍기를 켰다. 별 소용도 없기에 바람을 강풍까지 올려 버렸다. 어제도 조금밖에 못 잤는데, 오늘도 잘 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 * *
씻고 거실로 나오자, 마세준이 식탁에 앉아 빵을 먹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시선을 거뒀다. 도저히 마세준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봐, 어제 내가 쟤랑 뭔 짓을 했는데.
차라리 그냥 밥을 굶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빠 성화에 결국 마세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세준은 빵을 다 먹고도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빠는 싱크대에 접시를 내려 두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고, 엄마는 드라이 좀 해야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오늘따라 왜 저렇게 일찍 일어서지. 결국, 거실에는 나와 마세준, 이산초만이 남아 있었다.
“마세준, 어제는…….”
나는 빵을 내려 두고는, 손을 조몰락거리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제일 중요한 말을 못 했어.”
내가 우물쭈물하는 새, 마세준이 내 말을 가로챘다.
“이잎새, 나 세상에 태어나서 좋아해 본 여자 너밖에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사귀자. 나 받아 주면, 잘할게. 진짜 잘해 줄 거야.”
뽀뽀도 해 놓고 안 사귀는 것도 모양 우습긴 하겠지만…… 이건 좀 이르지 않나. 놀란 얼굴로 마세준을 돌아보자, 마세준은 진중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나랑 두 번이나 키스했…….”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재빨리 마세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엄마 아빠가 집 안에 있는데 못 하는 소리가 없다.
마세준은 내 손을 거두어 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깍지를 꼈다.
“도장.”
부지불식간에 내 입술에 쪽 소리가 다 나게 입을 맞추고서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이거 완전 상습범 아니야?
자기가 다 봤다는 듯이, 니야오- 하고 산초가 우리를 올려다보며 울었다.
* * *
성적표를 받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평점은 2점 올라 있었다. 아니,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이래? 마세준이 노트 정리까지 해 줬는데……. 어떻게 이것밖에 안 오를 수가 있어.
성적 안 나온다고 우는 거 되게 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누가 보기 전에 손가락으로 얼른 눈가를 찍어 냈다.
애들은 방학이라고 좋아서 난리가 난 와중에 나 혼자 우중충했다. 다들 성적 잘 나온 걸까. 종례를 마치고 터덜터덜 복도로 나가자, 마세준이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마세준 앞에 서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이잎새, 왜 그래. 어디 아파?”
마세준은 허리를 숙이며 눈높이를 맞추더니 내 얼굴을 살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뿌예졌다.
“왜 울어. 응?”
마세준한테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1점만 더 올렸으면 됐는데, 열 받아 진짜.”
내가 억울하다는 듯 중얼대자, 마세준은 알겠다는 듯 얼굴을 풀면서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2점이나 올랐어? 잘했네. 이번 시험 어려웠잖아, 등수는 더 올랐을 거야.”
그래. 2점이나 오르긴 했는데, 3점이 아니잖……. 가만, 1점 모자란다는 말만 했는데, 2점이나 올랐다는 걸 어떻게 안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눈물이 고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마세준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엄마한테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엄마랑 아주머니랑 통화하는 거 어쩌다 들었어.”
그래……. 마세준한테‘만’ 말 안 한 거구나. 마세준도 다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노트 정리도 해 줬던 걸까. 그럼 마세준도 엄청나게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잎새, 피자 먹으러 갈까?”
자괴감에 고개를 못 들고 있는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면서 마세준이 물었다.
“내가 산다. 치즈크러스트도 추가해 줄게.”
햇살같이 웃는 마세준 얼굴을 보고 있자니, 튜브 바람 빠지듯 기분이 풀렸다. 결국,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세준이 손을 내밀기에, 이번에는 얼른 그걸 잡았다.
* * *
“이잎새, 나도.”
포크로 피클을 찍어 먹는데 마세준이 느닷없이 말했다. 아기 새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날 기다렸다.
“징그럽게 왜 이래.”
나는 얼른 주변을 돌아보고는 큰일 날 소리 한다는 듯 속삭였다.
“나 손 미끄러워.”
뻔뻔하기도 하지. 나는 부득불 물티슈를 뜯어서 마세준 손에 쥐여 줬고, 마세준은 퉁퉁 부은 얼굴로 손을 닦았다.
“아기도 아닌데 직접 먹어야지. 사람들도 많은데 왜 그래.”
“사람들 없으면 먹여 줄 거야?”
마세준은 눈가를 붉히며 넌지시 물었다. 얘가 진짜 왜 이럴까.
“뭐, 그럴 수도 있고.”
내가 대충 둘러대자, 마세준은 그제야 얼굴을 조금 풀었다. 뭐냐 진짜, 다 커 가지고 점점 응석이 는다. 싫지야 않았지만.
“자.”
나는 마세준 접시에 피자를 하나 뜯어서 올려 주었다. 마세준은 자기 피자는 쳐다도 안 보고, 내가 피자 먹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곧 포크를 내려놓았고, 콜라 빨대를 입에 물며 마세준을 마주 바라봤다.
“이잎새, 다 먹었어?”
“어, 배불러.”
“그럼 집에 가자.”
마세준이 계산을 하는 동안 나는 화장실로 갔다. 틴트가 다 지워져 있기에 공들여서 다시 발랐다. 손을 씻고 나오자 마세준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마세준은 나를 흘끔 내려다봤다. 얼굴에 장난기가 묻어 있는 게, 또 뭔 짓을 하려는 건지 다분히 의심스러웠다.
“입술에 예쁜 거 발랐네.”
“너 때문에 바른 거 아니거든.”
“알아.”
내가 투덜대자 마세준은 씩 웃었다. 그러고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야, 왜 이래.”
우리 집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마세준이 나를 돌려 세웠다. 저 눈은, 뽀뽀하자는 눈이었다. 미쳤나 보다. 중문 너머에 산초가 저렇게 애처롭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제도 못 하게 했잖아.”
마세준은 내 눈은 쳐다보지도 않고, 입술에서 눈을 못 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럴 때마다 진짜 변태 같다.
“어떻게 그걸 맨날 해? 가끔 분위기 낼 때나 하는 거지.”
“이번 주에 두 번밖에 안 했어.”
세상 심각한 마세준 얼굴이 우스워서 웃음이 다 나왔다. 완전 삐돌이가 따로 없었다. 그걸 세긴 또 왜 세고 있어.
“18년 동안 한 번도 안 했는데, 일주일에 두 번이면 많이 한 거지.”
내가 웃음을 참으며 말하자, 마세준은 순순히 물러났다. 먼저 집으로 들어가서는 나 보란 듯 산초를 껴안고 얼굴을 비벼 댔다. 내내 눈은 나를 향하고서.
“산초는 무슨 죄야?”
나는 마세준 옆자리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마세준 얼굴을 꾹 쥐고 물었다. 내가 선물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곧 산초가 바닥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이잎새.”
“왜.”
“나한텐 안 물어봐도 돼.”
“뭘.”
마세준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나는 소리 내 한 번 웃고는, 오래전부터 훔치고 싶던 마세준 입술에 뽀뽀를 했다. 세 번이나 짧게 입을 맞췄는데, 마세준은 어림없다는 듯 다시 내 몸을 안아 당겼다. 윗입술을 살짝 무는가 싶더니 따뜻한 게 밀려들어 왔다. 그러고는 머릿속이 다 어지러울 정도로 나를 헤집어 놨다.
그래도 평소엔 툭 밀치면 바로 물러나곤 했는데, 오늘은 통 밀려나려 들질 않았다. 나는 조금 더 힘을 실어서 마세준 가슴팍을 밀쳤다.
“……그만해.”
마세준은 또 귀가 새빨개져 가지곤 반쯤 홀린 사람처럼 내 입술을 보고 있었다. 내가 손등으로 입술을 쓸자, 마세준이 아쉽다는 듯 내 볼에 입을 맞춰 왔다.
“그만하라니까.”
“응. 이제 진짜 그만.”
그래도 거듭 말하면, 마세준은 곧잘 말을 들었다. 나는 착한 마세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살짝 흩트려 놓았다.
* * *
“마세준, 어디야?”
-이제 막 씻고 나왔어. 잠깐 집에 들렀다가 바로 갈게.
“나 너네 집 앞이야. 맛있는 거 가져왔으니까, 너네 집으로 와.”
수화기 너머로 마세준이 말갛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갈게.
나는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마세준을 기다렸다. 층간 계단으로 가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마세준이 올 때가 된 것 같기에 다시 마세준 집 앞으로 갔다. 우웅 소리가 나면서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더니, 곧 다시 올라왔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세준이 나타났다.
“더운데 뭐 하러 뛰어와.”
나는 가슴을 들썩이는 마세준을 보며 말했고, 마세준은 씩 웃더니 잠자코 문을 열었다.
나는 마세준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세준을 식탁에 앉혔다. 그러고는 따끈따끈한 떡볶이를 꺼냈다.
“짜잔.”
“떡볶이네.”
“어, 간장 떡볶이. 하나도 안 맵고 엄청 맛있어. 소고기도 들어갔어. 아빠가 조금 도와주기는 했는데, 그래도 거의 내가 한 거야. 아빤 진짜 조금 도와줬어.”
마세준은 좋아 죽으려고 했다.
“이잎새, 예쁜 짓만 하냐 자꾸.”
그러고는 내 손을 끌고 가서 입을 쪽 맞췄다.
“넌 왜 이렇게 능글거리는 짓만 해? 이거 치우고 얼른 먹어.”
나는 마세준 손을 잡아 뺐고, 마세준은 그래도 좋다고 웃고 있었다. 우리는 선풍기를 틀어 놓고 떡볶이 한 대접을 다 비웠다. 마세준은 연신 맛있다고 했다.
마세준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철 지난 영화를 한 편 골라 놓았다. 설거지를 마친 마세준이 거실로 오기에, 얼른 영화를 재생시켰다. 영화는 기억 삭제를 의뢰한 사람과 그 연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억을 지울 때 사용하는 기계는 굉장히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그나저나 직업의식 참 별로다. 의료인이 의뢰인 앞에서 저렇게 병나발을 불어도 되는 거야?
그렇게 꽤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마세준은 피곤한 모양인지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어디 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세준이 언제 졸았냐는 듯 멀쩡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장실’ 그러고는 마세준 방으로 갔다. 잘 정돈된 이불을 걷어서 거실로 나가려는데, 책상 위에 못 보던 액자가 보였다.
몇 해 전 여름에 휴게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내 입은 댓 발 튀어나와 있는 반면, 내 어깨에 제 팔을 두른 마세준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참나, 나도 못 본 사진인데 언제 인화까지 해 가지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액자에서 사진을 꺼냈다. 사진 뒷면에 ‘잎새♡세준이’라고 적고는, 다시 액자 속으로 사진을 숨겼다.
광대를 씰룩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얇은 이불을 마세준 몸에 덮어 주고는, 나도 그 옆으로 가 앉았다. 마세준 이불에서는 내가 사 준 향수 냄새가 나고 있었다. 한 달 용돈 올인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니까. 고개를 숙여서 잘생긴 이마에 입을 맞추자, 마세준은 눈을 감고 웃으면서 나를 제 몸 위로 당겼다.
* * *
“나 졸린데…….”
-내일 늦잠 자면 되잖아.
수화기 너머, 마세준이 말끝을 길게 늘이며 투정을 부려 왔다. 몰양심도 정도가 있어야지. 대관절 나더러 무슨 수로 늦잠을 자라는 건지 모르겠다. 또 내일 아침에 새벽같이 쳐들어올 거면서.
2학기 개학과 동시에, 나는 수학 과외를 화요일과 금요일로 옮기게 되었다. 내가 먼저 하교한 뒤에도 마세준은 학교에 남아 야자를 했고, 그런 날이면 새벽까지 전화통을 붙들고 놔주질 않으려 했다. 딱 지금처럼.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아까 밤에 얼굴 보러 온다는 걸 엄마 아빠 핑계를 대며 안 된다고 했더니, 그게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나라고 뭐 마세준 안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마세준이 저러니 나라도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이제 눈 감았다 뜨면 고3이니까.
“…….”
-우리 오늘 저녁에 얼굴도 못 봤잖아.
기가 막혀서 웃음이 다 났다. 아니, 아침밥 같이 먹고 학교 같이 가. 점심도 같이 먹어. 석식 먹기 전에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는데.
-이잎새.
“알았어. 더 해.”
-목소리 좀 길게 들려주면 안 돼?
넌지시 묻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직 사람 간의 감정을 정의 내리는 데는 서툴렀지만, 추상적이고 아리송한 그 감정들 사이에서 오롯한 감정 하나를 분명하게 읽어 낼 수 있었다. 마세준은 나를 정말, 좋아한다.
“…….”
-빨리 어른 되고 싶다.
새삼 가슴이 떨려 짧은 말 한마디 못하고 있는데, 마세준이 느닷없이 말했다. 어른 되고 싶다는 말이 너무 애 같아서 귀여웠다.
“어른 돼서 뭐 하게?”
나는 어린아이에게 그러하듯 상냥하게 물었다.
-하루 종일 이잎새 얼굴이나 보려고.
마세준의 다정한 말들은 매번 하나 왜곡 없이 내 마음에 톡하니 떨어져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마세준 자리가 자꾸 커지고 있었다.
매일 밤 통화가 길어지는 건 내가 마세준을 매몰차게 쳐 내지 못할 만큼 물렁해서가 아니라, 나도 그만큼 마세준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마세준.”
-응.
“……나도 빨리 어른 됐으면 좋겠어.”
느끼한 말 하지 말라고 투덜대는 대신, 오늘은 나도 살며시 마음을 내어 보였다. 마세준이 말갛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은 울림이 내 귀 끝을 간지럽히다 부지불식간에 가슴을 살금살금 긁었다.
-아, 이잎새랑 뽀뽀하고 싶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누워 있는데도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너 맨날 뽀뽀 생각만 하지?”
마세준은 변명도 안 했다.
* * *
초인종 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엄마도 아빠도 집에 없는지, 문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꾸물꾸물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자 아침 10시였다. 그래도 오늘은 진짜 늦잠 자게 해 줬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 ‘잠깐만! 5분만!’ 하고 소리를 질렀다. 욕실로 가서 빛의 속도로 세수와 양치를 하고는, 머리를 몇 번 빗었다. 방으로 가서 틴트까지 바른 뒤에야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이잎새,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마세준은 내 볼을 양손에 쥐더니 볼이며 이마에 뽀뽀를 퍼부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야, 복도에서 그러면 어떡해.”
내가 팔을 잡아끌며 말하자,
“집에서는 그래도 된다는 뜻이야?”
마세준이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얄밉게 대꾸했다.
“너는, 진짜 너무 상습적이야. 속았어. 내가 너 이렇게 변태인 줄 알았으면…….”
“안 돼. 못 물려.”
마세준은 내 입술에 제 검지를 꾹 누르며 말했다.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내 꼴이 우스운지 살짝 웃었다.
“아침 뭐 먹고 싶어.”
“이이오으아.”
물으니 대답은 했다만, 입 가려 놓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김치볶음밥?”
추리력 좋은 마세준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세준은 곧 손가락을 떼어 내더니 말릴 틈도 없이 쪽 입을 맞췄다.
“치약 맛 난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입을 맞추는 일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쌓였는데, 저런 말만은 아직 못 듣겠다. 마세준이 저럴 때마다 나는 장판 밑으로라도 숨고 싶었다.
“알았어. 안 할게.”
하지만 나도 뽀뽀하지 말란 말은 안 했고, 마세준도 뽀뽀 안 하겠단 소리는 절대 안 했다.
얼마 안 가 고소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메웠다. 마세준이 참치 통조림을 뜯자 산초가 몸을 치대 왔고, 나는 웃으며 간식을 뜯어 줬다.
“이잎새.”
“어.”
“먹고 잠깐 바람 쐬러 갈까. 독서실은 오후에 가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산초가 간식 먹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마세준이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며 물었다.
“지난주에도 그러자고 해 놓고 하루 종일 놀았잖아. 안 돼.”
“응, 알았어.”
뜻밖에도 마세준은 단번에 항복 의사를 밝혀 왔다. 너무 단호하게 말했나. 안 그러던 애가 빠르게 체념하니까 괜히 더 미안했다.
“과외 선생님이 그랬어. 고3 되면 다 열심히 하니까, 미리미리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내가 뒤늦게 말을 덧대자, 마세준은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돌았다. 더 고집을 피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팬 위로 떨어진 달걀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들렸고, 곧 마세준이 식탁 위로 뜨끈한 접시를 내려놓았다.
“대신 딱 세 시 전까지만 노는 거야. 알았지?”
마음을 바꾸어 먹은 내가 김치볶음밥에 깨를 솔솔 뿌리며 말하자, 마세준은 눈을 다 접어 가며 웃었다.
“진짜 맛있다. 누구 남자 친구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냐.”
빈말이 아니었다. 마세준이 차려 준 늦은 아침은 정말 맛있었다. 역시나 마세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남자 친구’라는 말은 마세준의 수줍음 버튼이었다.
무의미한 가위바위보 끝에 마세준이 수세미를 쥐었고, 나는 샤워를 하고 아끼는 옷을 꺼내 입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벤치에 앉았다. 이게 뭐 별거라고, 나도 마세준도 이런 순간을 퍽 좋아했다. 가끔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랑 인사를 하거나,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거나, 날아가는 새가 까마귀인지 까치인지 제비인지 내기를 하는 게 다였지만.
날이 조금 차다는 생각을 하는데, 문득 어제 본 뉴스가 떠올랐다. 이제 수능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고 그랬는데.
“마세준, 내년에 수능 끝나면 뭐 하고 싶어?”
나는 고개를 반쯤 돌려 마세준을 보며 물었다. 올해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예비 고3이 된다.
“글쎄.”
“나는 자전거부터 마스터할 거야. 그리고 너랑 맥주도 마시고, 소주도 마실 거야. 그리고 귀도 뚫어야지. 미호랑 젤네일도 받으러 가고.”
“이잎새, 하고 싶은 거 되게 많네.”
마세준은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웃고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찬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수능 꼭 잘 봐야 돼.”
“…….”
알아들었다는 듯, 마세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앞으로는 늘 그래 왔듯 온종일 붙어 있거나 서로에게 시간을 할애하지는 못할 거다. 간질거리는 목소리에 들떠 새벽 내내 전화를 붙들고 있을 수도 없을 테고. 나도 그게 안타깝고 싫었지만, 나는 마세준과 나의 관계를 더 멀리 내다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우리 1년만 잘 참자, 세준아.”
마세준 볼을 꾹 쥐고는, 입술을 잠깐 맞대었다 떼어 냈다. 나는 다정한 마세준의 눈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리 상 주는 거야.”
“더 줘.”
세상에, 뻔뻔도 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마세준의 눈을 응시했다. 마세준은 상 맡겨 놓은 사람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세준.”
“응.”
“왜 이렇게 귀엽냐.”
마세준은 귀를 화르르 붉히면서도, 내 말이 듣기 좋았는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부드럽게 휜 눈이며 발간 뺨이며, 다 너무 예뻤다. 진짜 남 주고는 못 살게끔.
“마세준, 나중에 꼭 나한테 장가 와. 알겠지?”
나는 다그치듯 물었고, 마세준은 조금 놀란 듯했다. 하기야, 좀 뜬금없는 말이긴 했지. 그래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왜 대답을 안 해? 싫어? 너 설마 다른 여자한테 장가갈 생각이었어?”
내가 한 술 두 술 술술 떠보자,
“이잎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마세준은 세상 진지한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
“누가 이런 말을 가짜로 하냐.”
내 새침한 대답에, 마세준은 비죽비죽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당연히 너한테 장가갈 거야.”
싫다고 해도 업어 올 작정이었지만, 정말로 나한테 장가오겠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괜히 얼굴이 따끔거리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괜히 검지를 일자로 펴서는 코 밑을 몇 번 훑었다.
“아, 마세준 먹여 살리려면 진짜 수능 대박 나야 되는데.”
“내가 먹여 살릴 거니까, 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내가 장난스레 툭툭 던지자, 마세준은 마치 백 년 대계획이라도 짜 놓은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고딩이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그럼 넌?”
“이잎새가 나랑 살아만 주면 내가 다 하지. 밥하고 빨래하고 돈 벌어 오고 애 보고.”
“애?”
나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애라니……. 애가 생기려면, 그…….
“어, 애. 아기.”
“어우, 야. 그만해, 징그러워.”
급기야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고, 마세준은 씩 웃으며 시선을 떨궜다.
“오순도순 셋이 사는 것도 괜찮겠다. 산초랑.”
“누가 애 안 낳겠대? 네가 막, 남사스러운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까…….”
내가 아무 말이나 던져 대자, 마세준은 소리를 내서 웃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마세준을 골려 주려고 그랬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마세준이 나를 손바닥 위에 놓고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마세준을 흘겨보다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슬슬 팽팽한 눈을 풀었다. 내가 잘생겨서 참는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