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고작 며칠뿐인 ‘진짜 여름방학’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남은 여름 내내 나는 보충수업과 과외를 거듭하면서, 이따금 미호와 김용호를 만났다. 무슨 방학이 이러나 싶었다. 중딩 때가 말도 못 하게 그리웠다.
우리가 손을 잡았던 그 밤 이후로, 우리 사이에는 조금씩 낯선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세준은 조금 더 다정한 말투로 나를 불렀고,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그랬냐?’ 대신 ‘그랬어?’ 그랬다.
마세준은 저녁이면 수영을 갔다가 가끔 간식을 사 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때마다 살짝 젖은 마세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와 가슴이 속절없이 뛰었다. 마세준 손가락을 볼 때면 더했다. 에어컨 앞에 서 있어도 좀처럼 얼굴에서 열이 사라지질 않았다. 괜히 혼자 오버해서 그만 가라고 마세준의 등을 떠밀면, 마세준은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그러면서 뚱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럼 나는 또 쿵쾅거리는 마음으로 소파에 가 앉았다. 마세준은 뒤따라 내 옆에 앉아서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집에 가고는 했다.
뒤늦게 감정이 혼자 널을 뛰기 시작했다. 마세준이랑 같이 있을 때면 마세준이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밤이 되면 혼자 이불을 차면서 침대 위에서 몸을 굴렀다. 좋아하지 말라고 그 난리를 해 놨는데. ‘나 안 좋아하면 안 돼?’ 이 말을, 내 입으로 직접 마세준한테 했었는데. 이제 어쩌지?
남자 마세준과 친구 마세준 중 누가 더 오래도록 내 곁에 있어 줄까, 그게 내가 직면한 문제였다. 3점짜리 시험 문제보다 더한 문제.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답은 한길로 모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아무 논리도 없었다. 논리로 치자면 무조건 친구 마세준이랑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아야 했다. 그런데 자꾸 결론이 다른 길로 샜다.
마세준은 왜 저런 걸 따지지 않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봤다. 아직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런 걸 따지고 싶지가 않아서. 그도 아니면,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어서.
내 마음은 마지막 이유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마세준도 같은 이유에서 나를 보고 있기를 바랐다.
마세준이 좋았다. 이제는 ‘나 안 좋아하면 안 돼.’ 하고 말하고 싶었다.
* * *
용기를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린 스포츠센터 안내 데스크 직원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그 앞에 서 있었다. 한 30분을 그러고 있었을까, 놀란 얼굴을 한 마세준이 보였다. 나는 괜히 민망해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10초도 안 돼서 마세준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잎새?”
“어.”
나는 마세준의 얼굴을 쳐다도 보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던 바나나 우유를 마세준에게 내밀었다.
“나도 헬스나 다닐까 해서 와 본 거야.”
“그랬어?”
우유를 받아 든 마세준은 나를 바라본 채로 뒤로 걷고 있었다. 입이 귀에 걸린 채로.
“넘어져. 앞에 보고 걸어.”
“안 넘어져, 네가 봐 주면 되잖아.”
나는 멀쩡한 눈 둬서 뭐 하냐고 툴툴대려다, 그냥 빨대를 우유갑에 꽂았다.
“이잎새, 저녁 먹었어?”
“아니.”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마세준은 잠시 멈춰 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럼 밥 먹자, 나랑.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러고는 나를 보며 물었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마세준이랑 같이 먹은 밥만 삼천 끼 가까이 될 텐데, 왜 밥 먹자는 말에 얼굴이 뜨거워지지. 미지근한 우유를 가소로울 만큼 얇은 빨대로 있는 힘껏 빨아 마셔 봐야, 갈증도 두근거림도 어느 것 하나 가실 생각을 않았다.
미친 짓도 자꾸 하면 는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마세준이 보고 싶어질 때면 언제든 마세준을 보러 갔다. 그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구실이야 그때그때 대충 만들어 버무리면 그만이었다.
“마세준, 나.”
나는 초인종을 누르고는 인터폰에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곧이어 현관문이 활짝 열렸고, 나는 그 틈으로 몸을 들였다. 그러고는 개판 오 분 전인 부침개를 마세준을 향해 내밀었다.
“엄마가 이거 갖다 주래.”
“아주머니께서?”
마세준은 잘 덮인 포일을 열어 보더니,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안 먹어 봐?”
내가 식탁 의자를 빼 앉으며 묻자, 마세준은 젓가락 두 쌍을 가지고 식탁으로 왔다. 내가 젓가락을 물리며 ‘난 배불러.’ 그러자, 마세준은 어마어마한 두께의 김치 부침개를 스스럼없이 집어 먹었다. ‘딱 봐도 네가 한 거네.’ 그런 말을 안 해 줘서 고마웠다. 우리 엄마가 이런 처참한 부침개를 만들었을 리가 없는데도.
“뭐 하고 있었어?”
나는 마세준의 말투를 떠올리며 가능한 한 부드럽게 물었고, 마세준은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웃었다.
“너희 집 가려고 옷 갈아입고 있었어.”
그런데 때마침 내가 와서 좋다는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귀엽지. 미호가 그랬는데, 귀여워 보이면 게임 끝난 거라고.
사실 게임은 초저녁에 끝났다. 요즘은 마세준이 자꾸 보고 싶었다. 나랑 안 놀아 주고 맨날 수영 가는 마세준이 가끔은 미웠다. 그래서 내가 친히 안 하던 짓까지 했는데, 그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얼굴만 보면 좋았다.
* * *
개학과 동시에, 나는 교실 분위기가 아주 미묘하게 바뀌었음을 감지했다. 반 애들은 하나둘 책상에 코를 박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아껴서 자체적으로 단어 시험을 보는 애들도 있었고, 학원 한 군데 더 다닌다는 둥, 과외를 늘렸다는 둥. 다소 전투적인 학구열이 교실을 장악했다.
나는 그 틈에 나름 적당히 편승했던 것 같다. 아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월아 네월아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시험 기간에는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내가 퀭한 눈으로 의자에 앉아 있으면, 마세준은 시원한 주스를 내 책상에 올려놓고 가고는 했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던 날, 마세준과 나는 여느 때처럼 함께 하교하는 대신 번화가로 갔다. 내가 길거리 좌판에 놓인 머리띠에서 눈을 못 떼자, 마세준은 그걸 색깔별로 사 주었다. 마세준은 내가 초록색 머리띠를 하는 걸 유독 좋아했다. 헤벌쭉 웃으면서 ‘예쁘네.’ 그랬다.
영화관에서의 기억은 없다. 나는 매너 없게도 영화가 시작하기 무섭게 잠에 빠졌다. 마세준이 조심스레 나를 깨웠을 때는 이미 영화가 끝난 뒤였다. 마세준은 정 피곤하면 이만 집에 가자고 했고, 나는 싫다고 했다. 졸린 눈을 비벼 가며 밥도 먹고 인형 뽑기도 했다. 마세준은 하마 인형을 두 개나 뽑아 줬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그걸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아빠가 세탁도 안 하고 지저분하게 뭐 하는 짓이냐고 했지만, 나는 인형을 건드리면 집 나갈 거라고 난리를 쳤다.
영국에 놀러 가려던 계획은 아쉽게도 무산됐다. 마세준네 할아버지가 한국으로 놀러 오셨기 때문에 아쉽게도 갈 만한 명분이 없었다. 마세준네 식구들과 다 같이 모여서 떡국을 먹었고, 우리는 열여덟이 되었다.
어른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동안, 나는 마세준과 둘이 밖으로 나가서는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홍빛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겨울 놀이터는 우리에게 퍽 익숙한 곳이었다. 아마 여기서 마세준이랑 백 번도 넘게 그네를 탔을 거다. 어느 겨울에는 마세준한테 비수 아닌 비수를 꽂았었다.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뭐랬더라. 헤어지는 게 싫댔나. 무섭댔나. 그 겨울 끝자락에는 쿠키랑 잠옷도 선물 받았었는데. 열쇠고리랑. 그때도 난 마세준에게 아무것도 못 줬었다.
내가 흐린 기억을 되짚는 동안, 마세준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끔 날 돌아보고는, 주저하다 입을 닫고, 또 나를 돌아보고, 또 입을 달싹이다 말았다. 원래 같았으면 ‘아 뭔데!’ 이랬을 텐데,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겨울밤 냄새가 달큼하게 느껴질 건 또 뭐지.
“이잎새.”
“응?”
마세준은 자기가 사 준 내 머리띠를 내려다보며 말갛게 웃었다. 불러 놓고는. 싱겁게.
“기억나?”
한참이 지나고서야, 마세준은 뜬금없이 내게 물어 왔다.
“뭐?”
“너 좋아하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을 못 할 리가 있나. 어젯밤에도 그 생각을 하면서 이불을 열세 번은 찼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애먼 모래를 톡톡 차기 시작했다.
“근데, 잘 안 돼.”
마세준의 또렷한 시선이 느껴졌다. 잘 안 된다는 건, 안 좋아하는 게 잘 안 된다는 건가.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더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그거는.”
“그거는?”
내가 고개를 푹 숙이며 가볍게 툴툴대자, 마세준은 부드럽게 되물었다.
“옛날에, 완전 옛날에 그런 거잖아.”
“…….”
“옛날에 그런 거니까. 야, 그리고, 네가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
“좋아해, 이잎새.”
내가 대뜸 고개를 들고 마세준을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을 때, 마세준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네 말 다 들어줄 수 있는데, 그 말은 못 듣겠어.”
“…….”
그렇게 덧붙인 말에 아마, 나는 꼴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너무 떨렸고,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마세준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귀자고 안 할 테니까, 예전처럼 도망가지 마.”
“…….”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그런 마음 안 들 때까지, 네가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릴게.”
마세준은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나를 바라봤다.
“좋아해, 잎새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았다. 그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나는 곧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기서 어린 마세준 등을 수없이 밀치고, 마세준 마음도 밀쳤는데. 마세준은 제 마음을 다 꺼내 보이면서 내 이기적인 마음까지 다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죄책감을 가까스로 누르고는, 날 바라보고 있는 마세준을 향해 마주 웃었다. 그때부터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 * *
2학년이 되면서 나와 마세준은 반이 갈렸다. 나는 문과를, 마세준은 이과를 택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앞으로 우리가 같은 반이 될 일은 없었다. 나란히 옆 학교에 다니고 있는 김용호와 미호는 같은 반이 되었다고 단체채팅방에서 난리 바가지를 피워 댔다. [부럽네] 그날 마세준이 보냈던 답장을 생각하다 괜히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어색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벌써 가까워진 애들 무리가 여럿 보였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이 몇 명 있었지만, 이름도 긴가민가할 만큼 친분이 없는 애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교실에는 내가 친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꽉 찬 교실에서 종일 말 한마디 않고 앉아 있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으레 또래 애들이 느끼곤 하는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갈증을, 난 지금껏 거의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그건 모두 마세준 덕이었다.
나는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엎드려 잠을 청하는 식으로 혼자 시간을 때웠다. 마세준에게는 세미 접근금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예전처럼 자주 찾아와서도 안 된다고, 어쩌다 오더라도 교실 안으로는 들어오지 말라고 타일러 뒀다. 마세준에게 혼자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마세준이 다녀갈 때마다 따갑게 따라붙는 애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마세준은 하루 한 번 문자로 나를 불러내서 먹을 걸 쥐여 주고는, 아쉬운 얼굴로 돌아가곤 했다.
4교시 수업 시간에 나도 모르게 꾸벅 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교실이 텅 비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창 점심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교실 벽시계 소리가 다 들려올 만큼 사방이 조용했다. 누구라도 그냥 등 한번 찔러 주면 금방 일어났을 텐데, 애들이 어쩜 이렇게 무정하냐.
이상하게 급식을 먹기가 싫어서, 나는 터덜터덜 매점으로 갔다. 빵이랑 초코 우유를 골라 계산하고는 마세준네 반으로 향했다. 애먼 마세준한테 신세 한탄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마세준이 보고 싶었다.
막상 찾아는 왔지만, 나는 마세준 자리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게 마세준네 반에 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마세준네 교실로 들어가는 대신, 나는 복도에 자리한 사물함 위에 팔을 얹고 멍하니 서 있었다.
달리 할 게 없었다. 창밖 풍경도 그저 그랬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는 별 볼 일 없이 앙상했고, 날도 희끄무레하니 칙칙했다. 으슬으슬 추위가 느껴질 때쯤, 멀리서 마세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오늘 날씨만큼 쌀쌀맞은 목소리였지만 반가워서 웃음이 났다.
“괜찮다니까, 그냥 둬.”
몸을 돌린 곳에는 마세준과 웬 여자애가 같이 서 있었다.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나는 잠자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참나, 쟨 또 뭐래.
“부반장이 반장을 안 도와주면 누가 도와줘. 나눠서 들자.”
이름 모를 여자애는 살살 웃으면서 은근슬쩍 마세준의 손에 들린 노트를 덜어 가려 했다.
“그냥 두는 게 도와주는 거야.”
마세준은 여자애 반대편으로 몸을 틀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천천히 두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던 마세준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잎새.”
“세준아, 밥 먹었어? 나 밥 먹기 싫어서 빵 사 왔는데.”
나는 마세준에게 부러 살갑게 대답하며, 옆에 선 여자애의 명찰을 빠르게 스캔했다. 최주연. 똘똘하게 생겨서는 하는 짓은 영 아니다. 그러고 노려보면 뭐, 어쩌라고.
“밥을 왜 안 먹어.”
마세준은 노트를 사물함 위에 올려 두더니, 내 앞에 와 섰다. 최주연인지 최조연인지는 이제 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하나도 안 보였다. 마세준 어깨에 다 가려져서.
나는 세상 진지한 마세준을 올려다보았다. 하기야, 앓아누웠을 때도 내 밥걱정을 하던 앤데, 맨정신에는 더할 테지. 그래도 그렇지, 누가 보면 큰일이라도 난 줄 알겠다.
“그렇게 걱정되면 나랑 밥 먹어 주든가.”
“가자.”
기분이 좋아진 내가 장난스레 말하자, 마세준은 별안간 내 손목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지금 먹자는 건 아닌데…….
“야, 노트는? 저렇게 내팽개치고 간다고?”
“부반장이 도와준다고 했어. 그럼 부탁한다, 부반장.”
뒤에서 최주연이 황당해 죽겠다고 코웃음을 치는 게 들렸다. 나는 실실 웃으면서 마세준을 따라 걸었다.
수저가 거의 동나 있기에 제대로 배식을 못 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반찬은 고루 남아 있었다. 애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급식소는 제법 한산했다. 대신 식판과 컵을 정돈하는 소리가 이따금 울렸다.
“무슨 일 있었어? 왜 밥을 걸러. 아침도 거의 안 먹었잖아.”
마세준은 가만히 스텐 물 잔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마세준은 정말 날 뭐로 보는 걸까, 나 아침에 식빵 세 장 먹었는데. 우유 두 잔에.
“그냥, 자다가 일어나니까 점심시간이 좀 지났길래.”
할 말은 그게 다였다. 마세준은 초코 우유를 뜯어서 내 식판 옆에 놓아 줬다. 그 이상 뭘 캐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잎새.”
내가 밥 먹는 걸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마세준이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국을 뜨다 말고 마세준을 쳐다봤다.
“…….”
“아까 걔, 그냥 부반장이야.”
마세준은 대뜸 먼 산을 보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뭐래?”
“아까 급식소에서 나오는데 담임선생님이 노트 좀 가져가서 나눠 주라고 하셔서. 근데 걔가 마침 지나가고 있…….”
“알았다니까.”
귀여운 새끼……. 귀까지 빨개져 가지고는. 마세준이 말 저렇게 길게 하는 건 거의 처음 본다. 아까는 그렇게 밥 먹기가 싫더니, 이상하게 오늘따라 밥이 달았다.
나는 괜히 내 무릎으로 마세준 무릎을 툭 쳤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냥 한 번 웃고 말았다. 마세준은 그제야 얼굴을 풀었다.
“오랜만이네.”
그러고는 손에 턱을 괴고 나를 보며 말했다. 또 간질간질한 눈빛이었다.
“뭐가?”
“네가 세준이라고 불러 준 거.”
마세준은 좋아 죽겠다고 웃고 있었다. 나는 내 물컵을 비우는 거로도 모자라, 마세준이 마시던 물 잔까지 뺏어 와서 몽땅 마셨다. 그냥 좀 넘어가 주면 덧나? 걔 들으라고 그런 거잖아.
석식 시간 종이 울렸다. 나는 애들이 얼추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교실 앞쪽에 서 있는 마세준이 보였다. 화들짝 놀라 ‘교실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려다가, 신경 써 준 마음이 고마워서 그냥 느릿느릿 마세준을 따라 걸었다. 마세준은 가끔 뒤를 돌아 내가 바짝 따라오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나는 마세준과 마주 보고 앉아서, 가만히 식판을 바라보다 입술을 뗐다.
“밥은 네 친구들이랑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너까지 친구 없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너랑 먹으면 되지.”
마세준은 뭐 그런 걸 걱정하냐는 듯, 여상한 얼굴로 물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하긴, 그러면 되지. 나는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밥을 한 숟갈 가득 입으로 가져갔다.
야자를 마치고, 우리는 천천히 밤 속을 걸었다. 코끝이 조금 시렸고, 손끝도 그랬다. 나는 가끔 마세준 손을 몰래 훔쳐봤다.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던 게 벌써 작년 여름이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저 손을 잡으면 얼마나 가슴이 쿵쾅대는지, 얼마나 떨리고 기분이 좋은지.
“이잎새, 코코아 마실래?”
내가 춥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마세준이 그렇게 물었고,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코코아를 하나씩 손에 들었고, 마세준은 내친김에 젤리까지 한 움큼 사 주었다. 차가운 바람에 뜨거운 코코아는 금세 식어 버렸지만, 걷는 내내 마음이 따뜻했다.
우리는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김용호랑 미호가 다퉜다가 질질 울면서 화해했다는 둥, 최규훈네 형이 군대에 갔다는 둥. 그러다 보면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아쉬울 건 또 뭐지.
“이따 전화해도 돼?”
마세준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우리 집 1층 현관 앞에서 신발 앞코로 바닥을 툭툭 치며 물었다. 왜, 숨도 허락받고 쉬지. 별걸 다 물어본다 싶어서, 나는 물끄러미 마세준을 올려다봤다.
“금요일이잖아.”
“…….”
“늦게 자도 상관없다고…….”
마세준이 입꼬리 간수를 못 하고 웃기 시작했다.
“간다.”
나는 얼른 엘리베이터로 도망쳤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진짜 가관이었다. 눈가며 귀 끝이며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노곤한 몸을 소파에 누였다. 산초가 기다렸다는 듯 낚싯대를 입에 물고 다가왔다. 2학년이 되고 내 하교가 한 시간 더 늦어지면서, 이산초는 부쩍 애교가 늘었다. 나는 자그만 산초의 몸이 너무 짠해서, 이산초를 얼른 들어 올려 꼭 안아 주었다.
“이산초, 심심했어?”
이산초는 크릉크릉 대면서 내 턱에 제 이마를 힘껏 비볐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낚싯대 대신 어묵 꼬치를 한참 동안 흔들어 주었다. 이산초는 좋아서 미치려고 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까지 덩달아 신이 났다. 까르르 웃으며 한참을 놀아 주고 나니 팔이 다 아팠다.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산초를 안아서 방으로 데려가고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을 뜨자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어젯밤 11시 27분에 온 거였다. 조금만 일찍 하지. 그럼 받았을 텐데…….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서 그걸 멍하니 보다가, 그대로 마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잎새, 잘 잤어?
“어…….”
마세준 목소리는 초여름 숲속 같았는데, 내 목소리는 막걸리보다 더 탁했다. 아이 씨, 쪽팔려. 너무 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나 보다. 나는 다급히 목을 좀 가다듬었다. 그 소리에 깼는지, 내 다리 틈에서 자고 있던 산초가 올라와서 내 얼굴에 몸을 치대기 시작했다.
-오늘 뭐 해.
“그냥……. 이산초랑 좀 놀아 주다가, 공부하려고.”
-나도 오늘 그러려고 했는데.
마세준이 뻔뻔하게 웃으며 말하자, 습관대로 ‘웃기지 마.’ 그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그럼 올래?”
-가도 돼?
그렇게 묻는 마세준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응, 30분만 이따가 와.”
전화를 마친 나는 순식간에 욕실로 달려갔다. 어젯밤에 샤워를 했지만 다시 샤워를 했다. 교복 치마에서 틴트를 꺼내서 살짝 바르고는, 돌돌 말린 이불을 펴서 정돈했다. 옷을 좀 괜찮은 거로 갈아입을까 하다가, 그건 좀 웃길 것 같아서 깨끗한 실내복을 꺼내어 입었다.
식탁에 앉아 찬물을 들이켜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마세준은 책가방을 등에 메고, 손에는 종이 가방을 든 채 웃고 있었다.
“그건 뭐야?”
나는 주린 배를 감싸 안으며 마세준에게 물었다. 어렴풋하게 달큼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산초 간식은 아닌 것 같은데. 이산초는 그저 좋다고 마세준 무릎에 몸을 치대고 있었다.
“파이랑 타르트 좀 챙겨 왔어.”
마세준은 종이 가방을 내게 내밀었고, 나는 답삭 그걸 받아 들었다. 손끝이 살짝 스치는 바람에 거의 뺏듯이 잡아챘지만.
공부는 개뿔, 우리는 두 번째 영화를 재생시켰다.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가 식탁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고, 마세준은 영화에 완전히 집중한 채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떨어져 앉아. 그게 괜히 괘씸했다.
나는 하품을 하며 모르는 척 마세준 다리 옆에 쿠션을 얹었다. 그러고는 그 위에 냉큼 머리를 누였다. 마세준이 돌처럼 굳는 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마침 웃긴 장면이 흘러나와 참지 않고 웃었다.
마세준은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더니,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앞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다정한 손길로 넘겨 주었다. 내가 별소리를 않자, 마세준은 조심조심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너무 떨려서 목이 다 마르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곧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TV는 새카맣게 꺼져 있었고, 창밖은 아직 해가 쨍했다. 창을 타고 넘어온 레몬색 볕 아래로 이따금 먼지가 떠다니는 게 보였다. 나는 고요한 거실에서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눈을 조금 돌리자, 베란다 캣타워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이산초가 보였다. 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술 더 떠 달콤한 계피 냄새, 청포도 냄새, 고소한 버터 냄새. 그런 냄새가 어렴풋이 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영화 한 편이 끝날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까.
고개를 반쯤 뒤로 돌리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마세준은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을까. 나는 TV 화면을 향해 있던 몸을 바로 해 정자세로 누웠다. 그러자 마세준이 아주 옅게 웃었다.
“이잎새, 이제 다 잤어?”
“아니, 아직 졸려.”
응석 부리는 듯한 목소리가 나와 당황스러웠지만, 마세준은 조금 낮게 웃을 뿐이었다.
곧 마세준의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내 입가에 그 끝이 닿았다. 스치듯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마세준의 손은, 말도 못 하게 부드러웠다. 그걸 깨닫자마자 귀 옆에서 뜨끈한 심장 박동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세준을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러운 내 눈에는, 아마도, 이게 무슨 짓이냐고 쓰여 있었을 것 같다. 마세준은 내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느릿느릿한 손길로 내 입가를 쓸어내렸다. 따뜻한 손이 자꾸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크림 묻었다.”
마세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윗입술을 쓸었다. 입술이 살짝 짓눌리는 게 느껴졌다. 마세준의 눈가는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내 얼굴이야 안 봐도 비디오일 것이었다. 시선이 자꾸 흔들려서 마세준이 흐릿하게 보였다.
마세준은 더 닦을 것도 없는 내 입술을 몇 번이나 매만졌다. 발끝이 간지러웠다. 간간이 지나다니는 차 소리에도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래도 되나. 왠지 안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느낄 때쯤, 마세준은 대뜸 손을 떼어 냈다. 얼굴에 당황이 한가득 떠올랐다. 실컷 만져 놓고는 자기가 더 놀란 것 같았다.
“더 자.”
내가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마세준은 내 머리를 소파 위에 뉘어 주고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집을 나섰다. 산초가 뒤늦게 마세준을 따라 현관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문은 닫힌 뒤였다.
나는 입술을 맞물려 깨물고는 자꾸 올라오는 광대를 꾹꾹 눌렀다. 그러다 소파 위에 엎드려서 발을 구르며 몇 번이나 입술을 만져 봤다. 한참 뒤 몸을 일으켰을 때는, 테이블 옆에 놓인 마세준 가방이 보였다.
* * *
얘가 공부를 안 할 리가 없는데, 마세준은 주말 내내 책가방을 가지러 오지 않았다. 전화도 안 오고 문자도 안 왔다. 나도 미쳤지, 별것이 다 귀여웠다.
월요일에, 나는 마세준이 오기 전에 단장을 모두 마치고 식탁 위에 앉아 있었다.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달려가서 문을 열어 주자, 마세준은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 홱- 하고, 얼굴을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바로 부엌으로 내뺐다. 얼씨구, 지가 뭔 짓을 한 건지는 아나 보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마세준을 따라 식탁 의자에 앉았다. 마세준은 제 접시 위에 놓인 빵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제사 지내? 왜 안 먹어?”
내가 놀리듯 얘기하자, 마세준은 빨개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내가 마세준 빵에 예쁘게 발라 놓은 딸기잼보다 마세준 얼굴이 더 빨갰다. 마세준은 별안간 우리 집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왜 저러나 싶어서 마세준을 쳐다보는데, 따뜻하고 보드라운 뭔가가 순식간에 내 이마에 닿았다가 그보다 더 빠르게 떨어졌다. 마세준의 입술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진짜 미쳤어.
“너 미쳤어?”
내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죽여 묻자, 마세준은 턱을 꽉 물고 웃었다.
“어.”
그러고는 빵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혼자 열이 올라서 찬 우유를 벌컥벌컥 삼키는데 엄마가 셔츠 깃을 만지며 방에서 나왔다. 화들짝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엄마가 10초만 일찍 나왔더라면 진짜로 큰일 날 뻔했다.
“세준이 왔니? 해가 서쪽에서 떴나, 이잎새가 아침부터 부지런을 다 떠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환하게 마세준을 반겨 줬다. 뒤이어 부엌으로 나온 아빠도 마세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웃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마세준의 뻔뻔한 옆얼굴을 돌아보다가, 깨작대며 빵을 먹기 시작했다. 이게 빵 맛인지 밥맛인지도 모르겠고,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마세준이 훅 다가왔을 때 나던 스킨 냄새 때문에 계속 가슴이 뛰었다. 이마가 화끈거리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남의 이마에 불 질러 놓고, 마세준은 빵을 맛있게도 먹어 치웠다. 그러더니 맨 빵을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잎새, 잼 또 발라 줘.”
마세준이 그렇게 말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엄마 아빠가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게,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나는 낭패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고, 마세준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뭐가! 은혜 갚는 거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빵을 뺏어서 잼을 처덕처덕 발랐다. 마세준은 달지도 않은지 그걸 또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 아침, 마세준은 빵을 네 장이나 해치웠다.
“너 또 그러기만 해.”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숫자 화면을 노려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뭘.”
얼굴은 안 봤지만, 마세준은 웃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좋은가, 내가 뭐 해준 게 있다고. 잼 두 번 발라 줬다가는 좋아 죽겠네.
“뽀, 뽀뽀는 하지 말라고.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러면 안 돼. 아니, 만약 사귀는 사이라도 아직 그런 건 좀…….”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추어 섰다. 나는 얼굴만 아는 6층 아저씨께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했다.
“응. 이제 안 할게.”
마세준은 내 옆으로 가까이 서며 그렇게 말했다. 아저씨가 흘끔 우리를 바라봤고,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어 서자,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왔다.
막 아파트 현관을 나설 무렵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선 마세준은 제 겉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장갑이었다. 이게 뭐냐는 듯 바라보자, 마세준은 주머니에 숨겨진 내 손을 꺼내서 장갑을 끼워 주었다.
나는 조금 처진 얼굴로 마세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내가 겨우 빵에 잼 발라 주고 생색내는 동안, 마세준은 또 혼자 이런 걸 준비해 왔다. 내가 코코아를 마시면서 ‘아, 따뜻해서 좋다.’ 그러는 걸 주워들었던 걸까.
“이번 주 꽃샘추위래. 끼고 다녀.”
그러고는 민망한지 먼저 걷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속이 다 어지럽지. 내가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자, 저 앞에서 마세준이 멈추어 서더니 나를 돌아봤다. 어서 오라는 거였다. 나는 초록색 장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등교하는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부끄럽고 미안해서 그랬는데, 마세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뭐였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세준은 우리 교실 앞문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나 오늘 4교시 체육이라 조금 늦어, 교실에서 잠깐만 기다려. 최대한 빨리 올게.”
“그냥 친구들이랑 먹…….”
마세준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네 교실로 가 버렸다.
나는 장갑을 고이 벗어 가방에 잘 챙겨 두고는, 아침 조례를 기다렸다.
담임선생님은 진로 희망 사항을 적어 제출하라며 종이를 나눠 주었다. 나는 텅 빈 기입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본인 희망직업, 부모님 희망직업, 희망 사유. 뭐 그런 걸 적어 내라고 했다. 하나도 모르겠는데, 어쩌지. 그런 걸 일주일 만에 결정할 수가 있나?
엄마는 줄곧 나한테 공무원이 되라고 했지만 나는 공무원이 뭘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아빠는 웬만하면 이과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문과를 선택했다. 나는……. 나는 뭘 원하지? 모르겠다.
멍한 머리를 책상에 누이는데, 갑자기 오늘 아침 일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이마를 살살 쓰다듬었다. 당연히 그 온기야 진작에 날아갔지만, 괜히 이마가 평소보다 더 따뜻한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마세준은 뭐가 되고 싶을까. 그러고 보니 마세준이랑 그런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수의예과.”
무슨 과 갈지 생각해 본 적 있냐고 묻자, 마세준은 젓가락으로 감자조림을 집으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세준이 커다랗게 보였다. 부럽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안다는 건 무슨 기분일까.
“수의사 되려고?”
“되고 싶지.”
나는 김이 폴폴 올라오는 콩나물국을 헤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세준이 저렇게 자기 길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어디서 뭘 했나 싶어서, 기분이 좀 울적했다. 같은 나이에 같은 거 먹고 사는데, 난 왜 이 모양일까.
“난 하나도 모르겠어. 지어낼 수도 없고…….”
“천천히 생각해. 아직 1년 넘게 남았잖아.”
“다음 주까지 내라고 하시니까…….”
마세준은 항상 저 말을 한다. 천천히 하라고. 내가 수학 문제를 못 풀었을 때도 그랬고, 네발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도 그랬다. 내가 기죽은 얼굴을 내어 보이자, 마세준은 밥을 먹다 말고 젓가락까지 내려놓으며 다시 입술을 뗐다.
“우리 맨날 책상에 앉아만 있었잖아. 나도 지금이야 이렇다지만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르는 거고. 그거 그냥 종이야. 네 보폭대로 가면 되지.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마세준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밥을 한술 떴다.
“이잎새.”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마세준이 싱긋 웃으면서 제 몫의 푸딩을 내게 내밀었다.
“많이 먹어.”
나는 달큼한 푸딩을 얼른 뜯어 먹었다. 오늘은 마세준도 밥부터 먹고 먹으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나는 얼얼할 만큼 단 푸딩을 깨끗하게 다 비우고 나서야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마세준이 밥을 다 먹을 때쯤, 나는 내 몫의 푸딩을 뜯어서 마세준 손에 쥐여 주었다.
“너무 달아서 두 개는 못 먹겠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세준은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그 얼굴이 위로가 됐다.
아까 책상에 이마를 박으며 자책하던 기분 같은 건 이제 기억도 안 났다. 그거 그냥 종이고, 나는 내 보폭대로 걸으면 된다는 말이 계속 생각났다. 열여덟 살짜리 고딩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얌전히 푸딩을 먹는 마세준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큰일이었다. 예전에는 마세준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만 눈독을 들였는데……. 자꾸 마세준 입술만 눈에 들어온다.
* * *
“마세준,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편의점 들릴래?”
내가 가방끈을 한번 추켜올리며 묻자, 옆에서 걷던 마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눅신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이 밤에, 매미가 몸을 불태우며 울고 있었다. 도시의 매미들은 인공적인 조명 때문에 낮과 밤도 모른 채 산댔다. 그래서 밤에도 저렇게 매섭게 우는 거라고. 어쩐지 조금 딱했다, 얼마나 피곤할까.
내가 멍하니 나무 위를 들여다보며 매미를 찾는 동안, 마세준은 어느덧 편의점 문을 잡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마세준은 뭐가 좋은지 피식 웃었다.
겨우겨우 아이스크림을 골라 뒤를 돌았는데, 마세준은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달달한 바닐라 라떼나 모카 같은 것도 아니고, 무려 시커먼 아메리카노.
“웬 커피?”
나는 분홍색 포장지를 잽싸게 등 뒤로 감추며 물었다.
“독서실 가서 마시게.”
마세준은 뼈가 불거진 손으로 까만색 커피를 쥐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뒤를 돌았다. 솜사탕 맛 아이스크림을 도로 내려놓고는, 커피 맛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아메리카노는 몰라도, 이런 거라면 나도 먹을 수 있다. 마세준이 계산을 하다 말고 젤리를 계산대에 얹으려 하기에, 얼른 말렸다.
기분 좋은 종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오자, 푹푹 찌는 열기가 팔을 휘감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어른 냄새가 나는 마세준 옆에 서서 아사삭 아이스크림을 깨물어 먹었다.
우리는 집이 아닌 독서실로 가고 있었다.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성적표를 받은 나는 경악에 빠졌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성적은 조금도 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른 애들도 그만큼 열심히 하니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독서실에 보내 달랬더니, 엄마 아빠는 위험해서 안 된다고 어깃장을 놨다. 결국, 나는 마세준을 꼬드겼고, 마세준은 1분도 안 돼서 그러자고 했다. 언제나 그랬듯 마세준 찬스는 바로 먹혀들었다. 엄마는 흔쾌히 오케이 했다.
온종일 공부에 시달리다 또 공부하러 가는 건 조금 잔인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독서실 생활은 제법 할 만했다. 새벽에 마세준이랑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도, 인적이 드문 밤거리에서 음료수를 하나씩 쥐고 걷는 것도, 좋았다.
“나 무음이라서 답장 못 할 수도 있어.”
나는 독서실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리며 말했다. 고개를 들자, 마세준이 우두커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열두 시까지만 할까, 너 피곤해 보여.”
마세준은 지난주에 내가 코피를 조금 흘린 뒤로 나를 집에 못 보내 안달이었다. 그냥 찔끔 난 건데.
“안 피곤해. 나 방금 커피 아이스크림도 먹었잖아.”
나는 핀잔을 주듯 말했고, 마세준은 싱겁게 웃었다.
“커피 향 아이스크림.”
“그거나 그거나.”
자기는 진짜 커피 마셨다 이거지. 내가 툴툴거리자, 마세준은 말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오늘 공부 못 하게 하려고 작정했나. 아까부터 왜 저렇게 실실 웃냐.
“간다.”
나는 때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얼른 도망을 뺐다.
[지금 흘린 침은 내일의 눈물]
내 독서실 책상에 작게 붙여 놓은 종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실 독서실 안은 어둡고 적막하니 잠자기 딱 좋은 환경이라서, 의지와는 달리 졸아 버릴 때가 더러 있었다. 그걸 방지하려고 지난주에 붙여 놓은 거였다. 식상한 말이지만 그 어떤 명언보다 내게 와닿는 말이었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샤프를 손에 쥐었다. 아직 내가 뭘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외려 그게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일단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뭔가가 마음에 딱 박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사실 제일가는 원동력은 엄마와의 검은 거래였다. 기말고사 평점 3점을 올리면, 방학 때 마세준과 영국에 보내 준다고 했다. 마세준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이걸 말해 주면 마세준이 얼마나 좋아할까, 그걸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광대가 씰룩거렸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책장을 넘겼다.
왜 세계지리는 저 지경으로 쪼개져 있으며,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태어났다 죽었을까. 말들은 또 얼마나 많고 벌인 짓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머리가 팽팽 돌았다. 잠시 물이라도 마실 겸 대차게 하품을 하며 복도로 나왔는데, 물을 마시고 있던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민망함에 괜히 코를 훌쩍거리며 정수기 앞으로 갔다.
“커피는 어쩌고?”
소리를 죽이며 묻자, 마세준은 정수기 위에 놓인 컵을 들어 보였다. 하얀색 로고가 그려진 컵은 텅 비어 있었다.
“더워서 그런가, 목 타.”
그렇게 말하는 마세준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안 마시던 커피를 고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럼 이만 갈까? 안 그래도 문자 보내려고 그랬는데.”
“그래.”
“가방 챙겨서 나올게.”
마세준은 내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짐을 정돈하고 나오자, 마세준은 복도에 기대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에야 알게 된 건데, 나는 마세준 옆모습을 퍽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거의 매일 이 광경을 보는데도 아직도 볼 때마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이러고서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타면 진짜 가관이었다. 마세준 얼굴은 고사하고 마세준 신발 끈만 봐도 가슴이 다 뜨끔했다.
“안 가?”
우리는 아파트 현관 1층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나는 마세준이 가기를 기다렸지만, 마세준은 뒤를 도는 대신 제 가방을 앞으로 끌어왔다. 그러고는 두꺼운 스프링 노트를 한 권 꺼내서 내게 건넸다.
“이게 뭔데?”
“시험 범위 요약한 거야. 과목 겹치는 것만 해 뒀어.”
나는 곧은 손가락 틈에 들린 노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피곤이 묻은 마세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마세준…….”
“내일은 독서실 가지 말고 같이 공부할까. 산초도 보고 싶은데.”
내가 어색한 목소리로 우물쭈물하자, 마세준은 보드랍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마세준은 ‘갈게, 잘 자.’ 하고 뒤를 돌았다. 나는 마세준의 뒷모습을 오도카니 보다가, 뭐에 홀렸는지 마세준을 앞질러 가서 그 앞에 섰다.
“고마워. 푹 자고 내일 천천히 와. 같이 맛있는 거 먹자.”
조금 놀란 듯한 마세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괜히 얼굴이 홧홧했다. 나는 곧 엘리베이터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사람이 고맙다는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 건데, 그냥 할 말 한 건데, 왜 이렇게 쪽팔린 건지 모르겠다.
현관문을 열자, 졸린 눈을 한 산초가 현관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다리에 꼬리를 착- 얹고서.
“산초, 누나 마중 나온 거야? 아구, 예뻐.”
나는 더운 줄도 모르고 산초를 안아 들어 뽀뽀를 퍼부었다. 산초는 좋다고 크릉크릉 소리를 냈다.
찬물에 몸을 씻고는 이산초를 안고 침대에 눕자, 산초는 냉큼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 가 내 발치에 똬리를 틀었다.
분명 엄청나게 졸렸는데, 눈을 감아도 잠이 안 온다. 나는 산초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스탠드 불을 켜고는 마세준이 건넨 노트를 펼쳐 보았다.
마세준은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어 가면서 정갈하게 필기를 해 두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났대. 필통이라고는 텅 비어서 샤프밖에 안 들고 다니는 주제에. 뜬금없이 코끝이 찡했다. 빼곡한 글씨가 다 마세준 마음으로 보였다. 자기 공부나 잘하지. 뭐, 이미 잘하고는 있지만.
한 시가 다 되어 가는데, 밖에는 밤도 모르는 매미가 빽빽 울고 있었다. 내 마음도 그랬다. 밤도 모르고 쿵쾅쿵쾅 뛰었다. 다 커피 향 아이스크림 때문이다.
* * *
나는 책상 서랍에서 자그마한 종이봉투를 꺼내 손잡이를 쥐고는, 좌우로 팽팽 돌려보았다. 시계를 들여다보자 아침 11시였다. 연락이 없었다. 마세준이 이 시간까지 자고 있을 리가 없는데.
잠시 망설이던 나는 저금통을 탈탈 털었다. 꼬깃꼬깃한 지폐를 하나둘 펼쳐 보자 이만 원이 조금 안 되었다. 다행히 오백 원짜리 동전을 찾아보니 아홉 개나 되었다. 그러자 이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 마련되었다. 그걸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고는 빵집으로 갔다. 요거트 시폰 케이크가 폭신하니 맛있어 보여 그걸 골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나는 마세준네 집 초인종을 눌렀다.
“마세준, 나.”
“이잎새?”
집 안에서 마세준 목소리가 울리더니, 얼마 안 가 문이 벌컥 열렸다. 마세준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연락하고 올 걸 그랬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냉큼 마세준네 집으로 들어섰다. 내가 케이크를 뜯고 초를 꽂는 동안, 마세준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멀거니 서 있었다.
“천장 안 무너져, 앉아.”
마세준은 의자에 앉는 대신 케이크 위에 꽂힌 초를 응시했다.
“오늘 네 생일이잖아, 몰랐어?”
“어. 아빠가 미역국 끓여 놨다고 챙겨 먹으라고는 했는데…….”
나는 마세준의 손목을 잡고 식탁에 앉혔다.
“노래는 쪽팔려서 못 불러 주겠고, 알아서 기도하고 꺼.”
마세준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제 목을 만지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곱게 감긴 마세준의 눈가를 마음껏 훔쳐봤다.
얼마 안 가 마세준의 눈이 뜨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턱을 조금 치켜들었고, 마세준은 초를 불어 끄는 대신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뭐 해? 소원 다 빌었으면 얼른 꺼야지.”
“너도 소원 빌어.”
“원래 생일인 사람만 비는 건데.”
“뭐 어때.”
어설픈 설득에 넘어간 나는 주저하다 눈을 꼭 감았다. 평균 3점 이상 오르게 해 주세요. 기말고사 대박 나게 해 주세요. 마세준도요.
“다 됐어. 이제 불어.”
내가 눈을 뜨며 말하자, 마세준은 그제야 웃으며 초를 불어 껐다.
“자, 선물.”
내가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자, 마세준은 단정한 손끝으로 포장을 조심스레 풀었다.
“퍽퍽 풀어. 포장은 막 찢을수록 좋은 거랬어. 그래야 복 들어온대.”
“네가 준 거잖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꼭 가끔 저렇게 느끼한 소리를 하더라.
마세준은 곧 모습을 드러낸 연한 하늘색의 향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너, 이거 맨날 뿌려. 이번 달 용돈 탈탈 털어서 산 거란 말이야. 나 쫄쫄 굶어야 돼.”
“내가 다 사 주면 되지.”
안 그래도 다 사 주면서. 나는 마세준 손에서 향수병을 빼앗아 뚜껑을 열었다. 마세준 손목을 쥐고 한 번 칙- 하고 향수를 뿌려 줬다. 맡자마자 마세준 거다 싶은 향수였다. 청량하고 깨끗하고, 기분 좋아지는 향.
“어때? 마음에 들어?”
마세준은 가볍게 향을 맡더니,
“좋다.”
그랬다.
“그럼 됐어. 이제 빨리 케이크 먹자, 나 배고파.”
내가 플라스틱 칼을 들고 설치자, 마세준은 얼굴까지 붉혀 가며 웃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뗐다.
“그 전에 나랑 밥부터 먹어 주면 안 돼?”
네가 나랑 먹어 준 급식이 몇 낀데, 그런 걸 묻냐.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세준은 잽싸게 미역국을 데웠다. 생일이라고 아저씨가 신경을 쓰신 모양인지 냉장고에 이것저것 먹을 게 많았다. 대충 차렸는데도 한 상이였다.
나는 마세준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른 마세준 손에 칼을 쥐여 줬다. 나 혼자 두 조각을 먹어 치웠고, 마세준도 웬일인지 한 조각을 깨끗하게 해치웠다.
* * *
“마세준, 이거 어떻게 읽어?”
내가 영어 지문을 짚으며 묻자, 내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던 마세준이 손에 턱을 괸 채 나른하게 웃었다.
“왜 웃어, 어떻게 읽냐니까.”
“옛날 생각 나서.”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아저씨같이.”
내가 그렇게 핀잔을 주는데도, 마세준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안 읽어 줄 거면 말아. 사전 쳐 보면 다 나오거든?”
“Ambiguous.”
내가 강짜를 놓자, 마세준은 그제야 순순히 단어를 읽어 주었다. 그럼 뭐 하나, 뭘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Ambiguous.”
마세준이 천천히 읊어 주자, 나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가며 필기를 했다. 마세준은 그 내내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애매모호한.”
“애매…… 모호…… 한.”
나는 느릿느릿 뜻을 적고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세준이 비죽 웃기에, 나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