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 중의 균 마세균, 잠복기만 15년-9화 (9/17)

9장.

‘싫어? 싫으면 말고.’ 나도 이번에는 그런 말 없이 잠자코 마세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세준이 내 채근 없이 어떤 대답을 할는지 알고 싶었다. 마세준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영화 시간이 애매해서 저녁을 먼저 먹었다. 내가 삼겹살 타령을 해서 초저녁부터 삼겹살을 먹었는데, 마세준은 내가 싫어하는 뼈 부분을 하나하나 잘라 내 주었다. 영화를 보다 내 컵에서 포록포록 소리가 났을 때는 말없이 제 콜라를 내 손에 쥐여 주기도 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카페에 갔다. 팥빙수랑 망고 빙수 중에 고민하다가 팥빙수를 주문해 달라고 하자, 마세준은 곧 팥빙수랑 망고 빙수를 들고 나타났다. 그래 놓고는 잘 먹지도 않고 내가 먹는 걸 쳐다보기만 했다. 집에 와서 휴대폰을 보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카드 결제 내역 문자가 하나도 없었다. 고마워서 데리고 나간 건데, 또 빚을 진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이따금 둘이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특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은 암묵적으로 같이 영화를 보러 갔다. 내 다리가 모두 나은 후에도, 날씨가 좋은 날에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그런 걸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데이트가 아니면 무언가, 하고. 우리는 손도 잡지 않았고, 사귀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도 안 했다. 그런데 하는 짓은…… 딱 미호랑 김용호가 할 것 같은 일들이었다.

* * *

“엄마, 내 모자 못 봤어? 하얀 거, 챙 큰 거.”

나는 방문 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엄마에게 SOS를 청했다. 마세준은 식탁 의자에 앉아 산초를 위해 낚싯대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게 엄마가 미리미리 챙기라고 했어, 안 했어. 과자 챙겨 담을 시간에 옷이랑 제대로 챙기랬지.”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붙박이장과 서랍을 탈탈 털어서 내 모자를 찾아 주었다. 나는 가방에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잘 담아 여미고는, 거실로 나갔다.

“마세준, 버스 시간 몇 시랬지?”

“9시 40분.”

나는 휴대폰으로 남은 시간을 확인하다가 마세준을 돌아봤다. 마세준은 하얀 면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당장 청량음료 CF를 찍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땀 한 방울 안 흘리게 생겼다. 쳇.

우리는 신발을 신고 현관에서 한참 동안 산초에게 인사를 했다.

“산초, 누나 갔다 올게? 맛있는 거 사 올 테니까 신나게 놀고 있어? 엄마 아빠한테 매일매일 놀아 달라고 해?”

산초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무려 이틀 동안 누나랑 형아를 못 보는데…….

“엄마, 산초 꼭 놀아 줘야 해. 안 그러면 스트레스받아.”

“어휴, 여긴 걱정하지 말고 너나 정신 단디 붙들어. 물 들어갈 땐 선크림 허옇게 발라야 해. 안 그러면 아무 소용 없어. 깊은 데 들어가지 말고!”

내가 투덜투덜대자, 엄마는 내 주머니에 만 원짜리 몇 장을 찔러 넣어 주었다.

“카드 챙겼지? 가다 세준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 터미널 앞 청과에서 복숭아 꼭 사 가고. 응? 백도로.”

“알겠어. 엄마 그거 일곱 번째 말해.”

“걱정이 돼서 그렇지.”

엄마는 민망하다는 듯 웃고는, 산초를 안아 올렸다.

“세준아, 모쪼록 쉬는 거니까 재미있게 놀고 와. 우리 잎새 잘 좀 부탁하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맨날 나만 뭐라 그래. 마세준한테는 좋은 말만 하고.”

“어휴, 너는 못 미덥고 세준이는 미더우니 그렇지!”

쳇, 나는 산초 이마를 한 번 쓰다듬고는 뒤를 돌았다.

“엄마, 갔다 올게.”

“그래, 차 조심 물 조심 사람 조심!”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마세준, 충전기랑 튜브랑 챙겼어?”

“어.”

유비무환이라고, 마음이 든든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걸음은 사뿐하기만 했다. 우리는 강원도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짧은 피서를 가는 중이었다. 외할머니가 나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노래를 하셨는데, 엄마가 통 시간이 안 나서 결국 마세준이랑 같이 가게 된 거다.

“마세준, 거기 도착하면 오후 1시 정도거든? 그러니까 터미널에서 미리 간식이라도 먹고 가자.”

나는 곧 도착한 시내버스에 발을 디디며 말했고, 뒤따라 버스에 오른 마세준은 내 옆자리에 앉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우리는 터미널에서 샌드위치랑 사이다를 먹고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안쪽에 앉아.”

마세준은 짐을 좌석 위로 올리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서, 어느덧 자리에 앉은 마세준에게 한쪽을 건넸다.

“자, 너 또 이어폰 안 들고 왔지?”

마세준은 말없이 이어폰을 건네받고는 제 오른쪽 귀에 그걸 꽂았다.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가요를 반쯤 들었을 즈음 버스가 출발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 번 화장실을 갔다가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도착이었다. 엄마의 간곡한 청대로, 우리는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백도 복숭아를 두 봉지나 샀다. 외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또 20분 정도를 달리면 외할머니네 동네 입구가 나온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 후덥지근한 버스에서, 나는 차창을 활짝 열었다. 미지근하지만 강한 바람이 땀을 조금 식혀 주었다.

낡은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어 서자, 우리는 서둘러 내렸다. 놓고 내린 게 없는지 짐을 한 번 확인한 뒤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 족히 10분은 걸어야 한다.

나는 달랑 짐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고, 마세준은 짐 가방에 복숭아까지 들고 있었다. 나는 양손에 까만 봉지를 들고 있는 마세준을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까 싶어서 복숭아 하나를 꺼냈다. 티셔츠를 쥐고 쓱싹쓱싹 문지르고는, 마세준을 마주 보고 서서 거꾸로 걸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잠시 망설이다가 마세준의 입가로 복숭아를 내밀었다. 마세준은 웃으면서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나도 그걸 한입 먹었다. 무른 과육 틈으로 달큼한 과즙이 흐르기에 얼른 손바닥으로 입가를 훔쳤다.

사이좋게 복숭아를 나눠 먹으며 걸었더니, 금세 저 멀리 외할머니네 집이 보였다.

“할머니!”

“잎새야, 내 새끼. 어머나, 세준이가 아니냐. 친구랑 온다더니 그것이 세준이였어?”

그렇게 크게 외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가 고쟁이 차림으로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나는 얼른 달려가서 할머니를 껴안았다.

“할머니, 잎새 왔어요.”

“아이고, 설에 보고 이것이 얼마 만이냐, 우리 아기.”

“그러니까,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나는 언제부턴가 나보다 작아진 할머니 품에 폭삭 안겨서 투정을 부렸다.

“할머님, 안녕하셨어요.”

뒤에서 마세준 목소리가 울렸다.

“아이고, 올 설에 한 번 못 봤다고 그새 이러고 컸어 그래? 인제 참말로 장가가도 되겠어. 잘 왔다, 잘 왔어.”

할머니는 마세준 손을 덥석 잡아 문지르고는, 친손주처럼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할머니는 마세준을 엄청나게 예뻐했다. 그럴 만도 했다. 명절마다 자식들 번거롭다고 할머니가 직접 서울로 올라오시면, 그때마다 마세준도 보고 가셨으니까.

“들어가, 할미가 밥상 차려 놨다. 밥부터들 먹어.”

할머니는 무겁게시리 무슨 복숭아를 이렇게 많이 사 왔느냐고, 노인네 배통이 그렇게 큰 줄 알았느냐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함박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들고 오느라 고생했다며 마세준 손을 또 잡아 주었다.

할머니표 밥상은 소박한데 푸짐했다. 있는 나물 없는 나물 다 꺼내어 놓고, 젓갈에 조기에 따끈한 새 밥에, 몇 시간을 고았는지 뽀얗다 못해 하얀 사골국까지 상에 올라 있었다.

“할머니, 우리 완전 배고팠어요. 잘 먹겠습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래. 어여들 먹어.”

할머니는 내 숟가락과 마세준 숟가락에 번갈아 오징어젓이며 창난젓이며 찬을 올려 주었다. 마세준은 사양도 않고 그걸 잘도 받아먹었다. 해산물 잘 먹지도 않으면서……. 나는 그게 고마워서, 마세준이 좋아하는 메추리알 장조림을 앞으로 놔 주었다. 마세준이 자꾸 물끄러미 보는 것 같아서, 그 이후로는 밥을 먹는 내내 밥그릇에서 눈을 안 뗐다.

“한 그릇 더 주랴?”

할머니가 뿌듯한 눈으로 그렇게 묻자, 마세준은 ‘네. 제가 퍼 올게요.’ 그러고는 부엌에 가서 내 밥까지 더 퍼 왔다. 물귀신 작전이냐? 여기서 어떻게 더 먹어?

그 많은 밥을 기어코 다 먹은 뒤 설거지까지 마친 우리는 평상에 나란히 뻗듯이 누워 있었다. 배가 너무 불러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똥강아지들, 곶감 먹어라.”

이번에는 곶감과 식혜였다. 할머니가 손수 만들었을 식혜를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어서, 나는 얼른 일어나 앉아 식혜를 들이켰다. 마세준을 흘끔 보자, 마세준도 어느덧 식혜 잔을 깨끗하게 비워 놓은 후였다.

“냇가에 간담서?”

“네. 슬슬 옷 갈아입고 가 보려고요.”

“먹을 걸 좀 싸 주랴? 물에서 놀다 보면은 금세 배가 고플 것인데.”

할머니는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얼른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지금도 배 터질 것 같아요.”

나는 팔이며 다리며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는, 모자 끈을 꽉 조여 맸다. 마당으로 나가자, 마세준이 튜브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기어코 할머니가 챙겨 준 먹을거리가 있었다. 밀폐 용기에 들어 있는 건 먹기 좋게 썰어 둔 수박과 참외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수박에 씨가 하나도 없어서 괜히 코가 시큰했다.

“할머니, 내가 다슬기 많이 잡아 올게요. 저녁에 다슬깃국 끓여 먹어요.”

“그려, 많이 잡아 와.”

할머니는 잔인할 만큼 커다란 빨간 플라스틱 채를 두 개 건넸다. 이걸 가득 다 채워 오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우리는 설렁설렁 부러 돌아 걸었다. 너무 배가 불러서, 이대로 물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을 곳곳에는 여름이 묻어 있었다. 쨍한 매미 소리, 비현실적으로 맑고 높은 하늘.

“마세준, 너 얘 이름이 뭔지 알아?”

나는 노란 꽃잎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마세준을 향해 물었다. 마세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뽀리뱅이. 이름 귀엽지?”

마세준은 싱겁게 웃으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게 마을 어귀를 한 번 돌며, 내가 이름을 아는 들꽃 앞에서만 멈춰 서서 아는 체를 했다. 마세준은 그때마다 별소리 없이 옅게 웃었다.

어느덧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부른 배도 얼추 꺼진 상태라, 우리는 그대로 냇가로 향했다. 하얗게 마른 바위 위에 커다란 수건을 두 장 던져두고는, 플라스틱 채를 달랑 들고 냉큼 수면 아래로 발을 담갔다.

“읏, 차가워.”

나는 몸을 달달 떨면서도 한사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종아리 높이까지 들어가 바위틈을 헤집자, 다슬기가 성기게 붙어 있었다. 주변을 살피자, 마세준도 어느덧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마세준, 이거 봐 봐. 이게 다 다슬기야. 이렇게 뽁 따면 돼. 어? 송사리다! 여기 봐 봐. 이거 보여? 여기, 여기 이 올챙이 같은 거. 이게 송사리야.”

“송살이?”

“송사리. 라면 사리 할 때 사리. 아무튼, 다슬기 많이 잡아가자. 할머니가 이거 넣고 된장국 끓여 주는데 진짜 맛있어. 야, 내기할까?”

나는 마세준을 보며 호기롭게 물었다.

“무슨 내기.”

“다슬기 많이 잡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그러든가.”

마세준은 시큰둥한 대답과는 달리, 전생에 다슬기에 한이라도 진 사람처럼 다슬기를 잡기 시작했다. 결국, 나의 완패였다. 나는 마세준을 살짝 노려보다가, 얕은 물가에 플라스틱 채를 담가 두고는 튜브를 허리춤에 꼈다.

마세준은 내 튜브를 밀어 주었고, 나는 배은망덕하게도 마세준에게 물을 뿌렸다. 가끔은 물방울 틈으로 무지개가 생기기도 했다. 그 아래 서서 웃고 있는 마세준은 여름보다 더 여름 같았다.

이번에는 마세준에게 안아 내려 달라 조르는 대신, 나는 마세준더러 얕은 물가로 끌고 가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직접 튜브에서 내렸다.

우리는 짧은 물놀이를 마치고 뜨끈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머리 위로 드리운 나무는 더없이 싱그러웠고,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쳐 갔다. 씨가 하나도 없는 수박을 맛있게 먹고는, 볕에 뜨거워진 참외까지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물에 들어갔다. 할머니의 무언의 특명을 잊지 않은 우리는 다슬기와의 전쟁에 재돌입했다.

이미 다 젖어 별 소용도 없는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하늘이 붉게 물들 때가 되어서야 다슬기를 품에 안고 할머니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늦어 다슬깃국은 내일 먹기로 하고, 할머니가 미리 차려 놓은 저녁을 허겁지겁 먹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먼저 몸을 씻고 나오자, 마세준이 평상에 앉아 할머니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 앞에 가 앉았다.

“할머니, 입이 귀에 가 있네? 이제 잎새보다 마세준이 더 좋아요?”

“어째 그러고 섭한 얘기를 해?”

할머니는 소녀처럼 깜짝 놀란 얼굴을 해 보였고, 나는 깔깔 웃으면서 마세준을 물렸다. ‘감기 걸려. 가서 씻어.’ 그러고는 할머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할머니, 저 오니까 좋죠?”

“그러믄, 좋지. 좋고말고.”

“더 자주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방학이 너무 짧아. 이제 서울 가면 또 공부하러 학교 가야 해요. 방학 같지도 않아.”

“할미가 우리 잎새 보러 가면 되지?”

할머니는 반쯤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짜로? 언제 올 건데요?”

“아 언제기는, 열 밤 자고 가면 되지.”

나는 안마를 하다 말고 할머니의 목을 답삭 껴안았다. 어릴 때 할머니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하면, 꼭 저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잎새야, 할미 열 밤 자면 간다.’

할머니는 모기향을 몇 개 피워 주고는 졸린다고 먼저 방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고, 나는 이름 모를 새의 호젓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마세준이 다시 평상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내 옆에 와 앉는 마세준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나도 몰래 마세준의 어깨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하늘색 비누 냄새.

“나랑 똑같은 냄새 난다.”

마세준은 피식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었다. 나는 그 웃음에 괜히 속이 간지러워서 무릎을 껴안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울 하늘보다 별이 한결 많았다. 예전에는 더 많았는데, 올 때마다 별이 줄어드는 것 같다. 고요한 평온함에 어쩐지 기분이 나른해졌다. 손으로 평상을 짚으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별을 들여다보던 나는 돌연 마세준을 돌아봤다. 알고 저러는 건가. 마세준의 손끝이 내 손끝에 살짝 닿아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잠시 마세준을 그대로 두었다. 찌르르한 손끝과 쿵쾅쿵쾅 뛰는 가슴이 낯설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손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마세준은 곧 대놓고 내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손이 좀 닿았을 뿐인데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속이 어지러웠다. 이건 뭘까, 손을 잡은 것도, 안 잡은 것도 아니다. 문득 우리 사이가 이렇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마세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용기를 내서 마세준을 돌아보자,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마세준의 목울대가 울컥 움직였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개운하게 씻은 보람도 없이 뜨끔하니 곧 땀이 날 것만 같았다. 참다못한 내가 손을 빼려 하자, 마세준은 덜컥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소원 들어준댔잖아.”

이번에는 귀 옆에서 심장 박동이 쿵쿵 울렸다. 내 입으로 한 소리니 부정을 할 수도 없었고, 좋다고 나서서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손잡아 줘.”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이며 마세준 손에 깍지를 마주 꼈다. 마세준의 손이 뜨거운 게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나와 같은 이유에서였는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좀 더 그럴싸한 소원도 많은데, 고작 손잡아 달라고 조르는 마세준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또 가슴이 멋대로 뛰었다.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마세준의 얼굴을, 나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라도 마세준이 내가 침 삼키는 소리를 들었을까 봐 무서웠다. 그래도 손을 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마세준은 별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내 한 번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거였다. 나는 그걸 깨닫자마자 별안간 깍지를 풀었다.

“이, 이제 됐지. 모기가 있어서…….”

“이잎새, 나 여기 다쳤어.”

내가 잽싸게 슬리퍼를 신으려 하자, 마세준은 여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갈 거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마세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다슬기를 따다 다쳤는지 무릎에 피가 조금 굳어 있었다. 그러게 그렇게 죽자사자 다슬기를 따는 게 어딨어. 그것도 손 한번 잡겠다고.

“약 안 발라 줄 거야?”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

덩치는 산만해 가지고 투정이야. 나는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으며 투덜댔다. 할머니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방으로 가서는, TV장 아래에서 구급 약품함을 꺼냈다. 밴드랑 빨간약을 가지고 걸음을 떼는데, 마치 걷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어색했다. 평상에 다시 궁둥이를 붙이고 앉으려다, 나는 마세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일찍 말했어야지. 밥 먹고 씻는 동안 약을 발라도 열댓 번은 발랐겠다. 소독을 바로바로 해야 얼른 낫는 거 몰라? 흉 지면 어쩌려고 그래.”

마세준은 대답 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디 봐.”

나는 뚜껑 주변으로 약이 빨갛게 굳은 소독약 뚜껑을 열고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마세준에게 들고 있으라고 했다.

“많이 아파?”

“아니.”

내가 호- 입김을 불면서 약을 발라 주자, 마세준은 싱긋 웃었다.

“이잎새.”

“왜.”

“좋다. 하루 종일 같이 있으니까.”

나는 밴드 껍데기를 뜯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쳤어.

“네, 네가 붙여.”

결국, 아무 데나 밴드를 던져두고는 도망치듯 할머니 방으로 갔다. 모기장을 열고는 표면이 까끌까끌한 이불을 걷고 할머니 곁에 누웠다. 마세준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멀거니 누워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봤다. 마세준이랑 밥 먹고, 길 걷고, 그건 늘 하던 거였는데, 뭐가 그렇게 달라졌다고 잠까지 안 오나 싶어서.

일단, 여긴 서울이 아니었다. 하늘에 별이 많았고, 뽀리뱅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유가 될까. 그렇지 않다는 걸 나도 알았다.

오늘 마세준은 할머니가 올려 주는 반찬을 군말 없이 먹었고, 성실하게 튜브를 밀어 줬고,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그래, 다른 건 그것뿐이다. 나는 터질 듯한 얼굴을 부여잡았다. ‘좋다. 하루 종일 같이 있으니까.’ 그게 마치, 내가 좋다는 말로 들렸다.

* * *

나는 밤새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팔이고 다리고 오만 군데 모기한테 뜯겨서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정작 더 간지러웠던 건 마세준과 닿았던 손끝이었지만.

그랬는데, 닭 울음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뜬 새벽부터 멀뚱히 눈을 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 시간도 제대로 못 잔 것 같다.

할머니가 바지런히 일어나 씻는 동안에도, 나는 몸을 돌리고 누워서 자는 체를 했다. 일어나서 마세준을 어떻게 봐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잎새야, 아가, 인나서 세준이랑 가 튀김 가루 하나 사 와. 할미가 지짐이 맛나게 해줄 테니까. 응?”

나는 뒤로 돌아 눈두덩을 비비며, 문간에 서 있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눈이 뻑뻑했다.

“할머님, 잎새 그냥 두세요. 제가 다녀올게요.”

언제 일어났는지, 마세준이 불쑥 심부름을 자처하고 있었다.

“나 일어났어.”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자꾸 미뤄 봐야 마세준 얼굴 보기가 더 민망해진다. 나는 모기장을 북- 열고는 잠이 모자라 퀴퀴해진 얼굴로 방을 나섰다.

마세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화장실로 가 찬물로 얼굴을 벅벅 씻었다. 물에 젖은 손으로 뺨을 톡톡 쳤다. 호랑이 굴에 잡혀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댔다. 결연한 눈빛으로 양치질을 하고, 팔뚝까지 흘러내린 물을 수건으로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작은 거실에는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마세준이 서 있었다.

“할머니, 우리 갔다 올게요. 튀김 가루라고 그랬죠? 마세준, 가자.”

“아가, 이거 들고 가. 응?”

주머니에 지폐를 구겨 넣는데, 할머니가 커다란 부채를 내 손에 쥐여 줬다. 나는 헤벌쭉 웃으며 할머니를 한 번 껴안았다.

마세준은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우리는 동네에 단 하나뿐인 슈퍼마켓을 향해 걸었다. 할머니가 쥐여 준 플라스틱 부채는 족히 20년은 된 것 같았다. 아마도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90년대 화장품 회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마세준, 가위바위보 할래? 진 사람이 부채질 50번 해 주기.”

내가 마세준을 향해 묻자, 마세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끊임없이 부채질을 받았음에도 땀이 삐질삐질 배어 나왔다. 확실히 팔에 와 닿는 공기가 어제의 그것보다 더 축축하고 끈적했다. 아니나 다를까, 튀김 가루를 사서 나오는데 쏴아아- 하고 비가 쏟아졌다. 맞으면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드센 빗줄기였다. 어쩌지.

“마세준, 이거 소나기 같지?”

나는 녹슨 슬레이트 처마 아래로 손을 뻗어서, 수도꼭지라도 틀어 놓은 것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손을 적셔 보았다.

“글쎄.”

마세준은 슈퍼마켓 앞 평상에 앉아서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하기야, 어차피 이 비를 뚫고는 못 간다. 고스란히 맞았다가는 진짜 속옷까지 홀딱 젖을 게 뻔했다.

우리는 하늘색 장판이 덮인 평상 위에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제법 시원한 소리였다. 길 건너 우거진 나무들이 비를 맞는 모습도 운치 있었고, 마세준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따금 마세준의 얼굴을 훔쳐봤다. 그럴 때마다 마세준은 나를 돌아봤고, 나는 잽싸게 시선을 돌리고는 했다.

다행히 비는 얼마 안 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먹구름이 가시고, 따가운 햇볕이 젖은 땅 위로 쏟아졌다.

“이제 갈까?”

내가 마세준을 쳐다보며 묻자, 마세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잠잠했던 매미 울음이 한낮을 불태우며 쨍하니 퍼지고 있었다. 왜일까, 마세준에게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마세준은 왜 나를 저렇게 쳐다볼까. 목이라도 마른 사람처럼.

“아이스크림 먹을래? 이천 원 남았는데.”

나는 허름한 지폐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세준은 내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세준은 쭈쭈바를 골랐고, 내가 요구하기도 전에 뚜껑을 따서 내게 건넸다. 아이스크림은 여러 번 녹았다 얼기를 반복했는지 단물이 찐득하니 엉겨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마세준의 입가로 내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맛있어. 먹어 봐.”

마세준은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더니, 또 그 옛날처럼 내가 베어 문 곳을 보란 듯이 깨물었다. 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가끔씩 마세준이 얼마나 뻔뻔해지는지를 홀라당 잊고 있었다.

“이제 비 안 와, 가자.”

내가 입매를 굳히며 말하자, 마세준은 군말 없이 나를 따라 일어섰다.

* * *

할머니는 호박을 쫑쫑 썰어서 커다란 부침개를 해 주었고, 우리는 거기에 다슬깃국까지 곁들여서 완벽한 식사를 했다. 아침을 먹고 정리까지 했는데도 시계는 갓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뭘 하면서 시간을 때우나 싶었는데, 할머니가 옥수수를 따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마세준이 냉큼 그러겠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고쟁이를 입고 옆집의 옥수수밭으로 끌려갔다. 마세준은 빨간 꽃이 그려진 까만 고쟁이를 건네받았는데, 입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풀독 오른다는 할머니 성화에 별수 없이 그걸 다리에 끼워 넣었다. 바지가 정강이 위로 댕강 올라온 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내가 주는 고쟁이는 곧 죽어도 못 입는다더니.

마세준은 어제 다슬기를 잡던 기세로 옥수수를 땄고, 커다란 쌀자루를 순식간에 채웠다. 할머니는 옆집 할머니한테 입이 마르도록 마세준을 칭찬했다. 옆에 친손주를 놔두고…….

할머니가 갓 쪄낸 뜨거운 옥수수를 바구니 가득 들고 마을회관에 간다고 하자, 마세준은 냉큼 그걸 받아 들었다. 그동안 나는 할머니 집 한쪽의 오두막에서 마세준을 기다렸다. 통 기다려도 안 오기에 뜨끈한 옥수수를 한 개 반이나 주워 먹고는 발라당 누워서 낮잠을 잤다.

찌르라니 우는 매미 소리에 눈을 뜨자, 벌써 대낮이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마세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침에 마세준이 수백 번 흔들어 주었던 부채를 손에 쥐고는, 천천히 마세준을 향해 부채질을 했다. 얘도 어젯밤에 나처럼 잠을 설친 걸까. 깨워서 냇가에 한 번 더 가자 그럴까 하다,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 그냥 두었다.

저녁에는 할머니랑 같이 수제비를 해 먹었다. 복숭아를 듬뿍 넣고 화채도 해 먹었다. 할머니는 찹쌀가루를 보여 주며 내일은 화전을 해 준다고 했다. 나는 일찍이 찬물에 몸을 씻고는 털털털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렸다. 샤워를 마친 마세준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고, 나는 조용히 회전 버튼을 눌렀다. 서늘함에 몸이 달달 떨릴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나 먼저 잔다.”

그러고는 할머니 방으로 내뺐다. 별수 없다. 이러다 또 손이라도 잡자 그러면 어떡해.

* * *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표 고니 풀 화전에다 밥을 먹었다. 마세준은 화전을 처음 먹어 본다고 했고, 할머니는 그게 안타까웠는지 화전을 열 장도 넘게 구워 주었다.

내가 볼록 부푼 배를 두드릴 즈음, 마세준은 내게 구원의 눈길을 보내왔다. 나는 당최 거절이란 걸 모르는 마세준이 딱해서, 작은 거로 두 장을 더 집어 먹었다. 게다가 마세준 몫의 식혜도 반쯤 마셔 주었다.

아침 먹은 걸 서둘러 정리하고는, 방으로 가 어젯밤에 미리 챙겨 둔 짐을 챙겨 들었다. 할머니를 혼자 두고 서울로 갈 생각을 하니 서글펐다. 하지만 내일모레면 또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방을 한 번 빙 둘러보고는 마당으로 갔다.

“조심히들 가, 응? 가거든 이거 삶아 먹고.”

할머니는 우리가 직접 딴 생옥수수를 하나 가득 싸 주었다.

“할머니, 이걸 다 어떻게 먹어요? 너무 많은데…….”

“세 식구씩 두 집이면 삼 일이면 동이 날 것인데, 무엇이 걱정이야?”

“할머님,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마세준은 사양도 하지 않고 그걸 그대로 받아 들었다. 올 추석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는, 아쉬운 포옹을 뒤로한 채 뭉클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원래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할머니는 또 저 집에서 혼자 잠들고, 혼자 일어나겠지. 할머니가 우리 집에 묵었다 돌아가면 갑자기 거실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이번에는 할머니가 혼자 그 쓸쓸함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꾸 속이 상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내가 기어코 작게 훌쩍이자, 마세준은 어디서 났는지 깨끗한 티슈를 건네주었다. 나는 팽- 코를 풀었다.

* * *

“마세준, 어땠어? 우리 할머니네 동네.”

버스는 이제 막 고속도로로 들어서고 있었고,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마세준에게 물었다.

“좋았어.”

“에게, 그게 다냐?”

어딘가 성의 없는 답변이었다. 돌아보며 힐난하듯 되묻자, 마세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술을 뗐다.

“나중에 우리 할아버지한테도 같이 가자.”

“쳇, 거길 어떻게 가냐.”

“왜, 가면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주 안 될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마세준이 가면 된다고 하니까 진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세준이랑 간다 그러면 엄마도 보내 주지 않을까. 내가 그 핑계가 아니면 영국을 언제 가 보겠어.

“그러면 겨울방학에는 거기 갈까?”

나는 마세준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네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고, 마세준은 내 물음이 마음에 든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

눈을 떠보니, 이어폰이 내 양쪽 귀에 모두 꽂혀 있었다. 나는 잠시 음악을 정지시키고는, 좌석에 기대 잠든 마세준을 바라봤다. 마세준 무릎에 붙은 밴드를 보다가, 곱게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올려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 가까워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마세준이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낯설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그랬다. 내가 알지 못했던, 어쩌면 보지 않으려 했던 마세준을 뒤늦게 마주한 느낌이었다.

열다섯의 나와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그게 버겁거나 두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세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거나 마세준의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살짝 닿아 있는 다리를 구태여 떼어 앉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음악을 트는 대신, 마세준의 얼굴을 이따금 돌아봤다. 그러다, 그동안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문득 깨달았다. 남자 마세준과 손을 잡는다고 해서 내 친구 마세준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 옆에 마세준이 앉아 있듯이.

두 마세준이 어디까지 공존할 수 있을까. 그걸 궁리하려다, 그냥 눈을 감고 볼륨을 키웠다. 그건 내가 셈해 보거나 점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버스가 터미널에 들어서자, 나는 마세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마세준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반쯤 잠에 빠진 눈으로 날 보며 살며시 웃었다. 나는 괜히 창밖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버스가 완전히 멈추어 서자, 마세준은 재빨리 옥수수부터 챙겨 들었다.

“마세준, 너 왜 나 따라와. 너네 집 안 가?”

택시가 우리 동 앞에 선 것까지는 좋은데, 얘가 집에를 안 간다.

“나 산초 보고 싶어.”

마세준은 그렇게 말하며 대뜸 1층 현관문을 통과하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저렇게 말하니까 내가 적극적으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친히 우리 집에 들어온 마세준은 부엌에 옥수수를 내려놓았다. 싱크대로 가 손까지 씻고는 달랑 이산초를 껴안았다.

“산초, 형아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야, 얼렁뚱땅 눌러앉지 말고 얼른 가. 나 땀나서 찝찝하단 말이야. 씻어야 돼.”

이산초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마세준을 쫓아내자니 좀 미안했지만, 나도 좀 쉬고 봐야 했다. 마세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산초 이마에 뽀뽀를 몇 번 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렇게 마세준을 쫓아내듯 몰아내고 나니, 이제야 좀 숨을 편히 쉴 것 같았다. 식탁에 앉아서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냉수라도 한 잔 주고 내보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덩그러니 놓인 옥수수 자루는, 대충 보기에도 꽤 무거워 보였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비비는 산초를 안아 올려 대충 만져 주고는, 찬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로 달려갔다.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는데, 마세준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는 게 생각났다. 나는 주저 없이 마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세준이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아직도 마세준에게 <우리 잎새>일까, 아니면…….

-어.

그 짧은 대답이 왜 그렇게 다정하게 들릴까. ‘이잎새?’ 마세준이 그렇게 다시 물을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외할머니 댁 같이 가 줘서 고맙다고. 나 잔다.”

그러고는 덥석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옆으로 누워서 멀뚱히 눈을 뜨고 있는데 화면이 깜빡였다.

[잘 자]

마세준이었다. 그걸 보고는 혼자 손부채질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미친 모양이었다. 그 말이 뭐라고,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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