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 중의 균 마세균, 잠복기만 15년-8화 (8/17)

8장.

3월 2일, 눈을 떴는데 사방이 푸르뎅뎅했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린 상태로 방문을 열자, 식탁에 앉아 있는 마세준이 보였다. 대충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욕실로 갔다. 욕실 문을 닫는 순간까지 마세준의 시선이 느껴졌다.

거울을 보자마자, 마세준이 저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머리 꼴이 말이 아니었다. 대충 빗질을 하고는 양치를 했다. 그러다 순간 화딱지가 났다. 아직 해도 안 떴다. 그런데 학교라니. 말도 안 된다.

“이잎새, 또 세월아 네월아 해 너!”

어푸어푸 세수하는 틈으로 엄마의 잔소리가 들렸다. 쳇, 뭘 얼마나 늑장을 부렸다고 그래.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마세준이 졸업 선물이라며 영국에서 사다 준 잠옷은 거의 내 몸에 박제되다시피 했다. 촉감이 너무 좋아서 세탁하는 날을 빼고는 거의 매일 밤 그걸 입고 잔다.

아쉬운 마음으로 잠옷을 벗고는, 까맣고 도톰한 스타킹을 신었다. 낯선 새 교복도 껴입었다. 스킨로션을 꼼꼼히 바르고, 미호가 선물해 준 틴트도 톡톡 발랐다. 막상 바르고 보니 색이 그다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티슈를 뽑아 드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얼씨구, 이잎새. 그건 또 어디서 났대? 얘 좀 봐, 고등학생 됐다고 벌써 그런 데 손을 대네. 웃겨.”

“안 그래도 지우려고 그랬어…….”

“기왕 바르는 거 잘 좀 찍어 발라 봐. 다 삐져나왔네.”

풀이 죽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엄마는 깔깔깔 웃으면서도 티슈로 내 입가를 정돈해 줬다.

“고생해 바른 걸 왜 지워? 그나저나 우리 이잎새 다 컸네. 쥐방울만 한 게 엄마 립스틱 뭉개 먹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 애들은 이런 거 다 해. 막 섀도우도 바르고 그러는데, 나 정도면 아무것도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시겠지.”

엄마는 내 등을 살살 밀며 거실로 이끌었다.

“밥 먹어. 첫날부터 밥 굶으면 못써.”

격하게 동의하는 바라, 나는 얼른 식탁으로 가 앉았다. 마세준은 그새 밥을 다 먹었는지, 소파 앞에서 산초랑 놀아 주느라 바빴다.

“산초, 이산초. 거기 아닌데, 여기 있는데.”

마세준은 쥐돌이를 던지는 척하면서 손에 숨기고는 산초를 약 올렸다. 벌써 저 멀리 가 있던 산초는 엎드려 엉덩이를 씰룩거리더니, 빛의 속도로 날아가 쥐돌이를 낚아챘다. 마세준은 웃으면서 산초를 안아 올렸다.

“이산초, 이리 와. 뽀뽀. 형아 뽀뽀.”

나는 거기까지 듣고는, 우유 잔을 쥐며 식탁 위로 정신을 옮겨 왔다. 식탁 중앙에는 웬 영문 모를 케이크가 올라와 있었다.

“엄마, 웬 케이크?”

“세준이가 오늘 들고 왔어. 잎새 너 고등학생 된 기념이라고 세준네 엄마가 챙겨 보냈네. 섬세하기도 하지. 세준이 쟤가 괜히 다정한 게 아니야.”

“오오.”

나는 케이크를 보며 입맛을 다셨고, 엄마는 잽싸게 ‘습’ 소리를 냈다.

“아침부터 먹고 먹어.”

“케이크 먹고 싶은데…….”

‘습’ 소리가 한 번 더 울리고서야, 나는 식빵을 손에 쥐었다. 쳇, 이거나 그거나, 둘 다 빵인 건 똑같은데!

* * *

우리가 배정받은 고등학교는 집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아주 덥거나 추운 날이 아니고서야 설렁설렁 걸어가기에 딱 좋은 거리였다. 버스를 두 개나 타야 했던 중학생 때에 비교하자면 감지덕지였다.

“야, 너 몇 반이랬지?”

나는 가방끈을 한 번 끌어 올리며 마세준에게 물었다. 이제는 세상이 좋아져서 본인이 몇 반인지를 미리 알아볼 수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귀찮아서 어젯밤에서야 그걸 확인했다. 내가 배정된 반은 6반이었다.

“6반.”

“헐, 또 같은 반이네.”

5학년, 6학년, 1학년, 3학년, 1학년. 벌써 5년째다. 내가 손가락을 접어 가며 숫자를 세자, 마세준은 뚱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또 왜 저래?

우리는 앞뒤로 같이 앉았다. 또 짝지어 앉았다가는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몰라 걱정했는데 마세준이 알아서 내 뒤로 가 앉았다. 낯선 교실 분위기가 영 어색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미호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분위기 어때???]

{그냥저냥. 나 마세준이랑 같은 반 됐어.}

나는 미호한테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고는 가방을 뒤적이는데, 필통이 없었다. 나도 참, 첫날부터 정신을 어디 빼놓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마세준, 나 샤프 하나만.”

나는 마세준을 돌아보며 샤프를 요구했고, 멀뚱히 앉아 있던 마세준은 곧 까만 필통을 꺼내더니 통째로 내게 넘겼다. 그때 교실 뒷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누구더라, 싶던 와중에, 번뜩 생각이 났다. 최규훈이었다.

“오, 마세준. 헐, 이잎새?”

최규훈은 마세준 뒤통수만 보고도 마세준을 알아봤고, 연이어 그 앞에 앉은 나를 보고는 더 놀란 눈치였다. 나는 얼굴에 화색을 띤 채 최규훈이랑 하이파이브를 했다.

“최규훈, 오랜만.”

“너네 아직까지 붙어 다녀? 어떻게 반까지 붙었냐.”

“원래 악연이 더 질기댔어.”

내가 툴툴대자, 마세준이 잠시 나를 쳐다봤다. 최규훈은 덜커덩 소리를 내며 마세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됐네.]

다시 앞을 향해 앉자, 미호한테 그렇게 답장이 와 있었다.

* * *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생활이랑은 비교가 안 되게 빡셌다. 다른 어휘로는 설명이 안 된다. 빡셌다. 일단, 가장 최악은 야간 자율 학습이었다. 말이 자율이지, 합당한 사유가 없이는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통감한 사회의 부조리였다. 결국, 나는 과외가 있는 월요일, 목요일을 제외하고는 꼼짝없이 야자를 하게 되었다. 월, 목은 마세준 없이 먼저 집에 갔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나는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서 홀로 인도를 걷고 있었고, 순식간에 발목이 꺾이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억울한 표정으로 발치를 보자, 불룩 튀어나와 있는 보도블록이 보였다. 아이 씨, 볼품없게 하필 저런 데 걸려서 넘어지냐.

냉큼 일어서려 했는데, 왼쪽 발목이 아팠다. 흔히 넘어져 시큰거리는 거랑은 달랐다.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쪽이고 뭐고, 아파서 꼼짝도 못 하겠다.

당장 엄마한테 전화했지만, 엄마는 받지 않았다. 얄팍한 희망을 품고 아빠에게 전화를 해 봤지만, 이번에는 받기도 전에 끊겼다. 또 회의니 뭐니 하는가 보다. 어쩌지. 시간을 확인한 나는 결국 마지막 구원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만다행으로 아직 쉬는 시간이었다.

“마세준, 나 넘어졌는데 발 뼜나 봐. 못 걷겠어. 엄마 아빠가 전화도 안 받아.”

-어디야.

“나 여기, 문구점 앞에.”

마세준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통화를 끊었다. 슬쩍 왼쪽 발목을 들여다봤는데, 기분 탓인지 괜히 퉁퉁 부어오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망했다, 과외 숙제도 다 못 했는데……. 집에 가자마자 쏜살같이 하려고 그랬는데. 그렇게 망연자실해 늘어져 있던 차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잎새.”

마세준이었다. 엄청 빨리 왔네. 숨을 거칠게 들이쉬는 모습을 보자, 나는 괜히 민망해서 푸스스 웃었다. 마세준은 실내화 차림이었다.

“그 꼴을 해서는 웃음이 나오냐.”

마세준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꽤 진지한 눈빛으로 내 다리를 살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모르겠어. 여기하고 여기하고, 그리고 발목.”

나는 손목과 무릎, 왼쪽 발목을 차례대로 보여 주며 말했다.

“잘 아네. 잘 알면서 뭘 모른대.”

마세준은 내 구멍 난 스타킹을 보더니, 내 가방을 집어 제 앞으로 멨다. 그러고는 등을 내보였다.

“업혀. 병원 가게.”

“응. 가방 나 줘. 내가 멜게.”

“가방 멘 너를 업으나 너랑 가방을 업으나 똑같아.”

말이 웃겨서 아픈 것도 잊고 잠깐 웃었다.

진단명은 발목 염좌였다. 최소 2주간 보조기를 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심한 건 아니니 약 잘 먹고 몸을 사리면 금방 낫는댔다.

“이잎새 환자분, 처방전 받아 가세요.”

나는 마세준에게 지갑을 넘겨줬고, 마세준은 창구로 가 수납을 했다. 그동안 나는 보조기를 뚱하니 내려다봤다. 2주 동안 이 갑갑한 걸 어떻게 차고 있나 싶어 한숨을 푹푹 쉬는데, 마세준이 우뚝, 내 앞에 섰다.

“약국 다녀올 테니까 여기 있어.”

“나도 갈래.”

“되도록 걷지 말라고 하셨잖아. 잠시만 있어.”

“나 심심한데.”

내가 툴툴거리자, 마세준은 교복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는 그걸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게임 하고 있어.”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쌩하니 병원 문을 나섰다. 나는 마세준 휴대폰 대신 내 휴대폰을 꺼내 비밀번호를 풀었다. [잎새 왜. 엄마 찜방.] 이렇게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쳇.

얼마 안 가 마세준이 돌아왔다. 마세준은 내 가방을 열어 바스락거리는 약국 봉투를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다리를 굽히고 앉아 제 등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뗐다.

“나 이제 걸을 수 있어.”

일단은 그렇게 호기롭게 말을 했는데, 어깨동무를 하자니 어깨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허리춤을 껴안는 것만은 절대 못 하겠고, 그렇다고 다시 업히자니 마세준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찌해야 하나 싶어 상가 복도 벽면에 쓰러지듯 기대 있는데.

“그냥 업혀.”

마세준이 덤덤하게 그렇게 말했다. 결국, 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세준, 오늘 내가 치킨 쏜다.”

마세준 등에 올라타면서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과외 선생님이었다. 헐, 과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헐레벌떡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선생님, 죄송해요. 저 집에 가다가 갑자기 다리를 다쳐서 지금 병원 왔어요. 어떡해요? 네……. 네, 별건 아니에요. 그냥 보조기 차고 있으면 된대요. 진짜 죄송해요. 네, 네. 그러면 다음 주 월요일에 봬요. 네.”

나는 죄책감에 전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고, 마세준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과외 선생님.”

“…….”

“미리 말씀드린다는 게 깜빡했어. 야, 치킨 뭐 먹을래? 바베큐? 후라이드?”

“아무거나.”

또, 또 저런다. 메뉴를 고를 때는 되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누누이 알려 줬건만. 한 끼의 소중함을 모르는 자식.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옷감에 쓸린 손이 제법 쓰라렸다.

“마세준, 여기 봐. 나 피 계속 나.”

나는 진작에 피가 굳고도 남은 손 옆면을 마세준의 시야로 들이밀었다.

“별로 나지도 않네, 뭐.”

마세준은 어린애 장단 맞춰 주듯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해 왔다.

“참나. 지 몸 아니라고 되게 박하네.”

마세준에게 핀잔을 주는 와중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얘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마세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따끈한 목을 꽉 껴안았다. 까끌까끌한 교복 재킷 단면에 공연히 볼을 문질렀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집에 가서 약 발라 줄 거야?”

“……봐서.”

응석 부릴 구석이 없어 그런다기에는, 나쁜 짓이었다. 나도 알았다. 그리고 아마 마세준도 그걸 알 거다. 마세준은 화를 내거나 내 손을 뿌리치는 대신, 나를 지탱하고 있는 제 손을 한 번 추켜올렸다.

“많이 아프냐.”

“어. 엄청나게 아파.”

그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생에 가장 호되게 다친 날이었지만, 서럽지는 않았다.

* * *

“잎새, 조심하고! 또 걸어 다니면서 휴대폰 쳐다보기만 해 너, 아주 그냥. 엄마 이번에는 진짜로 압수할 거야. 저기, 세준아, 잎새 좀 잘 부탁해?”

“네.”

어젯밤 속상하고 미안하다며 눈물 흘리던 우리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또 가자미눈을 하고 내게 잔소리를 하더니, 마세준에게는 세상 상냥하게 말했다. 엄마가 쥐여 준 택시비 만 원을 주머니에 잘 접어 넣고는, 나는 마세준의 부축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도 안 나오는 거리인데, 걷기에는 무리라 당분간 택시를 타기로 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복도 구석에 세워진 자전거가 보였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마세준을 올려다보았고, 마세준은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택시는 교문까지밖에 못 가.”

문이 닫히자 그렇게 말했다.

“근데, 그럼 애들이 다 쳐다볼 텐데…….”

“어제처럼 내가 너 업고 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건 맞는 소리였다. 어제 하굣길에야 애들이 뜨문뜨문 걸어 그나마 눈에 덜 띄었다지만, 전교생이 몰리는 등굣길 인파 속에 마세준에게 업혀 들어갔다가는 괴소문에 시달리기 딱 좋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고, 그에 몸을 싣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층에 내려오자마자 마세준은 먼저 나를 자전거에 삐딱하게 앉히고는, 내 어깨에서 가방을 벗겨 앞으로 멨다. 그러고는 자기 가방에서 담요 하나를 꺼내더니 내 다리에 툭, 던져 주었다. 내가 냉큼 담요를 다리에 두르자, 마세준은 곧 핸들을 잡고 자전거 킥스탠드를 발로 가볍게 차올렸다.

마세준이 자전거에 오르고, 나는 순간 어딜 잡아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마세준은 내 손을 끌어서 제 허리춤을 안게 했다. 그러고는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마세준, 고마워.”

나는 마세준의 등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자전거에, 담요까지, 마세준은 어떤 마음으로 이걸 준비해 왔을까. 그 마음을 생각하니까 또 가슴이 찌르르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엄마보다 나를 더 챙겨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마세준뿐이다.

“이잎새.”

“어?”

“모르는 애들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마.”

마세준은 교문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더니, 혼자 자전거에서 내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교문을 통과했다. 교문에 서 있던 선생님은 자전거에 삿대질을 하려다, 내 다리에 채워진 보조기를 보고는 턱짓으로 들어가 보라는 시늉을 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등교한 여파는 상당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일단 마세준의 부축을 받으며 교실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게임 끝이었다. 교실에 있는 눈은 다 우리를 향해 있었다. 최규훈부터 실실 쪼개며 나와 마세준을 놀렸고, 웅성대는 애들도 한둘은 아니었다. 아니, 사람이 다쳤는데 말이야. 다리 왜 그러냐, 괜찮냐, 그거 먼저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닌가? 나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 * *

마세준은 귀신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타이밍에 이런 문자를 보내올 리가 없다.

[이잎새, 화장실 안 가고 싶어?]

{완전 가고 싶어}

안 그래도 화장실 가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는데, 답장을 보내자마자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마세준은 나를 부축해 줬고, 나는 염치 불고 그 팔을 붙들고 섰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여자애들한테 부탁해 줄까, 안에서 걷기 힘들잖아.”

“아니, 잠깐이잖아. 걸을 수 있어.”

마세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장실 근처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내가 손을 씻고 화장실로 나올 때까지, 마세준은 등을 돌린 채 거기 있었다. 저 둘 뭐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세준은 그런 게 하나도 안 들리나 보다. 내가 슬금슬금 걸어가서 옷소매를 살짝 쥐자, 마세준은 아무렇지 않게 팔을 내밀었다. 별수 있나. 나도 그걸 덥석 잡았다. 애들 눈치는, 다리 다 낫거든 그때 봐야겠다.

“약 챙겨. 밥 먹게.”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마세준 눈치를 보며 약봉지를 챙겼고, 마세준은 곧 나를 일으켰다. 아직 애들이랑 그렇게까지 가까워지지 못해서 신세 지기가 영 민망했는데 다행이었다. 우리는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내빈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급식실로 내려갔다. 먼저 자리에 앉은 나는 멀뚱히 마세준이 급식을 가져다주길 기다렸다.

“먼저 먹고 있어.”

마세준은 식판을 상 위에 내려 두고는, 자리에 앉는 대신 물을 떠 왔다. 따끈한 돈가스를 보자 군침이 돌았지만, 그래도 그거 기다릴 의리 정도는 있었다. 나는 잠시 후 자리에 앉아 국을 한 입 뜨기 시작한 마세준을 잠시간 보다가, 손대지 않은 돈가스를 마세준 식판에 조금 덜어 주었다. 내가 고기를 나눠 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마세준도 알 거다. 심지어 튀긴 고기? 그건 말 다 한 거다. 진짜 말도 못 하게 고맙다는 거지.

“그거 먹고 돼?”

“야, 뭐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다 옛날 얘기지. 나 이제 많이 안 먹잖아.”

마세준은 댈 걸 대라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밥을 먹었다. 나는 마세준이 보리굴비라도 된다는 듯, 밥 한 술 뜨고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술 뜨고 마세준을 쳐다봤다. 하는 짓이 좀 예뻐야 말이지.

“마세준, 토요일에 팥빙수 먹으러 갈래? 내가 사 줄게.”

“…….”

착한 사람한테는 먹을 걸 줘야 한다. 근데 얜 대답을 안 한다.

“뭐, 싫으면 말…….”

“싫다고 안 그랬는데.”

그럴 땐 저렇게 거들면 바로 대답이 튀어나온단 말이지. 귀를 붉힌 마세준은 내가 준 돈가스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약봉지까지 친히 까 줬다. 어떡하지? 마세준이 예뻐 보인다. 약을 삼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5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마세준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나는 자리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야, 딸기 우유랑 뭐라고?”

“딸기 우유랑 젤리.”

“젤리, 어떤 거.”

최규훈이 매점에 가려는지 애들한테 주문을 받기에, 나도 얼른 주머니에서 만 원을 꺼내 내밀었다.

“최규훈, 미안한데 나도 초코 우유 하나만 사다 주면 안 돼?”

“어, 당근 되지. 근데 너 잔돈 없어?”

“어.”

“뭐, 그럼 그냥 둬. 다리도 다쳤는데 내가 위로 차원에서 하나 사 줄게.”

“진짜?”

최규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교실을 나섰고, 나는 웃으며 그걸 바라보다가 뒷문으로 들어오던 마세준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뭐.’ 그러고는 앞을 보고 앉아서 다시 단어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매점에서 돌아온 최규훈은 종이 치기 직전에야 배식을 마쳤고, 나는 마지막으로 초코 우유를 건네받았다. 마세준은 초코 우유를 탐탁지 못하다는 듯 노려봤다. 참나, 그런다고 우유가 터지냐? 지 주려고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물기가 흥건한 초코 우유를 마세준 책상에 올려 주고는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마세준한테 잘해 주려니까 되게 창피하다. 제발 귀가 안 빨개졌기를 바랐다.

* * *

우리는 야자를 뺐다. 혼자 집에 가기도 힘들다고 사정을 했더니, 담임선생님은 흔쾌히 마세준까지 야자를 빼 주셨다. 마세준 마일리지가 보통이 아니긴 한가 보다. 친구 데려다준답시고 야자를 빼다니. 역시 공부는 잘하고 봐야 한다.

하굣길에는 마세준이 날 위한답시고 걸어서 자전거를 끌고 간다고 했는데, 내가 한사코 거절했다. 걸어서 어느 세월에 저 틈을 빠져나가. 그 대신 우리는 쌩쌩 달려서 집으로 갔다.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자전거에서 내리면서 내가 아픈 티를 내자, 마세준은 나를 업어서 우리 집 소파에 앉혀 줬다. 그러고는 곧장 제 가방을 챙겨 드는 거다.

“마세준, 밥도 안 먹고 가게? 한 시간만 있으면 밥 먹을 시간인데.”

나 밥 좀 먹여 달라는 소리였다. 마세준은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가방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칭얼대기 시작하는 산초를 안아 들었다.

“뭐 먹고 싶은데.”

그러면서 평이하게 물었다.

“아무거나, 네가 해 주는 거.”

“그럼 장 봐 올 테니까 잠깐 있어.”

“아니, 아무거나 그냥 있는 거로 해 줘. 가지 말고.”

마세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쥐돌이를 잡아 들었다. 산초가 크릉크릉 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났다. 나는 아직까지 무릎에 남아 있는 마세준 담요를 펼쳐 덮고서, 쿠션을 베고 비스듬하게 누웠다. 그렇게 마세준과 이산초가 노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쟤네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졸업식 지나고서였으니까. 놀랍게도 산초는 마세준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바로 몸을 비빈다든지 마중을 나가지는 않았어도, 멀리서 마세준을 보면서 코를 크릉크릉 골았다. 그게 찡해서 되게 미안했다. 물론, 마세준이 장난감을 손에 쥐자마자 바로 달려 나갔지만.

마세준을 기다렸던 건 산초만이 아니었다. 마세준이랑 말도 안 하면서 지냈을 때, 나는 외로운 게 뭔지 처음 알았다. 그냥 텅 빈 것 같았다. 그건 산초나 미호, 엄마로는 대체가 안 됐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들이랑 고양이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또 마세준이 영국에 갔을 때는, 더했다. 혼자 보는 영화는 별 재미 없었고, 맛있는 걸 먹어도 그다지 맛이 없었다. 마세준 지금 뭐 하지, 자려나. 밥 먹으려나. 영국 음식 맛도 없다는데 그 입 짧은 게 굶고 있지는 않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 화들짝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산초랑 놀고 있는 마세준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는데, 별안간 코끝이 찡했다.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번갈아 떠올렸다. 어제 오후 마세준이 실내화 차림으로 달려오던 모습, 지금 내 몸을 덮고 있는 까만 담요, 화장실 안 가고 싶냐고 물어보던 문자, 약봉지를 뜯어 주던 손, 밥 안 먹고 가냐니까 냉큼 가방을 내려놓던 몸짓. 어제오늘만 해도 벌써 이만큼이었다.

내가 거기에 기대 있는 동안, 마세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좋아하지 말라고 해 놓고 울면서 친구 하자고 하고, 내 몸 아프다고 사사건건 손을 내미는 나를, 마세준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직도 좋아할까, 아니면, 질렸을까.

“마세준.”

“왜.”

마세준은 산초랑 노느라 웃던 모습 그대로 나를 돌아봤다.

“영화 볼래?”

내가 그렇게 묻자, 마세준은 쥐돌이를 저 멀리 던져 주더니, 리모컨을 쥐었다. 산초는 발톱 소리를 내며 호다닥 달려갔다.

“아니, 나가서.”

‘내가 널 데리고 뭘 하냐.’ 그러면서 허탈하게 웃던 마세준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시켜 먹지 말고 나가서 피자 먹자고, 치즈크러스트까지 올리라고, 열네 살짜리 마세준이 그랬었는데.

“나가서 보자. 내가 팝콘도 사 줄게.”

우리가 벌써 열일곱이었다.

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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