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 중의 균 마세균, 잠복기만 15년-7화 (7/17)

7장.

3학년이 되면서 불행히도 나는 미호와 반이 갈렸다. 나는 낯선 애들 틈을 비집고 임성재의 옆에 앉았다. 이 교실 안에 내가 잘 아는 애라고는 임성재뿐이었다. 임성재는 3년 내내 같은 반이 된 기념이라며 임자 앨범을 친히 내게 개방했고, 나는 그걸 보면서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임자는 이제 아홉 살이 되었을 텐데, 아직도 아기 같았다. 예뻐라.

“야, 나중에 임자 보러 가도 돼?”

“어? 어…….”

그때 거짓말처럼 마세준이 앞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쌩하니 날 스쳐 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낮게 숨을 쉬며 눈을 꾹 감았다. 몇 번 그런 걱정을 한 적은 있지만, 설마 마세준과 같은 반이 될 줄은 몰랐다. 1년을 어떻게 버티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마세준은 때때로 영어 선생님 성화에 지문을 낭독했다. 그럴 때마다 그 딱딱한 교과서 지문이 내게는 동화책처럼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면, 여자애들뿐 아니라 남자애들까지 홀린 눈으로 마세준을 보곤 했다.

마세준이 유일하게 나를 보고 있다고 느낄 때는, 내가 이따금 수학 문제를 풀고 자리로 돌아오던 순간이었다. 나는 가끔 자진해서 앞으로 나가 수학 문제를 풀었는데, 그때마다 마세준 때문에 땅만 보고 걸어야 했다.

새로운 과외 선생님은 마세준처럼 좋은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족집게처럼 시험 문제를 뽑아 주었고, 질보다는 양으로 나를 훈련시켰다. 그래도 나는 그에 성실히 응했다. 성적도 제법 괜찮게 나왔다. 어쨌든, 이제 수학은 더 이상 내 약점이 아니었다.

1학기 기말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약을 먹어도 복통이 가라앉지 않아 점심을 걸렀다. 점심시간 내내 보건실에 누워 있다가 교실로 돌아왔는데, 책상에 초코 우유가 놓여 있었다. 혹시나 해 마세준 책상을 돌아봤더니, 마세준은 없고 다 먹은 초코 우유갑이 마세준 책상에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나도 마세준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마세준에게 고맙다는 문자를 보낼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두었다. 보나 마나 답장도 안 올 것 같았다.

가을 체육대회 날, 마세준은 계주 마지막 주자로 뛰어 우리 반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나는 구령대 구석에서 웃으며 작게 박수를 쳤고, 물을 마시던 마세준과 아주 잠시 눈이 마주쳤다. 마세준은 시선을 돌리며 물병 뚜껑을 닫았다.

다행히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겨울방학과 졸업을 앞둔 3학년은 전체가 놀자판이었다. 체육 시간은 말 그대로 나가 뛰어노는 시간이었다. 그날은 농구를 했다. 여자 농구가 먼저 끝났고, 우리는 농구 코트 앞에 주저앉아 남자 경기를 마저 지켜보고 있었다.

응원하던 애들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마세준이 골대로 몸을 날렸을 때 누군가 마세준을 밀쳤고, 두 사람은 동시에 엉켜 쓰러졌다. 나는 자각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농구 코트로 들어섰다.

마세준은 얼굴을 찡그린 채 누워 있었고, 함께 넘어진 임성재는 걷어 올린 소매 틈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체육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임성재에게 건네고는 바로 뒤를 돌았다.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마세준은 어느덧 일어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한 번도 본 적 없던 매서운 눈빛으로.

마세준은 경기를 내팽개치고 수돗가로 갔다. 나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거의 뛰듯이 걸어 마세준을 따라갔다. 마세준은 찬물로 세수를 하더니, 뒤를 돌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마세준, 괜찮아?”

나는 부디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뭘 물어. 괜찮아 보였던 거 아니냐?”

마세준은 쌀쌀맞게 말하고는, 그보다 더 냉랭하게 나를 스쳐 갔다. 그게 다였다. 혼자 멀뚱히 서 있는데 목이 메었다. 결국, 눈물이 비집고 올라왔다.

나는 남은 수업도 들어가지 못하고 보건실에 누워서 하염없이 울었다. 마세준은 아무래도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지 말랬더니, 왜 미워하기까지 하냐. 나는 걱정해서 그랬던 건데,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돼?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한테 그렇게 굴었는지 네가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는 또 아무 죄도 없는 마세준을 탓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반성을 해 놓고, 결국 쌀 한 톨만큼도 자라지 못한 거다.

급기야 보건 선생님이 내 침상으로 와서 조용히 좀 하라고 타일렀고, 그때부터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소리 죽여 울자니 더 서러웠다. 종례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는 소매가 축축하게 젖은 체육복 차림으로 쫓겨나듯 텅 빈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마세준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마세준을 노려보면서 눈물을 빼다가, 그대로 뒤를 돌아 달렸다. 몇 초 가지도 못하고 마세준한테 붙잡혔다. 마세준은 내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이잎새.”

1년 만에, 마세준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미워서 눈을 마주치기도 싫었다. 턱 아래로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이잎새, 나 봐.”

나는 절대로 마세준을 바라보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거 놔.”

“미안해. 내가 심했어.”

그 말을 들으니까 왜 그렇게 서러운지 모르겠다. 나는 복도 한편에서 엉엉 소리를 내서 울기 시작했다. 마세준은 곧 나를 풀어 주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 줬다. 나는 얼른 마세준의 손길을 뿌리치고 눈물을 벅벅 닦았다.

“…….”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새끼야. 알아?”

나는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내가, 맨날 혼자서, 진짜.”

그래도 마세준은 잠자코 들어 줬다. 나는 미워 죽겠는 마세준을 노려보며 눈물만 흘리다가, 마세준을 꼭 껴안았다.

“야, 왜 나한테 말도 안 걸었어? 내가 언제 너랑 연 끊재? 친구 하지 말재? 나한테 왜 그러는데.”

마세준은 한참을 그렇게 굳은 듯 서 있었고, 나는 그간 쌓인 설움을 여과 없이 쏟아 냈다.

“전화도 안 하고. 내가 너랑 미호 말고 친구가 어딨다고.”

“…….”

“산초가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지 알아? 걔가 무슨 죄인데. 어? 걔는 네 이름만 들려도 귀 쫑긋 세우고 문만 쳐다봐. 아냐고.”

마세준은 아주 천천히 내 몸을 떼어 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잎새.”

“…….”

나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마세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늘 일 미안하다. 다시는 너한테 그런 식으로 말 안 할게. 지금까지 속 좁게 군 것도 미안해.”

“…….”

그게 꼭, 다시는 보지 말자는 얘기로 들렸다. 마세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 등을 보였다. 내가 이렇게 펑펑 우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에서 사라졌다.

아까 보건실에서랑은 비교도 안 되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차가운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발을 구르며 울었다. 그러다가 무릎을 껴안고 앉아서, 시린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해가 지려고 했지만,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빨간 해가 복도로 쏟아져 들어올 즈음, 기력이 다했는지 거짓말처럼 눈물이 뚝 끊겼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스멀스멀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한 머리로 엉덩이를 터는데, 교실 뒷문에 기대고 선 마세준이 보였다. 언제 다시 와서 저러고 있었을까. 내가 우는 거 다 봤을까.

나는 교실로 향하는 대신 여자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턱을 닦으며 나오자, 마세준이 화장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세준을 스쳐 갔다. 아니, 스쳐 가려 했다. 마세준이 다시 내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왜 항상 이럴까. 왜 항상 나는 도망가고, 왜 마세준은 나를 막고 서서 이도 저도 못 하게 할까.

“이잎새.”

“…….”

“집에 가자.”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말 없이 마세준을 따라나섰다. 더 화를 낼 힘도 없었거니와, 이 이상 마세준과 거리를 벌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같이 집에 가는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다. 마세준은 버스에서 나랑 멀찍이 떨어져 앉았지만, 집 앞까지는 바래다주었다.

“들어가.”

문 잠그라는 소리도 이제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갔다.

* * *

밤 9시에 전화가 왔다. 할 말이 있으니, 괜찮으면 잠깐 나와 달라는 거였다. 나는 체육복 차림에 떡볶이 코트를 걸치고는 놀이터로 나갔다. 마세준은 혼자 그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옆 그네에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고 싶다고 오라셨어.”

마세준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영국에 있는 할아버지 말하는 거야?”

마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가.”

“학교도 안 나온다고?”

“봄에 티켓 끊어 놓으신 거라. 그래도 졸업식 전에는 돌아올 거야.”

“…….”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잎새, 오늘 일 미안해.”

마세준이 잘못한 건 맞다. 하지만 나도 마세준한테 잘한 거 하나 없다. 맨날 화만 내고, 지랄만 하고, 소리 지르면서 울고. 마세준은 뭐가 못나서 나 같은 것 때문에 마음 휘둘리면서 사나. 내가 뭐라고.

“마세준.”

“…….”

“나, 너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알아.”

“나는, 너랑 헤어지는 게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

“그래서 그런 거야.”

마세준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괜히 발로 모래만 찼다. 잠시 뒤 마세준이 힘없이 웃자, 나는 마세준을 따라 비죽 웃었다.

* * *

크리스마스 이튿날에는 마세준한테 문자가 왔다. 할아버지랑 같이 빨간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었다. 마세준은 루돌프가 그려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조금 확대해 봤다. 마세준은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렇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대신 마세준은 가끔씩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내 줬다.

나는 마세준 없이도 신나게 겨울방학을 만끽했다. 미호, 김용호에 최제훈, 임성재까지 가세해서 다섯 명이 썰매장도 갔다. 과외 선생님이 군대에 가게 되면서, 다른 선생님한테 과외를 받게 됐다. 새로운 선생님은 엄청 자상하고, 꼼꼼하고, 인내심이 좋았다. 고등학교 수학은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기도 했다.

미호랑 같이 임성재네 집에도 놀러 갔다. 임자의 실물은 충격적으로 귀여웠다. 처음에는 우리를 보자마자 숨기 바빴지만, 우리가 간식과 장난감으로 유혹하자 곧 귀한 얼굴을 보여 주었다. 해가 질 때까지 임자랑 신나게 놀다가, 간신히 발길을 뗐다.

예상과는 달리, 마세준은 졸업식 당일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마세준 없이 졸업 사진을 찍었다. 엄마는 못내 아쉬워했고, 나는 사진이야 나중에 찍으면 되는 거 아니냐며 엄마를 위로했다. 미호랑 교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같이 코끝이 찡해져서는 포옹을 했다. 임성재랑도, 김용호랑도, 최제훈이랑도 사진을 찍었다.

마세준이 모습을 드러낸 건 졸업식 이튿날이었다. 나오라는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패딩을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마세준은 벤치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었다. 그냥 웃음이 터졌다. 반가운 걸 어쩌겠어. 떨어져 있는 동안, 박 터지게 싸웠던 건 홀랑 다 잊어버렸다.

“졸업 축하한다, 이잎새.”

마세준은 내게 종이봉투를 몇 개 내밀었고, 나는 우물쭈물하며 그걸 받아 들었다. 얼핏 보아하니 쿠키랑 옷 같았다.

“자.”

나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다고 미안하다고 하려는데, 이번에는 마세준이 손을 내밀었다. 마세준의 손끝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것은 초록색 잎새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이건 입학 선물.”

“……뭐가 이렇게 많아? 미안하게. 난 준비한 것도 없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냉큼 마세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열쇠고리를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예뻤다. 기특해라, 어디서 이런 걸 났대? 누가 봐도 내 선물이었다. 패딩 안주머니에다 열쇠고리를 조심스레 넣고는 지퍼까지 꼭꼭 잠갔다. 마세준은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엄청 마음에 든다. 고마워.”

사과라면 그래도 몇 번 해 봤지만, 마세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무지 쪽팔렸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괜히 코를 한 번 훌쩍거렸다.

“졸업식엔 왜 안 왔어? 하루만 일찍 오지. 다들 너 기다렸는데……. 애들 다 엄청 서운하다고 그랬어. 우리 엄마도 그렇고…….”

보도블록 틈새로 돋아난 잡초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애들 이름을 팔아 이틀 새 쌓인 서운함을 풀어놓으려는 속셈이었다.

“넌?”

“…….”

그러나 마세준은 대번에 나는 어땠느냐고 물어 왔다.

“……서운했지. 제일 친한 친구랑 사진 한 장 못 찍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 속에서 손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모른다. 마세준은 입꼬리를 예쁘게 올리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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