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매일 밤, 침대 축구
여자 팬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동료 배우들 역시 인정한다는 듯 박수로 은우를 축하해줬다.
은우가 시상대로 오르는 동안 그를 소개하는 성우의 멘트가 이어졌다.
“이은우 씨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연기로 호평을 받았는데요, 대학 후배인 준하 역을 통해서 국민 연하남으로 대한민국 여심을 사로잡으면서 차세대 멜로 장인으로 각광받고 있죠. 촬영 현장마다 각국에서 몰려온 팬들을 끌고 다녔다는 후문인데요. 선배들도 인정한 앞날이 더욱더 기대되는 대한민국 대표 비주얼 배우입니다. 이은우 씨,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 사이 시상식장을 홀로 런웨이로 만들어 버린 은우가 어느덧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이쪽 보던데, 설마 나 본 거 아니야?”
“널 왜 봐. 여자 친구도 있다잖아. 하나도 안 고친 게 저 얼굴이래.”
“와, 이중석이 죽네 죽어. 외모 천재 인정.”
질래 앞줄에 앉은 인기 걸 그룹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질래 귀에도 훤히 들렸다.
그만큼 연예인들 사이에도 은우는 단연 연예인이었다.
남다른 얼굴에 비율까지, 불공평할 정도로 신이 그에게만 모든 걸 몰아 준 것만은 확실했다.
함께 선 사람들에게 굴욕을 주다니. 모델 출신이자 비율 천재로 인정받았던 작년 신인상 수상자 이중석을 순시에 오징어로 만들어 버렸다.
은우도 막상 수상자로 선정된 게 감격스러운지 붉어진 눈시울이 터지지 않도록 입술을 일자로 앙다물었다. 감정을 컨트롤하려는 게 스크린을 통해 그대로 비쳤다.
하긴, 맡은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밤새 연습했단 걸 질래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타고났다고 칭송했지만 그가 연기를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갈았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노력하는 천재의 좋은 예랄까.
은우가 트로피와 꽃다발을 받은 후 무대 중앙에 홀로 섰다.
터져버릴 것만 같은 눈망울로 괜히 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아서 질래는 그의 눈가를 닦아주고 싶었다.
은우는 신인상 수상에 가슴이 벅차오른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오늘 용기 내어 와준 그녀가 고마웠다.
오직 저를 위해 세상에 한발 내디딘 질래의 비상이 무대에 오른 그의 마음을 더욱 연약하게, 감성적이게 만들었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때부터 힐끗힐끗 질래를 보기 위해 뒤돌아본 걸 저 무딘 여자만 모른다.
그 덕에 걸 그룹 멤버들한테 괜한 오해까지 살 뻔한 은우 아니었던가.
어느새 무대에 서서 등대처럼 빛을 발하는 은우의 수상 소감이 이어졌다.
“많이 부족한 저에게 좋은 상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좋은 선배님들과 작업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것도 큰 복인데 작년 한 해 과분한 사랑까지 받게 돼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라이징 스타답게 신인상 트로피를 들고 말하는 순간에도 무대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괜히 팬들이 그를 ‘등대 은우’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울컥했는지 목이 멘 듯 은우가 잔기침으로 목소리를 정리한 후 끊겼던 수상 소감을 차분하게 이었다.
“모든 대리석 내부엔 저마다의 조각상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참된 모습을 드러내는 게 조각가의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좋은 조각가분들을 만나서 준하라는 캐릭터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를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조각해주신 감독님, 작가님, 선배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팬 여러분들과 ‘그 남자의 불시착’을 응원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저희 할머니 모두 고맙습니다.”
할머니를 언급하며 기 회장 쪽을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방긋방긋, 주름진 입술은 봉실거렸다.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손자 바보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긴장한 듯해 보이더니 은우가 여유를 찾은 듯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연하남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제 인생의 또 한 명의 조각가가 있습니다. 저를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도록 삶의 용기를 준 사람이자, 제 인생의 롤모델이기도 한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아마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뭐든 과한 은우가 일을 벌일 것만 같은, 뒤통수가 저릿한 느낌이 온 것은.
“오랫동안 홀로 그분을 연모해 왔습니다.”
시상식장이 술렁였다. 은우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빼자마자 카메라가 그의 손을 따라 줌인 됐다. 뭐지? 질래도 대형 스크린을 통해 그의 행동을 주시하는데. 설마 반지?
그런데 두 개다. 그가 일단 제 왼손 약지에 반지 하나를 끼웠다. 그리고 손에 들린 나머지 하나를 새끼손가락에 끼운 후 허리를 숙여 마이크 쪽에 입술을 갖다 댔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겠습니다. 늘 새로운 모습 보여주는 배우이자 남편이 되겠습니다.”
순식간에 장내가 소란스럽다. 은우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누가 봐도 작고 반짝이는 다이아가 박힌 프러포즈용 반지였다.
찰칵, 찰칵.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백송예술대상에 참석한 연예부 기자들도 이제 막 상승세를 탄 신인 배우의 돌발 프러포즈에 대박 기삿거리가 탄생했음을 직감했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조차도 의아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은 이게 혹 백송예술대상 측에서 사전에 마련한 이벤트는 아닐지, 수많은 의구심을 품은 채로 은우의 행동을 주목했다.
“더욱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사랑하는 그분의 남편이 되어 매일 밤 한 침대에서 살을 버무리며 제 남은 배우 인생, 살고 싶습니다. 응원해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은우의 예상치 못한 수상 소감에 휘파람 소리와 야유 비슷한 환호성이 시상식장을 해일처럼 덮쳤다.
문제는 은우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후 무대를 내려오는데, 이런. 그가 애초에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역시나 질래의 직감은 한 번도 저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트로피와 꽃다발을 든 남자가 향한 곳은 백송예술대상에 초대받은 VIP가 있는 관객석.
1부 마지막 순서로 분명 걸 그룹이 무대를 꾸미고 있음에도 일부 카메라는 은우를 주시했다. 그의 모습이 각종 매체를 통해 온라인상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저 과한 바보.
결국 일을 내고 마는구나.
그래서 나를 불렀구나.
은우는 질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후 상으로 받은 트로피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대한민국 예술계를 주름잡은 거장들이 자리한 이 잔치 속에서도 가장 잘생긴 남자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제 앞에서 무릎 꿇고 있으니 질래는 심장이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1년 전 기자 회견 때와는 차원이 다른 뜨거운 시선들이었다.
그 열기에 온몸이 녹아들고 숨통이 조여 왔지만 그래도 견뎌지는 건 은우가 제 앞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배우 이은우의 인생, 받아주시겠습니까?”
‘받아줘’, ‘받아줘’ 하는 주변의 소리가 필터를 거친 듯 뭉개져서 질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거부할 이유도 없었지만 시간을 끌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질래를 채찍처럼 때리는 것만 같아서 얼떨결에 은우의 신인상 트로피와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장신의 은우가 벌떡 일어나 제 앞만 비추는 등대가 됐다.
그 견고한 등대가 여자를 꼭 끌어와 제 품 안에 가뒀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질래만의 든든한 방패가 돼 주었다.
“결혼하자, 질래야.”
또다시 박수가 쏟아진다. 걸 그룹의 축하 공연이 끝난 후 백송예술대상 1부 클로징은 결국 은우의 프러포즈로 마무리되려나 보다.
은우가 제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어 그녀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 끝자락으로, 반지의 제자리를 찾아줬다.
“사랑해. 질래야.”
은우의 용기 있는 행동에 사람들의 축복이 축포처럼 터졌다.
마치 백송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탄 은우가 극 중에서 이루지 못한 연하남 퍼포먼스를 벌이는 게 아니냐며, 그런 착각이 들 만큼 모든 상황은 로맨틱했다.
로맨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장면이었다.
은우는 질래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자마자 허리를 숙여 그녀의 오렌지 립이 발린 입술에 늘 그랬듯 뒤늦은 퇴근 도장을 꾹 찍었다.
얼떨결에 은우와의 키스가 전국적으로 생중계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장면은 유튜브 상에서 두고두고 세기의 프러포즈 영상으로 회자될 만큼 많은 남자들에게는 부담감을, 여자들에게는 최고의 로맨틱한 장면으로 꼽혔다는 후문이다.
은우는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에게 쏠릴 것을 우려해 1부가 끝난 후 그녀의 손을 잡고 시상식장에서 당당하게 퇴장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끝까지 두 사람의 스토리에 집착했다.
은우가 질래를 손을 잡고 제 벤으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수많은 기자들이 그들을 뒤따르며 대놓고 질문했다.
“여자 친구분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은데 성함이.”
그러자 또 다른 기자가 질문한 기자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큰 목소리로 귀엣말을 해준다. 속삭인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너무도 잘 들렸다.
“몰라? 강화그룹 장녀. 나는 한눈에 알겠던데.”
은우가 그 기자들의 귓속말이 거슬렸는지 언론사 카메라 중에서도 행사를 생중계했던 메인 방송사의 카메라를 응시한 후 제 입장을 밝혔다.
“가질래요. 제 아내의 이름은 가질래입니다.”
드디어 베일에 가려졌던 비주얼 천재 이은우의 여자 친구 이름 석 자가 세상에 밝혀지는 순간. 또다시 주변은 그녀가 강화그룹 장녀였단 사실에 수군수군, 뒷담화가 흘러넘쳤다.
“진짜야? 그 가질래?”
그런 사람들의 속닥거림에 이번에는 질래가 움츠리지 않았다. 도리어 카메라를 보고 떳떳이 고백했다.
내가 바로 이은우의 여자 가질래라고.
찰칵찰칵, 내일 연예뉴스 탑을 찍을 것만 같은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찍힌다.
그 프레임 속에 담긴 둘의 표정은 모든 걸 설명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로맨틱한 연하남으로 꼽히는 이은우의 프러포즈를 받은 여인의 수줍은 얼굴도, 오랫동안 그녀 하나만을 바라봐 온 남자의 감출 수 없는 미소도.
모두 해피 엔딩이라고.
***
은우는 다음 날 질래를 데리고 구청으로 가 바로 혼인 신고를 마쳤다.
결혼식은 질래의 바람대로 둘이 헤어졌다 다시 만난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올리기로 기약한 후 둘은 정식 부부가 됐다.
은데렐라에서 벗어난 은우는 이제 질래와 한집살이를 한다.
옆집에 살던 여자를 제집으로 데려와 참아왔던 본능을 폭발시켰다.
질래도 그와의 사랑을 가로막았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그 자리에서 허물었다.
어쩌면 은우가 파리에 있던 그날 밤, 전화 통화로 사랑을 확인했던 그 순간, 이미 두 번째 사랑은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매일 매일 둘만의 환락 파티가 열렸다.
마치 야생마를 타고 천지를 달리듯, 잃어버린 1년을 보상받기 위해 서로를 원 없이 채웠다.
은우는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철망을 가르는 축구공처럼 언제나 파워풀 했으며 질래에게 강렬한 자극을 선물했다.
이래서, 연하남, 연하남 하나?
질래 안에서 그의 현란한 발재간은 메시처럼 환상적이었고 스피드는 호날두를 능가할 정도로 완벽, 그 자체였다. 피지컬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누가 봐도 글로벌한 굵기와 길이의 다리를 질래 안에서 휘젓는걸.
여자의 비좁은 골대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찌르며 질래의 흥분 점수를 올리기도 했고, 늘 사정없이 대시해 박진감 넘치는 경기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은우와 즐기는 침대 축구는 황홀경이요, 지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천국이었다.
가질래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은밀한 축구 경기로 말할 것 같으면 이은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올 수 없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요, 질래는 평생 그의 골을 받아내는 세기의 골키퍼라 칭하겠다.
원 없이 서로를 온전히 가진 은우와 질래는 더 이상 지난 아픔에 울지 않았다.
혹, 누군가가 그들의 속사정을 모른 채 손가락질한다 한들,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단단해진 신뢰와 사랑이 둘에게 주어진 모든 역경을 뛰어넘게 했다.
현재의 사랑을 굳건하게 지킨 그들은 훗날 서로의 미래가 됐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완전하게, 서로의 인생이 되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