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숨바꼭질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
질래는 창가에 기대어 어둑한 세상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은 그런 착각을 했었다.
작은 창밖의 세상이 전부가 아닌 걸 알면서도 비행기가 떠오를 때면 어느새 모든 게 제 발아래 있다는 착각들.
구름 위에 둥둥 떠 있을 때면 마치 특별한 세계에 있는 것 같아서 바닥에서 걷던 시절을 까먹곤 했었다.
곧 착륙한단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하늘에서의 영원한 삶을 꿈꿨건만….
비행기는 불시에 착륙했다.
쌩쌩, 바닥에서 활주로를 내달리다 뚝 멈춰 섰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바닥에는 은우가 있다는 거였다.
누군가와 다시 걸을 수 있는 바닥이, 그래서 좋아졌다.
새로운 이륙을 준비할 수 있는 바닥도 알고 보면 괜찮았다.
꽤나 영롱한 시작이었다.
제법 상쾌한 아침이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긴긴 무빙워크를 타고 그에게로 향하는 길.
낭만의 도시 파리에 ‘님’을 보러 오니 태윤의 집에서 벌어진 악몽이 서서히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냥 꿈이라고 믿기로 했다. 이 파리에서만큼은 지난밤의 진실 따윈 영원히 모르고 싶어졌다.
“가질래 씨?”
저 멀리서 누군가가 제 이름을 외쳤다. 열심히 흔드는 손이 엄청 성실하게 보였다.
은우였으면 좋겠지만 누가 봐도 그의 피지컬은 아니었다.
모든 건 비행기가 연착되면서 꼬였다. 저를 마중 나왔던 은우가 오전 스케줄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했다.
총총총, 뛰어가 그의 품에 안기는 절절한 재회를 꿈꿨지만, 현실은 꽤나 뻘줌한 상황이 연출됐다. 남 실장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난 것처럼 그 앞으로 오른손을 기품 있게 내밀었다.
“가질랩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GH엔터테인먼트의 남상우 실장입니다.”
한 가지 달라졌다면, 저를 소개하는 호칭이 짧아졌다는 것이다. 어딜 가든 강화그룹 자율주행팀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는데, 오늘은 심플하게 가질래라고만 소개했다.
아직은 완벽하게 복귀하지 못했기에 강화그룹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저만의 엄격한 잣대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그럼 바로 가실까요?”
“저, 잠시만요.”
질래는 남 실장의 센스에 살짝 실망할 뻔했다. 지금 제 모습은 누가 봐도 패션 위크에 갈만한 셀러브리티로 보일 리 만무했다.
그래서 쇼가 있는 로댕미술관 앞에서 몇 시까지 만나기로 정해 놓은 후 그녀만의 쇼 타임을 가졌다.
일명, 파리를 휘어잡는 패셔니스타로 거듭나기.
전 세계 수많은 유명 인사들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의 핫한 패션. 고급스러우면서도 트렌디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까지.
그쯤 해야 파리 패션계의 라이징 스타, 이은우의 여자 친구로서 당당히 컬렉션 장에 들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매년 세계 4대 패션 위크를 찾아다니는 뷰티 업계의 큰손이자 어느 패션쇼든 VIP 고객으로 등록돼 있는 친구에게 급히 SOS를 쳤다.
그녀를 통해 은우가 서는 브랜드의 옷, 그중에서도 아무나 입을 수 없다는 리미티드 에디션 가방과 옷을 공수받은 후 파리에서도 유명인들만 들린다는 숍에서 꾸민 듯 무심하게, 완벽하게 패션 위크 셀러브리티로 탈바꿈 한 질래였다.
거울 속 제 모습은 낯설 만큼 예뻤다. 왜 여자들이 꾸미는 데 돈을 쓰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사실 질래는 저를 치장하는 데 그다지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항상 적당한 선에서 과하지 않게, ‘사람이 명품이면 뭘 걸쳐도 명품이다’가 가질래의 철학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일탈이다.
목적은 단 하나. 은우가 좋아할까? 은우가 예쁘다고 할까?
비즈니스 차 방문하는 것 외에는 딱히 파리에서 풍류를 즐겨 본 적도 없었다. 주변 기대에 부응하느라 커리어 쌓는 데만 내달렸던 20대. 그때는 몰랐던 연애 감정을 오늘 제대로 불태워 보겠노라며 쿵쾅대는 가슴을 안고 은우의 쇼가 열리는 로댕미술관으로 향했다. 요란한 킬 힐도 무색할 만큼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와! 완전 다른 분이 오셨네요? 대한민국 탑 여배우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미술관 앞에서 재회한 남 실장이 웬일로 입바른 칭찬을 했다. 진심이든 아니든 그의 넉살 좋은 소리가 질래를 배시시 웃게 했다. 대한민국에서 날다 긴다 하는 연예인을 도맡았던 스타 제조기, 남 실장의 말 아니겠는가.
시작부터 예감이 좋았다. 남 실장과 맨 앞줄, 그러니까 유명 인사들에게만 주어진다는 VIP석에 앉아 은우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두근두근. 장황한 무대 음향에 맞춰 심장도 함께 나대듯 춤을 췄다. 리듬에 맞춰 긴박하게 뛰어대는 가슴 떨림도 좋았다.
드디어 쇼 타임! 팡팡 터지는 조명이 뇌쇄적이다.
나신의 조각상이 즐비한 로댕미술관 정원에서 아예 대놓고 에로틱한 무대를 연출하는 듯싶었다.
남녀가 묶인 채로 워킹 하는가 하면 파격적인 옷을 입고 성행위를 떠올리게 하는 충격적인 퍼포먼스도 이어졌다. 이쯤 되니 은우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기대 반 우려 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다.
긴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가 화려한 조명 아래 첫발을 내딛는데 툭, 툭, 떨어지는 걸음걸이가 독특했다. 휘적휘적, 힘을 뺀 워킹. 묘한 무대 장악력이 확실히 다른 모델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람을 끄는 흡입력이라고 해야 할까.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포토 그래퍼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선 처리하며, 손끝 하나, 발끝 하나 모든 움직임이 이슈이자 기삿거리가 되는 남자였다. 확실히 스타는 스타였다.
사실 질래도 은우가 등장하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왜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갓은우로 불리는지 그의 무대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리라.
실크 바지든, 벨벳 바지든, 어떠한 난해한 패션도 그에게는 예술이 됐다. 특히나 맨몸에 재킷 하나 걸친 덕에 걸을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가슴 근육이 여심을 녹일 만큼 섹시했다.
그가 한 달간 그 진입장벽 높다는 파리에서 많은 걸 이뤘음을 눈앞에서 확인한 순간이었다.
진짜로 별이 됐다, 은우는.
런웨이에서만큼은 어떤 별보다도 압도적이게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이었다.
그래서일까. 쇼가 끝난 이후에도 질래는 한참이고 멍 하니 무대를 바라봤다. 그만큼 여운 짙은 강렬한 무대였다.
화려한 조명이 꺼진 후 런웨이에서 내려온 은우는 여전히 카메라를 몰고 다녔다. 찰칵찰칵,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조명 덕분에 은우는 무대 아래에서도 여전히 발광하는 별이었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 수많은 셀러브리티들이 그와 사진 찍기를 자처했다.
특히나 여자들이 떼거지로 몰렸다. 외모가 개연성이 되는, 비현실적인 은우의 비주얼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먼발치에 서서 사람을 동경하듯 바란 본 것은.
그것도 저렇게 유명한 남자친구를 소녀 팬처럼 수줍게 기다리는 게 야릇한 전율을 주었다.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떠오르는 스타와의 비밀연애라니, 짜릿했다.
물론 은우는 사람들 속에서도 저와 계속 눈을 마주치려 노력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 때문에 이 스릴감이 금방 깨질 것 같아 조마조마하면서도 그 두근거림이 싫지 않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르가슴이 내내 휘몰아쳤다. 그의 눈빛만으로도 질래는 이 파리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은우도 알고 있었다. 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음을.
얼른 저 조그마한 여자에게로 가고 싶었다. 이 바글바글한 인파 속에서 거짓말 조금도 안 보태고 정말 질래밖에 안 보였다. 나머지 관중은 다 흑백처리 된 배경인 것처럼, 오직 질래만이 은우 눈을 밝게 했다.
그래서 질래에게로 간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은우가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황한 남 실장이 격하게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은우가 그런 남 실장을 보고 코를 찡끗 접는다. 결코, 질래 찾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러자 남 실장이 이번에는 타깃이 바꾸었다. 질래를 바라보며 애달픈 눈빛으로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제발 도망가 달라고.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제발 사진 찍히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그래, 아직은 여러 여자들을 위해서 은우를 로망으로 남겨주자며….
질래는 이 재미있는 숨바꼭질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리저리 도망칠수록 이상한 기운을 눈치챈 몇몇 기자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12시가 땡 지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질래는 로댕미술관 정원을 질주하며 다급히 도망쳤다.
그러다 결국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몇몇 사람들과 술래잡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미술관 1층 안에 들어선 것이다.
두리번두리번, 질래는 숨을 만한 곳을 물색해 본다.
보아하니 로댕의 작품이 전시된 1층 전시장은 아예 검은 천막으로 막아놓았다. 아무래도 많은 인파가 몰린 탓에 전시물을 보호하려고 일부러 통제구역으로 설정해 둔 것 같았다.
그런데 왠지 저 펄럭이는 휘장이 질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여기에 숨으면 아무도 못 찾을 거라고. 질래는 그 유혹에 이끌려 휘장을 몰래 걷어낸 후 그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조각상이 그녀를 반겨 주는 것 같았다. 질래는 그중에서도 제일 구석에 있는 조각상 밑에 저를 꼭꼭 숨겼다.
계속 쫓아오던 기자들이 포기하고 뒤돌아서기를, 은우가 당분간만 자신을 못 찾아내기를 바라며 조용히 숨죽이던 그때였다.
너무 정신없이 뛰었나? 정신이 혼미해진다. 또 미주신경성 실신인가?
혹 몇 분 몇 초, 졸도하더라도 여기라면 안전할 것만 같아서 질래는 조각상 밑에 쭈그린 채 스르륵 눈을 감았다. 제법 안전한 실신이라며 자부하던 찰나였다.
“기껏 숨은 데가 여기야?”
눈을 뜨니 아름다운 별이 떠 있었다. 태양보다 몇백 배나 밝은 초거성이었다.
이은우. 그가 질래를 찾아낸 것이다.
“어떻게 알았어?”
“숨는다고 못 찾아낼 줄 알았어? 대범하네, 가질래가 통제구역에 다 숨고.”
휴. 맥이 풀렸다. 그래도 저를 찾아낸 게 은우여서 다행이라며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여자의 색색거림이 남자를 미치게 했다. 남자에게 반사된 빛 때문인지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 덕인지 질래의 얼굴엔 발그레한 색감이 어여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음영이 너무도 예뻐서 은우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맛보고 싶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야해.”
“응?”
“봐봐.”
은우의 시선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하필 <입맞춤>이라는 조각상 밑에 제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벗고 있는 남녀의 깊은 입맞춤을 표현한 천재 조각가 로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조각상에는 사실 숨겨진 스토리가 있었다.
“은우야. 그거 알아? 얘네 금지된 사랑이었던 거?”
“아니….”
“잘 봐봐, 입술이 닿지 않았어.”
실제로 그랬다. 저 둘은 불륜관계라고 했다. 그래서 키스를 해보기도 전에 여성의 남편으로부터 화살을 맞고 죽은, 영영 키스조차 못 해보고 지옥 불에 떨어진 불운의 커플이었다.
하지만 은우는 달랐다.
아무도 없는 미술관 안. 남자의 잇새에서 샌 작은 숨소리조차 유독 낯간지러운 지금,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온기를 품고선 질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가질래.”
“응?”
“얘네가 못다 이룬 거… 우리가 해.”
“어?”
“지금.”
“으읍!”
메이크업에 창백해진 남자의 입술이 뜨거운 별에 달궈진 여자의 붉은 입술과 진득하게 닿았다.
이뤄지지 못한 안타까운 커플 조각상 밑에서….
그들처럼 한 꺼풀 한 꺼풀 옷이 벗겨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통제구역 안에서 은밀하게.
나체인 수많은 조각품들과 함께 그 둘은 미술관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흐으응, 으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