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보고 싶어서, 못 참겠다
“아하앙, 아앗!”
젖꼭지가 물렸다. 그 생경한 감촉에 여자가 와르르 무너졌다.
밀린 브래지어 사이로 수줍게 핀 한 송이의 꽃을 결국 꺾고만 태윤이었다.
“씨발,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알아?”
츄릅춥춥. 게걸스럽게 제 유두를 핥는 그를 어째서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을까. 팔을 쭉 뻗어 거세게 밀어내도 시원찮을 판에, 솔직히 무서웠다.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할짝대는 혀끝이 유두에 닿을 때면 야속하게도 전신이 부르르 반응했다. 축축하게 젖은 속옷이 민망할 따름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살금살금 다가와 젖은 팬티 위를 살살 긁적였다. 동그랗게 발기된 곳을 찾아 집요하게 괴롭혔다. 베베 꼬인 허벅지와 허리가 함께 들썩인다. 익숙한 감각에 반응하는 몸뚱이가 질래는 죽도록 싫었다.
“이봐, 좋다잖아, 그치? 진짜 남편을 알아보는 거잖아! 그치?”
뚝뚝. 눈가에 맺힌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얼굴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갔다.
스르륵. 치골 밑에 걸려 있던 팬티마저 발끝으로 하산했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가슴을 잃었다고 전부를 내준 것은 아니었다. 은우와의 은밀한 추억이 담긴 샘까지 절대 태윤에게 침범당할 순 없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무조건 꿈틀대고 본다. 두 다리를 번갈아 흔들며 죽어라 발버둥 쳤다. 그 덕에 남자가 주춤하는 사이 그의 손목을 물어 그를 위협했다. 샴페인의 축포가 터지듯 그의 손에선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정말로 한 번 꿈틀댄 게 다였다. 흥분한 남자가 거칠게 제압해 오니 최후의 발악이 그대로 함락되고 말았다.
“아앗. 제발!!”
퍼억!
속살이 열려버렸다. 검붉은 페니스가 질래의 내벽을 거침없이 갈랐다.
“미친, 존나 쫀쫀해.”
타닥! 타닥! 불통이 튀었다. 불기둥이 질구에 끝끝내 불을 지폈다.
“하지마아아! 하지 말라고오!”
“씨발, 이걸 어떻게 참았지?”
찰박찰박, 격한 피스톤 운동에 둘의 은밀한 부위가 마찰하는 질펀한 소리가 들렸다. 퍽퍽, 퍽퍽! 점점 속도를 높여가며 절정으로 향해가는 남자가 고백했다.
“흐읏, 쌀 거 같아.”
“흐흐흐흑. 아앗! 흐읏 안 돼!!!”
***
벌떡, 질래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에 온몸이 축축했다. 뻐근함을 호소하는 한쪽 팔에는 링거가 이어져 있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생생했던 남자의 촉감. 그 표정. 그 핏물.
대체 여긴 어디인 걸까?
“일어났어?”
“가줄래?”
질래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줄래네 집도, 병원도 아니었다. 봐도 봐도 낯선 방. 분명 태윤의 집 거실까지는 들어왔었는데, 그렇다면 혹시?
“여기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언니 남편 집이지. 아! 신혼집인가?”
“남편? 그런 사이 아니래도. 넌 여기 왜 있는데.”
줄래가 제 손에 들린 마른 수건을 질래 앞에 보란 듯이 흔들었다.
“간호 중이잖아. 땀을 어찌나 흘리던지. 일시적 뇌진탕 같은 거래. 아신병원 선생님 왔다, 갔어.”
“윤태윤은?”
“나갔어, 일보고 들어온대.”
그가 없다는 말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츰차츰 안정돼 갔다. 그제야 차분하게 제 상태를 살펴보는 질래였다. 일단 편한 잠옷으로 옷이 바뀌어 있었다. 혹시 몰라 속옷도 확인해 보는데 새것으로 갈아입혀 있었다.
“잔뜩 젖었던데?”
줄래가 마치 언니의 행동을 눈치챈 듯 야릇한 말을 먼저 던졌다.
“무슨 소리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신혼집에서 만났으니까 뭘 했나 보지?”
“했다고?”
“언니가 더 잘 알지 않겠어? 속옷만 봐선 그래 보였다는 뜻이야.”
시간을 보니 대충 1시간 정도가 지났다. 잃어버린 시간 동안 대체 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일 보고 온 다 그러든?”
“왜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안 나? 치매야? 그래서 기업을 어떻게 이끈다고 그래?”
“윤태윤 어디 있냐고!”
“나갔다 그랬잖아, 갑자기 일 생겼데. 언니 때문에 손 다쳐서 병원 들렀다 간댔어.”
“손을 다쳐?”
갑자기 꿈속에서 제가 그의 손을 물어뜯던 장면이 떠올랐다. 피를 뚝뚝 흘리던 윤태윤의 모습이 정말 꿈속의 한 장면에 불과했던 걸까. 의심할 겨를도 없이 줄래가 먼저 선수 쳤다.
“언니 일어난 거 봤으니까, 난 간다.”
비아냥거리는 동생의 시선은 한없이 싸늘했다. 대체 우리 자매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안타까웠다. 가장 끈끈해져야 할 시기에 불신으로 가득 찬 이 관계가 더없이 씁쓸했다.
“가줄래, 얘기 좀 해. 너 왜 자꾸 나를….”
“나중에. 내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참. 계속 폰 울리더라.”
줄래가 질래의 휴대폰을 침대 시트에 던지듯 올려놨다.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질래는 링거를 뽑은 후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겨우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아니다, 오늘은 내가 갈게. 나도 실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안정 취하라고 했어.”
“안정 취하려고 가는 거야.”
헝클어진 머리, 헝클어진 차림. 엉망진창인 몸을 이끌고 질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펜트하우스를 빠져나왔다.
밝았던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질래 속처럼 까맣게 타들어 갔다. 눈물을 가리기에는 딱 적당한 어둠이었다.
‘은우가 보고 싶다. 은우가 보고 싶다.’
이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온전히 지배한 지금 질래는 휴대폰을 꺼내 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를 걱정하는 연락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이라는 내용들. 얼마나 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까.
곧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울린 후 곧바로 화면 속에 보고 싶던 그 사람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야, 가질래!
“공항이니?”
아무래도 마음이 통한 듯, 그 잘생긴 얼굴 뒤로는 샤를드골 국제공항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지금 어디야? 윤태윤은? 별일 없었던 거지? 내가 연락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이런 남자가 바람이라고? 웃기지 마. 윤태윤.’
은우의 걱정 어린 그 한마디에 범람 직전인 눈물 댐의 수문이 열렸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거친 물살과 함께 휘몰아쳐 질래의 시야를 가렸다. 미안함인 걸까? 죄책감인 걸까?
-왜 그래?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은우야!”
-응?
“보고 싶어.”
남자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만 질래의 한 마디.
순간이동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녀 곁으로 당장이라도 날아가고픈 은우였다. 질래를 안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연락 안 되는 몇 시간이 마치 몇 달은 흐른 거처럼,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당장 갈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니야, 오지 마.”
질래가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젖은 눈가를 본 은우가 마음 아픈 듯 얼른 제 의지를 꺼내 보였다.
-아니, 갈 거야, 기다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오지 마. 무대 서!”
-…왜?
오지 말라는 냉정한 여자의 말 때문에 은우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그러자 질래는 어두워진 남자의 얼굴을 얼른 환하게 밝혀 주고만 싶다.
“내가 갈게, 이은우… 보고 싶어서…. 못 참겠다.”
***
“아. 정말 저를….”
한 남자가 차디찬 바닥으로 풀썩, 맥없이 주저앉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인파가 오간다는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서 은우 앞에 무릎 꿇은 남자는 다름 아닌 남 실장이었다. 은우가 정말 서울로 떠날까 봐 만사를 제쳐두고 공항으로 달려온 것이다.
“꿈이 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질래와의 통화를 다섯 발자국 뒤에서 엿보던 남 실장의 소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마에 손을 짚은 그는 십 년 감수한 얼굴이었다. 아니, 하루 새 십 년은 폭삭 늙은 듯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정말 가시는 줄 알고 제가, 하….”
“저보단, 오늘 남 실장님이 더 큰 서프라이즈를 준비하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여길 옵니까?”
“그게….”
“설마 돌아가신 분, 신분도 산 겁니까?”
“…….”
입술을 꼭 말아 문 남 실장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파리 와서 저와 숙소도 멀찌감치 잡는다 싶더니, 그런 엄청난 분을 케어하고 있을 줄이야. 그간 지나랑 함께 지냈던 모양이다.
“이제 어쩌시려고 그래요?”
현실적인 질문에 남 실장의 입에서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한껏 쏟아졌다.
“지나 씨가 오늘 이사님께 말씀드린 건… 죗값을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경찰입니까? 왜 저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법조계는 TY 쪽이 꽉 잡고 있습니다. 그걸 넘어설 수 있는 인맥과 힘! GH그룹 갖고 있으니까요. 지나 씨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정당한 처벌 그뿐입니다.”
죄를 지었어도 더 큰 권력 없이는 단죄도 못 한다?
입술을 삐죽이는 은우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외면하기에도 뭐하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럼 가 회장님을 찾아가셨어야죠.”
“이사님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길래, 자리를 마련해줬을 뿐입니다. 물론 대화 도중에 가버리셨지만.”
고민하는 은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 실장이 입술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어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입술을 벌렸다.
“윤태윤도 윤태윤이지만 결국 가장 타격받는 건 강화그룹 아닐까요? 가질래 씨가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데, 어쩌실 건지 궁금했을 겁니다.”
저와 무슨 상관일까 싶었던 이야기들이 질래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현실로 다가왔다. 최루가스라도 살포된 듯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질래가 받을 충격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은우였다.
“그래서 실장님은 어쩌실 건데요?”
“저도 죗값 받아야죠, 당연히.”
“그럼 저는요? 이제 와 발 빼시겠다?”
“생각보다 세상엔 유능한 매니저가 많습니다.”
은우가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돌연 대화를 멈췄다.
“…생각해보니 그건 그렇네요.”
훗. 몇 초간이었다.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실없이 웃는 시간은.
앞으로 얼마나 더 그와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을까. 인연의 심지가 점점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이럴 때면 다시 긍정적인 생각으로 우울함을 극복해 본다. 질래가 오고 있다는 사실.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며, 마음속에 몰려오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은우는 애써 밀어냈다.
“남 실장님!”
“네?”
“12시간 동안 뭐하면 금방 갈까요?”
질래 생각만으로도 저리 좋을까. 질래 사진을 보며 히죽거리는 은우 때문에 남 실장의 어둠도 서서히 걷혔다.
12시간. 질래가 서울에서 파리로 오는 비행시간임을 남 실장도 눈치챈 것이다.
“사랑하니까, 그렇게 좋습니까?”
마치 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순식간에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는 항상 남의 마음을 기막히게 잘도 간파했다. 이에 질 수 없다며 은우도 남 실장의 말에 재빨리 맞받아쳤다.
“맘 가는 대로 해서, 후회하십니까?”
“네?”
“지나한테 고백 한 번 못해 보신 거 같던데.”
남 실장의 목에 사례가 걸린 듯 헛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콜록거리던 그가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보였다.
“한 대 피우겠습니다.”
“너무 많이 피는 거 아닙니까?”
“여기 와서 의지할 거라곤 이놈뿐이라서요.”
“그 말, 서운한데요?”
타닥, 남 실장이 꺼내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질래에게 담배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언제든 그녀 입에 물릴 수 있는.
하…. 그게 뭐라고 상상만으로도 꼴렸다. 제길!
“콜록, 콜록….”
마치 담배 연기로 자욱한 제 쾌쾌한 속내를 본 사람처럼, 남 실장이 적절한 타이밍에 질책하듯 기침을 쏟아냈다. 덕분에 은우는 생각을 바로 고쳐먹을 수 있었다.
그래! 담배는 역시 백해무익해.
질래에게 담배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단 말… 취소다. 취소.
이런 뻘 생각이나 할 만큼 은우에게 12시간은 길고 길었다.
하…. 질래가 얼른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