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못 참겠다!
마냥 넋 놓고 있어도 기분 좋은 곳이었다.
파리를 더욱 낭만적이게 만드는 길.
강물 따라 걷다 보면 프랑스 역사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아서, 은우는 답답할 때면 이 그림 같은 풍경에 저를 더했다.
센 강. 유수가 부드러운 강.
주변으로는 루브르 미술관, 에펠 탑,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지난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은우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어주던 이곳이 한 여자의 등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젠장. 크리스마스의 진실을 들은 은우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저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듯 지나는 온몸을 잘게 떨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감싸주거나 손을 잡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신 이해 안 가는 부분들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대체 뭘 본 건데요? 얘기해 봐요.”
지나는 기다렸다는 듯 메고 온 에코백에서 꼬깃꼬깃한 쪽지 하나를 꺼내 은우의 손바닥에 쥐어줬다.
막상 제 손안에 들어온 과거를 열자니 은우는 망설여졌다. 입술을 핥으며 시간을 끌다가 결국 빛바랜 종이를 조심스레 펼쳐 봤다.
날짜, 시간, 장소. 기계 시리얼 번호 같은 암호들. 그리고 사람 이름에 제각각 O, X가 표시돼 있었다. 종이 끝자락에는 다급하게 쓴 듯 강화그룹 가정만 회장 이름 석 자가 크게 휘갈겨 있었다.
“뭐 같니?”
지나가 먼저 물어왔다. 내용을 보고도 선뜻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어서 은우는 집요하게 종이를 응시했다.
알고 있지만, 모르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 그래서 고개를 들어 큰 드레싱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를 다시금 주시했다.
“뭔데요?”
“마지막 날짜를 봐봐. 감이 안 와? 강화그룹 가 회장과 GH그룹 이은구 사장 사고 난 날.”
“설마… 윤태윤이라고요?”
“윤태윤이 아니지. 그 세력이겠지?”
“세력? 그 세력이 누군데요?”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그녀는 지금 저만의 극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겁에 질린 피해자 코스프레로 처량함을 어필하더니, 이번에는 수사물 검사라도 빙의된 듯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은우를 제압하듯 날카롭게 겨누어 본 후 입술을 열었다.
“그 세력은… 터키 질레에 본거지를 둔 비밀리에 조직된 테러 부대래. 터기 대형 방산 업체와 대한민국 몇몇 재벌가가 손잡고 조직한 그들만의 돔이랄까. 필요에 따라서 테러를 지원함으로써 저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든다. 이게 목적인 거지.”
영화 대사 같은 이야기가 그녀의 타고난 발성 덕에 은우의 귀에 속속 박혔다. 다만 거대한 진실이 쏟아질수록 은우의 호흡이 느려지고 눈의 깜빡임도 현저하게 줄었다. 그만큼 일반인이라면 누구라도 쉽사리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잔뜩 고인 타액을 목으로 천천히 넘길 즈음, 지나의 눈빛이 한층 더 영민해졌다. 더 큰 팩트가 숨겨있다는 듯 눈매가 매섭게 반짝였다.
“맨 밑에 이름, 그 사람이 물주이자 오너야.”
“…에? 말도 안 돼.”
헛웃음이 터졌다. 맨 밑에는 분명 가정만. 강화그룹 가 회장의 이름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강화그룹과 GH그룹의 제주도 사업 협약식에서 테러의 대상은 사실 GH그룹의 이은구 사장이었다는 것.
실제로 그 테러가 발생한 날짜가 적힌 종이에는 <이은구 (O)>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협약을 체결한 후 이은구 사장이 제거되면 그 사업의 주도권이 강화그룹으로 넘어온다는 계산에서였다.
어차피 GH그룹은 이은구 사장이 사망하면 일가 내에 다음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 회장은 저와 뜻이 맞는 TY그룹의 윤태윤과 손을 잡고 GH그룹을 넘어서 대한민국 넘버 원이 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윤태윤이 오랫동안 질래를 좋아해 왔다는 걸 눈치챈 가 회장의 큰 그림이 들어 있었다. 또한, 두 기업은 서로의 약점을 너무 많이 쥐고 있던 까닭에 결혼을 통해서 서로의 입을 막음과 동시에 공생하겠다는 저급한 배경도 깔려 있었다.
어찌 보면 태윤을 괴물로 만든 건 바로 질래의 아버지인 가정만 회장. 이 모든 게 바로 질래가 모르는 숨겨진 진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정만 회장도 현장에서 죽었잖아요.”
“사고였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사고. 드론이 오작동 됐거나 동선이 꼬였거나. 윤태윤만이 알고 있겠지.”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가 회장은 현장에서 살짝 부상 당하는 정도로 일이 마무리 됐어야 했다. 하지만, 작전에 착오가 생기면서 그만 이은구 사장과 함께 테러를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세계 정복을 꿈꿨던 그 테러 조직도 완전히 와해 됐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분명 테러 사건은 한 차례 더 있었다. 질래와 은우가 서울아신병원에서 탈출했던 그날.
“그럼, 병원은요? 그건 누가 한 건데요?”
지나가 입술을 꾹 오므린 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머뭇머뭇 입술을 꿈적이며 방어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은우를 바라봤다.
“그건 남 실장이 제안해서 우리가 사람 사서 한 거야. 윤태윤한테 주는 경고랄까? 인명피해 안 주려고 계산하고 터뜨렸다고. 물론 내 입방정에서 시작된 폭로가 남 실장을 통해서 GH그룹에 조금은 들어갔다고 생각해. 우리 힘만으로 윤태윤한테 맞설 순 없잖아? 어쨌든 나도 이 모든 내막을 파악하는 데는 남 실장의 도움이 컸어.”
그래서 지금 남 실장이 GH그룹과 손잡고 있다는 걸까.
설마…. 윤태윤에게 반격하고, 지나를 죽은 자로 만드는 데에 GH 일가가 개입돼 있다고? 들으면 들을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진실의 벽은 생각보다 웅장했다.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가짜인지, 지금으로서는 지나의 말을 믿는 거 외에는 별다른 대안도 없었다. 그저 묻고 또 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 은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시체는요? 그럼 시체는 뭔데요?”
“…살인은 아니야! 물론 고인한테는 미안해.”
절단 신공도 아니고, 지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꼭 다음 말을 뚝 끊어 버렸다. 그러자 은우가 따져 묻듯 첨예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래, 알겠어. 얘기하잖아! 인수를 포기한 무연고자 시신. 돈 주고 거래했어. 우연이지만 나랑 골격이 비슷한 여자가 있더라고. 하늘이 도왔지.”
“와, 대단하네요. 그게 무슨 하늘이 도왔다고….”
“어차피 죽어서도 버려진 사람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요?”
뻔뻔했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스크린 속에 있어야 할 영화배우가 화면을 뚫고 나와 액션 스릴러 영화 한 편을 현실인 양 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건 몰래카메라라고 누가 말해주길 바라고 또 바랐을 뿐….
그만큼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혹은 은우 저 스스로가 너무 무지했거나.
그럼에도 영화는 아직 엔딩 크레디트를 올리지 않았나 보다. 놀라운 이야기는 그녀의 입을 통해서 속절없이 전개됐다.
“과학수사대랑 국과수 직원 중에 나한테 약점 잡힌 애들이 좀 있었어. 우리 업장 고객이었거든, 얼마나 더럽게 노는 줄 알아? 봐봐, 조직에 미꾸라지 한 마리만 있어도 세상이 이렇게 간편하게 조작된다니까.”
“자랑스러워요?”
“이게, 자랑스러워 보이니?”
“물론 내 인맥 가지고 모든 게 가능했으리라고 보진 않아. 뒤에서 남몰래 돕는 손길이 있었겠지. 안 그래?”
남의 일 떠벌리듯 끊임없이 조잘대는 여자는 한때는 제 상사였고, 한때는 저의 롤모델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게 죽도록 부끄러울 만큼, 은우는 지나의 이야기를 들은 게 도리어 후회됐다.
저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는지. 이런저런 생각에 하염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은우야.”
아마도 그 답을 알려주려는 듯, 지나의 눈빛이 사뭇 묵직하게 짙어졌다.
“왜 난데요?”
“너한테 뒤통수 맞아야 제일 아플 거 같아서.”
“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리고 넌 GH그룹의 후계자니까.”
한참 동안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은우는 아름다운 센 강을 바라봤다. 유람선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파리에서 예쁜 추억을 만들 동안, 은우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감내해야만 했다.
대체 기 회장은 이 일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 건지. 진실을 차라리 영원히 묻어버리려는 건지, 별의별 생각에 혼란스러운 찰나였다.
“넌, 윤태윤이랑 절대 엮이지 마, 오죽하면….”
“윤태윤….”
그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은우의 양쪽 눈썹이 크게 씰룩였다. 이내 귓불을 만지던 손이 추락하듯 허벅지로 떨어졌다.
윤태윤을 조심하라는 지나의 한마디에 은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가질래. 질래가 지금 윤태윤과 함께 있다. 혹 윤태윤이 억하심정에 질래에게 보복을 가하는 건 아닌지, 은우는 지금 질래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질래랑 연락 두절인 게 은우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최지나, 너! 남 실장이랑 연락된댔지?”
“갑자기 웬 반말?”
“미안한데 나 한국 좀 가야겠다. 잘 좀 말해주라.”
은우는 휙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계속 통화 버튼을 누르는데, 젠장! 질래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무거워진 사내의 뒤통수에 저 멀리서 유령 같은 여자가 큰 목소리로 후려쳤다.
“이 또라이야! 너 지금 쇼가 몇 갠데, 무책임하게 가면? 어? 이은우 네가 그렇게 꿈꿨던 일들이… 어?”
생각보다 후끈후끈한 게 맞은 곳이 아프길래, 은우가 뛰던 발걸음을 멈춘 채 재빨리 돌아섰다.
그리곤 한때는 에베레스트보다 드높은 정상에 섰던 한 여자에게, 허나 지금은 파리의 거지만도 못한, 법적으로 사망한 사람에게 있는 힘껏 외쳐줬다.
“잘 아네, 내 꿈이 가질랜 거.”
“…….”
“꿈 찾아갔다고 해.”
후…. 지나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또 가질래라니.
그 뼈아픈 이름만 남긴 채 지나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한 남자. 그는 센 강과 함께 멀리멀리 흘러가 버렸다.
그 모습마저도 완벽히 화보가 되는, 파리의 일부처럼 잘 어울리는 남자의 고백이 지나를 오랫동안 쓰라리게 했다.
사랑? 좋아하시네.
너나, 윤태윤이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필요 없으면 말고. 똑같이 나쁜 새끼야.